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3권 - 23화
“운영자가 움직였습니다.”
S.A그룹 운영팀은 NPC를 코드네임으로 부른다. 업무상 편의다. 코드의 배열이 NPC의 기능과 역할을 보다 직관적으로 알려줬다.
하지만 극히 소수의 NPC는 코드네임이 아닌 이름, 혹은 별칭으로 불렸다. 한 번만 들어도 기억에 남는 특별한 ‘개성’을 지녔기 때문인데, 그중에서도 <운영자>는 특별했다.
코드네임 S-001.
이름은 한울.
대악마 바알, 대천사 라파엘과 마찬가지로 최상위 격을 지닌 그의 개성은 <퀘스트 부여>였다. 바알이 계약자(아그너스)를 만들고 이를 토대로 한정 된 <에피소드>에 접근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한울은 불특정 다수의 플레이어에게 역할과 상황을 부여함으로써 보다 다양한 에피소드를 ‘창조’할 수 있었다.
Satisfy 출시 후 5년.
S.A그룹은 드디어 처음으로 움직인 한울이 반가웠다. 그리드와 크라우젤을 비롯한 일부 플레이어 탓에 정체됐던 이야기들을 다시 꽃피우거나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갈 한울이 Satisfy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예측했다.
***
<하늘의 부름>
★히든 퀘스트★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당신의 힘을 필요로 합니다.
동대륙 시작의 도시 ‘판게아’로 이동하십시오. 고난에 빠진 판게아의 주민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3일 내에 판게아 도착
퀘스트 클리어 보상:
1.연계 히든 퀘스트 생성.
2.유니크 등급 무기 제작법(1회용 소모성 아이템)
퀘스트 실패 시:페널티 없음.
“헉. 이게 뭐야?”
레벨, 능력, 지위.
무엇도 상관없었다.
대장장이 직업을 가진 플레이어라면 모두가 똑같은 퀘스트를 받았다. 아무런 전조 없이, 갑자기 발생한 현상이었다.
대륙 각지에서 활동 중인 대장장이들 모두가 기쁨에 춤을 췄다.
“보상이 엄청나군! 뭔 일인지는 몰라도 대박이야! 푸하하!!”
“내 생에 히든 퀘스트를 얻는 날이 올 줄이야... 이게 웬 떡이래.”
“다른 대장장이들도 모두 퀘스트를 받았다고? 특정 직업군 혜택 퀘스트라.... 언젠가는 다른 직업군 플레이어들도 이런 식의 퀘스트를 받게 되는 건가?”
“아니야. 오직 대장장이에게만 주는 특전일 수도 있어. 이건 어쩌면 그리드 덕분일지도 몰라.”
“갑자기 그리드 이름이 왜 나와?”
“이 멍청아 그새 잊었어? 그리드가 대장장이의 신한테 축복을 받은 덕택에 대장장이 전부가 버프를 받았었잖아. 이번 퀘스트는 그 연장선인 셈이지.”
“아....!”
그리드, 그리드, 그리드.
아무 생각 없이 기뻐할 뿐이던 대장장이들의 입에서 템빨왕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누군가와 같은 계열의 직업을 가진 덕분에 혜택을 얻는다는 것.
무척 기쁜 일이었다.
무료 버스에 탑승한 기분이랄까.
“그리드 따라서 대장장이하기를 잘했지... 보상 진짜 좋네.”
‘아이템 이름’이 아니라 ‘등급’이 수식으로 붙은 제작법은 특별하다. 무조건 명시 된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된다.
이번 히든 퀘스트 보상은 ‘유니크 등급의 무기’를 확정적으로 제공해주는 셈이다.
1번만 사용하면 소모되는 제작법이라고 하나, 탐나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유니크 등급 무기의 가치는 옵션에 따라서 수천 만~수억 원을 호가하였으니까. 그 가치는 100레벨 제한 무기라도, 200레벨, 300레벨 제한 무기라도 비슷하다. 워낙 유저수가 많은 게임이기 때문에 어떤 레벨 구간에도 사람은 넘쳤고 고등급 아이템의 공급은 부족했다.
‘반드시 퀘스트를 깬다!’
모든 대장장이가 공통 된 목적을 품었다.
