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4권 - 7화
Satisfy가 ‘모든 사업의 정점에 설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채 6개월이 지나지 않았을 무렵, 임철호 회장은 이미 세계적인 부호가 되어 있었다.
임철호 회장은 가장 먼저 콘서트홀을 건설했다. 완벽한 음향 설비를 갖춘 세계 최대 규모의 콘서트홀이 서울에 탄생하게 되었다.
굳이 콘서트홀을 건설한 이유?
인터뷰에서는 단지 클래식 애호가이기 때문이라고 일축했지만....
“내 생각은 달라. 임철호는 야망을 드러낸 거야.”
모차르트의 마술피리가 공연 중인 S.A콘서트홀에 두 명의 사내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중년인은 OGC 편성국장 이국래였고 백발의 신사는 OGC 사장 김재식이었다.
“지난 3백 년 동안 모차르트의 음악은 쉬지 않고 흘러나왔어. 세계 곳곳에서 단 하루도 빠짐없이.”
클래식은 고리타분한 문화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부자들이 자신의 허영을 채우려는 수단으로 삼는, 특정 계층을 위한 문화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모른다. 본인들이 무의식중에 흥얼거리는, 혹은 한 번만 들어도 무릎을 탁 치게 되는 음악 중 태반이 클래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모차르트의 곡을 수록한 앨범은 1,000개도 넘게 출시됐고 전 세계적으로 수억 만 장 이상이 팔려나갔지.”
나이 예순을 넘긴 김재식이지만 소위 말하는 꼰대가 아니다. 그렇기에 현대 문화를 선도하는 게임 방송국 OGC의 사장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서두를 짧게 끝낸 그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임철호는 Satisfy가 클래식이 되기를 꿈꾸고 있어. 무한히 발생하는 오케스트라(플레이어)가 자신이 만든 곡(게임)을 영원토록 연주해주길 바라지. 그런 그가 당대 최고의 마에스트로인 그리드를 놓아준다? 말이 안 돼.”
이국래는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공식석상에서만큼은, 임철호는 Satisfy를 게임이라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또 다른 세계라고 표현했다. 그는 Satisfy가 마치 음악처럼 영원하길 바라고 있었다. 역사가 되길 원했다. 그리고 현재 Satisfy의 역사는 그리드라는 거장이 만들어나가는 중이다.
그리드가 국가대항전이라는 최고의 무대에 불참하는 것을 임철호 회장이 달가워할 리 없다.
“국대전에 불참하겠노라는 그리드의 의지가 사실일지라도, 임철호 회장은 어떻게 해서든 그리드를 무대에 세울 거라고 보시는 겁니까?”
“그래. 만약 그리드가 선수가 되길 거부한다면 다른 역할을 맡겨서라도 무대에 세울 거야. 당연히 금메달 보상보다 더 좋은 보상을 미끼로 뿌려서 말이지.”
“선수가 아닌 다른 역할이라 하면....?”
“그 역할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겠지. 나는 개인적으로 <영웅 깨기> 종목을 예상하고 있네.”
영웅 깨기.
지난해 국대전 PvP 우승자의 스펙을 100퍼센트 복제한 캐릭터가 <영웅>이 되고, 그 외의 참가자들은 도전자가 돼서 영웅과 싸운다.
선수들이 한 해 동안 얼마나 발전했는지 직관적으로 알려주는 종목이었다. 관객들을 흥분시킬만한 요소가 군데군데 심어져 있었다.
“올해의 영웅이 된 그리드... 그를 컨트롤하는 게 인공지능이 아니라 그리드 본인이라면?”
작년의 영웅은 크라우젤이었다. 하지만 그걸 크라우젤이라고 표현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었다. 크라우젤 본인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크라우젤을 재현했었기 때문이다.
독이었다.
인공지능은 크라우젤의 컨트롤 솜씨는 재현했을지 몰라도 센스와 감각은 재현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원본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전투력을 발휘했다.
반면 올해의 영웅은 오히려 원본보다 나을 것이라는 게 세간의 추측이었다.
당대 영웅 그리드는 천재 크라우젤과 전혀 다른 유형의 인물이었으니까. 그리드에게는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컨트롤 솜씨도, 영감을 주는 감각도 없었다. 그리드의 실력은 비교적 평범한(?) 하이 랭커 수준에 머물렀다.
