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4권 - 16화
‘설마 5대 교황……? 아니, 그럴 리가. 아니겠지.’
5대 교황 프렌스.
성스러운 빛의 무구 세트의 본래 주인인 그는 파그마와 돈독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거짓 역사는 아니었다.
성스러운 빛의 무구 세트의 제작자가 바로 파그마였으니까.
더군다나 파그마는 프렌스의 부탁에 따라서 레베카교의 삼신기까지 봉인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알려진 것 이상으로 돈독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미치지 않은 이상에야 절친한 친구의 영혼을 검에 봉인할 리 없…….’
황당하기 그지없는 의심을 떨쳐 내고자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그리드가 멈칫했다.
파그마에게는 브라함이라는 친구를 살해한 전적이 있다.
그를 일반인의 범주에 넣는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당신, 혹시 프렌스 교황 성하이십니까?”
그리드가 얼떨결에 질문을 던졌다.
그는 설마설마하면서도 아니라는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
그래도 자신의 근간이 되는 파그마가 상상 이상의 못된 놈은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성검에 담긴 에고의 대답은 ‘YES’였다.
제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맞히다니 놀랍군요. 역시 당신은 파그마와 관련된 사람인 거네요. 파그마를 아주 잘 알고 있나 봐요. 그러니까 파그마의 힘을 쓸 수 있는 거겠죠?
성검의 음성은 명징하고 밝았다. 발랄하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였다.
그리드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소름이 돋았다.
친우의 영혼을 차가운 검에 각인시켜 버린 파그마의 잔혹함에 한 번. 족히 수백 년 동안 검 속에 갇혀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밝은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프렌스의 정신력에 또 한 번.
‘이쯤 되면 정신력이 아니라 성격의 영역인 것 같다만…….’
한없이 긍정적인 사람이었던 걸까?
굳어 있는 그리드에게 성검이 질문했다.
당신이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당신이 품고 있는 브라함의 영혼 때문인가요?
“브라함의 영혼을 느끼시는 겁니까?”
처음에는 마력을 감지할 수 없어서 긴가민가했지만, 그렇게까지 오만한 기세를 발산할 수 있는 영혼을 브라함 외에는 떠올릴 수 없더군요.
성검은 마치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현재 상황이 즐거운 눈치였다.
“당신이 이곳을 지키는 이유는 혹시…….”
추측하시는 바가 맞을 겁니다. 저는 무덤 지하의 빙하 던전에 보존되어 있는 브라함의 시신을 지키고 있어요.
순간, 브라함의 벼락같은 외침이 그리드의 뇌리를 쩌렁쩌렁 울렸다.
-레베카의 개 따위가 내 육신을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하려 들다니!
‘진정해요, 브라함. 지키는 거라고 하잖습니까?’
-나로부터 지키는 거겠지! 내가 육신을 되찾지 못하도록! 악마보다 사악한 파그마 놈이 죽어서까지 나를 괴롭히는구나!
“…….”
브라함의 분노와 불안이 너무 강하다.
영혼 조각이 작게 쪼개지고 약화된 그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위태로웠다.
브라함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퀘스트를 빠르게 진행해야 한다고 판단한 그리드가 성검에 한 발 가까이 다가섰다.
파그마의 눈이 분석한 성검의 정보가 단편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무덤을 지키는 검>
등급:전설
내구력:??? 공격력:8,395
신성력:??? 방어력:2,029
*전설급 에고가 깃들어 있습니다.
*???
*???
*패시브 스킬 <신앙을 잃은 교황>
…….
…….
전설의 대장장이 파그마가 말년에 남긴 작품입니다. 수백 년, 수천 년 후에도 회자될 보물입니다.
5대 교황 프렌스의 자아가 각인되어 있는 이 검은 <검의 무덤>을 탐하는 이의 성향과 의도를 판별하고 의지를 행사합니다.
*사용 불가 아이템
‘말년의 파그마…….’
파그마가 남긴 작품들은 제작 시점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성능을 간직하고 있었다.
초창기의 파그마가 만든 작품들은 그리드의 작품들보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반면 중반의 파그마가 만든 작품들은 그리드의 작품과 비등하거나 그 이상이었고, 말년의 파그마가 만든 작품은 그리드의 경지를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경험과 연륜의 힘이다.
