템빨 45권 - 5화
[관중들의 투표가 종료되었습니다.]
[가장 많은 득표를 얻은 대상은 <마왕>입니다.]
“뭐? 무슨 헛소리야?”
황당한 알림창이었다.
얼굴을 구긴 선수들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투표 대상에 몬스터가 포함됐었다고? 이게 말이 돼? 바쁜 사람들 모아놓고 장난치는 거야, 뭐야?”
“S.A 놈들 성격 몰라? 보상 뿌리기 싫으니까 마왕을 투표 대상에 넣은 거지. 우린 놀아난 거고.”
출전 의도야 어찌됐든 조국을 대표하고 있는 선수들이다.
국대전이라는 무대의 무게 탓인지 욕설을 토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당장 쌍욕이 난무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흉흉했다.
마왕은 플레이어가 아닌 만큼 투표 대상에서 제외함이 옳다. 애초에, 마왕이 투표 대상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마왕에게 활약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선수들의 논리였다.
그들은 마왕의 득표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항의했다.
하지만 S.A그룹은 ‘투표 대상이 선수로 한정 된다는 말을 한 적 없다.’라고 짧게 일축할 뿐이었고 선수들은 금방 포기했다.
자신들만의 규칙으로 움직이는 S.A그룹은 예전부터 벽창호로 유명했을 뿐더러 반박할 수 있는 논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작금의 상황은 ‘절대 다수’의 플레이어들에게 긍정적인 경우였다.
특출한 한 명의 플레이어가 보상을 독식하는 것보다야 다 같이 못 먹는 편이 차라리 낫지 않은가.
힐끗.
선수들이 크라우젤의 눈치를 살폈다.
크라우젤은 잠자코 있었다.
보상 따위, 처음부터 관심 없었다는 것처럼 고고한 표정이다.
***
“수고하셨어요.”
대기실로 돌아온 그리드를 맞이하는 윤나희 팀장의 얼굴이 상기돼 있었다.
그리드가 이만큼이나 활약해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던 눈치다.
파훼와 반격.
각각 50퍼센트와 4퍼센트라는 확률의 벽을 뚫고 터진 지공(智公)의 <마법 관조> 스킬을 보고 설마 S.A그룹이 개입한 것은 아닐까, 의심했던 그리드가 의심을 거뒀다.
‘역시 게임은 운빨이지.’
마법 관조의 완벽한 발동은 높아진 행운 스탯 덕분에 발생한 행운이리라.
확신하며, 앞으로는 운빨 길만 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그리드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꺼냈다.
“근데, 마왕이 득표한 부분을 놓고 의심하는 사람들은 없었습니까?”
“무슨 의심이요?”
“마왕도 플레이어가 아니냐, 하는.”
“당연히 몬스터라고 알고 있는 대상을 굳이 플레이어라고 의심하는 건 무리가 있죠. 심지어 400명이 파티를 맺고 도전해야하는 레이드 대상이 플레이어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요?”
애초에 마왕 그리드는 스킨으로 떡칠 된 상태였다.
그리드의 생김새와 아이템, 소환수와 펫 모두 실제 모습과 크게 달랐고 스킬명과 스킬 연출까지 전부 변경 됐다.
마왕 등장 이벤트에서 사용한 <전격마기의 폭풍> 또한 대지에 용암이 들끓고 하늘에 광소가 울려 퍼지는 등 평소와 미묘하게 다른 연출이었다.
마왕을 플레이어라고 의심하고 그 플레이어를 그리드와 연관 짓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 다행이고요.”
안심한 그리드가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PvP 4강전이 재개되려하고 있었다.
***
125개국이 참가한 제4회 국가대항전은 역대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무려 53개나 되는 경기 종목들이 선수들에게 다양한 재능을 요구했고 시청자들에게는 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결과.
<메달 현황>
1.미국 (금9 은17 동11)
2.중국 (금7 은5 동7)
3.캐나다 (금7 은4 동4)
4.러시아 (금6 은2 동1)
5.영국 (금6 은1 동5)
6.한국 (금6 은1 동1)
7.일본 (금3 은3 동4)
8.인도 (금3 은2 동3)
9.브라질 (금1 은1 동0)
10.스페인 (금1 은0 동1)
....