수많은 전문가들과 매니아들이 제4회 국가대항전의 <영웅 깨기>를 유난히 기대하는 이유다.
그들은 인공지능이 플레이하는 그리드를 보고 싶었다. 그리드라는 인물이 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을 때 얼마만큼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 사람들은 그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이나 기대와 달리, 올해의 영웅이 그리드 본인이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국래 국장과 김재식 사장은 소름이 돋았다.
관객들의 반응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인공지능 그리드의 전투력이 예상에 훨씬 미치지 못하자 관객들은 혼란에 휩싸인다. 하지만 야유를 보내지는 못한다. 그리드는 여전히 강했고, 다른 참가자들 모두 그리드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으니까.
적막 속에 그리드가 입을 연다.
“아이엠 그리드!”
너희들의 1년은 내 앞에서 무의미하다. 작년의 나는 지금의 너희를 압도한다. 인공지능의 도움도 필요 없다.
온갖 도발과 오만을 내포한 그리드의 그 한 마디가 관객을 열광시킬 것이다.
“국대전 최고의 화제가 되겠군요.”
“그렇지? 그리드는 관객을 흥분시킬 수 있는 최고의 장치야. 그가 없는 국대전은 상상할 수 없어. 이번 국대전에서 우리 방송국은 선수들이 아니라 선수들이 상대하게 될 ‘적’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누구보다 빠르게 그리드를 찾아내서 특종을 잡는 거야.”
도박이다. 하지만 충분히 승산이 있는 도박.
이국래 국장은 전날 갱신 된 랭킹을 떠올렸다.
지난 1년 동안 하락세를 걸어왔던 그리드의 랭킹이 며칠 사이 가파른 상승곡선을 보이고 있었다.
‘다시 사냥에 열중하기 시작한 이유는 국대전을 앞두고 컨트롤 솜씨를 단련하기 위해서였나.... 국대전에서 최대한 활약하기 위해서....’
혼자서 전 세계를 속이려 들다니. 과연 타고난 스타다.
이국래 국장은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
[티라멧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랜디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노에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노에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템빨골 1과 템빨골 2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템빨골 1과 템빨골 2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컨트롤은 개뿔. 역시 게임은 펫빨이지.”
그리드는 몬스터를 사냥할 때마다 펫들과 경험치를 분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도 아까운 눈치가 아니었다. 펫들의 레벨이 오를수록 사냥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기 때문이다.
나흘 전까지만 해도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했던 갈구노스의 사원이 이제는 안방처럼 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중간 보스’의 출현은 여전히 압박이었지만.
“음.... 아무리 그래도 아래층에 도전하는 건 무리겠지?”
갈구노스의 사원은 직선 통로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미궁이었지만 곳곳에 나선형 계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었는데, 그 계단과 가까운 장소마다 어김없이 중간 보스가 출현하면서 미궁의 난이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그리드가 예상하기로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지옥이 펼쳐질 것이었다.
그리드가 위축 된 모습을 본 템빨골들이 딱딱딱! 연신 턱을 마주치며 웃었다. 마치 그리드를 겁쟁이라고 비웃는 듯한 태도였다.
퍽!
템빨골들의 두개골을 앞발로 후려 팬 노에가 말했다.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이 해골바가지들은 적이 될 것이다냥.”
“템빨골들이 적이 된다고?”
“그렇다냥. 고약한 리치의 냄새가 난다냥. 해골들은 리치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어서 노예가 된다냥. 노에가 아니라 노예 말이다냥!”
“진짜야?”
갈구노스가 리치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 갈구노스를 레이드하는 날이 온다면 템빨골의 뼈 분지르는 스킬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었다. 한데 적이 될 수도 있다니?
“그럼 아그너스의 리치랑 싸울 때도 템빨골은 못 쓰는.... 큭?”
난처한 표정을 짓던 그리드가 기겁하며 물러섰다. 중간 보스가 출현한 까닭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리드가 서있던 지면에 단검이 박혀있었다.
‘계단 근처도 아닌데?’
중간 보스의 출현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불길함에 휩싸인 그리드가 고개를 들었다.
<무덤을 빠져나온 무신의 추종자>가 그리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드는 아직 만나본적 없는 <무신의 추종자>가 언데드화 된 몬스터였다.
놀라운 사실은.
쩌엉--!
