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3권 - 11화
그리드와 분신의 전투가 끝난 후.
전대 적기사 싱클레드는 머레이의 국왕을 알현하고 있었다.
“그동안 큰 신세를 졌습니다. 전하께서 베풀어주신 하해와 같은 은혜,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잊지 않을 것입니다.”
“.....”
싱클레드가 이제 떠나겠노라 하자 젊은 왕은 아쉬웠다. 벌써 10년 이상 머물던 손님이 아니던가. 왕의 솔직한 심정이야 싱클레드가 떠나지 않았으면 했다. 앞으로도 머레이에 머물며 자신과 백성들을 위해서 싸워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래요. 잘 가세요.”
머레이 국왕은 자신의 바람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상처투성이 들개 같던 싱클레드와 처음 만났던 그날을 회상하며, 최대한 상냥하게 웃고자 애쓰며 싱클레드를 배웅했다.
소국의 왕에 불과한 자신에게는 싱클레드를 붙잡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
왕을 바라보는 싱클레드의 마음이 시큰거렸다.
평생을 헌신했던 조국에 버림받고 모든 것을 잃은 이후.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대륙을 정처 없이 떠돌던 자신을 거두어준 인물이 바로 머레이 국왕이었다.
국왕은 덕이 많은 사람이었다.
싱클레드가 머레이를 핍박하던 적기사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과거일 뿐이라며 원망하지 않았고, 싱클레드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라며 책임을 물지 않았다.
싱클레드는 국왕과 나눴던 대화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전하, 상처가 회복되면 떠나겠습니다.”
“왜요?”
“제가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제국에 알려졌다가는 전하와 전하의 백성들 모두 큰 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발각당할 일 없습니다. 나와 나의 신하들이 입단속만 잘하면 될 일이니까요.”
“제국은 막강한 재력과 권력으로 각국의 귀족들을 매수해왔습니다. 이곳 머레이에도 필시 제국의 끄나풀이....”
“아니요. 나의 신하들은 고작 몇 푼의 돈과 권력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뢰로 뭉쳐있습니다.”
“.....”
세상물정 모르는 젊은 왕이라고 생각했다.
저마다 각기 다른 사상과 야욕을 지녔을 수백 명의 귀족이 어찌 신뢰로 뭉칠 수 있단 말인가?
싱클레드는 제국이 머잖아 자신의 소재를 파악할 거라고 보았고, 그 전에 머레이를 떠나는 것이 그나마 폐를 덜 끼치는 일이라 보았다.
하지만 이후 11년.
제국은 여전히 싱클레드의 소재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싱클레드의 정보를 발설하지 않은 것이다.
머레이 왕국은 정말로 하나였다. 각자의 입장이 어찌됐든, 모든 신하들이 왕에게 충성하고 있었고 조국을 사랑하고 있었다.
멋진 나라였다.
배신과 음모가 난무하는 제국과는 달랐다.
“....전하.”
알현실을 떠나기 전.
싱클레드는 왕에게 약조했다.
“모든 일을 끝내고도 제가 살아있다면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이제 제 고향은 머레이니까요.”
모든 일이라.
제국에 버림받게 된 경위를 파악하고, 제국에 복수하는 일을 말함이라.
제국의 몰락, 혹은 싱클레드의 죽음.
결말은 단 두 개뿐이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대륙을 지배해온 제국의 몰락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국왕은 지금이라도 다시 싱클레드를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싱클레드의 염원을 알고 있기에 그저 응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멀리, 성벽 위에 오른 채 지켜보았던 흑발 왕의 모습을 떠올리며 기도할 뿐이다.
‘템빨왕이여. 귀하의 용맹으로 싱클레드 경을 지켜주소서.’
사실, 머레이는 신생국가 템빨국의 탄생이 달갑지 않았었다.
기존의 세력 구도를 무너뜨린 템빨국의 존재는 사하란 제국에게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대륙은 머잖아 템빨국 탓에 전화에 휩쓸릴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가?
