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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810화 (805/1,794)

템빨 44권 - 20화

“우와아아아아!!”

의문, 경악, 침묵, 환호.

베이징 올림픽 주 경기장을 가득 채운 관중들의 반응 단계다.

하지만 미국인 관중들은 여전히 의문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뭐야? 크라우젤이 왜 저기에 있어? 어제까지만 해도 PvP에 출전 한다는 기사가 줄을 이었었잖아?”

“그러게. 기사 보고 당연히 PvP에 나올 줄 알았는데....”

“PvP에 나가고 마왕 토벌전에 안 나가는 거 아니야?”

“미치지 않은 이상 그럴 리가 있나?”

“하긴...”

미국인 관중들이 경위를 눈치 채기 시작했다.

어떤 삼류 언론사에서 크라우젤, 지발, 하스터 세 사람이 PvP에 출전할 거라는 자극적인 찌라시를 흘린 것이다. 그 삼류 언론사는 막대한 트래픽을 올렸을 테고, 다른 언론사들 또한 진실은 제쳐두고 어뷰징 기사를 마구잡이로 쏟아냈을 테지.

책임이야 처음 찌라시를 흘린 삼류 언론사에게 돌리면 될 일이니, 이참에 우리도 트래픽이나 올려보자 했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그 막대한 양의 기사에 낚인 거고.

“하여튼 기자 놈들 하는 짓 보면 완전히 양아치라니까? 어제 기사 보고 아쉬워서 잠도 못 잤는데.”

“나도. 금메달 2개가 허공으로 날아가는 기분이라 분해서 못 자겠더라. 덕분에 술을 퍼마셨더니 숙취 때문에 아직도 머리가 아파. 뭐, 어쨌든 잘 됐지.”

“그래, 아주 잘 됐어.”

미국이 자랑하는 최강의 삼인방이 한 종목에 몰리는 일만큼은 발생하지 않았다.

환호할만한 일이다.

“크라우젤! 힘내라!! 응원한다!!”

정신 차린 미국인 관중들까지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하자 경기장 전체가 들썩이는 듯했다.

무대 위 메이샤오가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

“대, 대단하네...”

메이샤오는 중국 내 행사에 여러 차례 참석해왔다. 자신이 관객의 호응에 익숙하다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국대전의 규모는 차원이 달랐다. 10만 명의 관중들이 내지르는 함성에 머리가 멍해지고 긴장감이 심해졌다.

다른 참가자들 또한 비슷한 눈치였다.

여태까지 그들이 참가했던 종목에서는 이렇게까지 열렬한 관심과 응원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모두가 굳어 있었다.

하지만, 정작 관중들을 열광시킨 주인공은 태연했다.

긴장은커녕 감흥조차 없다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캡슐 앞에 다가서는 그에게 메이샤오가 소리쳤다.

“저, 저기요! 크라우젤 님!”

“..?”

“이, 이따가 사인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사실, 경기가 끝난 후에 부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캡슐로 멀어지는 크라우젤의 뒷모습을 보노라니 아득하게 느껴졌다. 두 번 다시는 대화할 기회조차 없을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 정도로 멀리 있는 사람이 바로 크라우젤이었다.

다른 참가자들도 이때다 싶었는지 메이샤오와 똑같은 부탁을 했다.

비록 그리드에게 한 번 패배했다고는 하나, 지난 세월 동안 크라우젤이 쌓아온 업적은 경이적인 것.

하이 랭커들 사이에게서도 크라우젤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사인도 받고 싶었고 같이 사진도 찍고 싶었다.

“....”

귀찮다는 듯이 대꾸도 안 한 크라우젤은 이미 캡슐로 들어가 버렸다.

아쉬움에 입맛 다시던 참가자들도 사회자가 재촉하자 뒤늦게 부랴부랴 캡슐로 달려갔다.

다음 순간 그들이 눈을 뜬 장소는 Satisfy 국가대항전 전용 서버 안이었다.

‘카메라에 찍히진 않았겠지?’

빌어먹을 메이샤오 같으니라고!

분위기에 휩쓸려서 크라우젤에게 사인을 요청했던 중국의 신성 장찌앤이 이를 갈았다.

중국 내에서는 인기 스타답게 콧대 높게 행동해왔고, 덕분에 차가운 외모와 어울리는 ‘얼음 왕자’라는 별명까지 얻었건만, 하루아침에 이미지 말아먹게 생겼다.

‘사인 요청은 무대에서 내려온 다음에 쫓아가서 했어야했는데. 빌어먹을. 빌어먹을!’

하여간 메이샤오가 문제다. 정말로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다. 하오의 동생이라는 점도, 자신보다 인기가 많다는 점도, 분위기를 주도하는 밝은 성격도.

‘각오해라, 메이샤오! 내가 네놈보다 빠르게 영웅을 격파하고 너의 그 높은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준비는 완벽하다.

장찌앤은 작년 PvP 결승전을 수천 번도 더 넘게 돌려보면서 그리드의 힘을 분석했다. 자신에게 맞춤 정장처럼 달라붙는, 이상적인 게임 내 옵션 설정도 찾아냈다. 열심히 레벨을 올려왔고, 유명한 보스들이 드롭하는 레전드리 아이템을 철저히 갖췄다.

