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4권 - 2화
아이템 오토 제작에 걸리는 시간은 <대장장이의 기술>레벨과 손재주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동대륙으로 넘어온 100인의 대장장이는 3천이 조금 넘는 손재주를 자랑하였고, 그들은 하나의 아이템을 제작하는데 평균 2시간 9분을 소요했다. 과연 그리드가 선별한 엘리트 집단다웠다.
하지만 아이템을 만드는 속도와 아이템 등급은 비례하지 않는 법이다.
“끙. 레어네.”
“난 노말....”
“에픽 아이템은 5명밖에 못 만든 거야? 이, 이러다가 우리 죄다 죽는 거 아니야?”
동요하는 음성이 대장간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재수 없는 인간들만 모인 건지, 첫 번째 아이템 제작의 결과는 참패라고 평가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어쩌지...”
대장장이들의 떨리는 시선이 그리드에게 향했다.
따앙! 따앙-!
구석에 자리 잡은 그리드는 묵묵히 작업 중이었다.
“그리드 님한테는 기대할 수 없겠지?”
“.....”
누군가의 혼잣말에 아무도 부정하지 못했다.
이번만큼은 그리드에게 의지할 수 없다.
그리드는 수작업만으로 아이템을 제작하는 인물이었으니까. 파그마의 후예가 안고 있는 페널티는 ‘오토 제작 불가’일 가능성이 무척 높다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였다.
따앙! 따앙! 따앙!
소문이 사실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듯, 다른 대장장이들은 이미 하나의 아이템을 완성하고 2번째 풀무질에 돌입하고 있는 반면 그리드는 여전히 단련의 과정을 진행하고 있었다. 아직 첫 번째 아이템도 완성하지 못한 눈치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방법은 하나뿐이야.”
몇 명의 대장장이가 <유니크 등급 무기 제작법>을 꺼냈다.
판게아에 도착한 대가로 얻은 보상이다.
대장장이 망치는 무기로 분류되는 바, 이 제작법을 사용하면 유니크 등급의 망치를 만들 수 있었다. 유니크 등급의 망치는 에픽 등급 아이템의 제작 확률을 크게 상승시킬 터였고.
물론 내키진 않았다.
판게아 대장간에 구비되어 있는 아이템 제작 재료는 오직 ‘강철’뿐이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강철로 만든 망치가 유니크로 떠봤자 옵션의 종류와 질은 ‘하급’에 불과할 여지가 컸다. 현재 대장장이들이 사용 중인 에픽 망치와 성능 면에서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었다.
‘거래소를 이용할 수 있으면 좋았는데.’
Satisfy 설정 상, 대륙 간 교류는 아직 대부분 차단 된 상태였다. 플레이어들의 시장이 서대륙에 형성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동대륙에서는 거래소 시스템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직접 채광이라도 해오지 않는 이상 별도의 제작 재료를 구할 방법이 없다는 뜻. 시간상의 문제로 채광을 해올 수도 없다.
한숨 쉬던 대장장이들이 이내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어쩔 수 없지. 아쉽지만 강철이라도 써서 망치부터 만들자. 여기까지 와서 퀘스트를 포기하는 것도 웃기잖아?”
축복 받은 방어구 강화석 20개.
당연히 탐날만한 보상이다.
하지만 대장장이들은 눈앞의 보상보다 그리드를 위해서 노력하고 싶었다.
애초에 그리드가 없었다면 판게아에 오지도 못했을 테고, 강시들을 쓰러뜨릴 수도 없었을 것이며, 주민들을 구출하지도 못했을 게 아닌가.
그리드 덕분에 온갖 보상을 획득해놓고, 자신들이 활약할 차례가 와서는 손해를 보기 싫다고 발을 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신의를 논하기 전에 양심의 문제였다.
“이번에는 우리가 그리드 님의 도움이 될 차례야.”
대장장이들이 결심을 굳혔다.
소수의 대장장이들은 망설이는 눈치였지만, 혼자서 발 뺐다가는 천하의 개잡놈이 될 분위기였다.
“시작하자.”
