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3권 - 12화
“파멸의 기사, 싱클레드 경을 뵙습니다.”
“....?”
금기가 되어 잊혀졌을 나의 이명을 알고 있다고?
아스모펠 일행과 함께 템빨국에 도착한 싱클레드가 어리둥절해졌다.
자신을 마중 나온 여성이 왠지 낯익었기 때문이다.
만물을 꿰뚫어보는 듯이 깊은 눈동자.... 흔치 않다.
“....메르세데스?”
아무래도 맞는 듯하다.
어엿한 숙녀가 되어 긴가민가했으나, 자세히 볼수록 어렴풋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피아로 대장의 종자였던 소녀.
하지만 청발 아니었던가?
애초에 그녀가 템빨국에 있을 리가?
자신의 기억을 확신하지 못하고 혼란을 겪는 싱클레드에게.
“기억해주셔서 영광입니다.”
백발의 미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본인이 메르세데스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싱클레드가 질색한다.
“빌어먹을 아스모펠 놈....! 역시 함정이었나!!”
늑대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인 싱클레드가 잽싸게 칼을 뽑았다.
그는 머레이에 머무는 동안에도 제국에 관한 정보를 꾸준히 수집해왔다. 피아로의 종자였던 메르세데스가 새로운 적기사단의 1번 기사가 됐다는 사실쯤이야 당연히 알고 있었다.
메르세데스가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라고 오해한 싱클레드는 템빨국과 제국의 관계까지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제국이 템빨국에 화친을 요청했다...!? 휴접 협정이라고!? 핫! 모든 게 연극이었고, 실상은 템빨국 또한 제국의 속국에 불과했던가....!!”
외치며, 살기를 내뿜는 싱클레드였으나.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현재 템빨왕 전하를 섬기고 있습니다.”
“뭐....?”
메르세데스의 허황한 설명이 싱클레드의 살기에 제약을 주었다.
당황하며 주춤거리는 싱클레드에게 아스모펠이 덧붙여주었다.
“말 그대로다. 그녀는 더 이상 적기사가 아니야.”
“나보고 그딴 개소리를 믿으라고?”
제국을 위해서 싸워온 메르세데스의 무용담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머레이에 머물렀던 싱클레드조차도 그녀의 무용담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을 정도다.
황제가 자랑하는 최고의 사냥개가 제국을 벗어나 템빨국을 섬기게 되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사실일세.”
“대, 대장...!”
싱클레드가 신뢰하고 존경하는 검호 피아로가 나타나 메르세데스의 주장에 무게를 실어주었으니....
“싱클레드, 이제 자네도 꽤 늙었구만.”
“...대장!!!”
싱클레드는 더 이상 의심하지 못했다.
와락!
솟구치는 눈물을 주체 못한 그가 피아로의 품에 안겨들었다.
과거, 제국의 적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파멸의 기사조차도 피아로 앞에서는 순한 양인 것이었다.
“고생 많았네. 정말로 고생 많았어.”
이제는 중년이 된 옛 동료의 등을 다독여주는 피아로.
그는 싱클레드가 얼마나 모진 고통을 받아왔을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 또한 같은 입장이었기에.
“대장...! 대장!! 흑...! 흑흑흑!!”
붉게 충혈 된 눈으로 석양을 바라보는 피아로와, 그의 품에 안긴 채 엉엉 우는 싱클레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땅거미 진 대지를 바라보는 아스모펠.
옛 영웅들의 서글픈 신세를 지켜보는 메르세데스의 가슴은 찢어질 것만 같이 아팠다.
***
[여신의 축복을 사용합니다.]
[<(신과 대적하는)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을 강화합니다.]
[<(신과 대적하는)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이 <眞-(신과 대적하는)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로 승격합니다!]
<眞-(신과 대적하는)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
<제작>버튼이 활성화되며 아이템 제작에 걸리는 시간이 대폭 감소합니다.
최소 에픽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됩니다.
다소 높은 확률로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됩니다.
일정 확률로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됩니다.
일정 조건이 충족 될 경우, 희박한 확률로 신화 등급 모작이나 신화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됩니다.