올해의 그리드에게는 당연히 상대가 안 되겠지만, 1년 전 그리드를 상대하기에는 충분하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게임 내에서는 무려 3년이었고, 3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영웅 그리드는 3년 동안 멈춰있던 반면 자신은 3년 동안 쉬지 않고 성장해왔으니 진다고 생각하는 게 힘들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였다.

『첫 번째 도전자, 중국의 장찌앤 선수가 출격합니다!』

쿠웅-!

사회자의 외침과 동시에 장찌앤의 몸이 절벽 위로 전송됐다.

묵직한 중갑옷을 입은 몸이 지면에 떨어지자 요란한 효과음이 울렸다.

소나무에 기대어 선 <영웅>, 그리드가 그를 아주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영웅 깨기 내내 무표정했던 작년의 영웅과는 전혀 다른 표정.

이건 결정적인 힌트였다.

올해 영웅의 인공지능이 호전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힌트.

작년의 영웅은 냉정, 침착한 성격을 지녔던 것과 큰 차이다.

인공지능의 성격은 전투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니까.

똑같은 네임드, 초네임드 등급의 인공지능이라고 해도 성격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모습을 보여주는 법이다.

만약, 장찌앤에게 충분한 경험이 있었다면 영웅의 들끓는 눈빛을 보는 순간 일부 계획을 수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찌앤은 경험이 부족했다.

그는 작년의 영웅을 컨트롤 했던 인공지능과 눈앞의 인공지능의 차이점을 첫 눈에 간파하지 못했다.

패착이었다.

크라우젤의 인공지능은 신중했고, 그 탓에 선공을 양보했던 반면 그리드의 인공지능은 공격적이었고, 선공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에.

콰자작-! 쾅!!

팽이처럼 회전하며 두 번 연속 이어지는 베기.

“....!?”

경기 시작과 동시에 날아온 공격을 막아내면서, 장찌앤은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력한 일격을 막아냈습니다.]

[<우는 전사의 검>의 내구력이 78 하락합니다!]

[오른쪽 손목이 골절되었습니다!]

[2,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앞으로 최대 15초 동안 오른 손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미친 거 아니야?’

물론, 사전에도 알고 있었다.

그리드의 공격력은 미쳤다. 평타만 허용해도 황천길을 오갈 정도다.

그래, ‘허용’했을 때 그런 줄 알았다.

근데 정작 까놓고 보니 방어해도 안 된다고? 이쪽은 액세서리까지 죄다 근력을 올려주는 옵션으로 세팅해놨는데?

쿠오오-!

그리드의 다음 공격이 날아오고 있었다. 이번엔 찌르기였다.

덜렁거리는 오른 손에서 왼 손으로 검을 옮겨 쥔 장찌앤이 스킬을 전개했다.

“천검지체!”

모든 상태이상. 심지어 물리적인 상태이상까지 면역하고 받는 피해를 경감시키는 아바타 계열 스킬이었다.

원래는 전투 후반부에 꺼내들 예정이었던 회심의 패였으나, 천검지체를 사용하지 않으면 전투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더 이상 아껴둘 수가 없었다.

채앵-!

그리드의 검을 정면에서 막아내고 이어서 반격하는 장찌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을 찌르며 다가온 그리드의 망토가 유난히 펄럭인다 싶더니, 펄럭이는 망토 사이로 4개의 황금손이 보였기 때문이다.

“씹...!”

쿠콰콰쾅!!

장찌앤이 백색 섬광의 폭격에 직격 당했다. 마법 저항력을 무시하고 들어오는 마법이었기 때문에 피해량이 만만치 않았다.

서걱-!

장찌앤의 검은 그리드의 가슴을 베고 있었다.

“누가 먼저 죽나 해보ㅈ...!”

이제부터는 진흙탕 싸움이다.

이를 악 문 장찌앤이 공격력 강화 버프를 두르고 연격을 날렸다.

[대상에게 5,38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5,290의 피해를...]

‘미친?’

공격력 버프까지 두르고 레전드리 무기를 휘두르는데 고작 이 정도 데미지밖에 안 들어간다고?

장찌앤의 눈동자가 떨리는 반면 그리드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마치 재롱이 귀엽다고 말하는 듯한, 그런 도발적인 미소였다.

“이 새끼가!”

인공지능 따위가 도발을?

수십 억 중국 인민에게 새로운 영웅 후보로 추대 받아온 신성답게 자존심 높은 장찌앤이었지만 그의 분노는 오래가지 못했다.

화르륵!

그리드가 몸에 두른 불꽃 때문이었다. 접근하는 대상을 불태우는 불꽃.

“으앗...!”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른 장찌앤이 뒷걸음쳤다.

자신이 검을 날려서 그리드에게 입히는 피해량보다, 불꽃에 입는 피해량이 더 빠르게 누적 된 까닭이다.

“무, 무슨... 헉!”

