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3권 - 3화
고민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직접 고민을 해 본 적은 없다. 내 탄생의 목적은 명확하니까.
파직! 파지지직!!
강력한 마력이 소용돌이치는 차원의 문.
저벅저벅.
문으로 다가가는 분신의 발걸음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바알의 이죽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가여운 존재여, 그 문 너머의 세상은 진정한 지옥일 것이다. 그 누구도 너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며, 오로지 고통과 고독만이 너를 기다릴 것이다. 그럼에도 문을 넘을 생각인가?
“반문. 이곳의 악마들은 나를 환영하는가?”
애초에 고통과 고독 외의 감정을 느끼는 방법은 모른다.
…라고 말을 덧붙이려던 분신이 입을 다물었다. 왠지 입 밖에 꺼내고 싶지 않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악마들은 최소한 너를 혐오하지는 않지. 단지 두려워할 뿐.
“무의미. 이곳에는 그리드가 없다.”
-큭… 크크큭! 그래, 가라. 오로지 하나의 목적만을 부여받고 탄생한 너의 덧없는 삶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내게 보여 다오. 앞으로 네가 느끼게 될 지독한 고통과 고독, 그리고 절망을 나는 이곳에서 즐겁게 감상하겠다.
“…….”
콰르르르륵!!
분신은 이미 차원 문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분신의 몸과 시야가 어지럽게 회전했고, 차원의 통로 너머로 끝없는 우주가 펼쳐졌다.
이어지는 것은 바다다.
적해.
세상의 중심에 떠오른 분신은 흑화를 벗고 있었다.
“그리드…….”
그리드를 꼭 닮은 분신의 날카로운 눈매가 서쪽 하늘 너머를 향한다.
***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설이 된 자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체력이 최소치가 되어 5초 동안 모든 공격에 저항합니다.]
수년 전, 세계 최초로 출시된 가상현실 게임 Satisfy를 처음 접했을 당시 유라는 그 무한한 자유도와 방대한 세계관에 천지가 개벽하는 충격을 받았다.
Satisfy가 이전까지의 온라인 게임과 SNS를 대체하는 수준을 넘어서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뿌리내리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Satisfy에서의 성공이 세계적으로 큰 파급력을 행사할 거라고 예측했다. 그녀가 Satisfy를 시작하게 된 경위다.
그녀는 Satisfy에서 성공하고 인정받음으로써 가문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리라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해냈다. 그녀는 최고의 랭커 중 하나가 되었고, 예측 이상의 스타가 되었다.
전 세계가 그녀에게 돈다발을 안기며 열광했다. 그저 부모 잘 만났을 뿐인 부잣집 아가씨에서 탈피한 것이다.
걸어 다니는 기업이 된 유라는 부모의 뒤를 이어야 한다는 속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충만한 자부심을 느꼈다.
20억 플레이어. 인류의 약 4분의 1이 참여한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절대자로 등극하였으니 본인의 재능이 얼마나 우월한 것인지 그녀는 새삼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초심만 잃지 않으면 다섯 손가락에 드는 랭커가 아니라 독보적인 지존까지 등극할 거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녀는 진정한 천재가 아니었다. 만인이 칭송해 왔던 그녀의 재능조차도 어떤 누군가 앞에서는 하찮고 보잘것없었다. 그녀가 갈고닦아 왔던 지식과 경험 또한 어떤 누군가 앞에서는 부끄러운 것이었다. 그 누군가란 바로 크라우젤이었다.
유라는 한계를 느꼈다. 자신의 재능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를 악물고 발버둥 쳐도 크라우젤이라는 진짜 천재가 세우는 기록들을 넘어설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Satisfy는 현실과 다른 게임이었고, 그녀에게는 아직 무수한 기회가 남아 있었으니까.
유라는 크라우젤을 뛰어넘기 위해서 클래스의 진화를 노렸다. 그 첫 단계로 야탄의 종이 되는 길을 택했다.
크라우젤의 환경보다 더 나은 환경을 구축함으로써 재능의 차이를 좁히려고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그리드였다.
