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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805화 (800/1,794)

템빨 44권 - 15화

그리드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브라함은 불완전한 상태였다.

생명을 다하고 육신을 잃은 그는 단지 영혼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어머니께 저주를 내린 악신을 증오하고, 자신을 배신한 친우를 저주하며, 그의 조각난 영혼은 분노라는 이름의 불꽃으로 맹렬히 타올랐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함은 초라하지 않았다. 결코 꺼지지 않을 불꽃처럼 보였다.

여러 개로 나뉜 그의 영혼 파편들은 하나하나가 끝을 알 수 없는 힘과 용맹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 모든 힘들이 그리드의 경외심을 불러일으켰었다.

불완전한 형태로도 세상을 오시할 수 있는 존재.

그 유일하면서도 절대적인 인물이 바로 전설의 대마법사 브라함이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 다시 만난 브라함은 달랐다.

조약돌처럼 작게 쪼개진 브라함의 영혼 파편들은 하나 같이 미약하고 초라했다.

꺼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불꽃?

더 이상 타오르지 않았다.

브라함의 작아진 영혼은 마치 타고난 뒤에 남겨진 재처럼 덧없어 보였다.

그리드를 굴복시키려했던. 온 세상을 굽어보았던. 단 하나의 마법으로 적해를 지배했던.

전설적인 대마법사의 위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왜⎯

“...당신은 왜 나를 떠났던 겁니까?”

웃고, 울던 그리드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진다.

이제 그는 오로지 울었다. 분노마저 느꼈다.

“그토록 초라한 모습으로.”

미약한 힘으로.

“방황할 거였다면.”

어차피 육신을 되찾지 못했을 거라면.

“왜 나를 떠났던 겁니까?”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며, 목까지 차오르는 서운함과 분노를 억누르는 그리드.

그는 브라함과 이별했던 날을 잊지 못한다.

나는 이제 모든 힘을 모았으니 떠나겠다.

너는 내가 힘을 모으는 동안 일시적으로 필요했던 그릇에 불과했다.

우리는 단순한 계약 관계였을 뿐이니 이별 따위 아쉽지 않다.

브라함이 남겼던 작별 인사다.

“모든 힘을 모았기는 개뿔.”

도리어 더 약해졌으면서.

“그릇에 불과하기는 염병.”

내게 애정을 주었으면서.

“아쉽지 않기는 씨발.”

다시 만난 지금, 이토록 나를 반기는 주제에 이별이 아쉽지 않았다고?

결국, 감정을 억누를 수 없게 된 그리드가 소리쳤다.

“당신 뭔데? 어째서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나를 떠났던 건데? 왜 혼자서 고생하고 있었던 건데! 말해 봐! 말해 보라고요!!”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의문을 표출합니다.]

-안 어울리게 웬 존대냐? 어디 가서 머리라도 잘못 얻어맞은 것이냐?

“아니, 기껏 한다는 말이 뭐 그래?”

혼자 화내고 울고 있는 내가 바보 같다.

질문에 대답하기는커녕 사소한 부분을 트집 잡는 브라함 탓에 그리드는 울컥 승질이 났다.

우습게도, 덕분에 진정됐다. 솟구치던 감정이 억눌렸다.

브라함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딱히 길게 설명할 것도 없다. 일이 내 예상과 달리 틀어졌을 뿐이야. 단지 그뿐이다.

거짓말이다.

브라함은 본인이 실패할 거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뻔히 알고 있었다.

그가 그리드에게 빙의된 채 모았던 마력의 양은 부활에 요구되는 양을 충족하지 못했으니까.

브라함은 자신이 그리드라는 그릇을 벗어나는 순간 영혼이 무너질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리드를 떠났다.

자신이 그리드 곁에 남아있다가는 그리드가 큰 화를 겪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브라함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드의 마음에 바위를 얹기 싫었다.

브라함이 화제를 돌렸다.

-한데 네놈은 어찌 3년 동안 변한 것이 없느냐? 안타까울 정도로 나약한 것은 여전하구나. 정녕 한심한 놈이다.

브라함과 이별해 있는 동안 그리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직계 뱀파이어들과 대악마 아스타로트의 힘을 흡수했고 빛의 정령을 얻었으며 대장장이의 기술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그리드는 스스로가 크게 성장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브라함이 봤을 때는 가소로운 수준이었다.

브라함은 어머니와 마리로즈를 제외한 뱀파이어들을 모두 하찮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고, 이미 수백 년 전에 뮐러에게 육신을 잃은 대악마 아스타로트의 힘 또한 반쪽짜리임을 알았다.

빛의 정령?

등급의 고하를 떠나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녀석이다. 아직은 평가할 가치도 없다.

