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3권 - 2화
“너, 왜 태어났어?”
“....?”
그리드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십공신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기껏 바쁜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한다는 짓이 인격모독이라니? 그것도 다짜고짜?
싸늘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라우엘과 극검만큼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십니까? 제가 부활한 이유야 당연히 세계를 지배하기 위함이죠. 크큭.... 전하를 보필하며 전생에 못다한 한을 풀 계획이랄까....”
“나는 대한의 건아! 당연히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리드 너도 마찬가지고!!”
후로이는 감탄사를 터뜨리고 있었다.
“과연 주군이십니다....! 큰 배움을 얻었습니다!!”
“....뭘?”
뭘 배워?
공신들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삐질, 식은땀을 흘린 그리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아무도 대답 못하네.”
“....?”
“대답했는데....?”
거를 건 거르자.
라우엘, 극검, 후로이 세 사람을 무시한 그리드가 다른 공신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태어났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답하지 못할 거야. 나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하지만 내 분신은 예외다. 녀석은 쉽게 대답할걸? 그리드를 죽이기 위해서 태어났다, 라고.”
“분신...? 그리드, 너의?”
“유라가 지옥에서 봤다는 그 녀석 말이야?”
“그래, 맞아. 그리고 놈은 이제 지옥이 아니라 지상에 있어. 심지어 우리들의 왕국을 향해서 진격해오는 중이지.”
“......”
술렁이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분신의 탄생 배경과 위험성에 대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전달 받았던 십공신은 사태의 심각성을 즉각적으로 깨달았다.
그리드가 주지시켰다.
“위험해. 분신은 진짜로 위험한 놈이야. 놈은 오로지 나를 해치기 위해서 행동할 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내게 다가오고 있어.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 될 거라고.”
“근거는? 분신이 지상에 올라온 건 둘째 치고 너를 향해 오고 있다는 게 확실한 정보야?”
“시스템 정보와 분신의 습성을 고려해 봤을 때 확실해.”
잠자코 듣고 있던 랭킹 1위 크리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놈의 정확한 위치는?”
눈을 번뜩이는 크리스의 의욕이 남다르다.
제3회 국가대항전 이후 몇 배나 강해진 지금의 자신은 그리드를 상대로 어디까지 싸울 수 있을지, 그는 궁금했던 것이다.
‘가짜 그리드라면 망설임 없이 싸울 수 있고.’
분신의 등장을 기회로 받아들이고 투지를 불태우는 크리스에게.
“알면 내 쪽에서 찾아갔지.”
그리드가 실망을 안겨줬다.
“나는 놈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놈만 내 위치를 알뿐이야.”
“그럼 빨리 찾아내는 게 급선무겠네.”
“아니, 어차피 이곳으로 오는 중이라며? 기다리면 되는 거 아니야?”
“백성들과 병사들이 전투에 휩쓸리면 어떡하라고?”
“병사들은 물리고 외성 밖 평야에서 싸우면 되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에요.”
회의가 한창 진행 중일 때였다.
뒤늦게 등장한 누군가가 대머리 반트너의 낙관적인 태도를 경고했다.
데빌 슬레이어 유라였다.
“제가 직접 목격한 분신과, 영우 씨가 알려주었던 분신의 특징을 종합해 봤을 때 분신은 영우 씨보다 더 많은 종류의 스킬을 구사할 수 있어요. 심지어 갓 핸드도 보유하고 있죠.”
유라는 그리드의 광역 스킬과 아이템 변신 스킬에 주목하고 있었다.
“최대한 외곽에서 싸워야 해요. 도시와 근접한 곳에서 싸웠다가는 전투의 여파로 도시 곳곳이 파괴될 거예요.”
내게 단 일격에 치명상을 입혔던 <초연살파극(超聯薩派極)>이라는 검무의 위력이 여전히 생생하다.
라인하르트가 자랑하는 높디높은 성벽도 분신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질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네 자루 갓 핸드가 <주작궁>으로 변신이라도 했다가는....
“분신의 공격성은 굶주린 맹수 같았어요. 저를 보자마자 이유를 불문하고 공격했죠. 이곳까지 오는 길에 마주치는 모든 사람을 해치고도 남아요. 우리는 왕국의 모든 전력을 이용해서라도 분신의 위치를 찾아내고 최대한 멀리서 요격해야 해요.”
템빨단원들은 세계를 위해 싸우는 영웅이 아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영리를 추구하고 있었다.
타인의 상처를 신경 쓸 입장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동료이자 친구이며, 자신들의 대장인 그리드를 걱정하는 마음은 한결 같았다.
