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4권 - 5화
“뭐야, 손재주가 여기서 왜 올라?”
포인트를 투자해서 성장시킬 수 있는 스탯은 4개로 한정된다. 근력, 체력, 민첩, 지력이다. 엘릭서도 마찬가지였다. 엘릭서로 올릴 수 있는 스탯 또한 그 4개밖에 없었다.
한데 손재주가 오르다니?
<무작위 엘릭서>는 보통의 엘릭서와 다르다.
이 결과를 도출하기까지 그리드는 약 2분이라는 시간을 소요하고 말았다.
“특수 스탯까지 올려 주는 엘릭서라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그리드가 현재 보유 중인 특수 스탯은 손재주, 끈기, 평정, 불굴, 위엄, 통찰력, 용기, 정치력, 악마력, 행운, 신위 총 11개다.
‘이 중 신위 스탯이 오를 가능성은 0퍼센트일 테고.’
신위는 특정 인물이나 세력이 그리드를 신격화할 때만 성장하며, 그리드에게 신화가 될 여지를 안겨 준 신화급 스탯이었다. 신위가 엘릭서로 오를 거라고 기대하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럼 나머지 10개 스탯들이 오를 거라는 말인데.’
좋지 않다.
상태 이상에 걸릴 확률이 낮아지며, 상태 이상에 걸릴 경우 빠르게 회복시켜 주는 평정 스탯은 레전드리 클래스 입장에서 효율이 너무 나쁘다.
받는 데미지의 일부를 일정 확률로 무효화시키는 불굴 스탯은 재수 없는 그리드가 기댈 만한 스탯이 아니었다.
위엄 스탯은 템빨 왕관 덕분에 이미 충분히 갖추고 있었고, 대상의 행동을 간파시켜 주는 통찰력 스탯의 효과는 분명한 상한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부터 느껴 왔다.
손재주?
아이템 제작 과정에서 자연히 오르는 스탯이다. 그리드 입장에서는 가장 쉽게 올릴 수 있는 스탯이었고, 현재 그리드의 손재주는 무려 3,967+880이다. 5천에 육박하는 셈이다. 아쉬울 게 전혀 없었다.
‘끈기도 쉽게 오르고……. 악마력은 말할 것도 없고.’
악마력은 완전히 꽝이다.
‘사실상 바라야 할 스탯은 정치력과 용기, 그리고…….’
정치력은 소속 영지의 내정 발전 속도를 올려 주기 때문에 국왕인 그리드에게 필수 불가결한 스탯이었다. 국왕의 정치력이 높으면 국가 전체의 내정 발전 속도가 오른다.
그리고 용기.
용기는 없는 것보단 낫다. 용기 스탯 1당 공격력과 방어력이 0.1씩 상승한다. 3차 각성 근력 스탯이 공격력을 0.6, 3차 각성 체력 스탯이 방어력을 0.9 올려 주는 것과 비교하면 무척 초라한 효과지만 누적되면 손해 볼 게 없는 스탯이었다.
끝으로,
‘…행운.’
행운은 이로운 효과가 발생할 확률을 높여 주는 스탯이다. 아이템 제작, 강화, 사냥, 레이드 등 모든 분야에서 유용하게 작용했다.
재수 없는 그리드는 행운 스탯이 가장 절실했다. 행운은 칭호 효과로도 오르지 않는 특수 스탯이었으므로 성장할수록 가치가 빛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좋아…….”
남은 2개의 엘릭서를 손에 쥔 그리드가 간절히 기도했다.
부디 행운이 오르길. 행운이 아니면 정치력, 용기라도 오르길. 제발 악마력이나 손재주는 꺼져 주기를.
“간다!!”
살면서 이만큼 긴장했던 날이 또 있던가?
꿀꺽, 마른침을 삼킨 그리드가 심호흡한 후 엘릭서를 복용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무작위 엘릭서의 효과로 손재주 스탯이 10 상승하였습니다.]
[무작위 엘릭서의 효과로 손재주 스탯이 10 상승하였습니다.]
“…….”
오로지 행운에 기대야 하는 콘텐츠는 잔혹하고 불합리하다.
감당하기 힘든 현자 타임에 휩싸인 그리드가 무릎을 포개고 앉았다.
“…게임 접을까?”
“냥?”
“아니, 이런 말은 농담으로라도 하면 안 되지.”
어깨에 앉아 있는 노에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어 준 그리드가 벌러덩 드러누웠다.
마치 놀리는 것처럼 오늘따라 유난히 하늘이 맑다.
그르릉, 그르릉.
노에는 그리드와 나란히 누워 있다는 사실만으로 즐거운 눈치였다. 배를 내밀고 누운 채 그리드의 가슴에 얼굴을 비벼 댔다.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얼마 만의 휴식인가.