헥세타이아 신에게 인정받은 그리드 또한 언젠가는 반드시 도달하게 될 경지였다.
“저를 브라함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그리드가 정중하게 부탁했다.
당신은 언제부터 검이 되었는지, 그런 모습이 된 것은 역시 파그마에게 강요받았기 때문인지, 도대체 몇 년 동안 그런 모습으로 지냈던 것인지 등등.
묻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그보다는 브라함의 시신을 찾아내는 게 우선이었다.
한데 의외로 성검이 비협조적이었다.
제 역할은 침입자로부터 빙하 던전을 지키는 거라니까요? 당신을 순순히 들여보내 줄 리 없잖습니까?
“침입자요?”
그리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성검은 그리드가 파그마와 관련된 인물이라는 사실과 브라함의 영혼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보지 않았던가?
한데 이제 와서 침입자 취급하고 출입을 막는다고?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당당히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파그마의 기술을 계승한 당대 전설의 대장장이이자 브라함의 영혼을 보호 중인 그의 친구입니다. 이런 저를 침입자 취급하시는 겁니까? 저야말로 빙하 던전에 출입할 자격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 아닐까요?”
당신이 파그마의 기술을 계승했다고 해서 파그마의 의지까지 계승했을지는 모를 일이니까요. 또한 브라함의 영혼을 보호 중인 것인지, 구속 중인 것인지 저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죠.
[새로운 히든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증명>
★히든 퀘스트★
무덤을 지키는 검의 시험을 통과하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시험 합격
퀘스트 클리어 보상:빙하 던전 출입 자격
‘시험이라고?’
공격력만 8천이 넘는 검이다.
무려 말년의 파그마가 제작한 작품이며, 전대 교황의 영혼이 각인된 검.
엿볼 수 없는 옵션 목록에 어떤 사기 효과가 귀속되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이 무시무시한 검을 상대로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
‘그래도 싸워야겠지.’
꿀꺽, 마른침을 삼킨 그리드가 열망의 무아검을 뽑아 드려는 순간이었다.
자, 문제 나갑니다! 파그마의 대의는 무엇이었을까요!?
“…엥? 세, 세계의 평화?”
딩동댕! 정답입니다!
“…….”
두 번째 문제입니다! 파그마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사상은 무엇일까요?!
“호, 홍익 대장장이 사상?”
딩- 동- 댕-! 정답입니다! 그럼 이제 세 번째 문제! 브라함의 정체는?
브라함의 정체.
멍청한 표정으로 문제를 맞혀 나가던 그리드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눈빛만큼이나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뱀파이어였고, 인간이었으며, 전설의 대마법사였던. 아직 진리에 도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공이라 칭송받았던 사람.”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추방하고 저주했던 악신 야탄과 자신을 배신한 단 하나뿐인 친구를 평생토록 증오했던 사람.”
-네놈…….
브라함의 영혼이 흔들렸다.
또렷한 음성으로 읊어 나가는 그리드의 마음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낀 까닭이다.
이는 동정이라는 하찮은 감정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의 그리드는 브라함의 이해자였다. 아마도 세상에서 유일한.
훌륭합니다. 정답이네요.
밝다 못해 경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들떠 있던 성검의 음성 또한 차분해져 있었다.
끝으로 질문입니다. 당신은 파그마의 대의와 사상에 공감하십니까?
성검의 예기가 사나워진 것은 기분 탓일까?
그리드는 경계하면서도 충실히 대답했다.
“공감합니다. 하지만 그의 행동들을 옳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저는 결코 친구를 배신하지 않으니까요.”
그렇군요.
역시, 사나워진 예기는 착각이었던 걸까?
성검의 태도는 온화했다.
좌로, 우로 2바퀴씩 회전한 성검이 지면에 박혀 있는 검날을 더욱 깊이 꽂아 넣었다.
그러자.
쿠구구구구구구-
단지 넓은 평야에 불과했던 검의 무덤이 지형을 바꾸기 시작했다. 평야 중심부가 언덕처럼 솟아올라 무덤이라는 이름에 적합한 형태로 바뀌더니 언덕 하단부에 숨겨져 있는 굳게 닫힌 철문을 세상에 공개했다.
스컹크 탐험대가 반년 동안 밝혀내지 못했던 검의 무덤의 진정한 모습이 단 수십 분 만에 밝혀진 것이다.