돈방석에 앉게 해줄 유니크 무기 제작법을 고작 강철 망치 제작하는데 써야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아깝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굳게 결심하고 번민을 끊어낸 대장장이들이 일제히 유니크 무기 제작법을 사용하려는 순간이었다.
“스톱.”
그리드가 소리쳤다.
대장장이들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됐다.
그리드의 손에는 지금 막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2개의 망치가 들려있었다.
“2개....?”
대장장이들이 2시간 동안 1개의 아이템을 완성시킨 반면 그리드는 아직 단련을 진행 중이었다. 한데 2개의 완성품이라니?
‘아이템 하나는 이미 진즉에 완성하셨던 거고, 2번째 아이템을 단련 중이셨던 건가?’
‘수작업 말고 오토 제작도 가능하다고?’
‘아니, 아무리 오토 제작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렇지 2시간 동안 2개의 아이템을 만들어? 손재주가 6천이라도 돼?’
<眞-(신과 대적하는)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은 아이템 제작에 걸리는 시간을 대폭 감소시킨다.
하지만 평범한 대장장이들이 그 사실을 알 리 없다.
“진해청, 알란타, 시더 님.”
“네? 네.”
그리드가 세 사람을 호명했다. 알란타와 시더는 100명 중 가장 랭킹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반면 진해청은 랭킹이 중간 수준에 그쳤지만 유니크 등급 망치의 소유자였다.
그리드가 진해청에게 부탁했다.
“아까 그 망치, 다시 보여주세요.”
“네...”
그리드의 의도를 모르겠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진해청이 자신의 망치를 꺼냈다.
사아아아-
그리드의 눈동자는 파란 빛을 머금고 있었다.
<파그마의 눈-바알의 계약자ver> Lv.1
파그마의 눈을 전개하여 대상 아이템 확인 시, 해당 아이템에 대한 이해도가 대폭 상승하며 능력치와 옵션을 확인하고 복제할 수 있습니다.
단, 아이템을 복제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제작한 아이템을 재료로 사용해야합니다. 또한 복제 대상 아이템과 재료로 쓰는 아이템의 등급 차이가 1등급 이내여야 합니다. 재료로 사용한 아이템은 복구되지 않습니다.
*같은 아이템에 여러 번 스킬을 사용해도 아이템 이해도는 누적 증가하지 않습니다.
*복제 대상 아이템에 귀속되어 있는 스킬은 복제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복제 유지 기간은 하루입니다. 유지 기간이 끝난 복제 아이템은 영구적으로 파괴됩니다.
스킬 자원 소모:제작 아이템 1개.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1시간.
분신을 쓰러뜨리고 얻은 힘.
그리드는 자신이 조금 전 제작한 에픽 등급 망치 중 하나를 재료로 진해청의 망치를 복제해버렸다.
[아이템 복제에 성공하였습니다!]
<대부호의 망치>
등급:유니크
내구력:486/520 공격력:193~240
레어 아이템 제작 확률:+3%
에픽 아이템 제작 확률:+34%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한 대장장이 장인 롤로망이 고심 끝에 탄생시킨 작품입니다. 롤로망은 제작 확률이 지극히 낮은 고등급 아이템에 집착하기보다는 가장 수요가 높은, 제법 괜찮은 시세의 아이템을 박리다매하는 편이 훨씬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하여 이 망치를 만들었고, 망치의 힘을 빌린 롤로망은 대부호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용 조건:레벨 210이상. 근력 603이상. 중급 대장장이 기술.
*복제 된 아이템입니다. 24시간 후에 파괴됩니다.
유니크 망치임에도 불구하고 유니크 아이템 제작 확률을 올려주는 옵션이 없다. 하지만 에픽 등급의 제작 확률을 크게 상승시켰다.
그리드가 굳이 진해청의 망치를 복제한 이유다. 적어도 이번 퀘스트에서 만큼은 진해청의 망치가 최고의 무기였다.
그리드가 이어서 신격을 사용했다.
[신으로 칭송 받아 마땅한 대장장이의 위용을 과시합니다. 모든 대장장이 관련 스킬의 캐스팅 시간과 재사용 대기 시간이 삭제됩니다. 총 2회까지 적용됩니다.]