...
세계 최강국 미국의 위엄이 만천하에 공개됐다.
미국은 타국과 비교할 수 없는 인재 풀을 자랑하며 많은 종목에서 메달을 휩쓸었다.
충격적인 사실은, 미국인 실력자는 국대전 참가자가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휴렌트, 박스, 아스카를 비롯한 수많은 실력자들이 국대전을 방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압도적인 1위였다.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국대전 선수 선발전’을 지역별로 진행하는 초강대국다웠다.
『이쯤 되니 템빨왕 그리드가 얼마나 위대했는지 실감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리드는 저 무시무시한 미국을 재치고 한국을 1위로 만든 전력이 있으니까요.』
『미국의 독주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세계 각국의 국민들은 지금쯤 그리드를 그리워하고 있겠네요.』
『하하. 하지만 아직 미국이 1위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PvP와 마왕 토벌전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특히 마왕 토벌전은 총 15개의 메달을 획득할 수 있다고 했죠? 금메달만 해도 5개이니 미국 입장에서도 안심할 수 없겠네요. 순위는 언제라도 바뀔 수... 아, 말씀드리는 순간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충격적인 <마왕 등장> 이벤트에 이은 PvP 4강전! 지금! 시작합니다!!』
***
“강하던데요?”
8강에서 탈락한 레가스가 남긴 소감이었다.
그는 어떠한 핑계도, 변명도 읊지 않았다. 단지 지발이 자신보다 강했을 뿐이라며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레가스가 미련 없이 인정할 정도면 최소 페이커급이라는 건데.’
지발.
Satisfy가 오픈한 직후부터 3년 이상 랭킹 2위를 고수했던 괴물이다.
그는 7대 길드의 수장으로 선출됐을 정도로 수완이 좋았고 PvE 분야에서는 천외천 시절 크라우젤과 비교될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였다.
상대적으로 PvP가 약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오해라는 사실도 증명한 바 있다.
제2회 국가대항전 당시 각종 경기에 출전한 지발은 출중한 PvP 실력을 선보였으니까.
단, 상대가 크라우젤이나 그리드일 경우에는 그 실력이 통용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고, 종국에는 동네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속세를 떠났지만.
“...화려한 복귀에 성공했다 이거군.”
무대에 오른 크리스가 히죽 웃었다.
비록 악연이었다고는 하나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인연 아닌가.
성공적으로 복귀한 지발의 모습은 크리스에게 깊은 감회를 안겼다. 은근한 흥분이 크리스를 휘감았다.
“2년 동안 죽어라 노력했나보구나.”
“그래. 죽기 살기로 노력했지.”
“...?”
지발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크리스는 짐짓 놀랐다.
프라이드 높은 지발이 설마 노력을 입에 담을 줄 몰랐던 것이다. 솔직히 울컥해서 반발할 줄 알았다.
지발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그리드나 크라우젤 같은 천재가 아니니까 아등바등 노력할 수밖에. 2년 동안 자존심도 버리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어. 별 더러운 일도 많이 겪었지만 끝까지 참고 버텼지.”
“변했군.”
“그래, 변했다. 앞으로도 계속 변해나갈 생각이고. 뭐, 회포는 여기까지만 풀자고. 마왕 놈이랑 어서 싸워보고 싶거든.”
지발이 탈 것을 소환했다.
64강전에서 보여줬던 쌍두하마도 아니었고, 32강전과 16강전에서 보여줬던 비룡도, 8강전에서 보여줬던 페가수스도 아니었다.
그것은, 죽어있었다.
생명이 아닌 인위적인 물건이었다.
“로봇....?”
쩌적! 쩌저저저적!!
들끓는 우레와 함께 반으로 갈라진 하늘의 틈새로 강림하는 백색의 거신.
이마에는 양쪽으로 갈라진 황금의 뿔을 달고 비취색의 안광을 흩뿌리는 그것의 이름은 레이더스.
고대의 유물, 마장기다.
