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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809화 (804/1,794)

템빨 44권 - 19화

“회장님께서 기대하고 계십니다.”

“제가 실패하는 모습을요?”

“하하. 표현이 과격하십니다. 아가씨께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길 기대하시는 거지요.”

“....”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라는 말을, 유라는 끝내 뱉지 못했다.

그녀의 굳게 닫힌 산호색 입술이 옴짝달싹할 기미조차 없자 중년인은 꾸벅, 깊숙이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자리를 떴다.

유라는 세 달 전 불쑥 집으로 찾아왔던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떠올리고 있었다.

“애들 장난은 올해로 끝내고 본가로 들어오도록 해라. 5년이나 놀았으면 충분하다.”

“장난도, 놀이도 아니에요. Satisfy는 세계를 지배하는 사업이라는 사실을 할아버님께서 모르실리 없을 텐데요?”

“사업은 Satisfy를 만들고 운영하는 놈들이 하는 게고. 너는 일개 플레이어일 뿐이지 않느냐. 너의 그 알량한 자부심이 플레이어로써 벌어들인 고작 수백억의 자산에 근거한 거라면 우스울 뿐이다. 너는 S.A그룹을 구성하는 수십 억 개의 부품 중 하나에 불과해.”

일개 부품.

심지어 누구라도 대체할 수 있을 소모품.

유라는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했다. 자신은 그리드도, 크라우젤도 아니었으니까. 본인이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녀는 오래 전부터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본가는 숨 막히는 곳이다.

무섭도록 차가운 곳이다.

부모님의 장례식 날, 그녀는 그 누구의 눈물도 볼 수 없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 멍청한 아들놈보다야 손녀 놈이 백배 천배 더 나으니까.’

장례식장에 맴돌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건 분명히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내 후계자가 되는 편이 부와 명예 모든 면에서 현재의 너보다 월등히 낫다.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고 돌아와라.”

“그러고 싶지 않아요.”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세우시고 나를 포함한 후손들이 일궈온 집안이다. 정당한 계통인 네가 뒤를 잇지 않으면 그 누가 뒤를 잇는다는 말이냐? 너는 벗어날 수 없다. 쓸데없는 고집 따위 버려라.”

“사촌 오빠들이 있잖아요. 저를 향한 집착은 이제 그만둬주시면 좋겠습니다. 진심이에요, 할아버님.”

“반푼이들 따위에게 후사를 맡기라고? 기필코 가문을 버리겠다는 게냐? 그럼 너처럼 괘씸한 녀석을 낳은 네 부모에게 책임을 물려야겠구나.”

“네?”

이미 돌아가신 분들은 왜 갑자기?

당황하는 손녀를 보고 피식 웃는 노인의 얼굴이 괴벽하다.

“너를 호적에서 파버리겠다. 네가 중국으로 떠나는 날, 내 땅에 묻힌 네 부모의 무덤을 파헤치고 백골을 꺼내 강가에 던져버리겠다.”

“할아버님의 아들이고 며느리입니다.”

“이미 죽은 녀석들 없는 셈 치는 거야 어렵지 않다.”

평정심을 노력하려고 했지만, 더 이상은 힘들다.

유라의 검은 눈동자는 갈 길을 잃고 있었다. 한참을 고개 숙이고 있던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제가 사람을 보내서 부모님을 다른 곳에 안치....”

“우리 집안의 묘지다. 외부인은 내 허락 없이 발을 들일 수 없어.”

“할아버님!”

“올해 국가대항전은 중국에서 열린다지? 좋다. 다녀오너라. 그동안 네 부모의 무덤을 파헤치면 될 일이니.”

유라의 가냘픈 턱에 힘이 들어갔다.

패악을 논하는 할아버지를 노려봐주지도 못한 채, 충혈 된 눈으로 테이블만 바라보던 그녀가 큰 결심을 내렸다.

“충분히 조사하셨을 테니 알고 계시겠죠? PvP. 국가대항전에서 가장 명예로운 종목 중 하나입니다.”

그리드와 크라우젤.

오직 그 2명만이 왕좌를 차지했던 최고난이도의 종목.

PvP는 막말로 꿈의 무대였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도전을 꿈꾸지만 결국 꿈으로만 남겨두게 되는.

“PvP에서 금메달을 따면 할아버지의 후계자가 되는 것보다 더 큰 명예와 부를 누릴 수 있어요. PvP에서 금메달을 따겠습니다. 그럼 저를 인정해주시고 놓아주세요.”

노인의 입가가 비틀렸다.

“내가 네 제안을 왜 들어줘야하는 게냐?”

“PvP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하면 본가로 돌아갈게요. 적극적으로 후계자 교육을 받고 집안과 회사를 더 크게 키울 거라고 맹세할게요. 하지만 제게 기회조차 안 주시고 강제로 후계자로 삼으신다면, 할아버님의 사후에 집안과 회사가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일방적인 거래는 가능하다. 단, 그 끝은 좋지 못할 것이다.

분명한 협박이었다.