아직 무명소졸에 불과했던 그리드는 유라에게 허무와 좌절을 맛보여 주었다. 그리드의 격이 다른 무력은 유라의 자부심과 꿈, 희망을 단 일격에 산산조각 내는 괴력을 발휘했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수년.’
유라는 온갖 사건에 연루되고 복잡한 감정을 느끼면서 몇 차례나 노선을 변경해 왔다. 결과, 레전드리 클래스 데빌 슬레이어를 손아귀에 넣었고, 이제 그녀는 그리드, 크라우젤이라는 두 천재와의 격차를 조금씩 좁혀 나가고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테, 템빨이다. 미안해.”
“…….”
허망하게 쓰러지는 자신에게 허겁지겁 달려오는 그리드의 태도가 유라의 자존심에 새로운 금이 가게 만들었다.
“네가 약한 게 아니라 내가 너무 템빨이라……. 괘, 괜찮은 거지?”
“…….”
유라를 단 일격에 쓰러뜨린 그리드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는 유라가 큰 충격을 받고 회의감을 느끼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유라를 자신과 동격의 존재로 인식한다면 결코 보이지 않았을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크라우젤과 싸워서 이겼을 때 그리드가 그를 이처럼 위로했던가? 동정했던가?
아니다.
그래, 지금 이 순간의 그리드는 유라를 경쟁자가 아니라 나약한 어린 양처럼 대하고 있었다. 자신 또한 지존이 되겠노라는 꿈을 잃지 않고 달려왔던 유라 입장에서는 끔찍한 태도였다.
“저도 알아요. 저는 약하지 않죠.”
그리드가 건네는 손을 뿌리치고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난 유라의 뺨은 잔뜩 부풀어 있었다. 누가 봐도 토라진 모습이었다. 평소의 지적이고 교양 있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딱히 동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실험이었잖아요? 뭐, 실험만 아니었어도 제가 방어 스킬을 썼을 테고, 그럼 단 일격에 쓰러지는 추태 같은 건 보이지 않았겠죠. 알겠어요? 정상적인 상황이었으면 저는 일격에 쓰러지지 않았다고요!”
“아, 그, 그래. 맞아.”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여성이었던가?
마치 절벽 위의 꽃처럼 홀로 고상하게 존재해 왔던 유라가 울상을 지은 채 흥분해서 소리치는 모습, 그리드에게는 낯설면서도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나이도 어렸지.’
하도 어른스럽게 행동해서 연상이라고 착각할 때가 종종 있었지만, 유라는 그리드보다 무려 3살 이상 연하였다.
그리드는 유라가 새삼 귀엽게 느껴졌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인을 마주할 때마다 긴장되고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마음이 처음으로 평온해졌다.
“…저 여우가.”
드물게 온전한 감정을 드러낸 유라와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그리드. 두 사람의 분위기가 썩 나쁘지 않자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지슈카의 관자놀이가 씰룩거린다.
이때,
-여기서 뭐 하세요?
‘응?’
그리드는 영문 모를 귓속말을 받았다. 유페미나가 보내오는 귓속말이었다.
-전하가 왜 쥬렌에 있어요?
아니, 뭔 말이지? 쥬렌이 어디야?
“아……!”
유페미나의 귓속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리드가 라우엘에게 소리쳤다.
“쥬렌이 어디지?”
“머레이 왕국의 수도입니다. 머레이 왕국은 적해의 시작과 맞닿은 해양국이죠.”
“분신이 그곳에 나타난 것 같은데?”
“…네?”
다짜고짜?
생뚱맞은 전개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지상과 지옥을 잇는 차원의 틈 중 하나가 적해 중앙에 있어요.”
어느새 차분함을 되찾은 유라가 설명했다.
그리드는 이미 유페미나에게 귓속말을 보내고 있었다.
-그건 내가 아니야! 적이다! 당장 거기서 도망쳐!
돌아오는 대답은,
-이미 아스모펠 경께서…….
-유페미나? 유페미나!!
***
“…그리드 님?”
예기치 못한 등장의 연속이었다.
