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807화 (802/1,794)

템빨 44권 - 17화

[천년의 한기가 뼛속 깊이 스며듭니다.]

[심장이 얼어갑니다.]

공간 자체가 최후의 안전장치였다.

그리드가 입장하자마자 다시 봉쇄 된 빙하 던전은 살아있는 생명을 용납하지 않았다.

‘파그마가 굳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군.’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적겠지만, 도굴꾼들에게 검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한이 있더라도 브라함의 시신은 끝끝내 안전할 것 같다.

[저항하였습니다.]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의 옵션 효과로 체온이 유지되는 중입니다.]

‘파그마라...’

떠오르는 알림창을 보면서 그리드는 연민을 느꼈다.

최소한 검의 무덤을 건설할 당시의 파그마는 발할라를 제작할 때의 칸과 비슷한 심정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큰 죄를 저지른 파그마의 마음은 브라함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자신의 육신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브라함은 단지 안도할 뿐, 여전히 파그마를 증오하고 있었다.

당연히 파그마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생명을 빼앗은 친구에게 용서받는 일은 영원토록 없을 것이란 사실을.

‘고독했겠네.’

후회 속에서, 고통 속에서 죽어갔으리라.

파그마를 변호할 생각도, 이해할 생각도 없는 그리드였지만 씁쓸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상념은 짧았다.

그리드는 새롭게 얻은 스킬의 정보를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광물 창조>

여러 개의 광물을 혼합하여 새로운 광물을 창조합니다. 대마법사의 협조가 필요한 스킬입니다.

스킬 사용 조건:대마법사와 연구 계약을 맺을 것.

스킬 연구에 필요한 기간:?

광물 창조 가능 횟수:1회

‘역시.’

광물 창조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그리드는 <파브라늄>을 떠올리고 있었다.

파브라늄은 파그마와 브라함이 오랜 기간 동안 함께 연구하며 탄생시킨 최강의 광물이다. 무한의 내구력과 자아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창조하게 될 광물은 다른 특성을 지닐 수도 있겠지.’

스킬은 ‘여러 개’의 광물을 혼합하여 새로운 광물을 창조한다고 명시하고 있었다.

어떤 광물을 혼합하느냐에 따라서 광물의 특성이 달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근데 설명이 꽤 애매하다?’

스킬 연구 기간을 알 수 없다는 점이 거슬린다. 여러 개의 광물을 혼합할 수 있다는데, 그 여러 개라는 것이 정확히 몇 개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은 점도 거슬렸다.

그리드의 의문을 느낀 브라함이 설명해주었다.

-몇 개의 광물을 혼합할 수 있는지와 연구에 필요한 기간은 마법사의 수준에 따라서 결정지어질 것이다. 정확히 추측하는 건 불가능해.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전설의 대마법사인 이 몸과 연구 계약을 맺으면 보다 많은 종류의 광물을 혼합해서 새로운 광물을 창조할 수 있겠지. 그것도 제법 빠르게 말이다.

브라함은 파그마와 함께 파브라늄을 창조한 경력이 있다. 이미 경험이 있는 이상 새로운 광물을 창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듬직하네요.”

그리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뼈와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천년의 한기조차도 그의 미소를 방해하지 못했다.

태클을 거는 쪽은 의외로 브라함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난 전설의 대마법사가 아니라 어설픈 지식만 남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연구에 협력할 수 없다.

“지식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나는 마법사다. 내 지식은 마법을 근거로 삼고 있으니 지식을 구현하려면 마법이 필요해.

“아....”

브라함의 영혼이 회복하기 전까지는 제2의 파브라늄을 창조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실망을 금치 못하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이죽거렸다.

-네놈의 부하 중에 마법사 한 놈이 있던 거로 기억하는데?

어디 한 명뿐이랴.

그리드는 수백 명의 마법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브라함이 굳이 한 명을 지칭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대마법사 아슈르.

브라함에게 마법사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갖춘 사람은 템빨국에 단 한 명뿐이었다.

-놈하고 협력하면 당장 오늘부터라도 연구를 시작할 수 있겠군.

콧방귀 뀌며 말하는 브라함에게.

“연구는 꼭 당신이랑 할 건데요.”

그리드가 단호히 답하자.

-귀찮게 굴기는. 네놈 같은 멍청이와 머리를 맞대고 연구해야한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치가 떨린다만... 뭐, 네놈이 정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나중에 내 발등에 키스해서 감사를 표하도록.

