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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774화 (769/1,794)

템빨 43권 - 9화

번헨 열도는 인스턴스 던전이다. 하나의 던전에 다수의 유저가 출입하는 개념이 아니라 한 명의 유저가 번헨 열도에 입장할 때마다 열도의 맵(Map)이 복사되고 새롭게 생성되는 개념이었다. 즉, 번헨 열도에 입장하는 유저들은 다른 이들과 똑같은 구조의 던전을 진행하면서도 다른 유저들과 별개의 진행 상황을 가지게 된다는 뜻이다.

[코드 네임 214098이 소멸하였습니다.]

“…….”

코드 네임 214098은 번헨 열도에서 발생한 존재였다. 정확히는 마흔한 번째 섬에서 그리드의 직업과 능력치, 그리고 칭호 효과와 아이템, 펫 등을 고스란히 복제하고 탄생한 그리드의 분신이었다.

본래라면 번헨 열도에서 소멸하거나 영원히 열도 안에 갇혀 있었어야 할 녀석이,

[코드 네임 214098이 소멸함에 따라서 플레이어 ‘그리드’에게 보상이 지급됩니다.]

하필이면 흑화 상태로 죽어 지옥에서 생환하였고, 번헨 열도가 아닌 오픈 월드에서 죽었다.

“어……?”

분신을 이렇게 쉽게 레이드할 줄이야?

분신의 특성을 정확하게 간파한 그리드가 교전 초반부터 분신의 갑옷을 파괴, 수월하게 승리를 쟁취하는 모습을 넋 잃은 채 바라보고 있던 운영팀원들이 퍼뜩 정신을 차린다.

“보상이라니?”

“무슨 보상?”

직원들이 술렁였다.

그리드의 분신은 이미 과거에 토벌당하고 그리드에게 보상을 지급하지 않았던가? 한데 또 보상을 지급한다고?

[플레이어 ‘그리드’가 마흔한 번째 섬을 돌파하였습니다.]

[플레이어 ‘그리드’가 미션 클리어 보상으로 <스킬 레벨 포인트> 1개를 획득하였습니다.]

[플레이어 ‘그리드’가 <대장장이의 눈> 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이게 뭐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시스템이 코드 네임 214098을 번헨 열도에 있는 존재라고 판단하는 건가? 그래서 마흔한 번째 섬 클리어 보상을 주는 거고?”

“그리드는 이미 마흔한 번째 섬의 클리어 보상을 받은 내역이 있잖아? 단순히 오류 아니야?”

낭패다. 번헨 열도에 존재해야 할 분신이 오픈 월드로 나와 버린 시점부터 시스템 오류가 발생한 것이 분명하다.

슈퍼컴퓨터 모르페우스의 명성도 이제 곧 추락하게 되리라, 모두가 걱정하는 그때였다.

“아니, 모르페우스는 ‘유저 의욕 증진’ 조항에 의거해서 보상을 내렸을 뿐일세.”

임철호 회장이 설명했다.

“Satisfy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이뤄 주기 위해서 창조한 세계일세. 노력에는 반드시 보상이 따라야 하는 거지. 불합리한 현실과는 다르게 말이야.”

몬스터를 잡으면 아이템을 얻는다. 간단한 이치다.

그리드는 분신을 레이드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보상을 지급받아야 했고, 분신이 주는 보상은 한정적이었다. 그 결과 그리드는 이전에 받았던 보상을 또 받게 된 것이다.

“여하튼 대단해…….”

모니터 속 그리드.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거친 호흡을 몰아쉬는 젊은 청년의 모습을 바라보는 임철호 회장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벌써 몇 번의 활약으로(비록 의도치 않은 활약이라고 해도) 인류를 구원한 그리드의 업적이 이미 전대 영웅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보았다.

“영웅은 하늘이 내린다라…….”

이대로 꾸준히 성장해 준다면 동대륙에서도 활약하지 않을까?

그리드보다 몇 배의 속도로 성장해 온 환국의 양반들조차도, 그들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일부 타락한 왕족들조차도, 또한 양반들 위에 군림하는 오존들조차도. 플레이어들에게 큰 위기를 선사하게 될 그들이 여태까지의 난적들과 마찬가지로 그리드에게 고배를 마시게 되지 않을까?

임철호 회장이 이처럼 그리드에게 큰 기대를 품는 이유는 그리드의 성향에 있었다.

날로 강해지고 있으나 결코 타락하지 않는 인물.

가족을, 동료를 아끼는 마음이 워낙 큰 까닭에 거대한 힘에 동반되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 임철호 회장은 그리드의 그런 점이 무척 믿음직스러웠다.

‘마치 손주 보듯이 하시네.’

본인은 알까?

모니터 속 그리드를 바라보는 임철호 회장의 눈빛에 담긴 애정을 엿본 윤나희 운영팀장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는 순간이었다.