괘씸하다?

아니, 전혀.

노인은 도리어 흡족했다.

적어도 이 순간의 손녀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쏙 닮아있었으니까.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혈육조차 겁박하고 헤쳤던 청년 말이다.

“좋다. 그 거래를 받아들이지.”

노인은 의외로 흔쾌히 수락했다.

유라의 생각대로 사전에 충분히 조사한 까닭이다.

그는 유라가 PvP에서 우승할 가능성이 한없이 낮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손녀의 재능은 한낱 게임 따위에 있지 않았기에.

“PvP 금메달. 네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어디랑 어디에 출전하려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마왕 토벌전이겠지.”

매해 그래왔듯이, 제4회 국가대항전 규칙 또한 일부 변경되거나 추가됐다.

그중 하나가 선수 출전 종목 비공개 시스템이다.

기존의 국대전은 선수들의 출전 종목 목록이 빠짐없이 공개됐던 반면 올해 국대전은 공개되지 않았다.

말인 즉, 선수가 직접 ‘나는 여기랑 저기에 나갈 겁니다.’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선수 개인의 참가 종목을 열람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 괜히 생긴 시스템이 아니었다.

대중의 호기심을 유발, 지속시키는 효과를 유도하는 한편 선수들 입장에서는 강적을 피할 방법을 궁리하느라 골치가 아파졌으니 전략성이 추가됐다.

그리고 국가대항전 마지막 날.

사람들은 아직 1개의 출전권밖에 사용하지 않은 크라우젤이 남은 2개의 출전권을 어디에 사용할지를 놓고 토론했다. 이 토론 자체가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재밌는 컨텐츠였다.

기자석에 앉아있는 세계 각국의 기자들도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출전권 하나는 무조건 마왕 토벌전에 썼을 걸? 결과에 따라서 다량의 메달을 딸 수 있는 유일한 종목을 크라우젤이 놓칠 리 없지.”

“PvP에도 참가했을 거야. 크라우젤 없는 PvP는 상상도 안 돼.”

PvP는 성역이다.

자신의 실력과 재능을 여지없이 뽐낼 수 있는 최고의 무대.

실력에 자신 좀 있는 랭커라고 하면 무조건 PvP에 출전하기를 희망했다.

특히 올해 국대전은 그리드가 불참했기 때문에 PvP 지원률이 높았다는 소문이다. 최소한 한 방에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크라우젤도 당연히 PvP에 지원했을 거라고 예상하는 기자들.

그들은 정말 극소수에 불과했다.

‘저놈들 기자 맞아? 왜 저렇게 수준이 낮지?’

국대전을 직접 참관하는 기자들은 대부분 베테랑이다.

그들은 선수들의 성향과 관계를 데이터화하고 있었고 이를 토대로 크라우젤의 PvP 불참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크라우젤이 영웅 깨기와 마왕 토벌전에 나갈 것으로 추측했다.

이유?

간단하다.

올해 PvP에는 그리드가 없다.

작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라도 크라우젤은 영웅 깨기에 출전할 가능성이 높았다. 작년의 그리드를 쓰러뜨리고 자신의 성장을 증명하려할 것이었다.

‘그게 기사가 되겠지.’

<영웅 그리드>는 진짜 그리드보다 몇 배 더 강할 거라는 것이 기자들의 생각이었다.

작년, 그리드가 배틀 필드에서 하오를 쓰러뜨리는 최상위급 컨트롤 솜씨를 보여줬다고는 하지만 그리드가 템빨 없이 싸운 건 그때 한 번 뿐이다.

실전에는 변수가 많은 법.

그날 하오의 컨디션이 유난히 안 좋았을 수도 있었던 거고, 그리드의 컨디션이 유난히 좋거나 운이 따라줬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드의 컨트롤 솜씨가 ‘최상급’이라고 확실히 증명되지 않은 현재 시점에서는 초네임드급 인공지능이 탑재 된 <영웅 그리드>쪽이 몇 배나 더 강할 거라고 손을 들어주는 수밖에 없다.

그 괴물을 크라우젤이 꺾을 수 있을까?

힘들 것이다.

고작 1년의 성장만으로는...

기자들은 벌써부터 손이 근질거렸다.

작년의 그리드에게 또 한 번 패배하고 좌절하는 크라우젤의 모습을 어서 빨리 기사에 옮겨 적고 싶었다.

***

“영웅에게 포커스를 맞춰.”

이국래 국장의 지시였다.

위에서 내려온 오더니까 충실히 잘 수행하라는 뒷말까지 덧붙였다.

국장 위...

OGC 방송국 소속 한찬구 PD는 긴가민가하면서도 오더를 충실히 따랐다. 모든 스텝들에게 영웅에게 집중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OGC 방송국 중계는 다소 특이했다.

다른 방송국 MC들은 영웅 깨기에 출전한 선수들이 누구일지 예측하고, 선수들의 스펙을 탐구하는데 여념이 없는 반면 OGC는 작년 그리드의 영상을 분석했다. 그리고 작년 그리드의 스펙을 토대로 영웅의 능력치와 스킬 목록을 추측하는데 전념했다.

