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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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45권 - 1화
<영웅>의 패배는 순리다.
1년. Satisfy 기준으로 무려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영웅은 정체돼 있었던 반면 도전자들은 꾸준한 발전을 이뤘으니까.
실제로 작년의 영웅은 도전자들에게 패배했다.
끝끝내 쓰러짐으로써 시간이 지닌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세상 사람들에게 일깨워줬다.
하지만 올해의 영웅은 달랐다.
이름난 강자들의 도전을 원천 차단했고, 그나마 도전한 이들은 주제 파악도 못한다고 비웃듯이 처참하게 도륙했다.
저 영웅의 본신은.
템빨왕 그리드의 저력은 과연 얼마나 대단하기에 시간마저 무의미하게 만드는가?
강렬한 의문에 휩싸인 사람들이 동요를 금치 못했다.
그리드라는 괴물의 거대한 존재감이 지구 전체를 침식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영웅과 대결 중인 크라우젤은 태연했다.
자신의 시간을, 노력과 발전을 부정당하면서도 그는 절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 순간을 마치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던 것처럼.
쩌엉-!
검성으로 전직하고 2년.
많은 것을 잃었다가 다시 되찾아가고 있는 크라우젤은 작년과 비할 바 없이 강해져 있었다.
20억 유저의 정점이 되는 과정에서 쌓아올렸던 방대한 지식과 정보.
이는 크라우젤을 과거로 회귀해서 인생 2회차를 살게 된 소설 속 주인공 같은 존재로 승화시켰다.
환골탈태 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그는, 그리드라는 괴물에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채앵!
푹-!
영웅이 날리는 참격을 <흘리기>로 무력화시킨 크라우젤이 칼집을 지면에 꽂아 넣자.
“...?”
참격을 날림과 동시에 검무의 보법을 밟던 영웅이 멈칫했다. 크라우젤이 세워놓은 칼집에 보법의 경로가 차단당하는 바람에 스킬의 발동이 취소된 것이다.
어쭈?
영웅의 반응이었다.
가소롭다는 듯이 피씩한 녀석이 새로운 보법을 밟았다.
푹!
크라우젤의 칼집이 재차 경로를 차단한다.
푹푹푹푹!
같은 일이 몇 번이고 되풀이됐다.
크라우젤은 작년 기준 그리드의 모든 검무를 숙지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영웅은 당황하지 않았다. 모든 보법이 읽히자 보법에 허(虛)를 섞는 방법으로 대처했다. 보법의 경로를 실시간으로 수정하고 검무와는 관계없는 보법을 밟기도 하면서 크라우젤의 혼란을 유도했다.
이 급박한 과정 속에서도.
채챙-! 채채채챙!!
열망의 무아검과 백호검은 쉬지 않고 교차하는 중이다.
폭발하는 묵색의 불꽃이 크라우젤을 덮칠 때도 있었고, 돌의 가시가 휘몰아치면서 영웅을 상처투성이로 만들 때도 있었다.
스파앗-!
소모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크라우젤이 이기어검을 추가로 전개했다. 인벤토리로부터 새로운 검을 2자루 소환, 손에 쥐고 있던 칼집과 함께 지면에 꽂아 영웅의 보법을 허와 실 구분 없이 봉쇄시켰다.
그 탓에 어정쩡한 폼이 된 영웅의 얼굴을 크라우젤의 검과 칼집이 교차하며 베고, 때렸다.
“큭...”
주르륵, 안면에 피칠갑 한 영웅의 눈동자에 분노가 일렁인다.
감정을 드러낸다는 건 그만큼 동요한다는 뜻이었고 크라우젤에게는 기회였다.
통찰력을 이용한 행동 예측은 평정심을 잃는 순간 무뎌진다는 사실, 경험 많은 크라우젤이 모를 리 없다.
“파천(破天).”
콰자작!
검호 시절 피아로의 절기.
한때 대악마 벨리알에게 치명상을 입혔던 궁극의 검술이 영웅의 공격을 회피한 크라우젤의 검 끝에서 발현되었고.
“커헉!”
영웅은 울컥 피를 토했다.
10칸으로 나뉘어서 표기 된 녀석의 생명력 게이지가 어느새 3칸 가까이 사라져있었다.
전투 내내 연계 된 검술을 상당량 허용하고 말았으니 제아무리 방어력이 높아도 부담이었다.