10만 관중들과 해설진, 그리고 TV와 컴퓨터 앞에 모여 앉은 수십 억 시청자 모두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으니 그들이 받은 충격의 강도는 마왕의 등장 때와 동등하다는 뜻이었고.
“최소한 올해는 내가 최강일 거다.”
마치 당연하다는 말투로 최강을 논하는 지발의 태도는 부재중인 그리드의 모습을 닮아있었으니.
“지발! 지발! 지발!!”
뒤늦게 정신을 차린 10만 관중들은 자연스럽게 지발의 이름을 연호하게 되었다.
키가 5미터에 육박하는 인간형 병기의 출현은 최강자의 부재를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하고 낭만적인 것이었기에.
[레이더스와 동기화합니다.]
...
...
[동기화 성공!]
[레이더스가 가동합니다!]
[최대 마나 수치가 낮습니다!]
[당신이 레이더스를 가동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은 21초입니다.]
“내가...!”
지난 2년.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인내했던가.
“내가 돌아왔다!!”
레이더스에 탑승한 지발.
전 세계가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 그가 환희에 차 포효했다.
쿠와아아아앙-!!
건축물의 뼈대로 삼아도 좋을 만큼 크고 두꺼운 창이 크리스의 머리 위로 떨어졌고.
[강력한 일격을 막아냈습니다.]
[<에티마의 대검>의 내구력이 108 하락합니다!]
[양쪽 손목이 골절되었습니다!]
[하반신에서 힘이 빠집니다!]
[7,93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앞으로 최대 15초 동안 움직일 수 없습니다.]
“큭....!”
양손으로 쥔 대검을 머리 위로 올려 방어한 크리스의 무릎이 단 일격에 굽혀졌다.
거대한 창의 무게를 견뎌내기 위해서 이를 악 문 그가 폭군의 힘을 개방했다.
[<폭군의 저력> 효과로 상태이상을 극복하고 방어력을 대가로 공격력을 상승시킵니다.]
“우오오오오오!!”
골리앗과 마주 선 다윗의 모습이 저러했을까?
거신의 창에 맞서 일어나는 크리스의 모습은 초라했지만 결연한 의지만큼은 결코 꺾이지 않을 것 같았다.
랭킹 1위 크리스.
그리드라는 하늘 아래 버티고 선 태산. 그는 상대가 그리드가 아닌 이상에야 누구에게도 정상을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콰아아아앙!
[강력한 일격을 막아냈습니다.]
[<에티마의 대검>의 내구력이 79 하락합니다!]
[오른쪽 손목이 골절되었습니다!]
[6,03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쿠와아아앙!!
[강력한 일격을 막아냈습니다.]
[<에티마의 대검>의 내구력이...]
산이란 결국 정복당하게 마련이다.
콰쾅!!
[방어에 실패합니다!]
[28,09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은빛 오우거의 갑옷>의 내구력이 190 하락합니다!]
[내상을 입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하락합니다!]
휘청.
PvP의 무대를 통째로 날려버릴 기세를 담은 채 계속, 계속 꽂히는 거창의 공세를 크리스는 언제까지고 견딜 수 없었다.
애초에 마장기란 대악마와 대천사들의 공습을 버티고 싶었던 고대의 인간들이 만든 병기.
아직 초월자가 되지 못한 인간의 몸으로 감당하는 건 무리다.
“네가 약한 게 아니다.”
끼릭!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크리스를 정확히 조준하는 레이더스의 안광이 번뜩일 때마다 지발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내가. 아니, 레이더스가 강한 거야.”
푸우욱-!!
거창의 날카로운 창끝이 크리스를 꿰뚫었고, 4강 첫 번째 경기는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빠르게 끝났다.
“지발! 지발!! 지발!!”
관중들은 여전히 지발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특히 남자들의 목소리가 컸다.
로봇에 타는 영웅.
국적과 인종을 가리지 않는, 세상 모든 남자들의 로망이었기에.
***
창의 긴 리치를 활용해서 검사들을 제압해왔던 폰이 4강에서 만난 유라에게 패배했다. 중장거리에서 쏘아지는 총탄이 치명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폰의 백마는 지발이 자랑하는 탈 것들과 달리 느렸고, 백마를 저격하는데 성공한 유라는 폰이 낙마하는 순간을 정확히 노려서 치명상을 입혔다.
