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3권 - 10화
최초의 레전드리 클래스 파그마의 후예는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히든 클래스다.
사람들은 파그마의 후예를 최고의 직업이라고 믿었다. 전설 등급 아이템을 마구잡이로 찍어냄과 동시에 <검성>마저 압도하는 최강의 전투력을 갖춘, 가히 전능의 직업이라고 평가하며 그리드를 질투하고 시기했다.
물론 오해다.
파그마의 후예는 완벽하지 않았다. 여느 직업들과 마찬가지로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는 직업이었다.
아이템을 오로지 ‘수동’으로 제작해야한다는 강력한 페널티를 안고 있었으며, 보유하고 있는 전투 스킬의 활용도 또한 전투 직업군과 비교해서 무척 낮은 편이었다.
그래, 파그마의 후예가 최강의 직업이라는 편견이 생긴 이유는 순전히 그리드 때문이었다.
아이템 하나를 제작하는데 적게는 수 시간에서 많게는 수일을 소모해야하는 ‘수동 작업’을 수천 번 이상 묵묵히(?) 수행해온 그리드의 집념이 만든 편견!
실제로 S.A그룹은 그리드를 무척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만약 파그마의 후예를 평범한 사람이 얻었다면, 파그마의 후예가 최강이라는 인식이 심어질 가능성은 무척 낮았으리라고 S.A그룹 임직원은 단언했다.
당연하다.
대체 그 누가 온갖 힘든 작업을 요구하는 대장일을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집중해서 반복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수백, 수천 번 이상 말이다.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못해. 아이템 한 번 만들 때마다 무조건 노동을 강요받았다면 큰 스트레스를 받았을 거야. 정신이 따라가지 못했을 거라고. 물론 아예 손 놓고 있진 않았겠지. 돈을 벌기 위해서, 혹은 내 장비를 만들기 위해서 종종 마음 독하게 먹고 대장일에 전념할 수도 있었겠지. 어디까지나 가끔씩 말이야.”
템빨국 수도 라인하르트.
대장장이 랭킹 1위 판미르가 수천 명의 플레이어들 앞에서 단언했다.
“그리드는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듣고 보니....”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
“하지만 정말인가? 모든 생산 직업군이 자동 제작 시스템이라는 혜택을 누리고 있는데 명색이 전설의 대장장이라는 사람이 자동 제작을 못했다고?”
“판미르가 거짓말을 할 것 같진 않아. 그리드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알려진 인물인데 굳이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그리드를 변호하겠어?”
“맞아. 그리드의 실력은 진짜라고. 그가 국가대항전에서 보여주었던 수작업 솜씨는 절대로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어.”
술렁이는 플레이어들은 전원 대장장이였다.
그리드가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의 축복을 받은 이후 템빨국으로 이주해온 수만 명의 대장장이 중 일부였다.
“지금 당장은 납득하지 못할지 몰라도 곁에서 지켜보다보면 알게 될 테지. 당신들은 그리드에게 정녕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거야. 단, 당신들 또한 그만큼 그리드에게 도움이 되어야겠지.”
새로운 대장장이들이 찾아올 때마다 ‘인사’를 명목으로 그리드 찬양 연설을 진행해온 판미르.
그가 신입 대장장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열심히 일하도록 해!! 노력하는 만큼 성장하고 종국에는 보답 받게 될 테니까!! 언젠가는 그리드의 가호로 대장장이 장인이 될 거다!!”
“우오오오!!”
반드시 보답은 따른다.
판미르가 심어주는 믿음이 신입 대장장이들의 의욕을 불태웠다.
그리고 이들의 의욕은.....
“대장장이 여러분께서는 본인이 만든 아이템을 거래소에 등록하지 말고 템빨국에 판매하도록 하세요. 본국은 당신들의 작품을 시세보다 비싸게 매입하는 것은 물론 별도의 국가 공헌도까지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라우엘에게 철저히 이용당했다.
라우엘은 대부분의 대장장이 플레이어가 템빨국으로 이주해왔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번 사태로 우리 템빨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대장장이 기근 현상을 겪게 되었다. 이때 대량의 아이템을 템빨국이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독점하게 된다면....’
결과는 뻔하다.
시장을 장악할 수 있게 된다. 폭리의 발판이 마련되는 것이다.
“큭.... 크크큭! 머잖아 모든 플레이어들이 템빨국산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겠지요.”
좋다.
권력을 웃도는 재력을 축적하는 미래가 그려진다.
아쉬운 부분은 딱 하나뿐이다.
“....그건 바로 eye의 부재....”
내 마성의 두뇌가 세계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이때, 달빛을 바라보며 핏빛의 와인을 기울이고 있는 내 눈동자가 신비한 마력을 담지 못하고 평범히 빛나고 있다는 건 지독한 치욕이다.
