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4권 - 4화
궁극의 명필이 한지를 채워나간다.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한 획, 한 획에 담긴 삶의 궤적이 무한하다.
「초국 왕은 판게아를 돌보라.」
한울이 마지막 점을 찍자, <말씀>이 완성 됐다.
머잖아 이 <말씀>을 받들게 될 초왕은 감격에 오열할 것이었다.
환국이 두려워 외면해야했던 영토와 백성들을 다시금 보살필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한울의 곁에 선 가람은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저 고약한 무리들에게 어째서 기회를 주시는 겁니까?”
“기회라. 이건 기회가 아니라 보답이다.”
붓을 내려놓은 한울이 가람을 바라보았다. 한울의 눈빛에는 측은지심이 깃들어 있었다.
“기회는 네가 얻었던 것이며, 판게아의 백성들은 네게 기회를 주고자 희생을 당한 입장이지 않더냐.”
사막에도 비는 내린다.
하늘은 결코 땅을 버리지 않는다.
“나는 저들에게 희생을 강요한 만큼의 보상을 내려야한다. 그것이 내가 지켜야할 도리다.”
하늘(한울)은 일방적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늘의 편협은 너무 많은 생명을 시들게 만든다. 하늘이 정도에서 벗어나는 순간 세계는 멸망할 수도 있었다.
그리드가 한울의 부름에 응한 대가로 큰 보상을 얻은 내막에는 이런 이치가 숨겨져 있었다.
“.....”
결코 욕망을 내세우지 않으며 오롯이 존재하는 자.
가람은 자신과 같은 양반이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한울에게 경외심과 거부감을 동시에 느꼈다.
***
“쩝.”
서대륙으로 돌아온 그리드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천하의 양반을 따돌리고 천문학적인 보상을 획득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우울한 기색이었다.
“....게임 참. 오지게 어렵네.”
낚일 수밖에 없는 형태로 발현 된 퀘스트.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적.
그리고, 더 높은 재능을 요구하는 게임 시스템.
스킬창과 마법창을 띄운 그리드가 머리를 감싸 쥐며 한숨 쉬었다.
“하. 스킬이랑 마법이 너무 많다고.”
파그마의 검무, 브라함의 강화 마법, 암흑의 룬을 비롯한 아이템들과 각종 칭호에 귀속 된 스킬들.
그리드가 현재 사용 가능한 전투 관련 스킬은 30개에 육박했다. 여태껏 제작한 모든 아이템을 활용한다⎯는 전제를 붙일 경우에는 50개도 쉬이 넘길 것이었다.
그리드에게는 너무 많았다.
그리드는 자신이 보유한 모든 스킬을 실전에서 활용할만한 순발력이나 센스가 턱없이 부족했다.
특히 상대가 강할수록, 상황이 긴박할수록 그리드의 사고는 원활하게 흐르지 못했다. 그리드는 자신이 보유한 스킬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일이 무척 어려웠다.
이건 노력만으로는 극복하기 힘든, 순수한 재능의 문제였다.
소위 말하는 천재들은 30개의 스킬이 아니라 50개, 60개 이상의 스킬도 무리 없이 소화하는 사고력을 갖췄으니까.
“쩝. 그나마 나보다 약한 적을 상대할 때는 여유가 있어서 이것저것 시도해볼 수 있었는데. 오래간만에 강한 놈이랑 싸우니까 다시 띨빵해졌네.”
그리드는 가람과의 전투를 복기해보았다.
우선 무형의 바람.
오직 ‘소리’로만 경로를 파악할 수 있는 그 바람의 연타 공격에 그리드는 맥을 못 췄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사방으로부터 압박해 들어오는 바람 공격에 처절하게 얻어맞고 천장에 처박히는 꼴사나운 모습까지 보였다.
만약 그리드에게 최소한의 ‘사운드 플레이’ 센스만 있었어도, 그렇게까지 무방비하게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뭐, 그래도. 천장에 처박혔을 때 떨어지는 돌의 파편들을 발판 삼아서 초연의 보법을 펼친 건 썩 괜찮았지. 그건 내가 생각해도 진짜 잘했어.’
못한 부분을 상기하듯 잘한 부분도 상기한다.
이는 괜한 잘난 척이 아니라 꼭 필요한 계제였다.
그리드가 패배한 전투를 복기하는 이유는 자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발전하고 싶어서였으니까.
본인이 못한 점과 잘한 점을 고루 되새겨야 다음에는 실수를 줄일 수 있고 강점을 부각할 수 있다.
“흐음.”
전투를 복기해볼수록 잘한 일도 많았다.
투기가 100퍼센트 쌓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반격한 일, 흑화 등의 버프와 도란의 반지를 사용한 타이밍, 최초의 왕 칭호 효과와 루쏜의 힘을 활용해서 동굴이라는 지형을 역이용한 일 등등.
‘물론 못한 게 더 많았지만....’
마법을 하나도 사용하지 못했다. 빛의 정령과 신을 겨누는 칼날에게 디테일한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크레이의 힘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고, 스킬을 삭제하는 옵션을 보유하고 있는 <다크버스의 반지>는 아예 까맣게 잊었다.