템빨국은 모두의 예상보다 강했고, 더욱 견고한 세력 구도를 구축했다. 템빨국 탓에 제국은 도리어 기세가 죽었으며 대륙은 양강 체계를 맞이했다. 제국의 폭정에 숨통이 조여지고 있던 소국들은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템빨국에 사신단을 파견하세요.”
“이번 전투로 인해 발생한 손실 금액을 청구하실 계획입니까?”
“아니요.”
싱클레드가 떠나자 국왕은 가신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머레이는 제국의 속국에서 벗어나 템빨국의 우방이 될 것입니다.”
과거, 템빨국 건국식에 찾아갔다가 허겁지겁 돌아온 큐단 남작은 주장했었다.
템빨국은 일개 병사조차도 타국의 기사보다 강하니 감히 저력을 엿볼 수 없다고.
템빨국은 반드시 강대국으로 성장할 것이니, 템빨국과의 화친도 고려해야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당시 큐단 남작의 주장은 너무 허황된 것이었기 때문에 국왕과 귀족들은 섣불리 결정할 수 없었다.
허나 이제는 이야기가 다르다.
머레이 국왕은 싱클레드와 호각을 겨룬 템빨국 병사의 이야기를 들었고, 일국의 수도 일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템빨국 귀족들과 템빨왕의 전투력을 직접 목격했다.
템빨국은 새로운 희망이었다.
***
‘예상했던 것보다 더 험악한 분위기군.’
하스터는 아스모펠을 돕고 있었다. 아스모펠과 동행하면서 그에게 전대 적기사들의 위치를 제보해주었다.
이는 아스모펠과 그리드, 더 나아가서는 템빨국을 위한 일처럼 보였지만 하스터는 자원봉사자가 아니다.
하스터에게는 템빨국을 도울 이유가 하등 없다. 물론 의무도 없다. 하스터가 아스모펠을 돕는 이유는 당연히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다.
전대 적기사들과 만나 대결하고 승리하라는 내용의 전직 퀘스트.
하스터는 이 퀘스트를 클리어 해야지만 <붉은 현자>의 모든 스킬을 개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스터는 전대 적기사들의 실력을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웠고 변수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아스모펠을 내세웠다.
아스모펠과 전대 적기사가 먼저 대결하게끔 유도한 뒤, 상대방의 실력을 파악한 후에야 자신 또한 승부에 임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최후에는 아스모펠에게도 재도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대 적기사와 대결한다는 것이 의외로 쉽지가 않았다.
“.....”
아스모펠, 하스터, 싱클레드.
나란히 길을 걷는 세 사람의 분위기가 어색하다.
아스모펠은 앞만 보고 걸었고, 싱클레드는 아스모펠을 더러운 오물 보듯이 하며 그쪽으로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이런 우울하고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다짜고짜 싱클레드에게 대결을 신청해봤자 퇴짜 맞을 게 뻔했다.
‘그냥 기습해버리면 싸울 수야 있겠지만.... 스승님의 동료였던 자에게 굳이 미움을 사면서까지 강행하고 싶지는 않군. 기회는 천천히 노려봐야겠어. 그보다 템빨국인가....’
아스모펠은 싱클레드를 템빨국으로 인도하겠노라고 했다. 나머지 전대 적기사들은 그 후에 다시 찾자고 제안했고, 파티의 주체는 아스모펠이었기 때문에 하스터는 제안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템빨국.
플레이어가 최초로 세운 왕국은 어떤 모습일까? 언론에서 보았던 것처럼 활기가 넘칠까? 아니면 역시 언론은 과장되는 법일까?
Satisfy시간으로 7년 가까이 산골에만 틀어박혀 지냈던 하스터는 새삼 호기심이 생겼다. 어린아이처럼 들뜨는 마음도 있었다.
당연하다.
하스터에게 이번 아스모펠과의 동행은 ‘첫 모험’이었으니까.
그래, 하스터는 지난 수 년 동안 오로지 수련에만 매진해온 인물이다.
그리드, 크라우젤, 아그너스 등의 다른 기적의 5인방과 달리 산전수전을 겪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괴로웠다.
생각해보라.
무려 7년 동안 한 곳에만 틀어박힌 채, 1년 365일 매일 같은 공부만 반복한다는 건 끔찍한 지옥이었다.