그리드의 모습과 꼭 닮은 분신이 사람들을 해친다?
그리드를 비난하는 여론이 급속도로 확대될 것이며, 그리드는 큰 상처를 입게 될 터였다. 템빨단의 이미지에도 금이 갈 것이었다.
그리드를 위해서라도,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템빨단원들은 분신의 진격을 막을 의무가 있었다.
“지금 당장 그림자단을 풀겠다. 별도의 지시 사항이 생기면 연락해라.”
스르륵.
살신 페이커가 즉각 행동에 나섰다.
그가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자 검은 망토를 두른 수백 개의 인영이 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광경이 창문 너머로 연출 됐다.
음지에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며 템빨국을 지탱하는 최강의 어쌔신 집단 <템빨 그림자단>의 출격이었다.
그림자의 왕 카심이 육성하고 페이커가 통솔하는 그림자단의 실력은 그리드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그들의 출격이 그리드의 마음에 다소 안정을 주었다.
“그림자단이 나선 이상 분신의 위치도 금방 파악하겠지?”
“분신이 날뛰는 중이라면 생각보다 더 빨리 파악하겠죠. 하지만 만에 하나 분신이 은밀하게 행동하고 있다면, 글쎄요....”
라우엘의 대답이었다.
시답잖은 반응이 기껏 들떴던 그리드를 다소 실망시켰다.
“유라 말 못 들었어? 보자마자 다짜고짜 공격했다는데, 그런 흉포한 놈이 과연 은밀하게 행동할까?”
“단순한 몬스터가 아니라 지능이 있는 존재라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초네임드급 NPC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체력 안배의 중요성을 알고 있겠죠.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굳이 소란을 피워가면서 소모전을 발생시킬 것 같진 않습니다. 템빨국 도처에 그림자단의 정보망이 거미줄처럼 촘촘히 펼쳐져 있다고는 하나, 대상이 최대한 외진 곳들을 경유할 경우에는 수색하기가 무척 어렵죠.”
“.....”
그럼, 결국 분신이 왕도에 도착할 때까지 두 손 놓고 기다려야한다?
직접 분신을 상대해봤기 때문에 분신의 강함을 알고 있는 그리드는 절망적이었다.
또한, 자신의 도라X몽이라고 믿고 있던 라우엘이 평소와 달리 마땅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자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리드의 얼굴에 그늘이 지는 것을 확인한 라우엘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근데, 분신과 싸워서 승산이 적은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까?”
“이제 와서 무슨 질문이 그래?”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자신의 오래 전 경험담을 다시 읊어주었다.
“놈은 나보다 강해. 아직 나는 모르는 파그마의 검무를 사용할 수 있을뿐더러 더 많은 종류의 검무를 융합할 수 있어. 결과적으로 공격력 계수가 높아서 나보다 능력치부터 높은 셈이고, 심지어 컨트롤 실력과 순발력은 나보다 몇 배나 더 위지.”
“헐....”
반트너가 혀를 내둘렀다.
그리드보다 더 강력한 것으로 부족해서 그리드보다 컨트롤 솜씨가 몇 배나 더 뛰어나다?
답도 없는 괴물이라고 밖에는 생각 들지 않았다. 템빨단 전원이 덤벼도 과연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 오만한 카츠조차도 꿀꺽, 마른 침을 삼켰을 정도이니 십공신들 전원이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라가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저를 한 방에 쓰러뜨렸을 정도에요.”
“.....”
불편한 침묵이 발생했다.
십공신은 앞으로 자신들이, 템빨국이 얼마나 큰 피해를 감수해야하는 것인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때.
“아니....”
머리를 긁적인 라우엘이 침묵을 깨뜨렸다.
“이런 말씀 드리면 기분 나쁘실 수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리드 님도 유라 양을 한 방에 잡을 것 같은데요? 저는 이번 사태가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
귀를 의심하는 유라의 아미가 좁혀졌다.
자신이 누군가?
레전드리 클래스로 전직하기 전까지 최상위 랭킹을 지켰던 최고의 실력자임과 동시에, 이제는 데빌 슬레이어다.
작년 국가대항전에서 잠시나마 크라우젤과 호각을 겨루기도 했었다.
실력에 자신감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아무리 그리드를 인정하고 좋아한다지만, 자신이 그리드에게 한 방에 잡힐 거라는 라우엘의 주장은 인정할 수 없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리드도 난처했다.
“왜 괜히 유라를 도발하고 그래?”
“도발이 아니라 펙트를 말하는 건데요? 유라 양, 당신을 일격에 해치운 게 5융합 검무인 초연살파극이라고 했던가요?”
