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4권 - 13화
하이 랭커 중에서 스스로가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었다.
그들은 자신이 훌륭한 재능을 지녔음을 자부했고, 다른 랭커와의 격차는 세월이 흐르는 과정에서 발생한 각종 변수로 인해 생긴 일종의 재난이라고 믿었다.
한 끗 차.
하이 랭커간의 격차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각종 변수와 ‘운’이라는 요소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
진실 된 믿음으로부터 우러나온 하이 랭커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작년까지의 이야기다.
총 3회의 국가대항전을 치르는 동안 하이 랭커들의 믿음은 흔들렸다. 이제 그들은 자신이 해온 주장이 얼마나 오만한 것이었는지 깨닫고 있었다.
소문만 무성했던 천외천 크라우젤이 만천하에 실력을 공개했고, 단순히 운 좋은 놈인 줄 알았던 그리드는 해마다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주었으니까.
같은 하이 랭커라고 해도 다 같은 재능을 지닌 것이 아니며, 하이 랭커 사이에도 분명한 ‘격’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PvP를 완전히 포기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약속 된 승리’라는 이름을 짊어졌던 사내.
그리드에게 몇 번이나 도전했다가 패배하고 남들보다 빨리 그리드의 실력을 인정하게 되었던 그의 이름은 부바트다.
올해도 터키 대표로 국대전에 참가하게 된 그가 다시 한 번 PvP 종목을 노렸다.
“올해는 그리드가 안 나온다네? 그럼 포기할 이유가 없지. 올해 PvP 금메달이야말로 내꺼다.”
야크 길드원들이 혀를 내둘렀다.
“대장은 왜 그렇게 PvP에 집착하는 거요?”
“그러게 말이야. 나가봤자 또 16강쯤에서 떨어질 거면서.”
“16강이 뭐야? 크라우젤하고 예선에서 만나면 예선 탈락이지. 낄낄.”
그리드가 없으면 부바트가 PvP 1위다?
부바트의 강함을 알고 있는 야크 길드원들조차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PvP는 하이 랭커들의 자존심이 걸려있는 종목.
크라우젤, 수에론, 레가스 등의 강자가 수두룩하게 참가하는 종목이었다.
그리드가 없는 지금이 기회라면서 PvP에 도전하려는 부바트가 솔직히 안타까웠다.
“작년에는 장췐인가 뭐시긴가 한테도 졌잖수.... PvP가 단체전이었으면 몰라도 1대1 개인전이니까 대장한테는 너무 불리하지....”
부바트의 직업 <클러셔>는 높은 방어력과 다양한 CC기를 자랑했다. 특히 레벨이 360을 넘고 새롭게 습득한 2개의 스킬은 ‘상태이상 저항을 무시’하는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CC를 걸면 뭐하는가? 적을 제압할 공격력이 없는데.
국대전 PvP종목은 부바트에게 불리해도 너무 불리한 것이었다.
하지만 부바트는 자신감이 넘쳤다.
부바트의 광팬임을 자처하는 터키의 한 부호가 준 선물 때문이었다.
<아르티나의 근성이 깃든 장갑>
레전드리 아이템이다.
착용자의 방어력과 비례해서 공격력을 올려주는, 부바트와 상성이 무척 좋은 아이템이었다.
이 대단한 장갑을 부바트에게 선물해준 부호는 올해야말로 터키의 위상을 높여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흐흐. 기대하라고. 올해는 다를 테니까.”
크라우젤은 더 이상 지존이 아니다.
작년, 그리드가 그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부바트는 크라우젤을 공략할 자신이 있었다. 가능성이 미미하다고 해도 상대가 그리드만 아니면 어떻게든 승산을 노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비단 부바트뿐만이 아니다.
재작년과 작년.
해가 거듭할수록 성장하는 그리드에게 전율하고 ‘내 두 번 다시는 PvP에 참가 안 하겠노라.’ 다짐했던 각국의 랭커들이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드가 불참을 선언한 올해 국대전만큼은 기필코 PvP에 참가, 메달을 따겠노라고 계획을 세우는 이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역시나.
세계 각국에서 도발적인 인터뷰 기사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일국을 대표하는 랭커들은 죄다 PvP 출전 의사를 밝혔고 크라우젤이 두렵지 않다고 외쳤다.
세간의 이목은 자연히 크라우젤에게 집중됐다.