*제작 아이템의 모든 능력치가 30% 상승합니다.
*신화 등급의 아이템 제작 시, 모든 능력치가 20, 대륙 전역 명성이 1,000 오릅니다.
*신화 등급 아이템의 제작 횟수가 3회가 될 때마다 특수한 일이 발생합니다.
*강화 된 스킬은 레벨이 마스터로 고정 됩니다.
따앙-!
칠악성의 유혹을 뿌리치고 최초의 성검을 정화한 그리드.
여신의 축복을 2개나 갖고 있는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예정대로 대장장이의 기술을 강화했다.
그의 손에는 <신과 대적하는 대장장이의 망치>가 들려있었다.
‘오토 제작....!’
그리드는 잔뜩 들뜬 상태였다. 드디어 남들과 마찬가지로 아이템을 자동 제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기대감이 컸다.
‘우선 제작법을 선택하고, 제작에 필요한 재료들을 준비한 뒤에 제작 버튼을 누르면 된다, 이거지?’
마치 초보대장장이처럼 차근차근 가이드를 살핀 그리드가 <양산형 그리드 세트>의 제작법을 선택했다. 그리고 필요한 재료들을 준비한 뒤 시야 한쪽에 떠오르는 아이템 제작 버튼을 클릭했다.
그러자!
[아이템 제작에 돌입합니다.]
따앙! 따앙!! 따앙!!!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리드의 몸이 스스로 움직이며 용광로의 온도를 높이고 철을 제련한 후 단조질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드가 직접 생각하고 궁리할 필요 없이 몸이 알아서 대장일에 열중했다.
따앙! 따앙! 따앙!
‘이거 겁나 편하잖아?’
그리드가 연신 감탄했다.
여태까지 아이템을 수동으로 제작해왔던 그는 신경 써야할 부분이 너무 많았었다. 불의 온도를 조절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단조질과 담금질 횟수, 타이밍, 아이템의 규격을 틀리지 않기 위한 노력 등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온갖 것을 신경 써야했다. 아이템을 제작하는 수 시간, 수 일 동안 몸만 힘든 게 아니라 정신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템을 오토로 제작할 수 있게 된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리드는 아무 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몸이 알아서 아이템을 만들어줬으니 정신적으로 큰 여유가 생겼다.
‘와, 씨. 여태까지 다른 대장장이들은 죄다 이렇게 꿀 빨고 살았다 이거지?’
편하다. 편해도 너무 편하다.
몸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지만 빈둥거리는 느낌이다.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겠는데?’
그리드의 유일한 재능은 노력이다. 노력을 멈추는 순간 남들에게 금방 따라잡힐 거라고 믿는 그의 성격 상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못했다.
“.....”
의식에 여유가 생긴 그리드가 의식을 활용하기 위해서 집중했다.
아이템 제작에 열중 중인 육신으로부터 의식을 완전하게 분리, 세상과 격리 된 자신만의 영역에 진입한다.
‘트리플 캐스팅을 연습해야겠어.’
트리플 캐스팅!
신화급 아이템 <벨리알의 지팡이>에 귀속 된 옵션이다.
3개의 마법을 동시에 캐스팅하고 전개할 수 있는, 오버 파워 수준의 옵션이었다.
남들은 마법 1개를 사용할 때 혼자서 3개의 마법을 사용한다고 생각해 보라.
‘완전 개사기지.’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트리플 캐스팅을 위해서는 3개 마법의 시동어를 동시에 떠올려야한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서 매직 미사일과 윈드 커터, 그리고 파이어 볼의 3개 마법을 트리플 캐스팅하기 위해서는 <매직 미사일>, <윈드 커터>, <파이어 볼> 3개의 이름을 머릿속에 동시에, 시간 차 없이 떠올려야하는 것이다. 당연히 고난이도였다.
‘더블 캐스팅이야 운 좋게 아다리 맞으면 성공할 때도 있었지만 트리플 캐스팅은 운으로 성공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마법 이름. 아니, 좋아하는 연예인 3명의 이름을 머릿속에 동시에 떠올려 보라고 요청할 경우 이를 성공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장담컨대 100이면 100 실패할 것이다.