뒤늦게 게임을 시작한 바람에 레벨이 아직 100조차 안 된 플레이어도, 랭킹에 등록 된 플레이어도 모두 같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동대륙으로 넘어가는 방법이다.
최근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서대륙과 동대륙을 오가고 있었지만, 그 숫자는 아직 일만 단위가 안 된다.
수천.
플레이어 숫자가 20억을 넘는다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지극히 소수였다.
평범한 대장장이들이 동대륙을 건넌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고, 이내 대륙 곳곳에서 욕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염병. 깨지도 못할 퀘스트를 주면 뭐 어쩌라는 거야?”
“시불 괜히 좋아했네... 사람 놀리나?”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에 <동대륙 이동 방법 구입>이라는 제목의 게시글이 속속들이 등록되고 있었다.
하지만 저들 중 누구도 동대륙을 밟지 못할 것이었다. 남들은 아직 경험하지 못한 무대를 선점할 수 있는 기회를 고작 돈 몇 푼에 팔아넘길 바보는 없었으니까.
***
‘히든 퀘스트는 말 그대로 숨겨진 퀘스트인데....’
대장장이 랭킹 1위 판미르는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모든 대장장이에게 떠오른 히든 퀘스트가 영 수상했다. 이렇게 쉽게 공개되는 퀘스트가 히든 퀘스트라고? 함정 같은 느낌이다.
‘어차피 클리어도 못할 퀘스트. 깊이 생각할 것도 없지.’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판미르가 퀘스트 창을 닫았다. 그리고 여전히 동요하고 있는 대장장이들을 추슬러서 작업을 재개했다.
따앙-! 따앙! 따앙!!
템빨국이 자랑하는 라인하르트 대장간 지구에 화음 같은 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수의 대장장이를 거느리게 된 템빨국의 무구 생산 속도는 이제 대륙 제일인지라, 일개 병사들에게까지 <양산형 그리드 세트>가 보급되고 있었다.
대장간 지구는 템빨국의 심장이었다.
열기가 뜨거운 그곳에.
“수고들 하십니다.”
템빨왕 그리드가 등장했다.
“오오...!”
대장장이들이 작업을 멈추며 환호했다. 신에게도 인정받은 전설의 대장장이... 우리들에게 큰 이익을 안겨준 영웅의 등장을 환영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리드 님! 아이템 만드는 모습 좀 보여주세요!”
“너무너무 뵙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보니까 더 잘생겼다!!”
소란을 피우는 대장장이들에게 그리드가 질문했다.
“여러분은 히든 퀘스트 못 받으셨습니까?”
대표로 나선 판미르가 대답했다.
“당연히 우리도 받았다네.”
“그런데 왜 여기서 이러고 계세요? 퀘스트 깨러 안 가요?”
대장장이들이 술렁였다.
“저희야 가고 싶어도 못 가니까 포기하고 있었죠.”
“그리드 님은 동대륙으로 넘어가는 방법을 아시는 겁니까?”
쏟아지는 질문에,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이었다.
“불길하네.”
판미르가 그리드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았지만 조건 없는 호의를 받은 기억이 드물어. 한데 이번 퀘스트는 특정한 조건도 없이 발생했을 뿐더러 커다란 보상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네. 내가 느끼기에는 자칫 함정 같아.”
연륜이다.
노년에 접어들고 있는 판미르는 자신이 보고 겪어온 것들을 토대로 그리드에게 충고했다.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하시는 부분 알 것 같습니다. 갑자기 뜬 히든 퀘스트이니만큼 경계하는 것이 옳겠죠.”
“알아줘서 다행일세.”
“하지만 과연 조건 없는 퀘스트일까요? 이번 퀘스트에도 조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대장장이라는 직업이죠.”
“.....”
“저는 판게아를 다녀온 경험이 있습니다. 그곳의 주민들 대부분이 지금은 템빨국의 백성이 되었죠. 하지만 모두가 저를 따라왔던 건 아닙니다. 일부는 판게아에 남아 모두가 떠난 도시를 외롭게 지켰습니다.”
그리드의 추론은 이랬다.