다크버스의 반지를 떠올린 것은 <검호의 파그마의 검무> 덕분에 강화 된 연살파극이 가람에게 철저히 무력화 당했을 때였다. 스킬의 기능을 ‘삭제’하는 어떤 기운이 가람의 창을 휘감았었고, 가람은 그리드의 스킬 시전 속도보다 빠르게 창을 휘두름으로써 연살파극의 모든 단계를 파훼시켰었다.
“아오! 썩을! 스킬이랑 아이템이 너무 많다고!! 그리고 노에 너는 왜 꼭 중요할 때마다 영혼 섭취에 실패하는 건데?”
“노, 놈의 공격이 유체화를 꿰뚫고 들어왔다옹.... 너무 세다옹.... 아파서 혼났다옹....”
“후.”
몇 번을 다시 생각해봐도 게임 난이도가 너무 높다.
플레이어들이 죄다 크라우젤도 아니고, 그 많은 스킬들과 아이템 옵션을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스킬이랑 마법 개수를 줄이는 대신 위력을 높여주면 게임하기 훨씬 더 편해지겠구만.’
오래간만에 고객센터에 건의해볼까. 아주 예의 바르게.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리드가 <티라멧의 허리띠>의 상세정보를 불러왔다.
나름의 공부와 투덜거림은 끝났으니, 이제 다시 현실을 마주할 때였다.
<티라멧의 허리띠>
등급:레전드리
*받는 피해를 15퍼센트 줄여줍니다.
*체력+250
*생명력+10,000
*스킬 <재생의 바람> 생성.
자작급 진혈족 티라멧의 고유 마력이 깃든 허리띠입니다.
★아이템의 최종 진화가 완료되었습니다.
1,500의 마나를 소모해서 뱀파이어 자작 <티라멧>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티라멧이 전투 중에 사망할 경우 24시간 후 다시 소환할 수 있습니다.
<재생의 바람>
패시브
뛰어난 재생능력을 자랑하는 티라멧의 마력이 착용자의 육체를 건강하게 만들어줍니다. 생명력 회복 속도가 대폭 상승하여 초당 500의 생명력을 회복합니다.
단, 이 효과는 피격 시 사라집니다. 사라진 효과가 다시 적용되기까지 10초의 대기 시간이 필요합니다.
“크....”
그리드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체감하기로 4년? 5년? 아니, 어쩌면 훨씬 더 오랫동안 유니크 등급에 머물러왔던 아이템이 드디어 최종 진화를 완료한 것이다. 그것도 마왕 토벌전을 앞둔 중대한 시점에서.
‘받는 피해 경감률이 15퍼센트가 된 거로 모자라서 피통이 1만이나 올랐네. 덕분에 가람한테 조금이나마 더 버틸 수 있던 거구나.’
유니크 등급 시절과는 차원이 다른 가치를 자랑하게 되었다. 성장형 아이템의 진정한 능력은 최종 진화를 이뤘을 때야 비로소 발휘된다고 하더니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
여전히 경험치가 오르지 않고 있는 <엘핀스톤의 반지>를 괜히 한 번 노려봐준 그리드가 티라멧의 정보를 불러왔다.
이름:티라멧
나이:295세 성별:남
종족:뱀파이어
레벨:300
칭호:불사의 귀족
*입은 피해의 30퍼센트를 즉시 회복합니다. 이 스킬은 1시간에 1회 충전되며 총 12회까지 충전됩니다.
단, 일격에 받은 피해량이 최대 생명력의 60퍼센트를 초과할 경우 회복하지 못합니다. 성스러운 공격을 허용할 경우 회복하지 못합니다.
*사망에 이르는 피해를 입을 시 생명력 100퍼센트 상태로 부활합니다. 부활 후 1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가 20퍼센트 상승합니다. 360레벨 달성 시 개화하는 효과입니다.
칭호:우울증
*시조 베리아체의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구속 된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존감이 무척 떨어져서 사기에 악영향을 받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저하됩니다.
공격력:2,150 마법공격력:100
생명력:100,000 마나:3,000
방어력:2,500 마법저항력:500
보유 스킬:[한 방은 막는다!(A)]/[나는 왜 사는 걸까...(C)]/[박치기(C)]
상태:우울(오래간만에 부활하자마자 죽었다. 나는 왜 사는 걸까... 차라리 죽고 싶다....)
“....이번엔 우울증이냐.”
상태가 영 별로다.
데빌슬레이어의 힘이 없으면 레이드하지 못했을 거라고 추측했을 정도로 강력했던 뱀파이어 자작 티라멧의 위용은 사라지고 없었다.
“뭐, 그때야 보스 몬스터로 분류됐었으니까. 소환수가 된 지금하고 비교하는 건 말이 안 되지.”
납득하는 그리드의 표정은 상당히 밝았다.
티라멧의 위용이 생전만 못하다고는 하나 약하다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방은 막는다!] 스킬 덕분이기는 하겠지만 양반 가람의 일격조차 막아낸 티라멧 아닌가?