노에와 함께 여유를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드 님!!”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지금 막 판게아에서 귀환한 대장장이들이었다.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그리드 님께서 퀘스트를 클리어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알림창 보고도 못 돌아오면 바보 멍청이죠.”
“음…….”
대장장이들의 면면을 살피는 그리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77명.
이들을 제외한 23명은 가람에게 사망하고 한발 앞서 서대륙으로 귀환했을 것이다.
그리드는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의 섣부른 판단 때문에 퀘스트 내내 위기와 공포를 느꼈던 대장장이들 아닌가. 그 끝에 누군가는 희생까지 당했다.
‘나를 저격한 퀘스트에 휘말려서…….’
안타까워하는 그리드의 표정을 읽은 것일까.
“우리보다 한발 빨리 서대륙으로 도착한 대장장이들도 모두 축제 분위기라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게, 그리드 님 덕분에 엄청난 보상들을 챙기지 않았습니까?”
“그들 모두 죽은 걸 걱정할 때가 아니죠. 레벨하고 손재주 조금 떨어진 게 무슨 문제랍니까? 돈방석에 앉게 생겼는데.”
“저희가 같이 상의를 해 봤는데요. 축복받은 강화석 종류는 모두 템빨단원 분들께 판매하는 게 좋다는 생각입니다. 귀한 물건을 외부에 반출하는 건 꺼림칙하고, 애초에 그리드 님 덕분에 얻은 보상이니까 템빨단원 분들께 싸게 넘겨야죠.”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리드는 대장장이들의 마음이 고마웠다. 하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었다.
“단원들한테 넘기기 전에 저한테도 좀 팔아 주세요.”
“네? 아니, 그거야 당연하죠. 아니다. 그리드 님한테는 돈도 못 받겠습니다. 절반을 그냥 가져가시죠.”
대장장이들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리드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드가 원하는 건 독식이 아니라 템빨국 전체의 발전이었다. 당연히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물건을 구매함으로써 대장장이들의 의욕을 유지시켜 주고 싶었다. 또한 그들이 자신에게 더 큰 호감을 갖게 만들고 싶었다.
역시나 대장장이들은 감격을 금치 못했다.
그리드가 생색을 내기는커녕 끝까지 겸손한 태도를 보여 주자 존경심을 느꼈다.
‘괜히 왕이 되신 게 아니야.’
‘그 많은 랭커들이 그리드 님을 섬기는 이유가 이거였어.’
‘개차반 카츠조차도 그리드 님한테는 공손하게 행동한다고 하더니…….’
그리드의 인망에 반한 대장장이들의 존경과 호감이 냄비의 물처럼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상기된 그들이 그리드에게 소리쳤다.
“엘릭서도 가져가 주십시오.”
“엘릭서요?”
“네. 아시다시피 저희는 평범한 대장장이니까요. 저희에게 가장 필요한 스탯은 체력과 손재주, 끈기인데, 이 엘릭서는 무작위 아닙니까? 저희가 원하는 스탯만 꼭 집어서 오를 가능성은 낮으니까 저희가 사용하는 건 사치 같습니다.”
그리드가 솔직하게 말했다.
“이거 말이 무작위 엘릭서지, 사실은 손재주 엘릭서인데요. 먹어 보세요. 손재주만 올라요.”
“하하……. 또 저희를 위해서 그런 말씀을…….”
“아니, 진짜로 손재주만 오릅니다.”
“그렇게까지 양보해 주실 필요 없습니다.”
“맞습니다, 그리드 님. 아무리 생각해도 저희에게 엘릭서는 사치입니다. 이 엘릭서는 어떤 스탯이 올라도 이득인 잡캐, 아니 만능캐인 그리드 님이 쓰시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
사실 옳은 말이기는 하다.
소량의 근력 스탯과 체력 스탯만 챙기면 그만인 평범한 대장장이가 무작위 엘릭서를 복용하는 건 쓸데없는 사치였다.
하지만 엘릭서는 보통 현금으로 2억 이상에 거래된다. 재벌 3세 카츠는 지난 수년 동안 수십 개의 엘릭서를 개당 3억에 꾸준히 구매했다는 소문이다.
제아무리 그리드라고 해도 231개의 엘릭서를 돈 주고 사는 건 부담이었다. 개당 2억으로 싸게 계산해도 도합 462억인데, 그 많은 지출을 쉬이 감당한다는 건 타고난 재벌이 아닌 이상 불가능했다.
심지어 손재주 엘릭서 아닌가? 2억의 가치나 있을지 의문이다.
망설이는 그리드에게 대장장이들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말 그대로 가져가 달라는 겁니다. 강매하려는 게 아니에요. 엘릭서는 그냥 드릴 테니까 그리드 님이 사용해 주십시오.”
“그게 무슨…….”
물질의 가치는 누구보다 그리드가 잘 알고 있다.
억 단위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아이템을 그냥 주겠다니?
