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4권 - 14화
검의 무덤에서 ‘무덤’은 2가지의 뜻을 담고 있다.
말년의 파그마가 제작한 실패작들의 무덤이자 브라함의 무덤.
검의 무덤은 무려 2명의 전대 전설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장소인 것이다.
Satisfy 세계관을 통틀어서 가장 유의미한 장소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았고, 그렇기 때문에 스컹크 탐험대는 검의 무덤에 집착해왔다.
무덤의 비밀을 파헤치는 순간 야탄교 본단의 위치를 밝혀냈을 때와 비견되는.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큰 명성과 재물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스컹크는 전용기를 구입해서 세계 방방곡곡을 유람하고 싶었고, 도그우먼은 불치병에 걸린 남동생의 목숨을 연장시킬 수 있는 의료시설을 섭외하고 싶었으며, 크로커다일은 자신의 차고에 수억 원짜리 슈퍼카를 10대 이상 진열하고 싶었다.
그래.
스컹크 탐험대원들은 검의 무덤에 투자한 1년이라는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았다.
불청객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그리드...!”
삐딱하게 쓴 왕관.
흑발 아래 높이 솟은 콧대.
맹금류의 것처럼 매서운 눈매.
갑옷과 망토로도 숨길 수 없는 근육질의 몸매.
불청객의 생김새를 빠르게 스캔하고 이어서 머리 위 아이디까지 확인한 스컹크 탐험대가 질색했다.
반면 그리드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파그마의 후예와 관계없는 플레이어들은 검의 무덤의 위치는커녕 검의 무덤의 존재조차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온 그리드 입장에서는 자신보다 한 발 앞서 검의 무덤에 도착해 있는 일단의 무리가 의심스러웠다.
“혹시 나를 노리고 쫓아온 건가?”
눈을 가늘게 뜬 그리드가 의심을 표출하자.
“아니요. 그럴 리가요? 우리의 만남은 우연한 것이 아닐까요?”
스컹크는 잽싸게 대처했다.
지난 1년의 세월이 아깝다. 그러므로 그리드를 막아서겠다.
이처럼 아둔한 생각 따위, 스컹크는 추호도 하지 않았다.
스컹크가 바보였다면 한 무리를 이끄는 수장이 될 수도, 한 직업을 대표하는 랭커가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후우.
깊이 내쉰 한숨에 온갖 상념을 실려 보낸 스컹크가 딱딱하게 굳어있는 안면 근육을 힘겹게 풀었다. 이내 그리드와 시선을 마주친 그는 정말로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누가 보면 그리드의 팬이라고 오해할 정도의 미소였다.
“그리드 님, 이렇게 우연으로나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탐험가 랭킹 1위 스컹크라고 합니다. 미천한 이름이지만.... 혹시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스컹크? 아.”
그리드도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방귀냄새 날 것 같은 이름.
쉽게 잊을 리 없다.
브라함과 처음 만나 최초의 <동화>를 겪었을 때 야탄교 본단에서 마주쳤던 기억이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야탄교 본단의 위치를 찾아내서 한동안 뉴스를 장식하셨던.”
“알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방실방실 웃으며 인사하는 스컹크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공적인 자리에서도 타인에게 마구 반말을 일삼고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는 그리드 아닌가?
한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사적인 자리에서 저토록 공손한 말투와 태도를 보이다니?
‘내가 좋아서 저럴 리는 없고...’
스컹크는 현재 상황을 매우 부정적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그리드는 일국을 다스리는 존재.
일반적인 플레이어와는 차원이 다른 정보력을 가졌다.
선택과 집중에 따라서 스컹크 탐험대의 근황을 파악하는 일도 가능한 수준일 터.
스컹크는 판단했다.
그리드가 이미 오래 전부터 스컹크 탐험대를 감시하고 있었을 것이며, 스컹크 탐험대가 자신을 대신해서 검의 무덤의 비밀을 파헤쳐주기를 기다렸으리라고.
‘그리드에게 있어서 검의 무덤은 특별한 장소다. 당연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겠지. 이거 참 철저히 이용당했군... 내게 존대를 사용하는 건 일말의 동정인가.’
어리석었다.
파그마와 관련 된 장소를 노린 이상 당연히 그리드를 경계했어야하건만 방심하고 말았다. 현실 파악 못하고 도리어 그리드에게 장사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자책밖에 들지 않는다.
“....음.”