그리드가 판단했을 때 트리플 캐스팅은 수련의 영역이었다. 반복해서 연습하고 숙달되지 않는 이상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다.
‘매직 미사일, 파이어 불, 원두 컵.... 매직 미사일, 빠이어, 윈드.... 매직 밀, 빠....! 염병!!’
따앙! 따앙! 따앙!!
육체가 스스로 움직이며 아이템을 제작하는 동안,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반복해서 연습해 봐도 도리어 더 복잡해진다. 자꾸 생각이 꼬인다.
그리드는 너무 답답한 나머지 몸이 배배 꼬이고 식은땀이 흘렀다. 막 짜증이 났다. 신경질 나서 눈물이 글썽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매직 미사일, 파이어 볼, 윈드.... 매직.... 파이리.... 윈둥....’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연습했다. 아무리 생각이 꼬여도 다시 계속 반복했다.
애초에 하루아침에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초조해하지 않고 인내하고자 노력했다.
***
“그래, 머레이의 왕께서....”
광활한 논밭.
나란히 앉은 피아로와 싱클레드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피아로는 싱클레드를 도와주었다는 머레이 국왕에게 깊은 감사를 느꼈고, 아스모펠이 무슨 경위로 적기사들을 배신했는지 알게 된 싱클레드는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그래도 역시 저는 아스모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싱클레드는 생생히 기억한다.
황도 곳곳에 걸렸던 가족들의 수급....
자신과 동료들에게 검을 겨누었던 배반자 아스모펠....
그 지옥 같은 광경이 뇌리에서 떨쳐지질 않았다. 여전히 매일 밤마다 악몽으로 되풀이되고 있었다.
“저는.... 저는.....”
아스모펠과 황제의 심장에 칼을 꽂겠노라.
싱클레드는 오로지 그 일념만으로 지난 12년을 버텨왔다.
이제 와서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아스모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용서하라고 말하지 않겠네.”
분노, 혼란, 초조, 고통에 휩싸인 채 몸을 떠는 싱클레드의 어깨 위로 피아로가 손을 얹는다.
“아스모펠 본인 또한 용서 받기를 원치 않아.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하네. 아스모펠의 배후에는 황비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의 진정한 적은 그녀야.”
“.....”
“아스모펠의 처분은 황비에게 복수한 뒤에 결정하도록 합세.”
“....네, 알겠습니다.”
쏴아아아-
바람이 분다.
황금빛으로 물든 밀밭이 파도처럼 출렁였고, 레인보우 포테이토의 잎사귀들은 토끼의 귀처럼 살랑살랑 움직이며 새들을 유혹했다.
끼이이-!
하늘에서 내려온 매가 레인보우 포테이토의 잎사귀를 움켜쥐었다가 다시금 상공하는 그때.
‘저자가 피아로....’
붉은 현자 하스터는 피아로를 주시하고 있었다.
궁극의 검술을 자랑하는 검호였고, 황제와 백성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던 기둥이라고 했던가.
스승 윈프레드가 입에 침이 닳도록 칭찬했던 거물 중의 거물 피아로가 하스터를 긴장시켰다.
‘벨리알 레이드에서도 그리드 이상으로 활약했었지.’
NPC답게 꾸준히 성장해왔을 지금의 피아로는 그리드의 분신보다 더 강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하스터의 몸과 마음이 달아올랐다.
하스터는 강자와의 대결에서 얻을 수 있는 배움의 기회와 대결에서 승리하고 얻게 될 보상이 벌써부터 기대되었다.
‘전대 적기사들과 대결하다보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터. 국가대항전 전까지 그리드와 비견되는 수준까지 성장할 수도 있다.’
자, 우선은 패배해도 된다. 다시 도전하면 그만이다. 그러니까 일단 시작해보자.
싱클레드와 피아로에게 차례대로 대전을 신청하고 한 단계, 두 단계 발전하자.