그리드는 대장장이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장장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그리드 님 아니면 얻지 못했을 아이템이니까요. 이미 유니크 아이템 제작법과 축복 강화석 덕분에 엄청난 돈을 벌 수 있게 됐는데, 그 이상의 욕심을 부리는 건 솔직히 저희 입장에서도 부담스럽습니다.”
“일종의 뇌물이기도 하죠. 저희가 오늘 그리드 님한테 엘릭서를 드리면 혹시 또 압니까? 나중에 그리드 님이 또 저희를 챙겨 주실지.”
“맞아요. 그리드 님한테는 필요 없는 제작법 하나씩 넌지시 던져만 주셔도……. 흐흐! 저희한테는 그게 더 좋지요.”
진심이었다.
이미 고등급 제작법을 수두룩하게 보유하고 있을 그리드에게는 가치 없을 제작법이 이들에게는 큰 가치를 선사할 수도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리드가 흔쾌히 호의를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감사히 받고, 반드시 보답하도록 하죠.”
“저희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언젠가 반드시 그리드 님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드와 함께 짧은 모험을 다녀온 100인의 대장장이들.
그리드의 유능함과 인망에 반한 그들은 새로운 충신이 되었다. 대장간 지구에 그리드의 명성이 퍼져 나갔다.
***
두근! 두근! 두근!
대장장이들과 작별한 후.
성으로 돌아와 아이린과 사랑을 속삭이고 라우엘에게 업무 보고를 받은 뒤, 곤히 잠든 로드의 이마에 입을 맞춰 준 그리드는 자신의 집무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무려 231개의 엘릭서가 놓인 상태다.
투명한 유리병 속에 담긴 무지갯빛 액체는 아름답기보다 공포였다.
그리드는 몸이 덜덜 떨렸다. 식은땀이 그의 등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기껏 다 마셨더니 손재주나 악마력만 올랐다가는 현타 오질 거 같은데.’
두렵다고 피할 수는 없는 일.
어차피 공짜로 얻은 엘릭서고, 어떤 스탯이 오르든 결국 이득이다.
간신히 마음을 다스린 그리드는 최대한 기대감을 버렸다.
설령 231개의 엘릭서가 모조리 손재주만 올려 줄지라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무작위 엘릭서의 효과로 손재주 스탯이 10 상승하였습니다.]
[무작위 엘릭서의 효과로 손재주 스탯이 10 상승하였습니다.]
[무작위 엘릭서의 효과로 용기 스탯이 10 상승하였습니다.]
[무작위 엘릭서의 효과로 민첩 스탯이 10 상승하였습니다.]
[무작위 엘릭서의 효과로 불굴 스탯이 10 상승하였습니다.]
[무작위 엘릭서의 효과로 손재주 스탯이 10 상승하였습니다.]
[무작위 엘릭서의 효과로 용기 스탯이 10 상승하였습니다.]
[무작위 엘릭서의 효과로 행운 스탯이 10 상승하였습니다.]
[무작위 엘릭서의 효과로 정치력 스탯이 10 상승하였습니다.]
[…….]
[…….]
쓰디쓴 엘릭서를 복용할 때마다 그리드의 표정이 밝아졌다.
최소한 꽝은 없었기 때문이다.
엘릭서는 악마력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반면 그리드가 그토록 바랐던 민첩과 행운은 몇 번이나 올랐다.
꿀꺽.
“꺼윽!”
150병 이상의 엘릭서를 들이켰을 때였다.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배를 붙잡고 트림을 하던 그리드의 시야로 기대치 못했던 알림창이 떠올랐다.
[용기 스탯이 1,200을 달성하였습니다. 용기 스탯의 효과가 상승합니다. 용기 스탯 1당 공격력과 방어력이 0.2씩 상승합니다.]
[행운 스탯이 400을 달성하였습니다. 이로운 효과가 발생할 확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용기와 행운의 강화!
더욱 강하게 쥐어지는 아귀힘을 느낀 그리드가 남은 엘릭서를 빠르게 들이켰다.
행운 효과가 강화됐다는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별해 보고 싶어서였다.
[무작위 엘릭서의 효과로 근력 스탯이 10 상승하였습니다.]
[무작위 엘릭서의 효과로 지력 스탯이 10 상승하였습니다.]
[무작위 엘릭서의 효과로 손재주 스탯이 10 상승하였습니다.]
[무작위 엘릭서의 효과로 행운 스탯이 10 상승하였습니다.]
[무작위 엘릭서의 효과로 행운 스탯이 10 상승하였습니다.]
“좋아!!”
50개의 엘릭서를 연달아 비운 그리드가 환호했다.
이로운 효과의 대폭 상승이 절실히 체감된 까닭이었다.
만면에 미소를 띠운 그가 남은 엘릭서를 모조리 다 비웠을 때, 그의 행운 스탯은 무려 631을 달성하고 있었다.
그리드는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어 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인벤토리에서 수백 개의 축복 강화석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