“이번 퀘스트는 그들을 도우라는 신의 계시입니다. 퀘스트에서 말하는 초월적인 존재란 저와 호감도를 쌓은 헥세타이아 신이며, 헥세타이아 신은 자신을 섬기는 대장장이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활약할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는 겁니다. 판게아에서 고통 받는 백성들을 도와주는 대신 큰 보상을 받으라고. 일종의 포상인 셈이죠.”
“그럴 듯한 해석이군. 레베카 여신을 섬기는 레베카교인들이 종종 그런 식의 퀘스트를 받는다고 하니까 일리가 있어. 하지만 왜 하필 판게아지? 판게아와 헥세타이아 신 사이에 접점이 있는가?”
“엥.... 그건 모르겠는데....”
그리드는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퀘스트의 무대가 왜 하필 판게아인지는 알 수 없었다.
판게아의 주민 중에 헥세타이아 신을 섬기는 사람이 있는 걸까?
아니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헥세타이아 신이 그렇게까지 삐뚤어졌을 리 없다.
“....뭐. 일단 가보면 알겠죠.”
그리드는 퀘스트에서 말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헥세타이아 신일 거라는 믿음을 떨칠 수 없었다.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판미르도 더 이상 말리지 못했다. 그리드의 추론이 제법 그럴듯했기 때문이다. 다소 불안한 측면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동대륙으로 갈 수만 있다면 가는 게 좋다고 보았다.
“하지만 자네에게는 유니크 등급의 제작법 따위 무의미하지 않은가? 나만 해도 딱히 필요가 없는데.”
“네. 하지만 다른 대장장이들에게는 필요하겠죠.”
대답하는 그리드가 대장간 지구 광장에 모여 있는 대장장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국가도, 인종도, 성별도 다르지만 오로지 나를 믿고 템빨국으로 이주해온 이들.
그리드는 저들에게 보탬이 되고 싶었다. 저들이 유니크 아이템을 생산하고 템빨국 내에서 유통한다면 템빨국의 전력이 한층 더 발전할 거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리고 연계 퀘스트가 기대되기도 하고...”
“그렇지. 대부분의 퀘스트는 연계 퀘스트 보상이 더 좋은 법이니까.”
“판미르 당신도 가실 거죠?”
“아니. 나는 여기 남겠네.”
“왜요? 보상 안 챙기세요?”
“누군가는 저들을 이끌어야하지 않겠나.”
판미르의 시선이 광장 뒤편에 늘어선 대장간들을 가리켰다. 대장간마다 작업에 열중하는 대장장이들이 보였다. 숫자가 제법 많았다. 그들은 광장에 모인 인파에 관심 없는 눈치였다.
“어떤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 노력하는 자들일세. 언젠가는 칸이라는 분의 뒤를 이어 제3의, 제4의 전설이 되기를 꿈꾸는 이들이지. 특히 랏츠라는 녀석을 기억해두게. 하루에 로그아웃도 2번밖에 안 하고 온종일 모루만 두드리고 있으니까.”
“템빨국의 미래를 짊어지게 될 인재들이라는 거군요.”
“그래. 그리고 내 랭킹을 위협하는 경쟁자들이기도 하지. 나는 이곳에 남아 저들과 함께 일하겠네. 애초에 쌓인 일거리도 많아. 너무 많은 사람이 자리를 비웠다가는 라우엘 재상이 날뛸게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두를 한꺼번에 이동시킬 계획은 없어요. 팀을 나눠서 순차적으로 이동시킬 겁니다. 그럼 업무에 지장도 안 생기겠죠. 판미르, 이번 퀘스트는 판게아에 도착만하면 되요. 스틱세이의 도움을 받으면 몇 분 내로 다녀올 수 있는데, 그 정도 여유도 없으신 겁니까?”
“판게아에 도착하는 순간 발생할 연계 퀘스트가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모르지 않나. 금방 다시 못 돌아올 수도 있지. 그럼 낭패야.”
“흐음.... 그럼 일단 첫 번째로 출발하는 팀이 무사히, 빠르게 다녀올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겠군요. 좋습니다.”
판미르와 대화를 끝낸 그리드가 단상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수천 명의 대장장이가 기대감 어린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레벨이 가장 높은 대장장이 순으로 100명. 저와 함께 첫 번째로 판게아로 이동하게 될 인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