브라함, 저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당신에게는 저의 목소리가 들리겠지요?
쿠우웅-
거대한 철문이 서서히 열린다.
열린 철문 너머로 피어오르기 시작한 냉기가 언덕을 타고 내려와 대지를 얼려 나갔다.
[★히든 퀘스트★ <증명>을 클리어하였습니다.]
성검은 진실을 전하고 있었다.
브라함, 파그마는 당신을 배신하고 해친 일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반성하였습니다. 악마들의 공습으로부터 번헨 열도를 지킨 그가 가장 먼저 찾아온 곳이 바로 이곳, 당신의 시신을 묻어 놓았던 빙하 던전이었죠. 파그마는 언젠가 당신이 육신을 되찾고 부활할 거라는 사실을 예상하였고, 그날까지 당신의 시신이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곳을 검의 무덤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영혼까지 소환해 가면서 당신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죠.
-닥쳐라, 닥쳐라, 닥쳐라!
그건 당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파그마는 당신에게 범한 죄가 용서받을 수준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는 그저 스스로에 대한 혐오를 줄이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닥쳐라!!
시신을 확인하세요.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부활하시기를 바랍니다. 지옥과 마리로즈, 환국과 신들……. 파그마는 끝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도 어쩌면 당신이라면…….
-닥쳐!
“브라함…….”
그리드가 자신의 가슴을 꽉 거머쥐었다. 마음속 브라함의 영혼들이 불완전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그리고 파그마의 후예여.
성검이 작별을 고해 왔다.
당신이 브라함을 대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당신은 파그마와 상반되는 사람이겠지요. 개인적으로 당신을 응원하고 싶네요. 자, 어서 던전으로 들어가세요. 곧 문이 닫히거든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래요. 저는 브라함이 부활할 때까지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테니까 필요하면 언제라도 다시 찾아오세요.
그것이 나의 업보다.
일회용 도구에 불과했던 레베카의 딸들에게 인간의 삶을 제공해 준 대신 교단을 약화시켰던 어리석은 교황의 업보.
파그마가 삼신기를 봉인해 준 대가를 앞세워서 강요한 업보였고, 지난 수백 년 동안 차가운 검이 되어 이곳을 지켰던 프렌스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 없었다.
쿠우웅-!
그리드가 빙하 던전에 입장하자 철문이 닫혔다.
언덕은 다시 평야가 되었고, 4,179자루의 검들은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
인간의 언어라는 것이 이토록 빈약했던가?
얼음 속에 갇혀 있는 백발 나신의 사내를 목격한 그리드의 사고가 정지했다.
그는 얼음 속 사내의 아름다움을 오직 마음과 이성으로만 느낄 뿐, 그것을 표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브라함의 영혼이 안정되고 있었다.
-무사했군.
“다행이네요.”
-내 모습을 보고 네놈을 보니 더욱더 오징어로구나.
“…….”
깜빡이도 안 켜고 들어오는 팩트 폭력에 그리드는 반박하지 못했다. 심지어 감사한 마음마저 느꼈다.
브라함의 시신을 가두고 있는 얼음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 오징어는커녕 꼴뚜기였으니까. 오징어는 과대평가였다.
[★히든 퀘스트★ <브라함의 부탁>을 클리어하였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지력이 +50 상승하였습니다.]
[현재 상태에서는 새로운 마법을 습득할 수 없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새로운 히든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파그마의 안배>
★히든 퀘스트★
파그마가 세상에 자신의 기서를 남기고 떠났던 이유는 친우 브라함을 위해서였습니다. 파브라늄의 가치를 알고 있는 브라함이라면 반드시 파그마의 후예를 찾아내고 혼의 그릇을 만들어 달라고 청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브라함을 이곳까지 인도해 온 당신에게 깊은 감사를 느낀 파그마가 선물을 줍니다.
[★히든 퀘스트★ <파그마의 안배>를 클리어하였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히든 피스 스킬 <광물 창조>를 습득하였습니다.]
-그리드.
“네.”
-나는 파그마를 용서할 생각이 없다. 영원히 증오할 것이다. 언젠가 지옥에서 재회하게 된다면 내 손으로 놈을 갈가리 찢어 죽일 것이다.
“그러세요.”
어쩌면 그거야말로 파그마가 원하는 일일 테니까⎯라는 뒷말을 그리드는 애써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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