[<파그마의 눈>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초기화됩니다.]
“파그마의 눈.”
망치를 복제하는 순간 평범하게 돌아왔던 그리드의 눈이 다시 파랗게 물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에 잠시 멍해졌던 대장장이들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리드의 손에는 <대부호의 망치>가 2자루 쥐어져 있었다.
물론 원본 망치는 여전히 진해청의 손에 있었고.
복제한 아이템의 정보를 대장장이들에게 공유한 그리드가 2자루 망치를 알란타와 시더에게 건네주었다.
“지금부터 저는 1시간 간격으로 여러분에게 이것과 똑같은 망치를 지급할 겁니다. 건투를 빕니다.”
물론, 아예 처음부터 대부호의 망치를 제작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과연 오토 제작으로 대부호의 망치를 재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명색이 유니크 아이템 아닌가.
“.....”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장장이 모두 입에 파리가 들어가는 것도 모른 채 멍하니 있었다.
***
“됐다!!”
퀘스트 종료까지 6시간을 남겼을 때였다.
“우와아아아!!”
“우리가 해냈어! 해냈다고!!”
대장장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히든 퀘스트★ <동대륙 체험(3)>을 클리어하였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축복 받은 방어구 강화석> 20개를 획득하였습니다.]
희망이 없었던 퀘스트.
성공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퀘스트를 클리어 해버렸다.
그리드가 계속해서 복제해준 망치 덕분이었다.
템빨의 위력을 절실히 체험할 수 있게 된 대장장이들이 그리드에게 선망의 시선을 보냈다.
그리드는 내심 으쓱해졌다. 지난 수 년 동안 자신이 경험하고 해결해온 모든 사건이 기적이라는 결과를 만들었으니 자부심이 충만했다.
하지만 지금은 평정심을 유지해야할 때다.
들뜬 마음을 억누른 그리드가 굳은 표정으로 알림창을 기다렸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연계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역시나.
쉴 틈도 없이, 새로운 퀘스트가 곧바로 떠올랐다.
<도사 사냥>
★히든 퀘스트★
판게아에 출몰하는 강시의 숫자가 이상할 정도로 많습니다. 판게아 인근에 강시를 제작하고 조종하는 도사가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도사를 찾아 쓰러뜨리십시오. 새로운 무기를 무장한 판게아의 주민들이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3일 내에 도사 사망.
퀘스트 클리어 보상:
1.연계 히든 퀘스트 생성.
2.무작위 엘릭서 3개.
퀘스트 실패 시:레벨 마이너스 2. 가장 높은 능력치 영구적으로 30 하락.
2개의 레벨과 30개의 능력치를 잃는다.
퀘스트 실패 시 감수해야하는 페널티가 무척 커졌다.
하지만 그리드는 두렵지 않았다.
그리드에게 가장 높은 능력치란 손재주였고, 근본은 대장장이인 그리드의 입장에서 손재주를 올리는 일은 무척 쉬웠기 때문이다. 손재주 조금 잃는 일 따위 문제가 아니었다.
‘레벨도 날 잡고 사냥하면 금방 복구할 수 있고.’
지금 주목해야할 부분은 보상에 있다.
엘릭서.
능력치 10개를 영구적으로 상승시켜주는 궁극의 비약.
그걸 무려 3개나 얻을 수 있는 기회다.
아닌 게 아니라, 다른 대장장이들 또한 보상이 탐나는 눈치였다. 하지만 두려운 기색이 더 컸다.
“도사는 또 뭐지?”
“강시들과 싸워야 되는 건가...”
대장장이들은 그리드와 다르다. 전투 능력이 없다. 원래라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던 그들의 입장에서 점차 상승하는 퀘스트 난이도와 페널티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물론 엘릭서가 탐나기는 했지만, 레벨 올리기가 어려운 비전투 직업군 특성상 레벨보다 엘릭서가 더 좋다고 확언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중도 하차는 불가능하다.
대장장이들은 꺾인 사기를 다시 세우고자 애썼다.
