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5권 - 3화
세계 각국의 커뮤니티가 들끓고 있었다.
-저기서 스킬을 저런 식으로 쓰니까 영웅 입장에서는 대응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네.
-와ㅋㅋ 싸우는 동안 갓 핸드랑 영웅 거리 점점 멀어지는 것 봐ㅋㅋㅋ 이기어검술 오진다.
-이기어검 저거 설마 크라우젤이 직접 컨트롤하는 건가?
-뭐래? 돌았냐? 당연히 오토지.
-헐! 굳이 왼쪽으로 움직여서 공격 거리 내주기에 뭔가 했더니 영웅 시야 차단하는 거였음ㄷㄷㄷ
-칼집 뽑을 때마다 몸에 탄력 실리는 것 보소.ㅡㅡ;
영웅 깨기 종료 직후인 상황이다.
커뮤니티를 활성화시키는 화두는 당연히 영웅 깨기와 크라우젤이었다.
사람들은 크라우젤의 전투 영상을 몇 차례나 복기하고 크라우젤의 전투 방법과 의도를 분석하고자 노력했다. 상호 간에 의견을 나누면서 배움을 얻으려고 애썼다.
그 와중에 새로운 논쟁거리가 발생했다.
-그리드는 크라우젤이 무서워서 국대전에 불참한 것 같은데.
그리드의 국대전 불참을 ‘지존 타이틀을 지키기 위한 비겁한 수단’으로 비약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근데 이게 꽤나 타당한 해석이었다.
랭킹에 공개된 그리드의 레벨을 보면 지난 1년 동안의 상승폭이 적었기 때문이다.
이는 작년의 그리드와 올해의 그리드의 수준이 비슷하다는 근거였고, <영웅>을 꺾은 크라우젤이 그리드보다 한 수 위일 거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리드는 어쩔 수 없긴 함. 나라도 통치해야 되고, 대장일도 해야 되니까 성장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인터넷 보면 분통 터지실 것 같은데요?”
넓은 대기실에 홀로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던 신영우가 힐끔 고개를 들었다.
노크하고 들어온 S.A그룹 운영팀장 윤나희가 도시락 봉지를 흔들고 있었다.
“식사하셔야죠?”
“좋죠.”
윤나희는 S.A그룹 본사에서 만났을 때와 느낌이 사뭇 달랐다. 업무에 찌든 몰골이 아니라 환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오피스룩 대신 입은 하늘색 진과 흰 티셔츠는 자유분방해 보였다. 중국 출장이 어지간히도 즐거운 눈치다. 이렇게 보니 상당한 미인이었다.
하지만 유라와 지슈카, 세희와 예림이의 미모에 적응해 버린 영우의 눈에는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는 게 문제였다.
영우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쓸데없이 눈만 높아지는 바람에 장가가기는 글렀다는 사실을.
“사람들 반응을 보다 보면 답답하지 않으세요?”
“뭐가요?”
“영우 씨가 매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줘도 사람들은 자꾸만 폄하하잖아요. 진실을 왜곡하는 경우도 많고요.”
인터넷엔 이상한 사람이 참 많았다. 익명이라는 비수를 쥔 사람들은 때때로 사이코패스 기질까지 보였다. 헛소리를 일삼는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 자체만으로 스트레스받을 정도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영우는 인터넷 반응을 신경 쓰지 않게 됐다.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인터넷 보니까 임철호 회장님한테 돌머리라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돌머리요? 회장님한테 돌머리?”
임철호는 가상현실 세계를 구축한 장본인이다. 세계 최고도 아니고 역대 최고의 과학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임철호라고 해도 완벽하지는 않다. 그는 자신의 분야에서만 특출할 뿐이지 평범한 구석이 많았고, 허당 기질도 다분했다.
하지만 멍청하다는 비난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꽤나 신선하고 재밌는 취급이다.
“사실은 돌머리가 아니라 돌대가리라고 부르던데, 입으로 말하려니 좀…….”
“돌대……. 풋!”
윤나희 팀장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급기야 배를 붙잡고 박장대소했다.
두 사람의 식사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오랫동안 그리드를 지켜봐 온 윤나희 팀장은 영우를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영우 또한 그녀에게 익숙했다. 올해는 마왕 프로젝트를 함께 준비하게 되면서 더욱 가까워진 부분도 있었다.
“지난 나흘 동안 지켜보면서 어땠어요? 올해 많은 랭커들이 330레벨을 넘기고 새로운 스킬을 여러 개 개화해서 수준이 부쩍 높아졌잖아요. 그들을 상대로 홀로 잘 싸우실 수 있겠어요?”
“음…….”
영우는 베이징덕의 넘치는 육즙을 음미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확실히, 선수들의 수준이 급격히 높아졌다.