-네놈에게 남겨주었던 마법의 수식들이 여전히 봉인되어 있구나. 도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3년 동안 단 하나의 수식도 풀어내지 못한 것이지?

“브라함.”

계속해서 심한 말을 일삼는 브라함을 그리드가 조용히 불렀다.

그리드는 담담한 척, 냉랭한 척 애쓰는 브라함의 태도를 보면서 마음을 완전히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늘에 흩어져 있는 작은 영혼 조각들이 그리드를 바라본다.

“당신의 말이 맞아요. 나는 약합니다.”

사실이다.

그리드는 강해졌다고 자부하고 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플레이어들 사이에서의 이야기다.

이미 그리드가 보는 ‘세계’는 플레이어들과 동떨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나한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돌아오세요.”

솔직하게 말한다.

간절한 바람을 담아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침묵합니다.]

“다시 함께합시다. 당신에게 배우고 싶은 게 아주 많아요.”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침묵합니다.]

“싫어요? 좋아, 그럼 양보하죠.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냥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내 곁에 있어만 줘요.”

그리드에게는 일말의 가식도 없었다.

그가 브라함을 원하는 이유는 대마법사의 지식과 마법이 탐나서도, 대마법사가 발생시킬 수도 있는 숨겨진 퀘스트들이 탐나서도 아니었다.

단지 그리드는 제2의 칸을 원치 않았다.

고독과 고통 속에 죽어갈 브라함을 원치 않았다.

나약해진 브라함을 품고 싶었다.

“나를 그릇으로 써먹어요. 당신이 힘을 다시 회복할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내 몸을 당신께 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힘이 완전히 회복되면 그때. 그때 다시 떠나요.”

-.....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흔들립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흔들림을 멈추고자 노력합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은 당신에게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강하게 흔들립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참지 못하고 말합니다.]

-...나는 네게 방해다.

-나를 만나는 순간 제약의 일부를 벗게 되는 리치 무무드는 강하다.

-무무드의 주인은 대악마 바알의 비호를 받는다. 지금 당장은 그놈이 애송이일지 몰라도, 언젠가 세상은 놈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나와 함께하는 이상 너는 계속되는 위기를 겪게 될 것이고 위기에 항거할 수 없게 된다.

수 년 전, 그리드를 떠나겠노라 결심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마음 속 깊이 묻어뒀던 말들.

절망을 품은 낱말들을 브라함은 담담히 꺼내나갔다.

그리드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내가 더 강해지면 됩니다.”

그리드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나 자신을. 당신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지면 됩니다.”

그리드는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항거할 수 없는 위기? 같잖아.”

그동안 그리드가 노력해온 이유는.

앞으로도 그가 노력하려는 이유는.

“내 가족과 친구는 내가 지켜요.”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본래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해왔던 그리드는 여러 가지 사건을 계기로 변하고, 또 변하고, 다시 또 변해왔다.

마음만 먹으면 재벌이 될 수 있고, 스타가, 영웅이 될 수도 있는 그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 중인 이유.

그 이유를 그리드는 또렷하게 말해나갔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나는 행복해졌어요. 부족해서, 약해서 멸시 받았던 삶과 작별한 순간부터.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된 순간부터. 나를 좋아해주는 친구들을 사귀게 된 순간부터 나는 행복을 느꼈습니다.”

이 행복을.

“나는 이 행복을 소중한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요.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행복을 내게 소중한 사람들도 함께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드가 별빛을 바라본다.

조약돌만한 작은 빛들.

수십 개로 쪼개어진 채 희미해져가는 그것들을 그리드는 하나도 빠짐없이 차례대로 눈에 담았다.

“당신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리드는 브라함을 알고 있다.

그가 어떤 저주를 받았는지.

저주 받은 그가 어떤 고통을 겪어야했는지.

형제를 외면하고 제자를 배신했던 그가 사실은 마음 속 깊이 괴로워하고 후회했다는 사실을.

그리드는 알고 있었다.

후회를 바로 잡을 기회조차 없이, 마지막 순간 하나밖에 없던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생을 마감한 브라함의 일생은 단지 지옥이었다.

그리드는 브라함에게 새로운 인생, 축복받은 인생을 선사하고 싶었다.

브라함에게 얻은 무수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갚아나가고 싶었다.

“나를 믿고 함께해요, 브라함.”

그리드가 손을 뻗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침음합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진실을 말합니다.]

브라함은 망설였다.

-나는 약해졌다.

-네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어.

-나는 네게 짐이며, 독이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은 당신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이런 나라도 괜찮은가?

그리드가 빛을 품었다.

“당신이니까 괜찮은 거야.”

쏴아아아아---

수십 개로 흩어져 있던 작은 빛들이 그리드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질긴 운명의 실이 그리드의 영혼과 브라함의 영혼을 하나로 묶었다.

알림창이 떠올랐다.

