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4권 - 12화
[검의 무덤의 지도를 완성하였습니다.]
“좋았어!!”
그리드는 지도 완성까지 최소 보름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2개의 비급을 습득한 무신의 추종자가 등장해준 덕분에 일정이 상당히 빨라졌다.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위기가 도리어 행운으로 작용한 것이다.
“행운 스탯이 높아진 덕분이겠지. 흐흐. 진짜 조만간 운빨왕으로 개명해야 되겠어.”
엘릭서 덕분에 급상승한 행운 스탯을 떠올린 그리드가 흐뭇해 웃었다. 옆에서 서운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템빨골들은 무시했다.
‘가람의 함정에 빠졌을 때도 그렇고, 최근 들어서 계속 운이 좋아. 이대로 계속 운이 따라준다면 국대전 전까지 검의 무덤에 도착하고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도 있겠는데?’
들뜬 그리드는 잠시 망각하고 말았다.
이곳은 갈구노스의 사원.
안전지대가 아니다.
““공들여 만든 병사를 해치다니! 괘씸하도다!””
쿠구구구궁!!
지하로부터 들려오는 갈구노스의 외침이 사원 전체를 뒤흔들었다.
무신의 추종자와 사투를 벌인 끝에 모든 자원을 소모한 그리드 일행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또 무신의 추종자들이 나타나기라도 했다가는 도망도 못 친다는 판단이었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킨 그리드 일행이 물약을 복용하고 아이템과 스킬 현황을 파악하는 등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그들은 굳이 경계하고 발악할 필요가 없었다.
이번에 갈구노스는....
[지엄한 대악마의 하수인, 리치 갈구노스와 적대 관계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심장에 ‘갈구노스의 각인’이 새겨집니다.]
[최초 각인 효과가 발생합니다. 마법의 정수가 담긴 각인입니다. 각인 효과 저항에 실패합니다.]
[최초 각인 효과로 사망합니다. 각인이 사라집니다.]
[최초 각인 효과에 내성이 생겼습니다.]
[경험치 36.7퍼센트를 잃었습니다.]
[+8<이상적인 단검>을 잃었습니다.]
병사들을 파견하지 않고 본신의 힘을 사용했고, 그리드 일행은 모조리 사망했으니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죽음이었던 것이다.
사원 1층에 있는 중간 보스를 레이드하면 ‘무조건 죽는다.’는 새롭고 소중한 정보를 획득한 그리드 일행이었다.
“다들 괜찮아?”
라인하르트 템빨성 정원.
부활 포인트에서 눈을 뜬 그리드가 동료들의 안위부터 챙겼다.
그리드에게도 죽음은 치명적이었지만, 절망을 느낄 정도로 큰 타격은 아니었다.
그리드의 사냥 속도는 남들보다 몇 배나 빨랐기 때문에 경험치를 복구할 때 필요한 수고가 덜했고, 잃은 아이템이야 전설 등급 이상이 아닌 이상 쉽게 복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단검.
유페미나를 처음 만났던 그날. Satisfy 시간으로 벌써 10년도 더 전에 만들고 지금까지 쭉 사용해온 아이템을 잃었다고 해서 그리드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8이라는 강화 수치도 아깝지 않았다. 동대륙에서 다양한 보상을 얻고 돌아온 그에게는 대량의 강화 주문서가 남아있었다. 신화 등급도 아닌 아이템을 8강까지 복구하는 일은 쉬웠다.
하지만 크리스, 폰, 레가스는 그리드와 입장이 달랐다.
그들에게 죽음은 절망적인 수준으로 치명적이었다.
잃은 경험치와 아이템을 복구하는 일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무척 어려웠다.
하여 걱정하는 그리드에게.
“괜찮다.”
“무슨 호들갑이야? 신경 쓸 거 없어.”
“사냥하다보면 죽을 수도 있죠.”
세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물론 그들의 속마음은 달랐다.
‘국대전 전까지 레벨을 하나 올리는 게 목표였는데 어렵게 됐군.’