“힘들겠지?”
“아무래도....”
유라가 결승전에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국민들은 랭킹 1위 크리스를 장난감처럼 부셔버린 백색 거신의 모습을 뇌리에서 떨치지 못했다.
반면 유라가 PvP에서 금메달을 따고 한국이 통합 순위 4위에 오르는 장면은 거품이 돼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국민들이 아쉬워하는 가운데 유라의 조부 이진명 회장은 안도하고 있었다.
“저 아이가 있을 장소는 Satisfy가 아니야.”
이진명 회장은 S.A그룹의 경제 독점을 방지하기 위한 국제법의 수혜자 중 하나다.
본래 자동차 사업을 주력으로 삼았던 대진 그룹은 기술력을 인정받아 동북아시아 지역에 생산, 유통되는 Satisfy캡슐의 부품 중 7.3프로를 독점 생산하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사업을 크게 확장 중에 있었다.
하지만 이진명 회장의 나이 올해 77세다. 120세 시대라고들 하지만 비대해진 기업을 이끌어 나가기에는 노쇠한 나이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후계가 필요했다.
유라에게 집착하는 이유다.
이진명 회장은 손녀의 사업적 재능을 잘 알고 있었다.
유라의 천재성이야 워낙 유명했고, 유라가 그간 쌓아올린 이미지도 무척 훌륭했기 때문에 주주들부터가 유라를 원하는 실정이었다.
“저 아이를 반드시 이 자리에 앉혀야 해. 선조들께서 세운 회사를 엄한 놈들에게 내어줄 수는 없다.”
대진 그룹의 리더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
소가죽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쥐는 이진명 회장의 주름 진 손에 힘이 실린다.
우와아아!!
TV 속.
결승전 무대에 오르는 손녀의 모습이 보였다.
손녀는 싸웠고, 고통 받았다.
아름다운 외형과 상반되게 폭력적인 거대한 마신의 한쪽 무릎을 꺾은 대가로 허리가 비틀렸고, 대지를 무너뜨리는 거창에 항거한 죄로 피를 쏟았다. 그리고 끝내 잿빛으로 산화했다.
“....그래. 이걸로 다 되었다.”
손녀의 마지막 경기를 지켜보는 내내 이를 갈던 이진명 회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의자에 깊숙이 머리를 기댄 그의 눈은 붉게 충혈 돼 있었다.
손녀의 패배를 원하고는 있었지만 정작 결과를 보니 마음이 언짢았다. 자신의 자랑스러운 핏줄이 실패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는 게 영 달갑지 않았다.
문득, 대진의 회장이라는 자리가.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책임의 크기가 원망스러웠다.
‘...이 나이 먹고 어린 손녀놈이나 괴롭혀야한다니. 쯧.’
먼저 떠난 아들놈이 웬수다. 정말이지 괘씸한 놈이다.
***
“이상한데.”
PvP 종료 후.
은메달을 목에 거는 유라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리드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유라의 표정이 필요 이상으로 담담했기 때문이다. 마치 미련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못한 유라의 성격을 고려해봤을 때 저런 반응이 나와선 안 되는 것이었다.
‘유라가 은메달에 만족할 리 없는데...’
신경 쓰인다. 자꾸만 신경 쓰여.
남자의 감이 말한다. 당장 연락해보라고.
하지만 연애 한 번 못해본 남자가 과연 ‘감’을 논해도 될까?
“아, 몰라. 기분 나쁠 거면 나빠하라고 그래. 친구가 친구한테 안부 묻는 건 평범한 일이잖아?”
그 평범한 일을 못해봐서 문제지.
마음을 독하게 먹은 그리드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명확한 용건 없이, 단지 걱정된다는 이유만으로 여자에게 전화해보는 건 처음이다.
그래서 그런지 긴장됐고 신호 대기음이 들릴 때마다 심장이 뛰었다.
이 한 통의 전화가 올해 국대전 최고의 이슈를 만드는 계기가 될 거라고는...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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