브라함의 영혼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어지간히 기쁜 눈치였다.

“알았어요. 발등에 키스 따위야 쉽지.”

-이,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네놈의 키스 따위 필요 없다!

“어쩌라는 거야...”

어찌됐든 지금은 백날 떠들어봐야 소용없다.

브라함이 다시 전설의 대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영혼을 회복해야했고 그때까지 필요한 기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뭐, 설레발치는 건 여기까지 하고. 파브라늄을 뛰어넘는 그라비아늄을 만들게 될 그날까지 당신의 회복에나 전념합시다.”

-그라비아늄?

“우리가 창조하게 될 새로운 광물의 이름입니다. 그리드의 그와 브라함의 라를 따서 그라비아늄.”

-그럼 비아는 뭐냐?

“이런....”

머릿속에 마구니가 끼었었다.

전혀 의도치 않게, 정말로 무의식중에 그라비아라는 이름을 떠올린 그리드는 수치심을 느꼈다.

‘요즘 욕구불만인가?’

새 광물의 이름은 역시 간단하고 무난하고 멋진 템빨석으로 짓는 편이 좋지 않을까?

아니, 아니다. 브라함과 함께 만들 광물인만큼 브라함의 이름을 꼭 넣고 싶다.

-??

브라함은 혼자서 얼굴을 붉히더니 급기야 혼자서 절레절레 고개 젓는 그리드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귀환 주문서를 사용합니다.]

그리드의 시야가 점멸하고 있었다.

***

-나름 괜찮군.

오래간만에 라인하르트 성으로 돌아온 브라함이 작게 감탄했다.

성 로비에 장식되어 있는 그리드의 초상화를 발견한 까닭이었다.

-좋은 그림이다. 실물보다 백배 나아.

“알아요.”

-왜 얼굴을 붉히는 게지? 왕의 성에 왕의 초상화가 걸리는 일은 당연한 일이야. 딱히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본다만?

“오징어 같은 얼굴을 전시했으니 부끄러울 수밖에.”

-하? 네놈, 나와 비교하면 오징어가 맞지만 인간 수컷치고는....

“아바마마!”

커다란 초상화 탓에 그리드가 민망해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로드가 그리드를 발견하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대로 그리드의 품 안에 뛰어들 기세였으나 이제 자기도 다 컸다는 걸까?

멈칫하더니,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공손히 허리를 굽힌다.

“여행은 잘 다녀오셨나요? 소자 많이 걱정하였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그리드가 로드를 안아주었다.

“우리 로드가 걱정해준 덕분에 무사히 잘 다녀왔지.”

“앗... 소자의 옷이 더럽습니다.”

“옷에 흙 묻는 건 당연한 일인데 뭘 새삼스럽게.”

확실히, 그리드와 로드 부자의 행색은 평범한 왕족들과 달랐다.

그들의 옷은 늘 땀과 흙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그리드는 대장일과 사냥을 하였고 로드는 수련을 하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네놈의 아들 말이다.

로드와 함께 목욕한 후 아름다운 아이린과 침실에서... 이하생략.

집무실에 돌아온 그리드.

그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침묵을 지켰던 브라함이 입을 열자 귀를 기울였다.

브라함은 다소 들뜬 눈치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범상치 않다고는 느꼈지만, 지금 보니 네놈보다 천배 만배 나은 재능을 지녔더구나.

“흐흐. 내 아들이 천재긴 천재죠.”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

아름다운 용모와 대륙을 대표할만한 재능을 지닌 아들을 둔 그리드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로드가 예쁘고 자랑스러웠다.

아들 칭찬에 헤벌쭉하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아직 마법은 가르치지 마라.

“네? 왜요? 우리 로드는 워낙 대단하고 뭐든지 다 잘해서 조만간 마법도 배우게 될 것 같던데.”

-아무튼 하지 말라면 하지마.

“이유는요?”

-말하기 싫다. 네놈이 이해할 때까지 설명하려면 답답하고 귀찮아질 테니까.

“아, 그러슈?”

브라함이 그리드를 신뢰하듯이-지식적인 부분 말고- 그리드 또한 브라함을 신뢰하고 있었다.

브라함에게 깊은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그리드는 그 즉시 로드에게 마법의 공부를 멈추라고 명하였다.

“자, 그럼 이제.”

마왕이 될 일만 남았다.

그리드가 미리 준비해온 백짓장을 책상 위에 펼쳤다.