[플레이어 ‘그리드’에 대한 보상이 불충분하다고 판단. 보상 내용이 <대장장이의 눈> 스킬에서 <코드 네임 214098의 눈> 스킬로 변경됩니다.]

“뭐, 뭣이!?”

운영팀원들은 물론이고 내내 즐거워하고 있던 임철호 회장까지 기겁을 했다.

코드 네임 214098의 눈, 즉 그리드 분신의 눈은…….

[플레이어에게 직관성을 줘야 한다고 판단. <코드 네임 214098의 눈>의 이름을 <파그마의 눈-바알의 계약자Ver>으로 변경합니다.]

바알의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Satisfy 세계관에서 최고의 인공지능을 자랑하는 제1위 대악마 바알. 순전히 자신의 유희를 위해서 분신을 지상으로 내보낸 그는 분신이 파그마의 힘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고, 과거의 자신이 파그마에게 선물했던 힘을 분신에게도 선물해 주었다. 그것이 바로 파그마의 눈이다. 분신이 보유하고 있던 대장장이의 눈 스킬 효과를 극단적으로 높여 주었던……!

“여기까지 예측하셨나요?”

윤나희 팀장이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그렇다고 대답하면 지독한 오만이지. Satisfy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 내가 예측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몇 개나 되겠는가?”

임철호 회장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윤나희 팀장의 염려가 컸다.

“세계관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강력한 스킬 중 하나인 파그마의 눈을 그리드가 얻게 되어도 괜찮을까요?”

임철호 회장이 도리어 반문한다.

“안 될 건 뭔가?”

“네……?”

“애초에 언젠가는 플레이어가 갖게 될 힘이었네.”

비록 그 시기가 7년은 앞당겨졌다고 해도 말이다.

뒷말을 삼키는 임철호 회장에게 윤나희 팀장은 재차 의문을 던졌다.

“유저 간의 격차는요? 칠악성 퀘스트를 마무리 지은 단계의 크라우젤이 혈왕의 자격을 갖추고 대악마들의 힘을 거머쥔 그리드와의 격차를 간신히 좁힌 수준이었습니다. 한데 그리드는 이제 파그마의 눈을 얻었죠. 크라우젤과 그리드의 격차는 다시 벌어졌고, 아그너스는 여전히 칠악성 퀘스트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어요. 파그마의 눈을 얻기 전 그리드와 동률일 것으로 예상됐던 하스터조차도 이제는 그리드보다 밑일 가능성이 높아졌고요. 결국 그리드와 대적할 수 있는 유저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결국 다시 좁혀질 격차 아닌가요? 그리드의 성장은 이미 최종 단계를 향해 가고 있는 반면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아직 중간 단계에도 진입하지 못한 실정 아닙니까?”

결국 그리드는 정체될 것이며, 추적자들이 바짝 뒤를 쫓게 되리라. 대화에 끼어드는 제2운영팀장 김건의 생각이었다. 그는 유저 간의 격차는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보았다.

하지만 윤나희 팀장의 의견은 달랐다.

“무엇을 근거로 그리드의 성장이 최종 단계라고 보는 거죠? 직업 전직 퀘스트가 몇 개 안 남아서? 파그마의 히든 피스도 다 얻어 가기 때문에? 아니요. 그리드가 계속해서 새롭고 강력한 아이템을 만들어 내는 한 그의 성장에는 끝이 없을 거예요.”

설령 김건의 생각이 옳다 해도,

“문제는 당장 수개월 앞으로 다가온 제4회 국가대항전이에요. 국가대항전에서 그리드를 막을 적수가 단 한 명도 없다면 흥행에 악영향을 끼칠 겁니다.”

“그건 그렇군요…….”

맞다. 최소한 3개 종목만큼은 그리드의 우승이 당연시 여겨질 것이고, 대중의 흥미를 반감시킬 것이다.

김건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윤나희 팀장이 한숨 쉬었다.

“NPC들처럼 너프시켜 가면서 균형을 조율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비단 게임뿐만이 아니라 어떤 소설이나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강력한 존재는 극의 흥미를 억제하기 때문에 너프가 필연이었다.

하지만 플레이어는 사람이다. 개인의 노력으로 힘을 쌓아 올린 그들을 운영진이 멋대로 너프했다가는 큰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는 수가 있었다.

“다음 국가대항전 말인데.”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임철호 회장이 말문을 연다.

“새로 추가될 <마왕 토벌> 종목 말일세. 그리드에게 마왕 역할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면 어떻겠는가?”

“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황당한 발언!

당황하는 윤나희와 김건에게 임철호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피아로, 메르세데스, 아스모펠, 그리고 순혈 뱀파이어 놀에 이르기까지……. 그리드는 악마처럼 강력한 인재들 또한 대거 거느리고 있지 않은가?”