‘렌시아를 떨어뜨렸어. 빌어먹을. 새로운 보조 무기를 다시 구해야 되네.’
‘죽다니.... 자존심 상한다....’
하지만 내색할 수 없는 노릇이다.
세 사람은 그리드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아이템과 경험치를 잃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투덜거리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자신들의 부주의로 벌어진 일 아닌가?
마음을 추스른 폰이 그리드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성과는 있었잖아? 지도도 완성했고, 던전 특성도 확인 했으니까 우리는 헛되이 죽은 게 아니야. 그리드 너도 분하겠지만 크게 마음 쓰지 말자. 괜히 동요해봤자 좋을 것도 없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라우엘에게 가서 보고해야겠군. 혹시라도 갈구노스의 사원을 공략할 생각이라면 큰 피해를 감수해야할 거라고 말해줘야지.”
중간 보스를 처치하면 ‘각인’을 당한다. 그리고 최초 각인 효과는 무조건 사망이다.
이미 최초 각인 효과를 당하고 내성이 생긴 그리드 일행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갈구노스의 사원에 도전할 때 죽음을 각오해야한다는 뜻이다.
“라우엘이 혀를 내두르겠군. 녀석의 성격상 갈구노스의 사원을 공략하자는 말은 결코 안 할 거야.”
“내 생각도 같다. 길드원들에게 중간 보스를 레이드 하지 말라고 공지하고 1층에서 잡몹만 사냥하라고 지시하겠지.”
플레이어들이 던전을 찾는 이유는 레벨 업과 득템을 위해서다. 레벨 업이야 던전에서 리젠되는 몬스터들만 잡아도 충분했다. 더욱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보스를 공략해야했지만, 난이도가 너무 높다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도전할 필요가 없다. 불확실한 무엇인가를 얻으려다가 역으로 손해만 입을 것이다.
크리스, 폰, 레가스의 머릿속에 ‘갈구노스의 사원은 공략 불가 던전.’이라는 판단이 섰을 때였다.
“국대전 끝나면 우리끼리 던전을 공략하자.”
잠자코 있는가 싶던 그리드가 황당한 소리를 했다.
당황하는 동료들에게 그리드가 웃어보였다.
“최소한 우리는 각인에 죽을 일이 없잖아?”
“그야 그렇지. 하지만 각인은 부차적인 문제야. 갈구노스의 사원은 난이도 자체가 높다고. 그리드 네가 4명이면 모를까, 너 한 명과 우리 셋만으로 공략에 도전한다는 건 무리가 있다.”
“너희들이 국대전에서 금메달 2~3개씩만 따오면 생각보다 쉬워지지 않을까? 금메달 보상 얻고 강해지면 되잖아?”
“이야. 그렇네. 그런 간단한 방법이 있었네.”
금메달을 쉽게 말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그리드가 유일할 것이다.
일행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
영상은 구름 위 하늘로부터 시작되었다.
인간은 함부로 도달할 수 없는 창공.
그곳을 2초 동안 묵묵히 비추고 있던 카메라 앵글이 급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구름 속으로, 구름 아래로, 급기야 메마른 대지 위로.
쿠웅-!
폭음과 함께 앵글이 흔들렸다.
이어지는 정적.
다시 수초 후에야 떨림을 멈춘 앵글이 돌아간다.
부러진 검이 보였다.
-이거 크라우젤 시점인 듯.
-헐 맞네. 추락하는 하늘을 표현한 거였어.
-컹스... 우리 전 천외천님께서 오프닝 영상부터 팩트폭행 당하시는 거임?;;;
-S.A그룹 잔인한 거 보소. 사람 두 번 죽이네.
-크라우젤 오빠 불쌍해서 어떡해.ㅠㅠ 예쁜 얼굴 구겨지면 안 되는데.ㅠㅠㅠ
제4회 국가대항전 사전 공개 오프닝 영상은 짧고 강렬했다.
작년까지 지존의 자리를 지켰던 크라우젤의 추락을 묘사한 영상.
