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3권 - 8화
할짝할짝.
까칠까칠하고 작은 혀가 뺨을 핥는다. 상냥함이 전해져온다.
털 풍성한 흰색 고양이. 아니, 지옥제일마수 멤피스 노에의 혀였다.
“주인.... 많이 아프냐옹?”
바둑알 같은 눈동자!
노에는 상처투성이가 된 그리드를 걱정하고 있었다. 초롱초롱한 눈에 근심이 깊었다. 고마워서 애써 웃은 그리드가 녀석의 작고 동그란 이마를 어루만져주었다.
“당연히 괜찮지.”
혹여 노에의 불안감이 커질까, X벌이라는 욕설은 간신히 삼키는 그리드였다.
<불굴>효과 탓에 분신에게 최후의 일격을 꽂는 것을 실패하고 반격을 우려, 황급히 자리를 이탈해 분신과의 거리를 벌린 그리드는 작금의 상황이 무척 불쾌했다.
‘염병, 그 타이밍에 불굴이라고?’
<불굴>
받는 데미지의 일부를 일정 확률로 무효화시킵니다. 생명력이 낮아질수록 확률이 상승합니다.
*수치가 높을수록 효과가 상승합니다.
*이 능력치에는 능력치 포인트를 분배할 수 없습니다.
특수 스탯 불굴은 이처럼 훌륭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불굴 스탯을 보유한 플레이어나 NPC, 혹은 몬스터는 확률적으로 적의 공격을 무효화시켰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확률이라는 것이 최대 0.01퍼센트, 0.001퍼센트를 논해도 좋은 영역이었다.
발동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 과장 좀 보태서 말하자면, Satisfy 제작진이 불굴이라는 스탯을 까먹고 구현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의심이 생기는 수준이었다.
왜?
여태껏 무수히 많은 아이템을 제작해온 그리드의 불굴 스탯은 무려 2천 단위에 육박했지만....
‘정작 불굴 효과를 누려본 경험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으니까!’
한데.
‘저 빌어먹을 분신 놈, 운도 좋아.’
분신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불굴의 효과를 누리고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여태까지 불굴의 혜택을 얻지 못해왔던 그리드 입장에선 상대적 박탈감이 컸다. 여러모로 아니꼽고 언짢았다. 속된 말로 뭣 같았다.
‘템빨에 운빨까지.... 진짜 더러운 놈일세.’
여태껏 그리드를 상대해왔던 적들이 느꼈던 감상을 고스란히 느끼게 된 그리드!
스륵.
“....!”
분신의 어깨가 미묘하게 움직이는 것을 포착하고,
타앗-!
황급히 도약한다.
스파앗-!!
파파파파팟!!
연살(聯殺)의 검무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리드가 서있던 자리를 수 차례 꿰뚫었다.
‘반응이 조금만 느렸어도 죽을 뻔했네.’
수십, 수백 번도 더 사용해온 연살이기에 동작을 간파하고 미리 대비할 수 있었다.
허공에 떠올라 지상의 분신을 따돌리고, 이어서 착지하며 안도하는 그리드의 귓가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짝짝짝!
“역시 그리드 전하십니다!”
“....?”
누가?
다짜고짜 들려오는 박수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린 그리드가 시선을 돌리자 라우엘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리드를 걱정하고 있던 라우엘은 이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갑자기 뭐 잘못 먹었나?’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로 긴박한 와중에 뭐가 좋다고 웃어?
눈살을 찌푸리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황당한 말을 지껄였다.
“전하께서는 분신을 일부러 살려두신 거군요!”
“어....?”
“흑화 상태의 분신을 죽여서야 또 오늘 같은 일이 되풀이될 것을 알고!”
“....아, 맞다.”
“또한, 배움의 기회로 삼기 위해서!!”
“....응?”
갑자기 뭔 헛소리인가 싶어 어리둥절하던 그리드가 아차하며 이마를 짚었다.
라우엘의 오해가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간과하고 있었는지 깨달은 까닭이다.
“전하께서는 그 옛날 랜디와 처음 만났던 날도 공부의 기회로 삼으셨지요. 그 작은 뇌를 굴려가며 배우려고 노력하는 자세.... 아주 가상하고 보기 좋습니다.”