“……?”

뭐지? 무슨 아이디어를 떠올리신 거지?

임철호의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가 윤나희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마왕 토벌 종목도 추가한 마당에 <마왕의 4천왕 격파> 종목까지 추가하는 걸세. 국가대항전 서버에서 그리드를 마왕으로, 그의 부하들을 4천왕으로 분류한 뒤 참가자들이 그들을 격파하도록 만드는 거지. 음, 기왕이면 참가자들과 시청자들은 마왕과 4천왕의 정체를 모르는 편이 좋겠군. 깜짝 이벤트 느낌으로 말이야.”

“그… 재미있는 생각이긴 하지만, 선수가 아니라 운영진의 입장으로 대회에 참가해 달라고 부탁하면 그리드가 과연 수락할까요? 메달을 따지 못하면 참가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요…….”

“메달을 왜 못 따? 마왕과 4천왕들이 이길 때마다 그리드가 메달을 가지면 되지.”

“으… 으음…….”

윤나희와 김건 팀장은 임철호 회장의 황당한 아이디어를 반박하지 못했다.

자칫 회장에게 밉보여서 직장을 잃게 될까 봐?

아니다. 회장의 아이디어가 대회의 흥행에 크게 기여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마왕의 정체가 그리드라는 사실을 숨기는 부분이 좋았다.

“그리드가 사용하는 스킬들의 이름과 이펙트를 바꾸면 정체를 감추는 데 큰 무리도 없을 거고. 어때? 좋지 않은가?”

“으… 으음…….”

끝까지 부정하지 못하는 윤나희와 김건 팀장이었다.

그렇다. 최소한 현재 시점에서의 그리드는 마왕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였다. 물론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말이다.

‘어차피 크라우젤을 제외한 다른 기적의 5인방들은 대회 참가도 하지 않을 테니 그게 밸런스가 맞다.’

확신하는 임철호 회장의 입꼬리가 연신 씰룩거렸다. Satisfy 국가대항전이 플레이어가 참여하는 대회의 수준을 넘어서 플레이어가 만들어 가는 대회로 진화할 수 있는 초석을 다지게 되었으니까!

***

“와아아아아아!!”

“갓리드! 갓리드!! 갓리드!!!”

도시 일각이 소멸해 버렸을 정도로 치열하고 화려했던 전투가 끝을 고하자 곳곳에서 함성이 터졌다.

사람들은 최강의 하이 랭커들을 홀로 위협했던 자신의 분신을 끝내 쓰러뜨린 그리드의 강력한 힘에 매료되어 있었다.

사아아아…….

그리드의 홍채가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흑요석을 연상시켰던 검은 눈동자가 이제는 깊은 바다를 담았다.

“아… 아아아……!”

털썩!

머레이 왕국의 병사들과 기사들, 그리고 플레이어들과 템빨단원들 모두가 환호하는 와중에 라우엘은 무릎을 꿇었다. 마치 만화 영화 속 주인공처럼 특별하게 느껴지는 눈동자를 갖게 된 그리드를 보자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다.

“부… 부럽다…….”

“…….”

옷깃을 깨물며 중얼거리는 라우엘의 목소리를 무시한 그리드가 새롭게 얻은 스킬의 정보를 확인한다.

<파그마의 눈-바알의 계약자Ver> Lv.1

대상 아이템을 시야에 담는 것만으로 능력치와 옵션, 제작법을 확인하고 복제할 수 있습니다.

단, 아이템을 복제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제작한 아이템을 재료로 사용해야 합니다. 또한 복제 대상 아이템과 재료로 쓰는 아이템의 등급 차이가 1등급 이내여야 합니다. 재료로 사용한 아이템은 복구되지 않습니다.

*복제 대상 아이템에 귀속되어 있는 스킬은 복제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복제 유지 기간은 하루입니다. 유지 기간이 끝난 복제 아이템은 영구적으로 파괴됩니다.

스킬 자원 소모:제작 아이템 1개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1시간

*단지 보는 것만으로 대상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하고 출처와 제작법을 엿볼 수 있었던 <파그마의 눈>은 파그마가 제1위 대악마 바알과 계약하는 순간 진화하였습니다.

계약에 의거, 파그마의 영혼에 개입할 수 있게 된 바알은 파그마에게 더 큰 힘을 주었고, 그 힘은 당대에 이르러서 2명의 파그마의 후예에게 차례대로 전파되었습니다.

“…….”

그리드는 파브라늄을 확보하고 싶었다. 하지만 분신은 갓 핸드를 드롭하지 않았고, 결국 파브라늄 확보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파브라늄보다 더 큰 것을 얻었다.

두근! 두근!

새롭게 얻은 스킬의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을 엿본 그리드의 심장이 뛴다.

“눈……. 나도 눈…….”

구석의 라우엘은 아이처럼 보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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