누군가는 환호했고, 누군가는 불쾌함을 금치 못했으며, 또 누군가는 동정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영상 속 앵글(크라우젤의 시점)이 부러진 검을 다시 손에 쥐고, 이어서 왕좌를 올려보았지만.
녹슨 왕좌는 주인을 잃은 채 방치되어 있었으니까.
빈 왕좌.
그리드의 부재를 상징하는 소품이었다.
아쉬울 수밖에 없다.
-하.... 영상 보니까 이번 국대전에는 그리드가 없다는 게 실감난다.
-허무하다, 허무해. 지존 없는 국대전을 무슨 재미로 보냐.
-솔직히 올해 국대전은 의미가 없어. 호랑이 없는 숲에서 여우들끼리 싸우는 꼴인데 여우 무리에서 왕 돼봤자 뭐함?
-호랑이? 염병하네. 그리드 도망친 거 모르냐? 올해는 크라우젤한테 질까봐 출전 안 한 건데 그게 무슨 호랑이야? 그냥 퇴물이지.
-네 다음 미국인.
-틀린 말 아닌데? 그리드가 금메달 보상까지 포기하면서 출전 안 하는 이유가 그럼 뭐겠어? 그리드는 지존 타이틀을 다시 빼앗길까봐 도망친 게 확실해.
-네 다음 미국인.
-그리드 없으니까 올해 한국은 메달 몇 개 못 따겠네. 순위 끝자락에나 보이겠군.ㅎㅎ
-네 다음 일본인.
-중국인인데?
-타이완 넘버원!
-외국인 겁나 많네. 누가 가서 극검 좀 불러와라.
세계 각국의 커뮤니티가 국가대항전을 주제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특히 한국 커뮤니티가 불타올랐다.
그리드 없는 한국을 비웃고 놀려주려는 해외 네티즌들이 매일매일 해일처럼 몰려들었다.
그리드 덕분에 매번 꿀을 빨아왔던 한국인들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외국인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그리드의 부재와 상관없이, 국가대항전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여전히 뜨거운 것이었다.
1년에 단 한 번 뿐인 최대의 이벤트다웠다.
그리고 다시 며칠 뒤 공개 된 풀버전 오프닝 영상은 전 세계 국민들을 더욱 흥분시켰다.
빈 왕좌를 허무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크라우젤.
그의 곁으로 천천히 집결하는 미국 국가대표 선수들.
그들 중 한 사람이 저벅저벅 빈 왕좌 앞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광오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왕좌에 멋대로 걸터앉았다.
그의 정체는....
-동네북!
-와 대박ㅋㅋ 이 타이밍에 지발이 복귀하네.
스스로 랭킹계에서 물러나기 전.
크라우젤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통합랭킹 2위 자리를 끝까지 지켰었던 지발이었다.
2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지발의 모습이 사람들을. 특히 미국인들을 열광시켰다.
심지어 미국 대표팀에는 지발 말고도 주목해야할 사람이 또 있었다.
-저기 라우엘 옆에 서있는 사람 하스터 닮지 않음?
-FPS 황제? 에이, 설마. 황제가 Satisfy에 왜 나와.
-하스터 맞는 거 같은데??
-진짜 맞다. 하스터야.
-미친? 하스터가 Satisfy로 복귀하는 거야?
-다시 황제되는 건가.ㄷㄷ
-레전드 복귀... 올해 국대전은 진짜 레전드각이다...
-크라우젤, 지발, 하스터, 라우엘, 스컬, 제퍼.... 올해 미국이 1위 못하면 그게 비정상이네.
제4회 국대전에 출전하는 국가는 125개국으로 정해졌다.
총 5분짜리 오프닝 영상은 그 모든 국가를 소개하지 못했지만, Satisfy 강대국으로 분류되는 13개 국가는 비중 있게 다뤘다.
비록 약소국에 속한 참가자라고 해도 네임드로 분류되는 하이 랭커들은 영상에서 짧은 지분을 차지했다. 대표적인 예가 지슈카였다.
출전자들의 화려한 면면이 국대전을 기대하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광시켰다.