라우엘은 좌절했다. 바로 몇 시간 전 그리드가 새롭게 얻은 푸른 눈동자가 그의 뇌리에 박힌 채 잊혀지질 않았다.
***
손거울 속 그리드의 눈은 크게 특별하지 않았다. 짙은 검정색 눈동자에 옅은 푸른빛이 맴돌 뿐이었다.
하지만.
“파그마의 눈.”
스르륵.
스킬을 전개하는 순간 눈동자에 깃든 푸른빛이 짙어지며 은은한 광채를 뿌렸다. 흑발 위에 얹어진 은색의 왕관과 신비로운 조화를 이루며 그리드를 범상치 않은 인물로 가꿔주었다. 남녀를 구분 않고 감탄시킬만한 매력이 넘쳐흐르게 됐다.
하지만 정작 그리드 본인은 별 감흥이 없었다. 그리드는 자신의 외견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눈동자가 어떻게 변하든 신경도 쓰지 않았고 그저 현실적인 부분들을 고려해볼 뿐이었다.
‘이 상태로 도살귀의 안대를 써도 효과가 중첩 되나?’
[도살귀의 안대를 착용합니다.]
‘되는군.’
안대를 다시 벗은 그리드가 생각에 잠겼다.
‘여신의 축복으로 대장장이의 기술을 강화하면 제작 버튼이 활성화된다고 했지?’
오토로 아이템을 제작할 경우 아이템 제작 속도가 대폭 상승한다고 명시되어 있기도 했다.
그리드의 기존 대장일 효율이 가내수공업에서 공장급으로 진화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등급 아이템의 제작 확률은 떨어질 테니 마냥 의존하기가 어려울 거라고 걱정했는데.’
이제 한 시름 놓을 수 있게 됐다.
‘신과 대적하는 대장장이 망치가 있으면 무조건 에픽 이상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될 테고, 파그마의 눈을 사용하면 한 등급 높은 아이템을 복제할 수 있으니까.’
이론적으로는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을 무장한 소수 정예군단을 거느릴 수도 있었다.
‘대악마 레이드에서도 활약할 수 있는 최강의 전력을 일시적으로나마 탄생시킬 수 있는 셈....’
두근! 두근! 두근!
레전드리 등급 아이템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리드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여신의 축복과 파그마의 눈, 그리고 신과 대적하는 대장장이 망치의 결합은 환상적인 마술과 같아서 그리드를 흥분시켰다.
전설의 대마법사 브라함과 무패왕 마드라의 기적 같은 힘을 엿봤을 때와 비슷한 고양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비록 다른 형태의 힘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나도 그들과 같은 선상에 오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가고 있는 게 아닐까?’
역대 최강의 전설들과 비견될만한 힘....
찌르르, 그리드의 가슴이 떨린다.
‘나, 진짜 겁나 컸구나.’
그리드는 지난 수 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온 스스로가 대견했다. 뒤늦게나마 행운을 내려준 하늘에게 감사했다. 나를 믿고 함께해준 동료들에게는 더욱 더.
“....다들. 다들 너무 고맙다.”
그렇다.
한층 더 발전하고 새로운 경지를 엿보게 된 그리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동료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순전히 동료들 덕분에 자신이 성장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사실이야. 나 혼자서는 결코 여기까지 도달할 수 없었어.’
유라의 도움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명예를 얻었다. 지슈카의 도움으로 템빨단을 만났다.
라우엘의 도움으로 재력과 지성을 키웠고, 후로이의 도움으로 욕설을 자제해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 외에도 많은 동료들이 지금의 그리드를 만들어주었다.
그리드는 책임감을 느꼈다.
‘너희들 모두에게 반드시 보답하겠다.’
누군가는 황당하게 느낄 다짐이다.
그리드가 동료들에게 준 도움은 이미 그리드가 동료들에게 받은 도움보다 훨씬 더 컸으니까.
한데 또 보답이라니?
입장의 차이다.
그리드는 자신이 동료들에게 준 것보다 받은 것이 훨씬 더 많다고 믿고 있었다.
‘애초에 체다카 길드가 나를 섭외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정말로 아주 어쩌면, 여전히 나는 어느 마을 대장간 한편에 쭈그리고 앉은 채 암 걸리는 일상을 보내고 있지 않았을까?
떠올리며 피식 웃는 그리드의 시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일일 접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과도한 게임은 건강에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게임에서 로그아웃 됩니다.]
그리드가 신영우가 된다.
불과 몇 년 전까지의 신영우는 그리드와 비교해서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인물이었으나.
“일단 씻을까.”
지금의 신영우는 그리드 그 자체였다.