“.....”
그래, 맞다.
신비의 숲에서 파그마의 모습을 복제하고 있는 랜디를 만났을 때도, 번헨 열도에서 자신의 모습을 복제하고 있는 분신과 만났을 때도 그리드는 싸우고, 패배하기를 반복하며 공부했다. 랜디와 분신이 사용하는 검무를 보고 배우고자 노력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간과하고 말았다.
분신이 선보인 화와 연회, 그리고 초연살파극을 보고 배우겠다는 생각을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그야 배움을 논할 정도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동료들이 위험했으니까.
기껏 함께 싸워달라고 부탁해 데려온 동료들이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고 있는 이때 나는 분신의 검무를 배우겠답시고 시간을 끈다?
도리가 아니다.
....라고 그리드는 생각했으나.
“잘 생각하셨습니다! 반트너 님과 폰 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끔 분신과 최대한 오래 싸우세요! 분신을 성장의 양분으로 삼으십시오!”
라우엘은 도리어 이처럼 소리쳤다.
그리드가 분신을 죽이지 못한 것을 일부러 살려준 것으로 오해하면서 말이다.
“뭐야? 일부러 살려줬던 거였어?”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하네. 자기보다 강한 상대와 싸우면서 초조해하기는커녕 도리어 이용해먹으려고 하다니....”
“저러니까 지존이지. 괜히 아무나 지존이 되는 거겠어?”
“기회가 오면 동료들을 희생시켜서라도 붙잡는다.... 인가....”
“동료들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리드를 서포트하고 말이지.”
“저게 바로 최강 길드 템빨단의 결속력....!”
웅성웅성!
라우엘의 외침을 듣고 멋대로 상황을 오해한 구경꾼들이 술렁인다.
그들 중에는 하스터도 포함돼 있었다.
‘조금 전 그리드는 분신의 예비 동작만 보고 공격 타이밍을 정확히 포착했다. 일부러 살려준 이유가 뭔지 알겠군. 그리드 녀석, 분신과 최대한 오래 싸우면서 본인 스킬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본인의 강점으로 승화시킬 의도야.’
깊어지는 오해!
초롱초롱해지는 대중들의 눈동자!
“그리드 힘내라!”
“우리는 비록 머레이 왕국의 백성이지만 당신을 응원할게요!”
“갓리드! 갓리드!! 갓리드!!!”
급기야 그리드를 응원하는 함성소리가 머레이 왕국의 수도 쥬덴 전역에 울려 퍼졌고....
“아니... 딱히 일부러 살려준 건 아닌....”
뭐만 했다하면 왜 죄다 착각하는지?
삐질, 식은땀을 흘린 그리드가 검을 고쳐 쥐면서 심호흡했다.
‘그래, 기회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분신은 그리드를 위협하는 최악의 적이되 그만큼 배울 점도 많았다.
특히 현재 유리한 입장은 그리드였다.
갑옷을 잃은 분신은 언제라도 죽일 수 있을만큼 약화 된 상태인 반면 그리드의 템빨은 건재했다. 변수가 될만한 불사 또한 양쪽 모두 이미 소진한 상태다.
‘하지만 정말 괜찮나?’
열망의 무아검을 복제하고 공격력만큼은 압도적으로 강화 된 분신의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내가 분신과 대결하며 검무를 관찰하는 여유를 부려도 될까? 동료들이 무사할 수 있을까?
스윽.
그리드가 동료들을 살폈다.
슬금슬금.
십공신들과 그들에게 설득당한 아스모펠 모두 전투의 현장으로부터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 그리드 님 힘내세요!”
“갓리드 파이팅! 대한건아의 위상을 보여줘!!”
“크크큭.... 전하는 해내실 수 있습니다.”
“.....”
싸우라고 등은 떠밀면서 같이 싸울 생각은 없는 건가.
....의리 없다?
아니, 전혀!
분신은 이제 최초의 위용을 잃고 있었다.