“...내가 지금 제대로 보고 있는 거 맞아?”
“왓 더... 칼집을 박아서 검무를 차단하네. 저런 발상을 어떻게 한 거지?”
“저게 생각만으로 되냐. 몸이 따라줘야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작금 벌어진 공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반면 칼밥 좀 먹었다는 사람들은 자지러지고 있었다.
특히 검술의 극의를 추구하는 크리스의 충격이 컸다.
‘사고의 범위가 달라.’
이쯤 되면 하늘의 저의가 의심스럽다.
기껏 크라우젤이라는 천재를 낳아놓고 그리드라는 괴물을 풀어놓은 이유가 뭘까?
라우엘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 두 분께서 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나셨다면 저기까지 성장하지 못했을 겁니다.”
극한에 극한.
서로가 유일한 호적수라고 인정하고 있을 그리드와 크라우젤은, 서로를 의식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일 수 있었고 몇 번이나 한계를 극복하며 지금에 도달한 것이다.
“하늘의 바람은 인간을 넘어서는 초월자의 탄생이 아닐까요? 마치 어떤 거대한 적의 습격에 대비하라고 충고하는 듯하군요. 큭, 크크큭... 조만간 지구에 제2계의 차원 문이 열릴 수도.”
“아...? 그러냐...”
얘는 왜 굳이 남의 나라 대기실까지 찾아와서 헛소리야?
오글오글!
크리스가 팔뚝의 닭살을 털어내는 그때였다.
『흑화...! 영웅이 진정한 힘을 개화합니다!』
크라우젤에게 연타를 허용하던 모니터 속 영웅의 피부가 창백해지는가 싶더니 흰자위가 검게 물들어갔다. 솟구치는 마기에 흑발이 넘실거렸다.
흑화에 이은 초(超)의 전조다.
퍼펑-!
퍼퍼퍼퍼퍼퍼펑!!
크라우젤과 거리를 벌린 영웅이 검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원거리에서 적을 제압하는 한편 회복을 도모할 생각인지, 입힌 피해량을 100퍼센트 흡혈하는 <크레이의 힘>까지 개방했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혈액이 적색의 꼬리 모양으로 굳더니 크라우젤을 위협했다. 가까이 오면 찔러 죽이겠노라 포효하는 기세였다.
상공의 갓 핸드들은 이기어검을 떨쳐내기 위해서 노력 중이었고, 크라우젤은 이기어검을 통제하는 한편 검기의 폭격을 회피하느라 분주했다.
‘흘리기로는 안 된다.’
검성의 패시브 스킬 <흘리기>는 ‘도검류 무기로 물체를 막아낼 경우 피해 없이 비껴나게 만들고 일정 확률로 적의 자세를 무너뜨리는’ 기술이다. 물체가 아니라 닿는 순간 폭발하는 검기를 흘리기로 대처하는 건 무리였다.
콰쾅! 쿠콰콰콰쾅!!
초(超)의 지속 시간은 대략 30초.
그리드의 많은 것을 파악하고 있는 크라우젤이 모를 리 없다. 그는 흑화를 등에 업고 공격 속도와 공격력을 끌어올린 영웅이 초(超)의 폭격을 끝내기 전까지 피해만 다닐 계획이었다.
<청운진>을 전개, 검기를 푸른 안개처럼 뿌려내고 기척을 지운 크라우젤이 온갖 엄폐물 사이를 이동할 때였다.
파칙-! 파지직!!
푸른 안개 위 하늘 곳곳에 백색 마력의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알람 마법이다.
그리드는 정신적 여유가 있을 때나 사용할 수 있는 전투법 중 하나.
영웅은 전투 개시 후 지금까지 알람+매직 미사일을 쿨타임이 돌아올 때마다 설정해 놓았었고 이는 크라우젤의 무방비한 등을 노리기에 최적화 된 공격이었다.
퍼엉-!
퍼퍼퍼퍼퍼퍼퍼퍼펑!!
빛살이 쏟아져 내린다.
전방으로부터는 초의 검기들이, 하늘로부터는 수십 발의 매직 미사일이.
‘마법의 발동 타이밍에 맞춰서 초를 사용한 건가?’
창살처럼 펼쳐지는 검기와 마법에 갇힌 크라우젤이 <초감각>에 의지해서 퇴로를 엿봤다.
콰앙!
초의 검기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퍼엉-!