스컹크는 표정 관리가 힘들어졌다. 동료들과 부하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고, 눈앞 사내의 음흉함이 두려웠다. 눈을 둘 곳이 없다.
하지만 스컹크는 한 세력의 장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았다.
사방팔방 굴러가는 눈동자를 진정시킨 그가 그리드에게 깊이 고개 숙였다.
“죄송했습니다.”
여러 가지 뜻이 함축 된 사죄였다.
당신의 퀘스트 포인트를 선점하려했던 점에 대해서.
당신은 뻔히 알고 있던 만남을 우연이라고 포장하려고 했던 나를 선처해달라는 마음으로.
고개 숙인 스컹크의 모습이 여러 사람을 당황시켰다.
스컹크의 동료들과 부하들은 물론이고 그리드 또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스컹크!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다짜고짜 왜 사과를 하는 건데!”
스컹크 탐험대가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컹크만큼 눈치가 빠른 도그우먼이 일행을 조용히 시켰다.
반면 그리드는 혼자다.
눈치가 빠르지 못한 그리드 혼자서는 상황을 판단하기 어려웠다.
“제가 당신에게 사과 받을 이유가 뭔지 모르겠군요.”
한참을 생각해보던 그리드가 그렇게 말하자 스컹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자는 나를 용서할 생각이 없다.’
스컹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리드를 다시금 정의해보았다.
서대륙에서 나름 큰 위세를 자랑했던 에트날 왕국의 고위 귀족과 정략결혼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철저히 이용, 세를 불려서 왕국을 통째로 집어삼킨 야심가.
자신을 추종하는 데미안을 교황으로 세우고 입맛대로 조종하는 계략가.
왕의 권력으로 다수의 NPC들을 포섭한 후 대악마 레이드에서 방패로 써먹은 냉혈한.
어차피 방패로 써먹을 NPC가 살해당했다는 이유로 임모탈 척살령을 내렸던 기회주의자.
유라와 지슈카라는 희대의 미녀들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어버린 것으로 모자라서 대륙의 황제가 먼저 ‘외교’를 시도하도록 만든. 실로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수완가.
잔인하고, 음흉하고, 포악하며, 영리하다.
이런 무시무시한 사내에게 자비를 바란다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다.
“그렇군요. 당신의 뜻은 그런 것입니까.”
절망적이다.
감히 파그마의 무덤을 파헤치려했던 행위를 용서받는다는 건 역시 불가능해보였다.
‘나는 응징을 당해도 괜찮다. 하지만 동료들은 달라.’
힐끔, 스컹크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료들과 부하들의 안색을 살폈다.
‘내 부주의함 때문에 저들까지 피해를 입게 된다면 내 자신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동료들을 1년이나 혹사시켜놓고 빈손으로 만드는 것으로 모자라서 목숨까지 잃게 만든다?
결코 벌어져선 안 될 일이다.
입술을 질끈 깨문 채 고민해보던 스컹크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드는 여전히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다. 어떤 처벌을 받을지 스스로 결정하라고 강요하는 태도처럼 보였다.
애초에 그리드의 입장에서는 스컹크 탐험대 따위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소꿉장난 집단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가 직접 스컹크 탐험대에게 어떤 처벌을 내릴지 고민하고 선택하는 건 비생산적인 일일 수도 있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은 스컹크가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동료들은 이곳의 비밀을 밝히는 방법을 파악했습니다. 저들 모두 그리드 님께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오니 그리드 님. 당신이 느끼고 있을 분노를 오직 저에게만 향해주십시오. 저들에게는 자비를 베풀고 곁에 두....”
“스컹크! 그 입 다물어!!”
“대장이 뭐라고 혼자서 모든 책임을 떠안으려고 하는 건데? 스컹크 탐험대는 하나라는 사실을 잊은 거야?”
스컹크가 그리드에게 애원하듯이 말하자 뒤늦게 상황을 눈치 챈 탐험대원들이 악을 썼다.
그들은 자신의 대장이 홀로 희생하는 모습을 원치 않았다.
“어차피 그리드한테 죽어야한다면 차라리 다 같이 죽는 게 낫지!”
“그래! 제길! 애초에 우리가 죽을죄를 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대장! 혼자서 모든 걸 끌어안으려고 하지 말라고!!”
“....아?”
스컹크에게 고래고래 소리치며, 흥분해서 저도 모르게 쌍소리까지 지껄이던 스컹크 탐험대원들이 일제히 그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스컹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드는 그 어떤 말도 없이 스컹크 탐험대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건 마치 용서를 뜻하는 태도처럼 보였다.