운동으로 단련 된 육체를 지녔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 정신을 지녔으며, 궁궐 같은 집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또한.
“오늘도 수고 많았어.”
소중한 가족이 있다는 점도 같았다.
“밥 차려놨으니까 밥부터 먹어.”
삑.
여동생 세희가 혜성그룹 다이아몬드 캡슐의 소독과 탈취 기능 버튼을 누르며 말한다.
오빠의 일정을 꿰고 있는 그녀는 영우가 로그아웃하는 시간에 맞춰서 타월과 갈아입을 옷가지도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땡큐....?”
동생이 건네주는 옷가지를 챙기던 영우의 얼굴이 굳었다.
세희의 눈빛이 영 사나웠기 때문이다. 열 받은 노에의 눈빛처럼 날카로웠다.
“왜, 왜 그래?”
“몰라서 물어? 사람 참 밉네.”
“뭐가?”
영우가 진짜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세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TV 봤어. 십공신 전부를 대동하고 싸웠을 정도면 적이 엄청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것 같은데, 그런데도 어째서 나를 부르지 않은 거야?”
세희의 Satisfy 아이디는 루비.
그녀는 성녀다.
일반적인 성직자와는 궤를 달리하는 신성력을 발휘해서 아군을 서포트하는 강력한 존재였다.
세희는 서운했다.
“나도 데려갔어야지. 그럼 분명히 도움이 됐을 텐데.”
“상대가 너무 강해서 네가 위험할까.... 흠흠, 뭐야, 너? 못본 새 왜 그렇게 자신만만해졌어? 쪼렙 주제에.”
“하? 나도 이제 270렙이거든? 예림이랑 단둘이서 뱀파이어의 도시를 클리어할 수 있을 정도로 세거든?”
“둘이서 뱀파이어의 도시를 클리어한다고? 풋! 푸하핫!! 허풍을 치려면 적당히 쳐야지!!”
“지, 진짜라니까? 물론 순혈 뱀파이어가 있는 도시 말고 이미 오빠가 한 번씩 클리어한 도시이긴 하지만....”
“예이, 예이. 오빠는 씻을 테니까 이제 그만 내려가 봐.”
눈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웃은 그리드는 세희의 말을 당연히 믿지 않았다.
순혈종이 없는 뱀파이어의 도시라고 해도 300레벨도 못 찍은 플레이어 둘이서 클리어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기 때문이다.
크리스와 유라 등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십공신들조차도 둘 이상 파티를 맺어야 클리어 가능한 곳이 바로 뱀파이어의 도시였다.
‘제아무리 성녀라도 자원이 무한한 것도 아니고, 딜러와 탱커 라인이 충분히 받쳐줘야 하는데 예림이 혼자서는 역부족이지.’
“진짜라고! 이 바보야!”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이 바본데에~?”
혀를 배꼼 내밀어 동생을 놀려준 그리드가 룰루랄라 욕실로 향한 그때였다.
띠링~
거실 벽면에 걸린 TV 화면 상단에 메일 도착 알림이 표시됐다.
발신인은 S.A그룹.
메일의 제목은 ‘마왕 프로젝트’다.
“저 바보.... 응? 이게 뭐지?”
TV 인터넷에 연동되어 있는 영우의 메일 주소는 공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온갖 방송 섭외 요청이 날아오는 메일이었고, 영우 혼자 관리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세희에게도 종종 확인을 부탁하곤 했다.
그래서 세희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마왕 프로젝트’ 메일을 열람해보았고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사람들은 모르게 마왕이 되어 달라고? 흐음, 재미있네. 보상도 엄청나고... 오빠 성격상 반드시 수락할 것 같은데....”
피아로, 아스모펠, 메르세데스, 놀을 마왕의 4천왕으로 구현하겠다는 컨셉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흥미진진한 프로젝트였다.
긍정적으로 메일을 검토해나가던 세희가 날짜를 확인했다.
“어느덧 3달밖에 안 남았구나.”
코앞으로 다가온 제4회 국가대항전이 각별히 기대되는 그녀였다. 물론 영우도 마찬가지였다.
“이 제안, 받아들여야겠어.”
쏴아아....
샤워기가 쏟아내는 물줄기 아래 선 신영우.
욕실에 설치 된 TV를 통해서 메일을 확인하는 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대신 마왕과 4천왕이 착용하는 아이템을 내가 제작한다는 조건으로.’
본 서버와 별개로 취급되는 국가대항전 전용 서버에서는 ‘창조’ 스킬을 마음껏 사용해도 된다.
영우는 혼자 수백 명의 플레이어들과 대적해야한다는 악조건을 수락하는 대신 파브라늄과 디바인 스톤 등의 최강 광물들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할 계획이었다. 이번 기회가 자신에게 큰 공부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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