<검의 장막>으로 매직 미사일을 막아내며 안개 속을 날아다니는 그의 모습은 너무 빠르고 복잡했다. 시청자들의 시선은 그를 쫓기 힘들었다.
하지만.
콰쾅!!
통찰력과 도살귀의 안대를 한계까지 운용 중인 영웅은 끝까지 조준점을 잃지 않았다. 시야를 방해하고 탐지를 교란시키는 청운진의 안개가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저벅.
끊임없는 움직임은 스태미나의 소모와 직결되는 바.
하늘에서 쏟아지는 매직 미사일이 더 이상 없음을 확인한 크라우젤이 제자리에 멈춰 서더니 검을 고쳐 쥐었다. 유니크 단계까지 성장하고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이라는 수식언을 달게 된 +8백호검이었다.
영웅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표적이 멈춘 것을 감지함과 동시에 이상적인 단검을 꺼냈다. 오른 손에는 열망의 무아검이, 왼 손에는 이상적인 단검이 쥐어진 형국이다.
“신속한 몸놀림.”
영웅의 민첩성이 극대화됐다.
이제 쓸모없다는 듯, 이상적인 단검을 다트처럼 허공에 집어던져버린 녀석이 멈춰있는 크라우젤을 노리고 초당 6회의 검기를 연속 발사했다.
크라우젤은 허리를 비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공격 속도가 워낙에 빠르다. 거의 시간 차 없이 검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크라우젤은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기다렸다.
자신에게 도달하는 검기의 숫자가 12개 이상이 될 때까지 인내했다.
그리고.
쿠오오오-!
자신의 코앞까지 도달한 검기의 숫자가 정확히 12개가 되고, 그 뒤로 6개의 검기가 추가로 바짝 쫓아오는 광경을 확인한 크라우젤이 검을 휘둘렀다.
한데 타이밍이 조금 어긋났다.
갓 핸드를 상대하고 있던 검 중 한 자루가 이상적인 단검에 얻어맞고 날아간 까닭이다. 일시적으로 자유를 되찾은 갓 핸드 하나가 쇄도해오더니 크라우젤의 쇄골에 실패작을 꽂아버렸다.
“큭...! 하늘 찢기!”
콰작-!
콰자자자작!!
검기의 폭풍이 등지고 있는 하늘에 맹수의 발톱이 아로새겨진다 싶더니.
퍼퍼퍼퍼퍼퍼펑-!
크라우젤에게 쏟아졌던 총 18개의 검기 중 4개가 크라우젤에게 적중하였고 나머지 14개는 고스란히 영웅에게 되돌아갔다.
하지만 영웅은 이를 요격하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하늘 찢기를 통한 반격 방향은 상단으로 국한됐기 때문이다.
14개의 검기는 영웅에게 닿지 못하고 영웅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 다음 폭발했다.
『아! 조준 실패인가요?!』
『갓 핸드에게 공격을 허용한 시점부터 균형을 잃은 것 같습니다. 검기에 입은 데미지가 상당히 클 것 같네요...』
뒤늦게 걷히기 시작한 안개 사이로 크라우젤의 상황을 지켜본 해설진이 안타깝다는 듯이 침음했다.
하지만 해설진이 호들갑을 떠는 것과 달리 크라우젤은 의도한 바를 달성하고 있었다.
연속되는 폭발이 바로 머리 위에서 일어나자 일대에 커다란 충격파가 발생했고, 이 충격에 휩쓸린 영웅의 육신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크라우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선 채 검을 크게 휘둘렀다.
아주 찰나동안 신경이 분산 된 영웅과 크라우젤의 거리는 약 15미터.
검이 닿지 않는 거리였으니 부질없는 몸짓처럼 보였다.
하지만 크라우젤이 허공에 삽질한다고 오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세상을 가르는 검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서걱-!
크라우젤의 검격이 발생시킨 깔끔한 절단음이 아득하게 뻗어나간다.
하늘 위 구름들이.
크라우젤과 영웅 사이의 대지가.
풍경을 이루는 소나무와 솔잎들이 처음부터 두 쪽이었던 것처럼 모조리 반으로 갈라져나갔다.
크라우젤의 궁극기 중 하나인 <우주 검>의 효과였다.
“...!?”
기고만장하던 영웅의 두 눈이 부릅떠진다.
녀석의 몸이 기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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