그는 국가대항전 서버에서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 창조>를 토대로 어떤 아이템을 창조하면 좋을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

제4회 Satisfy 국가대항전 개최국은 중국이었다.

어느덧 3일 앞으로 다가온 국가대항전을 앞둔 중국에서는 하나의 칼럼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벌써 63년째 e-스포츠계에 종사 중인 노(老)기자의 칼럼이었다.

<한국인들은 겸손을 배우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은 동북아시아의 작은 소국 중 하나에 불과하다. Satisfy가 출시되기 전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중국 인민들에게 있어서 한국은 중요한 나라가 아니었으며, 한국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e-스포츠 팬들에게 있어서 한국은 역사적인 나라였다. 한국은 e-스포츠의 발상지일 뿐더러 수십 년 전의 ‘전설’로 회자되는 프로게이머 대부분이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수십 년 전의 전설들.

도대체 언제 적 한국이란 말인가?

지금의 한국은 역사의 편린에 불과하다.

e-스포츠의 종주국이 어딘지 궁금해 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한국인들이 e-스포츠 세계에서 활약했던 시기도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다.

60년 전.

본 기자가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모든 장르의 게임에서 트로피를 휩쓸었던 한국인 프로게이머들의 당당한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젊은 시절의 내게 있어서 그들은 결코 넘볼 수 없을 천상의 신들이었다.

반면 지금은?

한국인들은 빠르게 몰락했다.

그들의 마지막 영웅은 Faker와 Wolf, 그리고 Bang이다.

한국인 프로게이머가 e-스포츠에서 활약한 것은 이제 아득한 먼 과거의 일일 뿐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여전히 자만한다.

아직도 자신들이 e-스포츠 종주국의 국민이라는 점을 내세우고 있으며 수십 년 만에 탄생한 영웅 greed가 언제까지고 홀로 조국을 지켜 주리라 믿는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우리 중국에는 몇 명의 영웅이 있는 줄 아느냐고.

저기 서방의 미국은 몇 명의 영웅을 거느리고 있는 줄 아느냐고.

그네들이 그토록 찬양하는 greed라는 영웅도 결국 개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느냐고.

한국에는 한계가 있다.

수십 년에 한 번씩 희대의 영웅을 낳는 국가라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고, 당대에는 greed라는 영웅이 한국을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지만, greed의 시대가 과연 영원토록 지속 될 수 있을까?

중국과 미국 등의 e-스포츠 선진국들은 천문학적인 자본으로 쌓아올린 인프라가 있고 이 인프라는 새로운 영웅을 매 해마다 수십 명씩 배출해왔다.

하지만 한국은?

우리와 사정이 다르다.

e-스포츠가 막 부흥하기 시작했던 무렵에도 한국 정부는 게임을 ‘마약’이라고 규정했을 정도로 무능(최소한 이쪽 분야에서는)했다. 한국은 편협하고 시대에 뒤쳐진 국가다. Satisfy 흥행 이후 부랴부랴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으나 노하우가 없으니 온갖 시행착오를 겪어야할 것이다.

한국은 우리와 다르게 영웅을 지속적으로 육성할 수 없으며, 먼 옛날에도 그랬듯이 ‘하늘이 내린 천재’ 한 명에게만 의존해야하는 입장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현실을 모르고 거만한다.

한국이 또 다시 e-스포츠의 정점에 오르리라고 믿고 있다.

올해 국가대항전에 불참하겠노라 선언한 greed는 자국민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지, 본 기자는 생각한다.

greed를 잃은 올해의 한국은 겸손을 배우게 될 것이다.

중국 여론이 그리드를 놓고 들끓었다.

본인들이 그토록 무시해온 ‘소국’의 국민에 불과한 그리드를 영웅이라고 칭송하기 시작했다.

그리드를 칭송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생각 깊은 영웅’에 대한 경외였지만, 현실은 글쎄?

그리드의 국대전 불참 덕분에 중국도 1위, 2위를 노려볼 수 있게 된 점에 기뻐하는 마음이 더 컸다.

개최국이 된 올해부터는 중국이 기대만큼의 활약을 해주기를 수십 억 중국 인민들이 바라고 있었다.

한데 처음부터 이변이 발생했다.

개최식 전 미니게임으로 자리 잡은 <배틀 필드>에서 중국인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생존자 중 한 명은 한국인이었다.

코크.

템빨국의 십공신을 스승으로 둔 젊은 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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