특히 노말 클래스 전직자들의 성장세가 도드라졌다. 처음부터 좋은 스킬을 얻고 시작하는 히든 클래스 전직자들과 달리 그들은 레벨이 오를수록 다양한 스킬과 특성을 얻었고, 클래스 간의 격차를 좁혀 나갔다.
The Gap is Closing.
오래전 임철호 회장이 했던 말이 현실이 돼 가는 중이다.
“처음엔 쉽게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솔직히 많이 긴장돼요.”
고슬고슬한 볶음밥을 한 술 뜬 영우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는 올해 국대전 기간 동안 다른 선수들의 성장을 눈여겨봤고, 그들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
“그래도 역시 제가 질 거라는 생각은 안 드네요.”
The Gap is Closing?
내가 신경 쓸 문구는 아니다.
히든 클래스라고 해서 다 같은 히든 클래스가 아닐뿐더러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노력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문 법이니까.
당장 주변을 보라.
금연, 금주, 다이어트조차도 매번 포기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후루룩.
자신감 넘치게 말하고 짬뽕 국물을 들이켠 영우의 얼굴이 차츰 붉어졌다.
영우가 먹은 국물은 짬뽕이 아니라 마라탕이었고, 둘은 엄연히 다른 음식이었다. 급기야 땀을 뻘뻘 흘리게 된 영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 물 좀. 딸꾹!”
‘꼭 회장님 같네.’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됐고, 그만큼 자신감이 넘치지만 평상시에는 어설픈 면이 있다. 알면 알수록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다.
슬며시 웃은 윤나희 팀장이 생수를 건네주었다.
“400 대 1의 싸움. 기대할게요.”
125개국을 대표하는 랭커 400명과 그리드 1인의 대결.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는 점이 무섭다.
***
그리드의 부재.
오직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올해 PvP 참여율은 역대 최고를 찍었다.
‘최소한 한 방에 죽을 일은 없으니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원래 실력만 발휘할 수 있으면 나도 월드 클래스야.’
이처럼 안일한 생각을 품고 PvP에 출전한 사람이 무려 467명이었고, 그들 중 단 64명만이 선별되어 본선 무대에 올랐다.
예선에서 탈락한 403명의 선수들은 솔직히 큰 충격이었다.
크라우젤을 비롯한 미국 선수들과 폰을 비롯한 템빨단원들,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거두 수에론, 터키의 부바트, 일본의 데미안, 인도의 고샤루, 뉴질랜드의 에버튼 등.
멀리서 보기만 했던 네임드들의 실력을 직접 경험해 보니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중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거 좀 이상해. 그리드는 논외로 치고, 크라우젤 밑으로는 다 평등한 거 아니었어?”
“어디서든 급은 나뉘게 마련이니까.”
“제기랄! 인정할 수 없어! 내가 이렇게 약했다니! 말도 안 된다고!”
“…충격이긴 하다. 보는 거랑 실제로 체험하는 건 느낌이 완전히 다르구나.”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인도의 고샤루만 해도 매해 PvP 예선에서 탈락했던 인물이다. 하이 랭커들이나 전문가들에게 고평가를 받는 데 반해서 커리어가 빈약했다. 그래서 거품인 줄 알았다.
한데 웬걸?
“요호호홋! 거인의 소오온!”
괴상한 소리로 웃으면서 마법을 빚는 고샤루의 강함은 차원이 달랐다. 예선전에서 그는 거의 학살자 수준이었다.
“…….”
실제로 고샤루는 강했다. 64강 무대에서 만난 다른 강자를 모래성에 가둬 버리더니 고렘을 소환해서 난타, 잿빛으로 산화시켰다. 괜히 흙마법사 랭킹 1위가 아니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예선전에서 탈락한 선수들은 속은 기분이었다. 고샤루가 지난 3년 동안 일부러 약한 척하고 방심을 유도한 건 아닐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물론 큰 착각이었다.
고샤루가 매해 예선전에서 탈락한 이유는 단지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일찍 만났기 때문이다. 그래, 운이 나빴을 뿐이다.
하지만 올해의 고샤루는 예감이 좋았다. 예선전 내내 쩌리들만 만나더니 본선 대진운도 좋다. 64강 상대도 무난했고, 32강 상대는 부바트였다.
“오효효.”
64강 대진이 모두 끝난 후.
32강 무대에 오른 고샤루가 연신 웃었다.
부바트.
작년 PvP에서 장췐이라는 중국의 신예에게 패배한 인물이다. 약속된 승리라는 오만방자한 이명을 이미 수년 전에 잃은 그를 고샤루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매번 PvP에 출전하는 이유가 뭔가? 단체전에 출전해서 이니시나 걸어 주면 그나마 메달을 노려 볼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터키 국민들도 꽤나 답답하겠어? 요호호홋.”
부바트는 히든 클래스 전직자였고, 강력한 탱킹력과 CC기를 겸비한 실력자였다. 하지만 공격력의 부재 탓에 일대일 승부에선 약할 수밖에 없다. PvP에 집착하는 그의 작태는 참으로 몰지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올해의 부바트는 달랐다.