그중에서도 가장 화제가 된 장면은....
까닥.
단 한 번의 손짓.
어둠 속, 마치 성처럼 거대한 오르간에 삐딱하게 기대어 선 인영이 카메라를 향해서 손짓한다.
그건 명백한 도발이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덤비라고.
몇 명이라도 좋으니 내게 맞서 보라고.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저건 누구임? 왜 얼굴을 안 보여줘?
-국대전에 처음 참가하는 하이 랭컨가?
-자세 조옷나 거만하네. 여태까지 국대전에 참가 안 한 랭커 중에서 네임드가 누구더라??
-러시아의 나이트? 북한 장미화? 이스라엘의 야곱?
-나이트는 몰라도 장미화랑 야곱은 검증도 안 됐는데 어디다가 비벼.
-의외로 야곱 아니냐? 아이디부터 거만한 것이 영상이랑 매칭 잘되네.ㅋㅋ
-오르간이 괜히 나온 게 아닐 거고... 유럽쪽 사람일 거 같은데. GZ쪽 애들 아님?
-GZ를 어디다가 비벼요.;; 내 생각에는 페이커일듯.
-페이커...? 페이커! 맞네, 맞아!
-와. 어쩐지 포스가 좔좔 흐르더라니.
-진짜 페이커 같다...
-하긴. 지명도로 따지면 페이커 미만 잡이지. 페이커쯤 되니까 영상의 대미를 장식한 거다.
사람들은 영상 속 인영의 주인공이 페이커라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살신(殺神) 페이커.
그는 공식석상에 오른 적 없는 하이 랭커 중에서 가장 많은 업적을 달성한 인물이었고, 세계 최강의 길드라는 템빨단 내에서도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강자였다. 한 손은커녕 그리드가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
“오오올~ 꽤 멋지게 나왔네? 얼굴이 안 나와서 그런가?”
신영우와 신세희.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자정에 공개 된 오프닝 영상을 시청한 두 남매는 상반 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세희는 영상의 대미를 장식한 오빠의 모습에 흥분한 반면 영우는 영 꺼림칙한 표정이었다.
‘대사가 삭제됐네.’
시간 없으니까 한꺼번에 덤벼.
오프닝 영상 촬영 당시, 카메라를 향해서 손을 까닥인 영우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편집됐다.
분하고 아쉬웠다.
‘개간지였는데 그걸 지워?’
남들이 들었을 때는 너무 식상하고 유치한 대사였을까?
한숨 쉬던 영우가 힐끔, 동생 세희를 쳐다보았다. 낡고 펑퍼짐한 추리닝 차림에 다시 한 번 한숨이 나왔다.
“저번에는 교복이더니 이번에는 학교 체육복이냐? 고등학교 졸업한지 반년도 더 지난 애가 왜 걸핏하면 교복에다가 체육복 차림인데?”
“말했잖아? 고등학생 때 입던 옷들을 입어야 공부할 때 집중력이 올라서 그렇다고.”
“S대생이 왜 굳이 집에서까지 공부를.... 학교 들어갔으면 장땡 아닌가?”
“졸업 하려면 공부해야죠.”
“아직 1학년이잖아. 쉬엄쉬엄해. 예림이랑 같이 클럽도 다니고. 남자친구도 좀 만나고. 대신 통금 시간은 지키고.”
“공부하고 게임하기도 바빠.”
세희는 오빠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아왔고 오빠 덕분에 너무 많은 것을 누려왔다. 그래서 자신 또한 성공하고 싶었다. 최소한 경제적으로는 오빠로부터 독립하고 오빠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다. 이제는 자신이 오빠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더 게임에 열중하는 것이다. 그녀는 성녀의 포텐셜을 알고 있었다.
세희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영우가 씁쓸하게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잔다.”
또 새로운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수면이 필요했다.
‘검의 무덤에는 어떤 히든 피스가 기다리고 있을까?’
파그마가 말년에 만든 작품들과 브라함의 시신이 묻혀있는 장소.
영우는 여러모로 기대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