“그런데요?”
“대련장 가서 그리드 님한테 2융합 검무 한 방만 맞아보세요. 2융합 검무 한 방에 죽으실 걸요?”
“......”
유라의 눈꽃 같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뜬금없이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는 라우엘이 밉게 보였다.
“그러니까, 뭐죠? 사실 영우 씨의 분신은 하찮은 존재이고, 제가 영우 씨의 분신에게 당한 이유는 순전히 제가 약하기 때문이다, 이 말인가요?”
결국 참지 못하고 반문하는 유라에게.
“아니요? 분신이 강한 건 사실이지만, 그리드 님 또한 그 못지않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라우엘은 천진한 얼굴로 대답했다. 전혀 악의가 없음을 어필하고 있었다.
“유라, 무시해. 라우엘이 말실수한 거니까.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잖아?”
어색한 미소를 지은 그리드가 사태를 수습하고자 나섰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유라는 라우엘에게 악의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서라도 그리드에게 맞아봐야 했다.
“대련장으로 가죠. 한 대 때려보세요. 단, 실험의 공정성을 위해서라도 지옥을 소환해서 일시적으로 능력치를 올릴 거예요.”
“으.... 응? 괘, 괜찮은데.”
그리드에게는 여동생 세희가 있다. 여자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얼마나 피곤해지는지 학습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여자가 자기를 때리라고 해서 진짜로 때렸다가는 무슨 사달이 생길지 모를 일이었다.
더군다나.
‘애초에 널 어떻게 때려?’
상대는 유라다.
그리드의 은인이었고, 친구였으며, 세계 최고의 미녀였다.
가녀리고 아름다운 여성을 다짜고짜 때리라니... 내키지 않는다.
완강하게 거부하는 그리드였으나.
“전하께서 실험에 동참해주지 않으실 경우, 저는 앞으로 영원히 유라 양에게 미움과 의심을 사게 되겠죠.”
라우엘이 슬픈 표정을 지은 채 등을 떠밀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그리드는 실험에 참여해야했다.
여자를 세게 후려갈기는 실험에 말이다!
“이런 미친....”
괜히 쓰레기가 된 기분!
유라의 뒤를 따라 대련장에 도착한 그리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지옥 소환.”
주변 환경을 지옥으로 만들어주는 필드 마법을 전개한 유라는 능력치가 대폭으로 상승하는 버프효과를 부여받았다.
“자, 어디 한 번 때려 봐요.”
“으.... 으음....”
가슴을 활짝 내미는 유라를 마주한 그리드가 힐끔, 힐끔 주위를 살폈다.
무저항의 여성을 일방적으로 폭행하는 자신의 볼썽사나운 모습을 혹 누군가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지, 염려한 것이었다.
멀리서 라우엘이 소리쳤다.
“아무도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입니다! 이곳엔 우리들 십공신밖에 없으니까 걱정 말고 힘껏 때리세요!”
‘하여튼 저놈이 문제야!’
없어서는 안 될, 정말로 늘 도움을 주는 감사한 친구임과 동시에 매번 나를 난처하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원수이기도 하다.
이를 악 문 그리드가 <신을 겨누는 칼날>을 소환, 땡기미에 부착시킴과 동시에 춤사위를 펼쳤다.
극살(極殺)이었다.
연살, 초연 등의 다단히트 스킬을 사용해서 유라의 몸을 난도질한다는 것은 차마 못할 짓이었기 때문이다.
라우엘이 이마를 짚었다.
“아니, 기왕이면 2융합 스킬 중에서도 가장 강한 스킬을 사용하셨어야....”
왜 연살을 사용하지 않고, 극살을?
유라에게 내 주장이 잘못 된 거라고 알려주고 우리 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실 작정인가?
라우엘은 걱정했지만.
츠카카카칵....!!
기우였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설이 된 자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체력이 최소치가 되어 5초 동안 모든 공격에 저항합니다.]
“....!?”
유라는 극살 일격에 치명상을 입었으니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쓰러지는 그녀를 다급히 부축한 그리드가 사과했다.
“테, 템빨이다. 미안해.”
“.....”
유라와 십공신 전원 할 말을 잃었다.
이 순간 그들은 상기하고 있었다.
자신들, 그리드에게 ‘무기’라는 템빨을 얻었지만 아직 방어구는 다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분신은 녹슨 칼을 쓴다고 했죠? 녀석이 그리드 님보다 강한 스킬을 연마해왔을지 몰라도 그리드 님은 템빨을 연마하셨으니까 뭐....”
고요에 잠긴 대련장에 라우엘의 음성이 메아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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