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4권 - 8화
검의 무덤.
확 트인 평야 중심부에 4,179개의 검이 꽂혀있다. 이중 3,580개는 허수요, 나머지 599개는 요물이다.
599개의 검은 각자 좌측으로, 혹은 우측으로 회전했고, 그 회전률에 따라서 평야의 방위와 경사가 바뀌었다. 수만 개의 패턴을 가진 잠금장치라고 생각하면 쉽다. 퍼즐을 맞춰나갈수록 평야는 언덕의 형태로 변해갔고, 그 언덕은 소위 말하는 ‘무덤’과 딱 알맞은 형태였다.
“이런 젠장. 여기서부터 다시 패턴이 바뀌네.”
423번째 검을 좌측으로 한 바퀴 돌렸더니 1번~422번 검의 위치가 초기화됐다. 기껏 솟구쳤던 언덕이 다시 가라앉으며 평야가 된 것이다.
허탈에 빠진 동료들을 달래고자 손뼉 친 스컹크가 소리쳤다.
“쉬었다가 다시 가자.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초조해하지 말자고.”
“오케이~~ 이참에 다들 로그아웃하고 식사하고 옵시다.”
스컹크 탐험대가 검의 무덤을 조사하기 시작한지 벌써 1년 4개월이 지났다. 1년 동안은 무덤의 위치를 찾아냈고, 이후 4개월 동안은 무덤을 여는 패턴을 밝혀내고자 분투 중이다. 도중에 몇 번이나 실패하고 실수하며 했던 일을 또 반복한 횟수가 무려 수천 번이었지만 스컹크 탐험대는 여전히 의욕이 충만했다.
숨겨진 역사와 비밀을 파헤치는 일이야말로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의 재미였으니까.
그래, 이들에게 레벨이나 랭킹 같은 개념은 관심 없는 별세계 이야기일 뿐이다.
“조금 이상하지 않아?”
홀로 막사 안에 앉아 검의 패턴들을 살펴보고 있는 스컹크에게 누군가가 의문을 표했다. 그녀는 스컹크 탐험대의 2인자이자 탐험가 랭킹 9위에 빛나는 도그우먼이었다.
“이곳은 파그마와 관련 된 장소야. 본래라면 파그마의 후예가 접근했어야하는 곳이지.”
파그마의 후예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바로 그리드다.
“과연 그리드가 이 복잡한 패턴들을 풀 수 있었을까? 우리 같은 전문가가 80명이나 모인 채 궁리해도 몇 달이 걸린 일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검의 무덤은 개인에게 내려지는 시련치고 난이도가 너무 높아.”
탐사와 관련 된 스킬이 없을 그리드가 혼자서 수만 개의 패턴을 파악하고 무덤의 비밀을 밝혀낸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그리드는 왕이고, 동원할 수 있는 인력도 많겠지만.... 만약 파그마의 후예가 그리드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왕이 아니었다면? 파그마의 후예는 결국 혼자서 이 난관을 해쳐나가야 한다는 건데 그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돼?”
“하고 싶은 말이 뭐지?”
흥미를 느낀 스컹크가 도그우먼에게 시선을 돌렸다. 도그우먼은 불안한 기색이었다.
“무덤을 여는 더 쉬운 방법이 있을 거야. 지금 우리는 최악의 방법을 이용 중인 거고.”
“흠.”
그럴 듯한 주장이다. 사실 스컹크도 도그우먼과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너무 늦게 깨달았다.
스컹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설령 너의 생각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미 늦었어. 우리는 벌써 패턴의 규칙 일부를 파악했고, 422번째 검까지 열쇠로 활용하는 방법을 밝혀냈지. 이제 와서 새로운 방법을 찾겠다고 시간과 인력을 낭비할 수는 없어.”
머지않았다.
스컹크 탐험대는 앞으로 2달 내에 무덤을 개방할 거라고 예상 중이었다. 기껏 방법을 찾아내고 연구해서 여기까지 와놓고 이제와 새로운 방법을 찾는다는 건 비효율의 극치였다. 대원들의 사기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다.