물러나며 천검산화를 전개, 그리드의 경로를 최대한 차단해놓고 물약부터 복용하려던 장찌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드가 일대에 펼쳐진 천검산화를 모조리 손쉽게 회피하고 돌파하더니 순식간에 지척으로 다가온 까닭이다.

종회무진의 힘이었다.

“꺼, 꺼져!”

겁에 질린 장찌앤이 공격 스킬을 마구잡이로 난사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름난 랭커들을 사냥해왔던 최강의 공격들도 그리드의 방어력은 꿰뚫지 못했다.

“하핫!”

영웅이 즐겁다는 듯이, 혹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장찌앤의 얼굴을 손으로 낚아챈 녀석이 <여왕의 업화>를 폭발시켰다.

불과 1분 13초.

중국의 신성이 ‘1년 전’ 그리드에게 박살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문제는, <흡혈>능력 때문에 그리드의 생명력 게이지는 거의 변함없이 유지 된 상태라는 점이다.

큰 충격에 빠진 중국 인민들이 침묵했다.

***

『아아! 결국 메이샤오 선수가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언제까지 계속되나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됐군요. 안타깝게 됐습니다. 하지만 메이샤오 선수는 충분히 잘 싸워줬어요.』

메이샤오는 다른 3명의 선수들과 달랐다.

날카로운 철 채찍과 마력이 깃든 천을 이용해서 마치 성난 황소처럼 덤벼드는 그리드에게 제동을 걸고 역으로 상처를 입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투우사 같았다.

5분 이상을 버티면서 그리드의 생명력을 50퍼센트 가까이 떨어뜨렸다. 물론 그리드에게는 <티라멧의 허리띠>와 <최초의 왕>의 회복 효과가 남아있다는 점을 고려해야했지만 어쨌든 눈부신 활약이었다.

3분 내에 사망하며 그리드의 생명력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던 다른 참가자들과 메이샤오는 분명히 비교 됐으니까.

“우와아아아아!!”

10만 관중들과 전 세계 수십 억 시청자들이 메이샤오의 이름을 연호하며 환호한다.

하지만 정작 대기실에 앉은 그리드는 감흥이 없는 눈치였다.

“저놈 저거 대충 싸우네.”

1년 전 그리드.

초네임드급 인공지능이 컨트롤 중인 올해의 <영웅>이 싸우는 방식은 불도저 같았다. 오로지 스펙으로 적을 밀어붙이는 그 모습은 그리드 그 자체였다. 딱히 감탄할만한 솜씨가 없었다.

그리드가 입맛을 다셨다.

인공지능이 자신의 몸을 어떻게 컨트롤하는지 멀리서 지켜보면서 공부의 기회로 삼을 생각이었는데, 뜻대로 안 되자 아쉬웠다.

하지만 아쉬움은 잠시.

“크라우젤...”

영웅 깨기의 마지막 참가자가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그리드는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았다.

동시에.

콰작-!

“...?”

모니터 속 영웅은 다른 참가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크라우젤에게 선공을 날렸고, 크라우젤은 회피하며 발경을 전개, 영웅의 몸을 허공에 띄워버렸다.

동시에 솟구치는 백호검.

복부를 꿰뚫린 영웅이 허공에 피를 뿌린다.

순간, 다른 참가자들에게는 미소를 유지했었던 영웅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매직 미사일을 쏴서 크라우젤을 떨쳐낸 갓 핸드들은 처음으로 <묠니르>를 무장했다.

“파(派)!”

지상에 착지한 영웅이 검기의 파도를 소환했고, 동시에 갓 핸드들은 크라우젤을 향해서 쇄도했다.

높은 통찰력 스탯과 <도살귀의 안대>의 힘을 결합시킨 영웅은 크라우젤의 회피 경로를 예측하고 갓 핸드를 절묘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라우젤에게는 이기어검이 있다.

채채채챙-!

크라우젤의 인벤토리로부터 튀어나온 네 자루의 검이 갓 핸드들과 어지럽게 얽혔다.

“완벽해...!”

그리드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기어검은 어려운 스킬이다. 갓 핸드와 다르게 하나부터 열까지 명령을 내려야 행동을 실천했다.

작년의 크라우젤은 이를 완벽하게 활용하지 못했고, 이기어검을 제어하려다가 도리어 본신의 집중력을 잃는 등 실수를 보였었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그는 이기어검과 본신을 동시에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하나의 자아로 5개의 육체를 제어하는 꼴이었다.

스팟-!

백광보를 밟은 크라우젤이 영웅의 후위에 섰다.

통찰력으로 이를 읽어낸 영웅은 허리를 비틀어 돌리며 검을 세웠다.

쿠콰콰콰콰콰쾅!!

두 자루의 검이 맞부딪치자 검은 불꽃이 크라우젤을 덮쳤고, 날카로운 돌의 가시들이 영웅을 꿰뚫었다. 아니, 꿰뚫는 것처럼 보였다. 신속하게 <란스티어의 망토>를 몸에 두른 영웅은 투사체로 분류되는 가시들을 대부분 튕겨냈다.

“.....”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수십 억 인구 모두가 손에 땀을 쥔 채 화면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거야.”

그리드는 환희에 찼다. 그는 영웅의 싸움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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