언데드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빠르다는 점이다. 머리 없는 기수(騎手) 듀라한처럼 광속의 돌진을 자랑했다. 듀라한과 달리 머리는 온전히 붙어 있어서 시야 확보도 훌륭하다.
[8,94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녹슨 장검에 어깨를 꿰뚫린 그리드가 신음을 토했고, 달려오는 무신의 추종자에게 반응하지 못했던 티라멧과 랜디는 깜짝 놀라면서 무신의 추종자를 그리드로부터 떼어놓으려고 노력했다.
“...무구의.... 산은.... 어디냐....”
“그러니까 거기가 어디냐고! 나도 모른다니까! 이 미친놈아!!”
버럭 소리친 그리드가 열망의 무아검을 휘두르자 붉은 벼락이 떨어졌다. 허리를 베이면서 벼락까지 얻어맞은 무신의 추종자는 잠시 움찔하는 게 전부였다. 감전을 저항해버린 녀석이 귀찮게 달라붙는 티라멧과 랜디를 단칼에 베었다. 티라멧은 뛰어난 재생력으로 목숨을 부지했고, 랜디는 회(回)로 반격까지 가했다.
그 틈을 놓칠 그리드가 아니었다. 하이 랭커 수준의 컨트롤 솜씨라는 건 이미 평범함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파그마의 검무 연살이 잠깐의 틈을 드러낸 무신의 추종자의 가슴을 정확히 수차례 꿰뚫었다.
하지만.
“무구의.... 산은.... 어디냐....”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무신의 추종자는 언데드라는 종족 특성상 고통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공격을 받을 때마다 위축되기는커녕 즉각즉각 반격을 날렸다. 이는 기술의 영역이 아니라 무신의 추종자의 고유 능력이었다.
피격 시, 입은 데미지를 고스란히 되돌려주는 반격을 가한다. 라는 내용의 사기적인 능력 말이다.
근접 전투형 직업군에게 무신의 추종자는 완벽한 카운터로 작용했다.
‘피격 시 같은 데미지로 무조건 반격... 피통은 중간보스답게 수백만. 이걸 누가 1대1로 잡겠어?’
하지만 그리드는 지금 1대1 중이 아니었다. 5대 1. 아니, 7대 1이다. 당연히 그리드쪽이 7이였다.
쩌어엉-!!
또 한 차례 날아온 반격이 신을 겨누는 칼날에 가로막혔다. 안도할 새도 없이 곧바로 검무를 펼치기 시작한 그리드가 빛의 정령에게 소리쳤다.
“섬화!”
번쩍!
명령과 동시였다.
무신의 추종자의 얼굴 앞으로 순간 이동한 동글동글한 빛 덩어리가 강한 빛을 쏘았다. 0.3초의 실명을 유발하는 마법이었다.
그리고 실명의 효과는 ‘공격 명중 불가’다.
“연살파극!!”
이미 흑화와 대장장이의 분노를 사용하고 있던 그리드가 궁극의 검무를 펼쳤고, 실명에 걸린 무신의 추종자는 허공에 눈 먼 칼이나 날리며 피를 쏟았다.
그리고 그리드의 곁에는 행운의 여신이 미소 짓고 있었다.
“연살파극!”
신장의 발동으로 2연속 궁극기가 나가자.
키에에에에에에!!
긴 혀를 쭉 뻗은 무신의 추종자가 비명을 지르며 잿빛으로 산화하였고....
[레벨이 올랐습니다.]
[<망령의 장비 파편>을 획득하였습니다.]
[<검의 무덤 지도 파편(6)>을 획득하였습니다.]
사냥터 특성상 오직 경험치만 기대하고 있던 그리드는 의외의 득템에 성공했다.
검의 무덤.
파그마가 말년을 보냈던 장소이며, 브라함의 시신이 매장되었다고 알려진 곳이다.
“무구의 산이 여길 말한 거였어?”
지도 파편을 펼쳐 든 그리드의 손끝이 떨린다.
갈구노스와 죽은 무신의 추종자들 사이에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이며, 무신의 추종자들은 왜 죽어서도 검의 무덤을 찾는 걸까.
그런 의문들은 쓸데없는 사치였다.
그리드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지도를 완성한다....”
브라함.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이름이 그리드의 뇌리를 맴돌았다. 숨겨진 히든 피스에 대한 기대감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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