도그우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이제 와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자고 말하려던 것도 아니었고. 다만, 앞으로 새로운 장소를 탐사할 때는 보다 다각적인 측면에서 탐사를 진행하는 게 좋을 거 같다고 말하려던 것뿐이야.”
“그러지. 이번 탐사는 공부였다고 생각하자.”
“응. 그건 그렇고 무덤 안에 뭐가 숨겨져 있을지 정말 기대되네. 파그마의 후예와 관련 된 아이템이나 퀘스트가 있으면 그리드에게 비싼 값에 팔아넘길 수 있을 텐데....”
“협상은 느긋하게 해야지. 결국 아쉬운 입장은 그리드가 될 테니까.”
몇 달 후, 혹은 몇 년 후.
그리드 또한 이곳을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텅텅 빈 무덤을 보고 초조함에 휩싸일 것이다.
그 초조함이 정점에 도달했을 때야말로 거래하기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다.
스컹크는 검의 무덤에 잠자고 있을 보물이 이미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다그닥다그닥!
길게 뻗은 미궁을 달리는 백마가 있었다.
말 위의 사내는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썩은 로브를 뒤집어 쓴 좀비가 말을 바짝 쫓아오는 중이다.
“이런 미친. 저 자식이 여기서 왜 나와?”
말 위의 사내 폰이 치를 떨었다.
다수의 탱커와 마법사가 파티를 맺지 않는 이상 토벌 불가라는 판정을 내린 최악의 몬스터, <무덤에서 빠져나온 무신의 추종자>는 천하의 폰이라도 1대1로 상대하기 벅찼다.
폰은 혹시라도 무신의 추종자와 만나는 일이 없게끔 계단과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사냥해왔다. 한데 사원에 무슨 이변이 발생한 것인지, 무신의 추종자의 활동 반경이 넓어졌고 폰은 쫓기는 쥐새끼 신세가 되고 말았다.
‘레가스 이 자식, 어디서 또 삽질하고 다니는 거 아니야?’
현재 갈구노스의 사원에서 사냥 중인 동료들의 면면을 떠올려본 폰은 레가스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어려운 싸움을 추구하는 레가스의 성격을 고려해 봤을 때, 레가스가 무신의 추종자들을 도발하고 다녔을 확률이 무척 높았다.
‘하여튼 그 원수 같은 놈!’
직선의 통로가 끝나갈 무렵.
폰은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이 방향을 꺾는 그 찰나의 순간,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해왔던 무신의 추종자에게 결국 뒤를 잡힐 거라는 판단이었다.
‘차징 스킬로 밀어낸다.’
무신의 추종자와 맞대결은 어리석은 짓이다. 모든 근접 공격을 100퍼센트 공격력으로 반격하는 괴물과 싸워봤자 피통 적은 이쪽만 손해다.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파는 꼴이랄까?
끼히힝-!!
마침 백마가 통로의 끝에 도달했다. 벽을 마주한 백마가 좌측으로 뻗은 통로를 향해서 고개를 틀었고,
키야아-!!
무신의 추종자는 백마가 느려진 틈을 놓치지 않았다. 거리가 발생하자마자 칼을 꽂아왔다.
하지만 이 상황을 예측하고 있던 폰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허리를 비틀어 검을 피하더니 창대를 휘둘렀다.
퍼억-!
창대에 가슴을 세게 얻어맞은 무신의 추종자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좌측으로 고개를 꺾은 백마, 그 위에서 창을 휘두른 폰, 허공에 떠오른 무신의 추종자.
세 가지 광경이 동시에 펼쳐지며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을 준다.
우당탕탕-!
무신의 추종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틈에 좌측 통로로 진입한 백마는 다시 전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휴.”
잠시나마 따돌렸다. 이때 최대한 거리를 벌려놓으면 무사히 도망칠 수 있다.
생각하며 십년감수하는 폰이었지만.
“으아아아아아악!!”
어두운 통로 저편에서부터 비명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새로운 무신의 추종자가 나타났다.
폰이 눈살을 찌푸렸다.
“왓더...”
새로운 무신의 추종자는 레가스를 뒤쫓고 있었다. 레가스는 폰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오고 있었고.