심지어 기본 능력치가 무척 우수하다. 유니크 무기를 장착한 수준의 공격력과 유니크 방어구 세트를 풀로 무장한 수준의 방어력을 겸비했다. 노템 상태라는 것이 주목할 부분이다. 티라멧은 노에와 달리 인간형 몬스터이기 때문에 아이템까지 끼워주는 게 가능했다. 대상의 모습을 복제할 때 대상이 착용 중인 아이템을 약화 버전으로 복제, 사용하는 랜디와 달리 티라멧은 순수하게 템빨을 받을 수 있었다.
‘얘를 탱커로 세워두면 나 혼자서도 어지간한 던전은 공략할 수 있겠는데....’
마왕 토벌전에서도 든든한 방패가 되어줄 터.
내일 당장부터라도 티라멧의 아이템을 만들어야겠다고 계획한 그리드가 동대륙에서 얻어온 보상 물품들을 확인했다.
유니크 등급 무기 제작법 1개.
유니크 등급 방어구 제작법 2개.
축복 받은 무기 강화석 10개와 무기 강화석 107개.
축복 받은 방어구 강화석 20개.
무작위 엘릭서 3개.
“진짜로 다 챙겨왔네....”
퀘스트 보상들이 너무 좋아서, 혹시 이거 사기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을 정도였지만 다행히 사기는 아니었다. 모든 보상이 온전히 인벤토리에 보관 중이었다.
“유니크 제작법들은 티라멧 아이템 제작해줄 때 쓰고.”
그리드는 최소 에픽 등급 이상의 아이템을 제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니크 등급 아이템을 쉽게 찍어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유니크 등급 이상의 아이템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운에 크게 의존해야만 했고, 확정 유니크 제작법은 그리드에게도 든든한 보험이었다.
“강화석은 당장 아이템 강화하는데 쓰고.”
신화 등급의 아이템 강화 확률은 0.00001퍼센트쯤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낮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귀한 축복 강화석들을 판매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작 돈 몇 푼에 강화 시도 비용을 팔아넘길 정도로 그리드가 바보는 아니었다.
“더도 말고 3강.... 아니, 2강만. 제발 2강.”
주문을 외우듯이 기도를 올린 그리드가 마지막으로 엘릭서를 살폈다.
무작위 엘릭서 3개.
특정 스탯을 총 30개 올려줄 것이었다. 무려 3레벨의 가치다.
그리드가 본인의 주력 스탯 현황을 확인했다.
이름:그리드
레벨:364
....
....
근력:3,220(+360)
체력:2,047(+580)
민첩:2,750(+330)
지력:1,898(+405)
....
....
“왕관 바꿔서 지력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나쁘지 않군.”
세상은 그리드를 템빨러로 인식하고 있고 그리드 또한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그리드의 가장 큰 저력은 스탯에 있었다. 26개가 넘는 칭호를 보유한데다가 고등급 아이템을 꾸준히 찍어온 그리드의 주력 스탯 총합은 동레벨 다른 유저의 2배 가까이 높았다. 네임드 NPC나 보스들과 육탄전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스탯에 있는 것이다.
그리드는 일반적인 엘릭서가 근력, 체력, 민첩, 지력 총 4개 종류로 구분된다는 점을 상기했다.
“무작위 엘릭서도 당연히 4대 주력 스탯 중 하나를 올려줄 거고....”
그리드가 원하는 스탯은 단연코 민첩이었다. 민첩과 근력의 1대1 황금비율을 완성하고 높은 전투력 보정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과연 뜻대로 될까?
자신의 불운을 알고 있는 그리드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체력이 올라도 좋아. 피통이 이미 15만 넘은 마당에 20만 노려보지 뭐.”
최초의 왕 칭호 효과 등, 그리드는 최대 생명력이 높아질수록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체력이 오르는 건 확실히 좋았다.
“근력도 뭐.... 나쁘지는 않지. 지력도....”
지력이 오를수록 브라함의 강화 마법이 개방되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민첩 다음으로 중요한 스탯이 지력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지력에 큰 욕심이 없었다. 마법이 많아지면 뭐하는가? 제대로 써먹질 못하는데.
“하.하.하. 민.첩.만 안 오르면 좋겠는걸?”
무작위 엘릭서를 손에 쥐고 심호흡하던 그리드가 갑자기 국어책을 읽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바라는 것과 반대의 결과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에 나름 꼼수를 부리는 것이었다.
꿀꺽.
한참을 망설이던 그리드가 드디어 엘릭서를 먹었다.
무작위 엘릭서의 효과는 놀라웠다.
주력 스탯만 올려주는 보통 엘릭서와는 달랐다.
[무작위 엘릭서의 효과로 손재주 스탯이 10 상승하였습니다.]
“야 이 XX.”
욕 좀 끊고 싶은데 왜 안 도와주냐?
피눈물을 흘리는 그리드였다.
그는 아직 눈치 채지 못했다.
무작위 엘릭서가 손재주를 올려주었다는 말은 즉 다른 <특수 스탯>을 올려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또한, 그리드에게 주어진 엘릭서는 단 3개가 아니다. 수십 명의 대장장이들이 그리드를 찾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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