카메라워크도 영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평야 위에 우뚝 선 흑발의 사내.

올해 국대전에 출전하지 않아 전 세계인들이 아쉬움을 느끼게 만들었던 지존 그리드의 모습을 핥듯이 살펴진다.

『올해 영웅은 작년의 영웅과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작년의 영웅은 높은 회피율과 명중률을 보유한 대신 방어력과 생명력 측면에서는 평범한 선수들과 크게 다른 구석이 없었지만, 올해 영웅은 공격을 받아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는 높은 방어력과 생명력을 겸비했죠.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아요. 이 단단하고 빠른 육체를 AI가 컨트롤할 경우 회피력도 급상승할 거라는 말이죠. 선수들 입장에서는 이걸 어떻게 쓰러뜨려야할지 감도 안 잡힐 겁니다.』

『그렇죠. 생존력이 준 보스 몬스터급이라고 보면 됩니다. 기본 방어력이 우수한데다가 흡혈과 치유 능력을 겸비했고 특정 조건에서 실드까지 사용하니.... 아, 무적도 있죠.』

『근데 정작 문제는 생존력이 아닙니다. 바로 높은 공격력이죠. 영웅에게 한 대라도 공격을 허용할 경우 플레이어는 거의 빈사 상태에 돌입한다고 봐야 해요. 그나마 검무를 출 때는 모션이 길기 때문에 대처할 수 있지만 평타가 스킬급의 위력을 발휘할뿐더러 불꽃을 폭발시키는 스킬은 즉발이라...』

『작년에 타르마 선수가 불꽃 한 방에 산화했었죠.』

『타르마 선수가 올해 국대전에는 불참한 이유가 그때 생긴 트라우마 때문일 거라고...』

궁극기를 연속으로 적중시킨다고 해서 죽는 상대가 아니다.

반면 이쪽은 평타만 맞아도 빈사 상태가 된다.

선수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봤을 때, 올해 영웅을 쓰러뜨리는 일은 답도 없었다.

적어도 해설진의 눈에는 그랬다.

『하지만 국대전 참가자들은 각국을 대표하는 강자이니만큼 느낌이 다를 수도 있을 겁니다.』

『맞아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떠올릴 수 없는 공략법을 마련해왔겠죠. 물론 소수에 불과하겠지만...』

『장혁민 해설위원께서는 올해 영웅 깨기에 몇 명의 선수가 참가했을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음... 많아 봐야 10명이 조금 넘지 않을까요.』

『제 생각과 같으시군요. 크라우젤과 크리스, 지발, 하스터, 수에론, 폰, 레가스, 카츠, 데미안 그리고 가끔씩 터무니없는 공격력을 발휘하는 극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군요.』

『뭐, 저희가 너무 섣부르게 추측하는 감이 없지 않죠. 올해 국대전 참가국이 무려 125개나 되고 참가 선수는 천명이 넘으니까요. 아직 우리가 모르는 강자들이 있을 테고 개중에는 영웅을 격파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온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선수 목록이 공개되었습니다. 올해 영웅 깨기에 참가한 선수는.... 어?』

『허.』

해설진이 할 말을 잃었다.

베이징 경기장 곳곳에 떠오른 홀로그램을 통해서 공개 된 선수 목록.

해설진의 예상보다 훨씬 더 짧았기 때문이다.

『다섯 명...?』

1,300명에 가까운 선수 중에 고작 5명이라니...?

선수들이 그리드를. 아니, AI가 컨트롤하는 그리드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리드가 이 정도였어?’

‘작년 영웅 깨기보다 더하잖아?’

‘아니, 템빨단원들은 아예 안 나왔네?’

그리드를 바로 곁에서 지켜봐왔을 템빨단원들이다.

그들 중 단 한 명도 영웅 깨기에 출전하지 않았다는 말은 즉....

꿀꺽.

곳곳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린다.

수만 명의 관중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어버리자 무대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다섯 명의 선수들이 차례대로 무대 위에 오르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관중들의 눈빛에 측은지심이 깃들었다.

실제로 무대에 오른 선수들도 동요하는 눈치였다.

출전 선수가 예상보다 훨씬 더 적자, 혹시 자신들이 주제 파악을 못한 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단 한 명의 사내를 제외하고.

“크, 크라우젤...!”

“우와아!! 크라우젤이다!!”

“와아아아아아아!!”

기자들의 예상대로였다.

크라우젤은 PvP가 아닌 영웅 깨기를 선택했다.

이제 그는 쫓아가는 입장.

그의 목표는 그리드였기에.

“저 개자식이....!”

“이건 좀 서운하네.”

지발과 하스터, 그리고 크리스 등.

크라우젤을 두려워하면서도 경쟁의식을 품고 있던 실력자들이 이를 갈거나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들 모두 자존심이 철저히 뭉개졌다.

크라우젤이 말하고 있었으니까.

너희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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