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766화 (43권) (761/1,794)

템빨 4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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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43권 - 1화

산과 바다에 둘러싸인 머레이 왕국. 제국처럼 뛰어난 인프라를 자랑하지도, 템빨국처럼 다양한 퀘스트를 자랑하지도 못하지만 나름의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였고, 플레이어들에게 제법 인기가 있었다.

수천만 명의 플레이어가 머레이 왕국에 소속돼 있었고, 그중 10분의 1이 왕도 쥬렌을 본거지로 활동했다.

콰쾅! 쿠콰콰쾅!!

시가지에서 발생한 소란. 경비병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싶더니 군대가 출동했고, 이어서 갑자기 폭발이 일어나며 비명이 난무했다.

“말도 안 돼…….”

소란을 듣고 현장에 달려온 족히 수천 명의 플레이어가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빛바랜 적색 갑주를 무장하고 있는 기사와 허름한 갑옷 차림의 병사가 싸우는 모습이 초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허공을 도약하고, 또 박차며 마치 날듯이 움직여 눈에 보이지도 않는 빠르기로 휘두르는 검격을 교환하는 사내들의 모습. 제3회 국가대항전 PvP 결승전에서 진행됐던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대결을 연상시킨다. 아니, 그들의 대결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었다.

“아스모페에에에엘!!”

분노에 찬 포효를 내지르는 적색 갑주의 기사 싱클레드. 그가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발생하는 잔광이 경로상의 모든 것을 꿰뚫고, 속을 헤집는다.

대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담벼락조차도 잔광에 꿰뚫린 후에는 속부터 무너져 속절없이 내려앉았다. 사람이 저 공격을 허용했다가는 어떻게 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에 대항하는 금발의 병사는?

화르륵!!

불의 잔광을 남기며 경로상의 모든 것을 불태웠다. 무너진 담벼락이 발생시킨 흙먼지 속에서는 폭발까지 일으켰으니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잿더미가 될 것 같았다.

“저렇게 센 NPC가 있었어……?”

“도대체 어디서 온 괴물들……. 헉!”

“피, 피해!!”

싱클레드와 아스모펠의 대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술렁이던 플레이어들이 질색했다. 아스모펠의 공격을 막아 내고 그대로 칼을 지면에 꽂은 싱클레드가 반경 100미터의 땅을 초토화시킨 까닭이었다.

“큭……!”

싱클레드와 검격을 교환하며 발생한 반동 탓에 잠시 허공에 떠올랐다가 마침 착지하는 순간 솟구치는 지면에 덮쳐진 아스모펠이 신음을 토했다.

고통에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이 싱클레드의 분노를 자극했다.

“고작 칼에 찔린 정도가 아픈가……!!”

조국이 있기에 내가 있고, 조국이 있기에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조국은 싱클레드의 전부였다. 대륙을 지배하는 대제국의 신민으로서 그는 큰 자부심을 품었고, 조국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했다.

12년 전의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조국의 뜻을 받들어 전장으로 향한 그는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싸웠다. 조국의 영광을 위해서 적들의 심장을 찢었고, 자신은 상처를 안았다.

하지만 조국에 귀환하였을 때 그를 반긴 것은 백성들의 환호도, 황제의 치하도 아니었다. 수만의 병사들이 겨누는 날카로운 창과 칼, 그리고 동료라고 믿었던 아스모펠의 사늘한 위협이었다.

‘조국을 배신한 역적들이여, 저항 말고 투항하라.’

‘…….’

지옥의 풍경이었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도시 길목마다 내 부모의, 내 아내의, 그리고 내 자식의 수급이 걸려 있었다.

그날, 자신의 전부였던 조국을 버리고 도망치면서 싱클레드는 다짐했다. 반드시 복수하겠노라고. 아스모펠의 혀를 자르고, 눈을 파내고, 사지를 절단하여 놈의 가족들 앞에 쓰레기처럼 뿌려 주겠노라고!

“아스모펠……! 고작 그 정도를 고통이라 느끼지 마라……!!”

무슨 수로 제국에 잠입하여 아스모펠에게 도달할 수 있을까. 지난 12년 동안 제국의 추적을 따돌리며 오직 그 방법만을 궁리해 왔다.