“크라우젤 선수, 최근 각국의 랭커들이 당신을 상대로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그리드 수준의 실력자라면 자신만만해도 좋다고 봅니다.”
찰칵! 찰칵찰칵!!
기자회견장에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크라우젤의 대답을 받아 적는 기자들의 표정이 고양됐다.
그리드 수준의 실력자가 아니면 자신감을 갖지 말라. 그리드가 아닌 이상 내가 지는 일은 없다.
크라우젤의 발언은 이런 뜻을 내포하고 있었으니까.
자극적인 기사를 만들기에 충분한, 적절한 자신감과 도발을 엿볼 수 있는 답변이었다.
한 기자가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전 세계인들이 흥미를 품을만한 질문이었다.
“그리드의 국대전 불참을 놓고 그리드가 도망친 거라고 표현하는 여론이 있는데요. 크라우젤 선수는 그리드의 국대전 불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껏 빼앗은 지존 타이틀을 다시 빼앗길까봐 도망친 것이다.
그리드에 대한 여론 중 하나였다.
크라우젤의 생각은 어떨까?
기대하는 기자들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던 크라우젤이 짧게 한 마디 던졌다.
“도망이 아니라 자비겠죠.”
“자비요?”
크라우젤의 말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기자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기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면 눈치 빠른 기자들은 잽싸게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내 분주해지는 회견장의 광경을 묵묵히 둘러보면서, 크라우젤은 마음속으로 그리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드.’
크라우젤은 그리드가 에테르 다이아몬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현 시점에서 에테르 다이아몬드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국대전 참가밖에 없다.
그리드의 국대전 불참 소식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크라우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네가 마왕인가?’
***
‘생각보다 빡센가본데.’
올해 국대전에 새롭게 추가 된 종목은 7개였고 그중 하나가 <마왕 토벌전>이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될 마왕 토벌전의 규칙을 철저히 숙지한 그리드는 기분이 영 언짢았다.
마왕성은 동서남북 사방위에 성문이 있었고 마왕의 사천왕이 각각 한 명씩 성문을 지킨다.
플레이어는 120명씩 조를 나누어서 사천왕을 공략하고 성문을 돌파한다.
이때 <마왕>은 성 안에 대기하며, 대기 시간이 10분을 넘어설 때마다 최대 생명력 +20만의 보너스를 획득한다. 대기 시간은 4개의 성문이 전부 돌파당하는 순간 끝난다.
여기서 그리드가 가장 거슬리는 부분은 10분당 20만의 생명력 보너스였다.
성문에서 사천왕들이 싸우는 동안 그저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10분마다 20만의 생명력이 오른다고?
‘너무 퍼주는 거 아니야?’
그리드의 방어력과 마법저항력은 플레이어의 범주를 초월한다. 생명력, 방어력 비례 계열 스킬을 허용하지 않는 이상에야 플레이어에게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한데 10분마다 20만의 피통이 늘어난다니?
‘사천왕들이 지키고 있을 성문이 쉽게 돌파당할 리도 없는데 말이야.’
마왕 토벌전에서 그리드의 만피는 100만을 초과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리드의 스펙을 뻔히 알고 있는 S.A그룹이 그런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점이 그리드는 불안했다.
‘국대전 참가자들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암시 같은데....’
애초에 힘든 싸움이 될 거라고 각오하고는 있었지만, 어쩌면 각오보다 더 힘든 싸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동생 세희가 국대전에 참가하지 않은 점이 위안이 될 정도다.
무섭다고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그리드.
그가 알 리 없다.
본래 S.A그룹은 마왕의 생명력이 10분당 50만씩 오르게 설정해놨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리드가 최근 너무 강해지는 바람에 상승 생명력을 50만에서 20만으로 하향 조정한 것이다.
이유?
이유는 S.A그룹만 안다.
“그건 그렇고 이 길 제대로 된 거 맞나?”
잠시 걸음을 멈춘 그리드가 다시 지도를 펼쳤다.
검의 무덤의 지도였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는데 어째 영...”
그리드는 바보지만. 아니, 바보‘였지만’ 길치는 아니다. 그래서 북쪽 끝의 동굴을 찾아 파그마의 기서도 얻을 수 있었다.
지도를 보는 그리드의 능력에는 문제가 없었고, 지금 그리드는 지도가 알려주는 길을 정확하게 이동하는 중이었다.