“요호호… 히익!?”
이니시에이터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적에게 접근하는 능력이다.
전투의 포문을 열어야 하는 이니시에이터의 특성상 탱킹 능력은 기본이요, 상태 이상 저항력도 높아야 했다.
대지를 늪으로 만들어 적의 돌진을 방해하고, 흙의 벽을 세워 앞길을 차단하는 등 고샤루가 온갖 흙마법을 깔아 봤자 부바트는 그에게 쉽사리 접근했다.
더군다나 올해의 부바트는 <아르티나의 근성이 깃든 장갑>까지 갖췄다.
착용자의 방어력과 비례해서 공격력을 올려 주는 레전드리 아이템 덕분에 부바트는 부족한 공격력을 충당하고 있었다.
콰작-!
“히요옥……! 힉!”
퍽! 퍼퍼퍼퍼퍼퍼퍽!!
생존력이 부족하다는 고질병을 앓고 있는 마법사 고샤루에게 부바트가 접근한 순간 싸움은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부바트의 우악한 손에 붙들려 허리를 꺾이더니 정수리부터 땅에 꽂힌 고샤루는 이후 몇 분을 얻어터지다가 잿빛으로 산화했다.
쉽게 16강에 진출한 부바트가 콧방귀 뀌었다.
“하여간 말 많은 놈치고 제대로 된 놈이 없어.”
그런 의미에서 그리드는 무시무시한 녀석이다.
말 한마디 뱉을 시간에 칼을 휘둘러서 적을 단숨에 죽여 버렸으니.
…꿀꺽.
그리드를 만나 단칼에 베였던 경기들을 떠올리고 마른침을 삼킨 부바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마지막 기회다. 그리드가 없는 올해야말로 메달을 노린다.’
PvP에서의 증명은 모든 하이 랭커의 꿈.
부바트의 의욕이 활활 타올랐다.
올해 PvP는 크라우젤조차 참가하지 않았으니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
PvP 16강.
‘신경 쓰이네.’
대회를 모니터링 중이던 그리드는 유라가 등장하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유라는 오늘따라 유난히 쓸쓸하고 처연해 보였다. 물에 푹 젖은 듯한 느낌이다. 그녀 주위에만 비가 내리고 있는 듯한 착시가 생겼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리드는 평소에도 유라를 많이 신경 썼다.
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 왔으니 아무래도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걱정이었다.
오늘 유라의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인다.
‘안 되는데.’
8강 진출자는 유라를 포함해서 폰, 레가스, 데미안, 크리스, 지발, 수에론, 부바트였다.
여태껏 그리드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들 모두 훌륭한 실력자였고, 그중에서도 특히 데미안은 유라와 상성이 나빴다.
데빌 슬레이어의 힘을 끌어 올려 주는 한편 다른 이들에게는 디버프로 작용하는 필드 마법 <지옥 소환>이 데미안에게는 별 효력이 없을 것으로 추정됐기 때문이다.
한데 유라가 8강에서 만난 상대가 데미안이었다.
불완전한 컨디션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만난 셈이다.
“유라.”
그리드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무엇인가에 쫓기듯이 검을 휘두르는 유라의 모습이 위태롭게 보여서 당장이라도 곁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엥……?”
그리드가 멈칫했다.
화면 속.
타앙-!
처음 보는 세검으로 데미안의 검을 붙잡아 놓은 유라가 권총을 쏘았고, 이에 데미안의 머리가 뒤로 크게 젖혀지고 있었다.
“큭……!”
데미안은 무척 당황하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개월 전, 아그너스를 해치우고 네 번째 전직 퀘스트 <숙적>을 클리어한 유라는 직업 전용 마스터리 스킬 <빛의 검술>을 얻었으니까.
그녀의 검술은 천하의 교황이라도 처음 보는 형태의 것이었고, 동시에 쏘아지는 총탄의 위력은 명불허전이었다.
“성스러운 보호, 빛의 화신, 빛의 가호, 여신의 보호, 여신의 가호.”
힐로 회복한 데미안이 망설임 없이 풀 버프를 전개했다.
그가 같은 플레이어를 상대로 ‘진정한 교황의 위엄’을 드러낸 경우는 그리드 이후 처음이었다.
“유라 상, 혼또니 스미마셍.”
“나야말로 미안해요.”
스파아앗-!
백열하는 신성력이 옥빛 검광에 베였고, 총탄이 춤을 췄다.
그녀는, 전설이었다.
그리드나 크라우젤과 같은.
그녀 또한 승리에 익숙할 권리가 있었다.
“악몽 반추.”
유난히 길었던 고행의 길.
빛은 그녀를 너무 늦게 찾아왔다.
하지만 아직 되돌릴 수 있는 수준의 늦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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