동료들은 이미 자신들의 역할을 끝낸 상태였고, 그리드를 배려해주고 있었다. 그리드에게 사냥감을 양보해주고 있었다.
“좋아.”
마음을 다스린 그리드가 때마침 흑화의 지속 시간이 끝나고 있는 분신에게 손을 까닥였다.
“덤벼. 내게 모든 검무를 선보여 봐. 최대한 오래 싸우자. 정정당당하게 맞서줄 테니까.”
멋지게 말하며.
“꿀꺽.”
연금술 시설에서 제조한 궁극의 생명력 회복물약을 복용하는 그리드였다.
“.....”
정정당당을 논하더니 혼자 물약을?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을 느끼면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구경꾼들의 눈초리가 게슴츠레해지는 반면.
‘1.3초 더 빨리 먹었어야지.’
그리드의 물약 재사용 대기시간까지 계산하고 있던 하스터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는 분신이 높은 생명력 회복 속도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엿보고 있었다.
‘생명력 게이지의 변화를 보아.... 공격을 5초 이상 받지 않으면 초당 생명력 회복량이 1만 단위까지 올라가는 괴물이다.’
보스 몬스터. 그것도 상위 보스 몬스터 판정이다.
그리드가 물약을 복용할 수 있는 플레이어의 입장이라고 해서 결코 유리하지도, 치사하지도 않았다.
하스터의 흥미가 커진다.
‘그리드는 과연 자신의 의도대로 최대한 오래 시간을 끌면서 싸울 수 있을까?’
힘들 것이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분신의 생명력 게이지는 가득 차는 반면 물약에만 의존해야하는 그리드는 그러지 못할 테니까.
‘국가대항전에서 종종 보여줬던 흡혈 반지와 회복 반지만으로는 부족할 거라고?’
뭐, 그 정도로 끝이 아닐 터다.
하스터는 그리드가 당대의 지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분신과의 최초 교전 당시에는 그리드의 판단력을 의심했지만 그뿐. 그리드의 전투력만큼은 최고라고 평가했다.
그래, 하스터는 그리드의 저력을 믿었다.
저 괴물 같은 분신과 반드시 멋진 싸움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다.
단, 개인적인 바람은.
‘결국 위기에 처하고 피아로를 소환해주면 좋겠지만 말이야.’
“.....”
잠시 들떴던 일대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사람들 모두 숨죽인 채 그리드와 분신을 주시했다.
저벅.
스슥.
그리드와 분신은 서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물러나는 등, 거리를 재고 있었다.
챙-! 채채채챙!!
“니야아아옹!!”
그리드와 분신의 머리 위에서는 갓 핸드들과 노에, 랜디, 백광의 검, 신을 겨누는 칼날이 교전 중이다.
그리드의 펫들과 스스로 움직이는 검들이 분신의 갓 핸드를 하나씩 맡고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덕분에 순수한 1대1 구도가 만들어졌다.
꿀꺽.
긴장감이 고조됨에 따라서 마른 침 삼키는 소리가 곳곳에서 울린다.
하지만 그리드와 분신에게는 그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았다. 집중력을 끌어올린 그들은 잡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파그마의 검무!”
“파그마의 검무.”
먼저 춤사위를 펼친 사람은 그리드였다. 두 보 전진하며 검을 찔렀고, 분신은 좌로 한 보 움직이는가 싶더니 회전하였다.
“살(殺)!!”
“파(派).”
파와 비교했을 때 살의 공격력이 압도적으로 높다.
하지만 그리드는 분신이 파를 쓴 의도가 무엇인지 엿보고 있었다.
파의 동작이 살의 동작을 완전히 카운터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휘릭-!
분신은 그리드의 살을 가뿐하게 피하고 검기를 쏟아내는 반면, 살을 찌른 후 잠시 무방비해진 그리드는 검기에 직격 당했다.
콰쾅! 쿠콰콰쾅!!
“시작이다....!”
파의 검기에 적중당한 그리드의 신형이 흔들리는 것이 신호였다.
그리드의 틈만 엿보고 있던 분신이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다. 연(聯)의 수법으로 그리드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들더니 극(極)으로 위협했다.
서걱-!!