다른 기적의 5인방들이 굵직한 사건과 사고를 겪으며 온갖 자극에 노출되고 이를 흥분과 의욕으로 승화시킬 때에도, 오직 하스터만큼은 무료한 나날을 인내했다. 아무런 자극 없이, 그저 똑같은 일상을 매일매일 반복했다.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느끼는 즐거움.... 그에게는 없었다. 사실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었을 정도로 지난 수년이 그에게는 고역이었다.
하지만 하스터는 인내했고, 그렇기에 붉은 현자가 될 수 있었다.
‘나의 고행이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행보와 비교해서 유난히 어려웠다고는 생각 안 해. 그들이 마냥 즐거웠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아. 노력이 동반되는 모든 일은 고생이 따르고 저마다 힘든 점이 있게 마련이니까.’
하스터는 스스로가 대견했지만 스스로를 추켜세우기 위해서 타인을 깎아내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그리드의 실력에 큰 감명을 받은 상태였다.
자신의 분신과 싸우는 그리드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그를 지존이라고 인정했다.
‘작년 국가대항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성장속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해.’
3할 아니, 2할.
‘그것도 아니야. 1할로 하자.’
이는 그리드와 싸웠을 때 이길 수 있는 확률이다.
하스터가 가늠하기로 현재의 자신은 그리드를 이기기가 무척 힘들었다.
‘물론 그리드가 분신과 싸울 때 보여줬던 실력이 전부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하스터는 엿보았다.
분신과 싸울 때의 그리드, 전력을 꺼내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그래, 마치 제3회 국가대항전 PvP 결승전과 같이....
“이봐.”
“네.”
생각에 잠긴 채 길을 걷던 하스터가 즉각 대답했다. 싱클레드가 수상하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뭐가 좋다고 혼자 히죽거리고 있는 거야?”
“...아, 제가 웃고 있었습니까?”
오래간만에 찾아온 자극이 기쁨이 됐나보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힌 하스터가 대답했다.
“새로운 라이벌을 찾은 것 같아서 말이죠.”
역사상 수많은 프로게이머들이 있었고, 그중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들은 전설이 되었다.
템빨국의 살신(殺神)이 존경하는 듯한 한국의 옛 프로게이머 또한 위대한 전설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몇 안 되는 전설들 중에도 영원한 승자는 없었다.
만인이 존경하고 사랑했던 전설들조차도 패배와 시련을 맛보고 좌절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단, 하스터는 달랐다.
현역 시절 하스터는 단 한 번의 패배도, 시련도, 좌절도 겪어보지 못했다. 그의 전적은 오로지 승리로 점철되어 있었다. FPS 게임계에서 그는 전설을 넘어선 신화였다.
‘당연히.’
하스터의 마음 한쪽에 자리 잡고 있던 크라우젤의 존재가 점차 희미해지고 그리드가 그 자리를 채운다.
‘Satisfy에서도 신화는 이어질 것이다.’
더욱 더 분발해서 강해지고, 언젠가는 반드시 그리드를 뛰어넘겠노라는 다짐을 세우는 하스터.
그의 목적은 그리드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게 아니다. 단지 자신의 기록을 위한 도전이었다.
전대 지존 크라우젤을 비교적 쉽게 쓰러뜨렸던 그는 모른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크라우젤은 패배에 익숙한 인물이며, 언제나 패배를 양분 삼아 성장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왜?
크라우젤 또한 자신과 같은 유형의 천재라고 오해하고 있었으니까.
***
세눈박이 괴물의 무덤.
수백 마리의 괴물들을 몰살시키고, 녀석들이 리스폰되기까지 짧은 명상에 임했던 크라우젤이 눈을 뜬다.
“10할.”
붉은 현자 하스터.
지난 수개월 동안 크라우젤에게 시련을 안겼던 거대한 장벽이 완벽하게 허물어졌다.
쿠우우우우우웅-!
수십 초 만에 리스폰 된 세눈박이 괴물들이 대지에서 솟아나는 돌의 칼날들을 감당 못하고 곧바로 산화한다. 여기도, 저기도 순식간에 몰살이다.
추락한 하늘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회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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