[<전능을 잃은 대마법사의 영혼>을 습득하였습니다.]

[세컨드 클래스 <대마법사>가 <지공(智公)>으로 변경됩니다.]

[레전드리 등급의 세컨드 클래스를 2회 연속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오를 때마다 획득하는 추가 능력치 포인트가 2개에서 4개로 격상합니다.]

[레벨이 오를 때마다 획득하는 능력치 포인트의 절반이 지력에 투자됩니다.]

[<전능을 잃은 대마법사의 영혼>은 현재 ‘불능’상태입니다.]

[현재 상태로는 새로운 마법을 배울 수 없습니다.]

[현재 상태로는 <동화>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전능을 잃은 대마법사의 영혼>은 1년에 한 번씩 회복하거나 당신의 지력이 1,000 오를 때마다 회복합니다.]

[<전능을 잃은 대마법사의 영혼>은 ‘불능’, ‘무력’, ‘호전’, ‘회복’, ‘완전’ 총 다섯 가지 상태로 구분되며 ‘회복’ 상태와 ‘완전’ 상태에 돌입할 경우 특수한 일이 발생합니다.]

[스킬 <마법 관조>가 생성됩니다.]

<마법 관조>Lv.1

패시브

지공(智公)의 지혜와 지식이 모든 마법의 섭리를 꿰뚫어 봅니다.

*적이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마법의 술식을 해독하고 50퍼센트 확률로 파훼하거나 4퍼센트 확률로 복제, 반격합니다.

*아군이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마법의 술식을 해독하고 30퍼센트 확률로 강화시킵니다.

*모든 속성의 마법에 적용되는 효과입니다.

*한 번에 여러 개의 마법을 관조하는 일은 아직 불가능합니다.

마법 자원 소모:없음

마법 재사용 대기 시간:3초

“아....”

그리드는 이런 걸 원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브라함에게 무엇인가를 얻고 싶어서가 아니라 브라함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정작 대단한 힘을 얻게 되자 솔직히 기뻤다. 감탄밖에 안 나왔다.

‘현역 시절의 브라함은 도대체 얼마나 강했던 거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리드의 귓가로 브라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퀘스트의 전조였다.

-파그마 놈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를 경계하였다.

[히든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놈은 내 시신을 얼음 속에 전시한 것으로 모자라서 이곳 어딘가에 숨겨놓고 내가 접근조차 못하게끔 암호를 걸어놨어. 그리드, 언젠가는 내가 반드시 되찾아야할 육신이다. 나는 내 시신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고 싶다.

<브라함의 부탁>

★히든 퀘스트★

브라함은 자신을 죽인 파그마가 죽어서까지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꿈꾸는 브라함은 자신의 시신이 온전한 상태인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브라함의 시신 발견.

퀘스트 클리어 보상:브라함과의 호감도 30 상승.

[당신과 브라함의 호감도는 이미 최대치를 넘어섰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이 변경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지력+50. 히든 퀘스트 연계.

말해도 될까?

안심시키려면 미리 말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퀘스트 내용을 보며 고민하던 그리드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브라함, 파그마는 당신을 배신하고 해친 일을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뭐라고?

“인계를 침공한 대악마들을 불러들인 존재가 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는 선악을 구분 짓는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신에게 저지른 짓을 후회했어요. 눈물까지 흘리면서 가슴 아파했죠. 그가 당신의 시신을 얼음 속에 넣고 이곳 어딘가에 숨겨놓은 이유는 당신을 경계하고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시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일 확률이 높....”

-닥쳐라. 헛소리 따위를 들으려고 네놈을 다시 그릇으로 삼은 게 아니다.

그리드의 말을 끊는 브라함의 음성이 떨렸다.

브라함이 느끼고 있는 거대한 혼란이 그리드에게 전해져왔다.

그리드는 직감했다.

두 전설을 묶어두고 있는 후회와 증오의 족쇄를 끊어내는 순간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것임을.

그리고 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다.

파그마의 후예이자 브라함의 친구.

바로 그리드였다.

“파그마의 눈.”

성급하게 행동하기보다는 일을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한 그리드가 푸른 안광을 뿜어냈다.

검의 무덤의 전경이 그의 시야에 담기자, 검의 무덤을 장식하고 있는 4,179자루의 검이 낱낱이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파그마? 아니, 다른 사람이군요?

4,179자루의 검 중 오직 한 자루의 검만이 그리드에게 반응했다.

에고가 깃든 검이었다.

레베카교의 보물 <최초의 성검>을 연상시키는 성스러운 검.

그리드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성검에 각인 된 에고는 필시 성인(聖人)의 에고일 터.

그리고 파그마의 옛 친구 중에는 교황이 있었다.

이쯤 되니 그리드는 파그마가 무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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