“야, 야! 씹! 내 쪽으로 오지 마!!”
기겁한 폰이 욕설까지 섞어가며 소리쳤지만, 레가스는 방향을 꺾지 않았다. 지금 와서 발을 멈췄다가는 그대로 목이 날아가는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 살려....! 우앗!!”
사실 레가스는 동아줄을 발견한 심정이었다. 폰과 힘을 합치면 무신의 추종자와 싸워볼만하다는 희망에 찼었다.
하지만 폰의 뒤에도 무신의 추종자가 있었다. 폰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쫓기는 신세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레가스의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이었다.
“정신 바짝 안 차려?”
폰과 스쳐가는 순간, 귓가로 들려오는 폰의 목소리가 레가스의 정신을 일깨웠다.
퍼억-!
폰의 창이 레가스를 쫓아온 무신의 추종자의 얼굴을 찔렀고,
“쿨럭....!”
반격 당한 폰이 울컥 피를 토했다.
한편 레가스는 폰을 뒤쫓고 있는 무신의 추종자의 가슴을 발차기로 힘껏 때리고 있었다.
차징의 기능이 실린 발차기였기 때문에 무신의 추종자는 멀찍이 날아가 버렸다. 레가스는 반격을 받지 않았다.
풀쩍 뛰어서 백마 위에 올라탄 레가스가 폰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폰도 참! 저처럼 차징 스킬을 썼어야죠! 반격 당하는 거 몰라요?”
“한 대 맞기 싫으면 닥쳐.”
내 차징 스킬은 재사용 대기 시간에 걸려있었다. 라고, 일일이 설명하기도 귀찮은 폰이었다.
끓어오르는 살의를 간신히 억누른 그는 이대로 달려서 미궁을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한데.
키야아아아아아!!
“....!?”
눈앞에 또 새로운 무신의 추종자가 나타나 길을 막았다. 깜짝 놀란 백마가 자리에 멈추며 앞발을 세웠고, 기마 스킬이 낮은 레가스는 낙마하고 말았다.
“아고고....”
[왼 팔이 골절되었습니다.]
골절이 심하다. 20초 정도 유지되려나?
왼 팔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레가스가 주변을 살폈다.
앞뒤로 총 3마리의 무신의 추종자에게 포위당한 형국이었다.
“이게 웬 날벼락이지...”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레가스에게 폰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네 작품 아니었어? 너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럴 리가요. 저도 얘들은 차마 못 건드리겠어서 계단 쪽은 얼씬도 안 했는데....”
“그럼 누구야? 이거 설마 크리스 작품이야?”
어떤 빌어먹을 놈이 무신의 추종자들을 화나게 만들었는가!
폰은 진실을 알고 싶었다. 이유도 모른 채 죽는 건 너무 억울했다. 욕할 놈이라도 있어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저벅. 저벅. 저벅.
무신의 추종자들은 더 이상 달리지 않았다. 길이 하나밖에 없는 통로 중앙에 먹잇감들을 포위해놓은 형태가 되었으니 급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 포식할 일만 남았다.
“무구의 산은.... 어디냐....”
“....무구의... 산은... 어디냐...”
철컥.
폰과 레가스를 둘러싼 무신의 추종자들이 검을 고쳐 쥔다.
“아니. 질문을 했으면 대답을 기다려야지 칼부터 휘두르려고 하네.”
“맞습니다! 무신의 추종자님들! 우리한테 대답 듣기 전까지는 칼 좀 내려놓으시죠!”
말이 통할 리 없다.
무신의 추종자들이 검을 곧추세웠다.
그때였다.
“폭군의 길.”
쿠구구구구구-
물소 떼가 달려오는 듯한 착각이 생길 정도로 요란한 소리가 울리면서 미궁 전체가 흔들렸다.
폰과 레가스는 물론 무신의 추종자들 또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들 모두 대검을 쥔 거한을 목격하게 되었다.
랭킹 1위 크리스의 등장이었다.
“천톤 검!”
콰작!!
그것은 순전히 물리적인 힘이었다.