나는 오늘 너희들을 보지 못했다.
나는 지금 너희들을 보지 못한다.
하니 떠나라.
없던 일로 해주겠다.
나는 오늘을 잊겠다.
하늘에 떠있는 별빛만 바라보고 선 그리드는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스컹크의 감정이 복받쳤다.
‘내가 이자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오해하고 있었구나.’
사실 그리드 입장에서는 스컹크 탐험대가 얄미울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뻔히 파그마의 후예의 퀘스트 포인트인 검의 무덤을 선점하려한 것으로 모자라서, 무덤에서 얻게 될 보물을 그리드에게 비싼 값에 팔아넘기겠다며 희희낙락거린 집단이 바로 스컹크 탐험대였으니까.
그리드는 이를 뻔히 지켜보고 있었을 테고, 스컹크가 죄와 벌을 논한 이유다.
한데 정작 그리드는 자비를 베풀려고 하고 있었다.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면서까지, 자신의 입장에서는 괘씸해 마지않을 녀석들을 상대로...
‘하해와 같은 마음씨를 지녔구나.’
그리드가 간악한 인물이라고 분석해왔던 스컹크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어쩌면 이 나약할 정도로 인자한 그리드야말로 진정한 그리드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크리스, 페이커, 폰, 레가스 그리고 교황 데미안과 지슈카, 유라 등의 이름난 강자들이 어디 바보겠는가?
그리드가 정말로 간악한 인물이었다면, 그들이 수 년 동안 그리드를 군소리 없이 따라왔겠는가?
‘그들 모두 그리드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던 거야.’
깨달으며 전율한 스컹크가 그리드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오늘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힐끔.
스컹크가 일행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조용히 별빛을 올려보고 서있는 그리드의 눈치를 살피던 스컹크 탐험대원들이 슬금슬금 스컹크 곁으로 다가와 섰다.
스컹크가 그리드에게 친구 신청을 보냈다.
“검의 무덤과 관련해서... 아니,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실 때면 언제라도 귓속말을 보내주십시오. 반드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꾸벅.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인사한 스컹크가 동료들을 이끌고 자리를 떠났다.
그리드는 끝까지 그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스컹크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그리드는 묵묵히 선 채 별빛만을 올려볼 뿐이었다.
‘정녕 거대한 남자다.’
저토록 정 많은 인물이라면 스컹크 탐험대에게 원한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드가 봤을 때 스컹크 탐험대는 자신이 존경하는 스승의 무덤을 파헤치려한 도굴꾼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모든 걸 용서한 것이다.
“템빨왕. 템빨국이라...”
스컹크가 새로운 거처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한편 그리드는 스컹크 탐험대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바로 코앞에서 떠드는 스컹크의 목소리도 그는 듣지 못했다.
현재 그의 오감은 자신을 둘러싼 별빛에 집중 된 상태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당신을 반가워하려다가 관둡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당신을 그리워한 적 없다고 주장합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당신과 함께했던 시절을 이미 모두 잊었노라고 콧방귀 뀝니다. 그 시절이 하찮고 보잘 것 없었다고 표현합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당신이 여전히 약하다며 당신의 자질을 의심합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밥은 잘 먹고 다녔냐는 질문을 던지려다가 관둡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합니다.]
-네놈은 여전히 못생겼구나.
뇌리로 직접 전달되는 음성이 그리드는 익숙했다. 사무치게 반가웠다.
결코, 단 한시도 잊지 못했던 음성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의 태도가 왠지 친숙하고 그리워서 멍하니 있던 그리드가 결국 한 줄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천하의 대마법사님께서 더럽게 초라해지셨네. 사실은 개허접 마법사님 아니야?”
찌푸린 얼굴로 힘겹게 토해내는 그리드.
그는 눈치 채고 있었다.
브라함이 어째서 예정보다 일찍 자신을 떠났던 것인지.
자신을 떠난 브라함이 그간 얼마나 고생해왔을지.
작게 조각나있는 영혼 파편들을 보고 모든 걸 눈치 챘다.
그래서 감정이 복받쳤고 목소리가 자꾸 떨렸다.
“정말로... 정말로 보고 싶었어요. 브라함.”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르겠다.
펑펑 눈물 흘리면서 미소 짓는 그리드였다.
그를 둘러싼 브라함의 영혼 조각들은 조용히 반짝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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