결심한 하스터가 저 멀리 앉아있는 피아로에게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어이, 새싹을 밟으면 어떡해?”
구석에 앉아 밭일 중이던 농부 하나가 하스터의 발목을 붙잡았다.
“....?”
걸음을 멈춘 하스터가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자신이 파란 잎사귀를 밟고 있음을 알게 됐다.
“죄송합니다.”
프로게이머 출신인 하스터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믿었다.
또한 스승 윈프레드와 긴 세월 함께한 만큼 NPC에 대한 편견도 없었다.
상대가 비록 농부 NPC라고 해도 무시하지 않고 예의 바르게 사과했다.
꾸벅, 고개 숙인 후 다시 걸음을 옮기는 하스터의 귓가로.
“어쭈? 또 밟아?”
농부의 음성이 재차 들려왔다.
아차 싶었던 하스터가 잽싸게 발을 치웠지만 농부는 이미 머리끝까지 화가 난 눈치였다.
“아니, 애초에 너 뭐냐? 딱 봐도 외부인 같은데 왜 논밭에 숨어든 거야? 제국에서 보낸 첩자야?”
으르렁 거리며 밀짚모자를 벗어 던지는 농부, NPC가 아니라 플레이어였다.
아이디는 휴렌트.
하스터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오러 마스터?’
지난 수 년 동안 한 자릿수 랭킹을 유지하다가 홀연히 사라졌던 거물이 왜 여기서 밭일을 하고 있는 거지?
당황하는 하스터에게 휴렌트는 연신 수상쩍다는 눈빛을 보냈다.
“첩자 맞지? 너 지금 쥐새끼마냥 살금살금 피아로 님한테 다가갔잖아? 피아로 님을 해치려는 암살자지?”
“아니, 그게 무슨 가당치 않은 억측입니까? 나는 암살을 하려는 게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대결을 신청하려고....”
“뭐? 대결? 네가 누군데? 하스터? 피아로 님이 너 같은 어중이떠중이들을 일일이 상대해줄 정도로 한가하신 분 같아?”
“....어중이떠중이? 내 이름을 처음 들어보나?”
“그럼 두 번째 들어봐야 되냐?”
“하....?”
나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세계 최고의 프로게이머다.
하스터의 자부심이었다.
그는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을 거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휴렌트는 하스터를 몰랐고, 하스터의 자존심은 깨진 유리처럼 갈라졌다.
심지어 휴렌트는.
퍽-!
감자내음이 나는 소쿠리를 휘둘러서 하스터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하스터를 적이라고 단단히 오해한 눈치였다.
하스터는 굳이 오해를 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우선 당신에게 예의범절부터 가르쳐야겠군.”
“남의 논밭에 함부로 침입한 도둑놈에다가 암살자 주제에 예절을 논해?”
그렇게 말하는 휴렌트 본인은 군대까지 이끌고 템빨국을 침략했던 인물이다.
빠직!
하스터의 인내에 한계가 왔다.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운 그가 검을 뽑았다.
기적의 5인방 중 하나이자 전대 지존 크라우젤을 꺾은 전력이 있는 최강의 실력자가 세상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단, 상대가 나빴다.
검성 후보의 경지에 올랐었고,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염을 토했었던 휴렌트는 지난 수 년 동안 피아로에게 수련을 받아왔다. 심지어 피아로에게 직접 선택 받은 남자다.
퍼억-!
“....!?”
오러가 깃든 소쿠리에 얻어맞은 하스터가 아찔한 고통을 느꼈다.
소쿠리가 너무 가벼운 나머지 소리 없이 날아온 공격이었다.
예측하기 힘든 궤도와 예상치 못한 파괴력을 엿본 하스터의 등골이 오싹해진다.
“너도 우리와 동류였나....!”
“우리가 누군데? 오러 스네이크!”
“...잠....!!”
쿠콰콰콰콰쾅-!!
논밭이 들썩인다.
멀리, 뒷짐 지고 선 피아로는 허허 웃고 있었다.
“휴렌트 녀석, 내일부터 노동량을 늘리고 싶은가보군. 과연 귀감이 되는 농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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