묵직한 대검에 두개골을 찍힌 무신의 추종자의 두 발이 마치 대못처럼 지면에 깊숙이 박혀버렸다. 강한 무게에 짓눌린 무신의 추종자는 ‘반격한다.’는 특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비명만 내질렀다.
폭군 버프까지 사용한 크리스의 궁극기는 대상의 저항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다.
“와우....”
“그리드인 줄....”
일격에 생명력 절반을 잃은 무신의 추종자가 움찔움찔 거리는 모습에 폰과 레가스는 넋이 나가버렸다. 크리스의 괴력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싶었다.
그들에게 크리스가 소리쳤다.
“뭣들 해! 어서 도망쳐!!”
“도망치라고? 이대로 싸우는 거 아니었어?”
“싸우긴 뭘 싸워! 십톤 검까지는 반격하는 괴물들이다! 백톤 검이랑 천톤 검 쿨타임 걸려있으면 상대할 재간이 없다고!”
계속 새로운 동료들이 합류하고 있는데, 어찌된 것이 상황은 딱히 나아지질 않는다.
혀를 내두른 폰과 레가스가 크리스가 열어준 퇴로를 통해서 내달리기 시작할 때였다.
“지도 내놔.”
뒤편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신의 추종자들의 갈라진 목소리보다 왠지 더 무섭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펑-! 퍼퍼퍼퍼퍼퍼퍼퍼펑!!
수십 줄기의 백색 섬광이 무신의 추종자들을 폭격한다.
물리저항력뿐만 아니라 마법저항력도 상당하다고 알려진 무신의 추종자들을 고통에 떨게 만들 정도로 위력적인 마법 폭격이었다.
마법사 군단이라도 나타난 건가?
깜짝 놀란 크리스와 폰, 레가스가 마법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지도 뱉으라고.”
단 한 명의 사내가 서있었다.
화염을 몸에 두른 그리드였다. 손에는 검이 아닌 지팡이를 쥔.
“여왕의 업화.”
쿠와아아아아아아앙-!!
벨리알의 힘을 개방했을 때 활성화되는 궁극의 마법.
최대 마나의 90퍼센트를 소모하는 대가로 대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다. 사용자의 지력 수치와 표적의 최대 체력 수치에 비례해서 피해량이 결정되는 이 마법은....
키에에에에엑!!
단 일격으로 무신의 추종자를 전투불능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불꽃에 휩싸인 무신의 추종자 한 마리가 바닥을 나뒹굴었고, 뜨거운 열기를 이겨내지 못한 녀석의 팔과 다리 일부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
더 세졌나?
멍하니 있던 크리스와 폰이 레가스의 목소리를 듣고 번뜩 정신을 차렸다.
“뭣들 하세요! 어서 그리드 님을 도와드려야죠!”
“어. 으, 응....?”
돕는다고?
누구를?
크리스와 폰, 심지어 레가스까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노에, 랜디, 템빨골은 물론이고 빛의 정령과 뱀파이어까지 소환한 그리드가 무신의 추종자들을 수세에 몰아넣고 있었다.
무신의 추종자들은 빛의 정령과 황금 칼날의 방해 때문에 뱀파이어와 펫들의 방위선을 쉽사리 돌파하지 못했고, 그리드는 벨리알의 지팡이의 옵션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끊임없이 마법을 소환, 무신의 추적자들을 폭격했다.
“...저게 어딜 봐서 대장장인데.”
심지어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무신의 추종자들을 박살내다니.... 이쯤 되면 네크로맨서+마법사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세 사람은 본인이 <일인군단>이라고 주장하는 네크로맨서 랭커들이 지금의 그리드를 보고도 그딴 헛소리를 지껄일 수 있을지 궁금했다.
넋 나간 세 사람에게 그리드가 소리쳤다.
“히익! 야! 너네 뭐하냐! 안 도와줄 거야? 으아앗!!”
벨리알의 힘은 그리드가 공인하는 희대의 개사기 스킬이었지만 지속 시간이 2분밖에 안 된다. 어느새 불길을 잃은 그리드는 노에와 함께 이리저리 도망 다니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다른 무신의 추종자들을 상대하고 온 까닭에 대부분의 검무가 쿨타임에 걸려있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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