한데 길이 이상했다.
정확히 표현하면 길이 도중에 사라졌다고 할 수 있었다.
“이게 뭐여.”
걸음을 멈추고 멀뚱멀뚱 선 그리드의 눈앞에는 깎아 지르는 듯한 절벽이 서있었다.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은 절벽이었다. 지도에 표기된 이곳은 평범한 산길에 불과했다.
‘지도가 잘못 된 건가?’
지도가 가짜다? 여태까지 헛고생한 거라고?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었다.
쿠르르르릉....
그리드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절벽의 중심부가 갑자기 갈라지기 시작했다.
쿠릉. 쿠쿠궁.
갈라진 틈이 계속 크게 벌어졌다. 마치 처음부터 2개였다는 듯이, 이내 완전히 분리 된 절벽은 2개가 되어서 마치 산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벌어진 절벽 틈새로 생긴 길목을 확인한 그리드가 지체 않고 몸을 날렸다.
절벽이 2개로 갈라진 시점부터 이곳은 지도에 표기된 것과 똑같은 지형을 갖게 되었기에.
***
“아...!”
“제길!”
곳곳에서 탄식과 욕설이 터져 나왔다.
스컹크가 594번째 검을 좌측으로 3바퀴, 우측으로 4바퀴 회전시킨 순간.
무덤처럼 솟구쳐있던 언덕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으며 다시 평야가 되었기 때문이다.
594번째 검이 문제였다.
좌측으로, 우측으로 총 27회씩 회전하는 이 검을 도대체 어떤 순서로, 또 어떤 방향으로 회전시켜야 ‘열쇠’로 작용하는 건지 도통 알아내기가 힘들었다.
“벌써 28번째 실패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면 또 몇 시간이 걸리는데.”
“다들 사기가 떨어졌어. 오늘은 이만 해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얼굴을 구기고 있는 스컹크에게 동료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스컹크의 반응은 날카로웠다.
“이제 다섯 개 검의 위치만 파악하면 돼. 무덤 완성까지 얼마 안 남았다고.”
“마음이야 알지만 급할 필요가 없잖아? 벌써 몇 달 동안 해왔던 일이야. 이제 얼마 안 남은 일이니만큼 더 침착하고 신중해야지. 조급하게 굴었다가는 도리어 일을 망칠 수도 있다고.”
도그우먼의 설득이 스컹크를 진정시켰다.
심호흡한 스컹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와서 서두를 필요 없지.”
스컹크 탐험대가 검의 무덤을 조사해온 지난 5개월 동안 이곳을 방문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스컹크 탐험대조차도 검의 무덤을 찾아내기까지 반년이 걸렸다는 점을 고려해 봤을 때, 이제 와서 갑자기 누가 이곳에 나타나 밥그릇을 뺏어갈 가능성은 없었다. 초조해봤자 손해였다.
마음을 다스린 스컹크가 동료들과 부하들에게 말했다.
“다들 고생 많았다. 오늘은 여기까지하자. 푹 쉬고 내일 보자고.”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했어.”
휴, 드디어 끝이다.
스컹크의 외침에 안도한 일행이 시스템 창을 열었다. 한시라도 빨리 로그아웃해서 지친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고 싶은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쉬러 가지 못했다.
반짝반짝!
“....!?”
검의 무덤 상공.
낮이나 밤이나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정체불명의 푸른 빛 조각들이 갑자기 반짝이기 시작한 까닭이다.
“별들이 왜....?”
별이 아니라는 사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저 푸른 빛 조각들은 별이라기에는 너무 가까운 곳에 떠있었고 또한 낮에도 선명한 푸른빛을 발산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름답게 반짝이는 모습이 마치 별과 같았고, 손으로 쥐려 해봐도 쥘 수 없었으니 별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다들 자리를 지켜!”
여태까지 없던 현상에 동요하는 동료들에게 스컹크가 소리쳤다.
탐험가의 직감과 그간 쌓아올린 경험이 그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어떤 새로운 외부 요인으로 인해서 검의 무덤이 변화를 맞이하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갑자기? 뭐지?’
좋지 않은 느낌이 든다.
스컹크가 마른 침을 삼키는 그때였다.
“어휴. 드디어 도착했네.”
불청객이 나타났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스컹크와 일행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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