극은 피하기 어렵다.
열망의 무아검을 복제하고 그리드 못지않은 공격력을 발휘하고 있는 분신에게 극을 적중당할 경우 천하의 템빨왕 그리드라도 치명상을 면할 길이 없었다.
란스티어의 망토와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조차도 무아검의 공격력을 전부 감당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한데.
“...큭!”
그리드는 베이고 말았다.
결코 맞아선 안 되는 공격을 허용하고 대량의 생명력을 손실했다.
휘청거리는 그리드의 상태를 빠르게 파악한 분신이.
“살.”
회심의 일격을 연계했다.
최고의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완벽한 딜계산을 할 수 있는 녀석은 이번 일격으로 그리드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적중시켰을 때의 이야기다.
“파!!”
그리드가 살을 회피하면서 반격했다.
분신에게 당했던 수법을 고스란히 되돌려준 것이다!
“....!”
살을 꽂기는커녕 역으로 파에 적중당한 분신이 비틀거린다. 갑옷을 잃은 녀석에게는 파의 데미지조차도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분신은 혼란을 느꼈다.
‘그리드의 실력. 살을 반격하지 못했어야 정상. 달라졌다?’
녀석은 그리드가 그러했듯.
“연!”
파에 이어지는 연속 베기에 대처하지 못했고.
“극!”
빠져나갈 틈이 없는 와중에 전개 된 극 또한 피하지 못했다.
서걱-!!
쿠오오오오-!!
분신의 가슴을 크게 베는 그리드의 무아검이 적색으로 물들며 포효한다.
푸우우욱! 푸욱!!
그리드의 등 뒤 허공으로 2개의 적색 꼬리가 솟구쳐 나왔다.
암흑의 룬에 귀속 된 <크레이의 힘>이 개방 된 순간이었다.
그리드는 분신에게 극을 날려 입힌 데미지를 100퍼센트 흡혈, 자신의 생명력으로 전환시켰고, 이때의 흡혈량이 그리드의 최대 생명력을 초과하였으므로 2개의 적색 꼬리가 생성된 것이었다.
“뭐해! 이대로 뒤지기 싫으면 어서 연회인지 뭔지를 써봐!!”
2개의 꼬리를 위시하며 도발하는 그리드의 시야로.
[대상을 해치웠습니다!]
“....?”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의도치 않은 알림창이 마구 떠오르기 시작했다.
갑옷을 잃은 분신은 그저 좋은 고기 방패였을 뿐!
그리드의 공격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음에 몰린 것이다!
“아, 안 돼....! 화라도 보여주고 가....!”
그리드가 간절히 손을 뻗어보지만.
“....끝.”
그리드를 꼭 빼닮은 분신의 건장한 육체는 이미 잿빛으로 산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흔한 번째 섬의 공략에 성공하였습니다!]
[미션 클리어 보상으로 <스킬 레벨 포인트> 1개를 획득하였습니다!!]
[또 하나의 한계를 극복하고 전설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파그마의 후예>의 히든 피스, <봉인 된 능력> 중 하나를 획득합니다.]
“....??”
그리드는 데쟈뷰를 느꼈다.
눈앞에 떠오르는 알림창의 내용들, 몇 년 전 번헨 열도에서 분신을 쓰러뜨리고 목격했던 것과 어째 상당히 비슷....
“...한 수준이 아니라 똑같은 거 같은데?”
[패시브 스킬 <대장장이의 눈>을 습득하였습니다.]
[패시브 스킬 <대장장이의 눈>을 이미 습득하고 있습니다.]
[.....]
[분석 중.....]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보상이 불충분하다고 판단. <대장장이의 눈>이 <코드네임 214098의 눈>으로 변경됩니다. 플레이어에게 직관성을 줘야한다고 판단. Satisfy의 역사와 세계관에 맞추어 <코드네임 214098의 눈>스킬의 이름이 <파그마의 눈-바알의 계약자ver>으로 변경됩니다.]
“....내가 멍청한 거냐....”
그리드는 사태 파악이 불가능했다.
알림창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해 봐도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편, S.A그룹 운영팀은 발칵 뒤집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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