갑자기 아스모펠이 나타나는 바람에 아그너스와의 거래 타이밍을 놓치고 이후 숨죽인 채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유페미나는 무척 당황했다.
그리드가 이 머나먼 타국까지 친히 행차한 이유를 그녀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아스모펠 경이야 전대 적기사들을 찾아내고 설득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라고 해도.’
하이 랭커이자 왕으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리드가 아스모펠과 행동을 함께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출현은 아스모펠의 임무와 별개일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아스모펠 또한 놀라고 있었다.
“저, 전하? 어찌 전하께서 이곳을……!”
“…….”
황망히 고개를 조아리는 아스모펠에게 그리드는 답이 없었다.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자신에게 집중된 모든 이목을 무시한 채 그저 앞만 보고 인파를 가로질러 나갈 뿐이다.
-여기서 뭐 하세요? 전하가 왜 쥬렌에 있어요?
귓속말을 보내 보지만 대답도 없다.
‘뭐지?’
유페미나는 말없이 혼자 걷는 그리드에게 수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드가 무장하고 있는 갑옷과 부츠, 건틀릿과 무기 모두 낯익으면서도 이질감이 느껴진 까닭이다.
‘다 예전에 사용하던 아이템들 아닌가……?’
심지어 세월의 풍화를 제대로 맞은 것처럼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다. 자신의 아이템을 직접 수리하는 대장장이 그리드가 저런 허름한 아이템을 장비하고 다닌다는 건 이상했다.
때마침 귓속말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건 내가 아니야! 적이다! 당장 거기서 도망쳐!
“하……?”
그리드가 아닌 그리드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페미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가 싶던 아스모펠이 갑자기 일어나 그리드의 등을 찌른 까닭이었다.
“네놈은 누구지?”
그렇다. 아스모펠은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진짜 그리드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사악한 악마가 감히 전하의 모습을 복제……. 윽!”
콰작! 쿠콰콰콰쾅!!
분신의 등에 꽂은 칼을 힘껏 돌려 쑤시고 있던 아스모펠이 비명을 내지르며 날아가 무너진 길가 한쪽에 처박혔다.
사각에서부터 날아와 그의 안면을 가격한 주먹은 황금색의 손, 갓 핸드였다.
‘저게 뭐야?’
그리드의 생김새와 예전 아이템을 고스란히 복제한 것으로 모자라서 갓 핸드까지 재현하고 있다?
유페미나의 혼란이 거세졌고, 아스모펠이 다짜고짜 그리드를 공격하자 의아해하던 하스터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짝퉁 같기는 하지만… 그리드의 힘을 가늠해 볼 기회인가?”
그리고,
“킥… 킥킥……. 나는 바쁘다고…….”
혼란을 틈탄 아그너스는 자리를 떴다.
“네놈은 뭐냐!!”
“당장 무기를 버려라!!”
머레이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왕국에서 소란을 피우는 정체불명의 불청객들을 언제까지고 묵과할 수가 없었다.
이미 지친 듯한 싱클레드를 대신해서 대열을 맞추고 선 그들이 그리드의 분신에게 창과 칼을 겨누자,
“파그마의 검무, 파(派).”
“……!?”
분신은 템빨왕을 상징하는 춤사위를 전개하여 병사들을 학살했다. 아니, 정확히는 학살하려고 했다.
쩌정-! 쩌저저저저저저정!!
사방팔방으로 굽이굽이 뻗어 나간 검기가 수십 개의 황금색 방패에 가로막힌다.
방패의 정체는 마법이었다. 지붕 위 소녀가 발현한 마법.
“까불지 말아요. 당신 따위가 그리드 님의 명성에 흠집을 낼 수는 없으니까.”
“…판단. 위험도 상.”
스파앗-!
분신의 어그로가 유페미나에게 끌렸다.
몸을 날려 도약한 녀석이 지붕 위의 유페미나에게 칼을 날렸고, 유페미나는 이를 온갖 복제 스킬로 막아 냈다.
싱클레드와 아스모펠의 대결 이상으로 화려한 전투가 구경꾼들의 넋을 나가게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