그들을 안타깝게 쳐다보던 그리드가 주민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새로운 무기와 갑옷을 무장한 주민들은 사기가 충천한 상태였다. 전보다 몇 배는 강해진 감각을 느끼며, 판게아를 지켜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들에게 그리드가 물었다.
“강시들이 어느 방향에서 출몰했었습니까?”
“대부분의 강시들이 남쪽에서 왔습니다.”
“남쪽이라....”
도사의 위치를 대강 파악한 그리드가 중얼거리자 주민들이 비장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또 저희들을 위해서 싸워주시려는 겁니까.”
“저희도 힘을 보탤 수 있도록 허락해주세요.”
“결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판덕공을 따라가게 해주십시오!!”
“좋습니다.”
그리드는 거부하지 않았다. 캐릭터 관찰로 주민들의 정보를 확인해본 결과 대부분의 주민들이 300레벨이 넘었고, 약간이나마 전투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강시를 대량으로 소환할 수도 있는 도사와의 싸움에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리드를 위시한 일행이 서쪽으로 이동했다.
깡충! 깡충!
주민들의 제보가 맞았다.
강시들은 허물어진 서쪽 성벽을 뛰어넘어 판게아에 진입하고 있었다.
그리드와 주민들은 강시를 베면서 전진했다. 강시들이 오는 방향을 역으로 추적해서 도사에게 접근해갔다.
그리고 일행은 깊은 동굴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절벽 아래 뚫린 동굴이었다.
강시들이 그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계속, 계속.
“어떤 쳐 죽일 놈이...!”
주민들이 흉흉한 살기를 피어 올렸다.
그들은 강시를 만들어 판게아를 공격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도사를 결코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저놈의 도사 때문에 삶의 터전을 복구할 기회조차 없었고, 벌써 몇 명의 가족과 친구를 잃었는지 모른다.
그리드가 선두에 섰다.
스파앗-!
그리드의 머리 위에 떠오른 빛의 정령이 캄캄한 동굴을 밝혀주었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키에에에엑!!
동굴 깊은 곳에서 커다란 몸집의 강시 3마리가 튀어나왔다.
혈강시였다.
철강시, 독강시와 달리 산 자를 재료로 만든 강시다. 처녀의 피와 온갖 극독초를 혼합하여 제작하는 이놈들은 철강시보다 3배 이상 단단하고 빨랐다. 약간의 지능을 갖췄기 때문에 상대하기 까다로운 부분이 많았다.
“허억!!”
혈강시를 알아 본 주민들이 대경했다. 무사보다 강하다는 혈강시가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들이 깊은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그리드는 침착했다.
“연(聯).”
나비처럼 현란한 검무가 단 한 걸음 뒤에 연계된다.
군대조차 위협하는 혈강시 3마리가 단 수초 만에 수십 덩이의 고기조각으로 변해서 후두둑,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드의 차가운 시선이 몸을 벌벌 떨고 있는 어떤 중년인에게 꽂혔다.
동굴 끝에 숨어있던 도사였다. 혈강시 3마리를 순식간에 해치운 그리드의 무위를 목격한 탓인지 그는 하얗게 질려있었다.
“나를 상대하려면 최소 흑마강시쯤은 준비했어야....?”
콧방귀 뀌던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겁에 질린 도사의 시선이 꽂히는 방향.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등 뒤라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누구...?’
그리드가 황급히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쿠와아앙-!
돌풍이 불어 닥쳤고, 그리드의 뒤편에 서있던 대장장이들과 주민들의 몸은 폭죽처럼 터졌다.
그리드의 가슴 또한 강한 압력에 짓눌리고 있었다.
[29,59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방어력 하락 디버프를 먹은 상태로 대악마에게 얻어맞으면 이런 느낌일까?
숨을 멎게 만드는 끔찍한 격통 속에서, 그리드는 도포 차림의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시대의 강자를 발견하였습니다.]
[영웅왕의 투지가 끓어오르기 시작합니다.]
대장장이들과 주민들의 시체더미를 밟고 선 사내.
양반 가람이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놈 하나 잡자고 벌인 일이건만, 별 잡놈들을 주렁주렁 달고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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