제 발로 나타나 준 아스모펠은 싱클레드 입장에서 뜻밖의 행운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을 리 만무했다.

“우오오오오오오!!”

쿠오오오오오-!!

땅에 박힌 검에 주입되는 싱클레드의 검기가 점차 더 강대해질수록 땅은 더 짙은 살기에 침식되었다.

보다 날카로운 검기가 지하를 무너뜨리고 지상 위에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을 죽음으로 인도했다. 그 중심에 아스모펠이 있었다.

“쿨럭……!”

아스모펠의 피부는 이제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연신 피를 토할 때마다 목과 얼굴의 혈관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아스모펠은 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죽음으로써 자신이 저질렀던 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고, 옛 동료의 원한이 조금이나마 풀리길 바랐다.

하지만 왕에게 받은 사명이 있었다. 사명을 완수하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었다.

콰아아아아앙!!

불처럼 타오르는 검기를 폭발시킨 아스모펠이 싱클레드의 검기를 무력화시켰다. 흔들리던 대지가 격동을 멈췄고, 그 위에 섰던 모든 식물과 사람들은 죽음의 사신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내가 그대 아버지의 목을 베었다.”

스윽.

고해한 아스모펠이 칼로 자신의 목을 베었다. 깊지는 않다. 피가 흘러나오는 수준이었다.

“그대 가족들의 유해를 해친 병사들이 모두 내 지휘 아래 있었다.”

스윽, 스윽, 스윽…….

싱클레드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아스모펠이 자신의 몸 곳곳에 연신 상처를 내었다. 가죽 벗긴 가축의 부위를 나누듯이 자신의 눈가와 귀, 입과 목, 가슴, 팔, 허리, 다리 등 모든 부위를 칼로 한 번씩 베었다.

“…무슨 미친 짓이지?”

질문하는 싱클레드에게,

“훗날 네가 나를 죽이고, 나의 역겨운 송장을 해체하여 짐승의 먹이로 던져 줄 때 편하길 바라서다.”

피칠갑한 아스모펠은 설명해 주었다.

“조만간이다. 내가 섬기는 왕께 은혜를 갚을 때까지만, 부디 그때까지만 내게 유예를 다오.”

“…….”

“감히 용서를 구할 생각 없다. 그저 미안할 뿐이다. 너와 네 가족들에게 한없이 죄스러울 뿐이다.”

“…….”

불쾌한 예감이 엄습한다.

12년 동안 한시도 잊지 않고 저주해 온 복수의 대상이 어쩌면…….

“싱클레드, 나와 함께 템빨국으로 가자. 피아로가 기다리고 있다.”

“…대장이?”

***

헥세타이아 신과의 대결이 끝난 후 발생한 온갖 결과는 그리드에게 큰 희열을 안겼다.

신이 자신을 은인으로 추대하였고, 세상의 모든 존재가 자신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을 비롯한 대장장이들이 큰 혜택을 누리게 되었으니, 만인의 칭송 속에 그리드는 충만한 자부심과 우월감을 느낄 수 있었다.

파그마에게도 숱한 영감을 주었었다는 드워프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하자 긴장되는 한편 기대도 됐다.

하지만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지옥의 어떤 존재에게 위치가 포착되었다는 소식과 제1위 대악마 바알이 언급된 점은 영 꺼림칙한 면이 있었다.

지옥의 어떤 존재란 대체 누구이며, 다짜고짜 바알이 언급된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드는 함부로 가늠할 수 없었지만 지옥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품게 되었고, 한편으로 두려웠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두려움이 현실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지옥에서 당신의 위치를 포착했던 존재가 지상에 강림하였습니다.]

‘아니, 대체 누군데?’

일단 대악마는 아니다. 대악마였으면 대악마라고 명확히 명시되어 있었을 것이다.

‘지옥에서 나를 찾고 있었고, 대악마가 아니며, 나를 찾자마자 지상에 직접 출두할 정도로 의욕적인 존재…….’

생각 끝에 그리드는 누군가를 특정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분신이었다.

분신은 오로지 그리드를 해치기 위해서 탄생한 존재였다. 유라의 증언에 따르면 놈은 여전히 목적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리드를 죽이기 위해서 그리드를 찾아 헤매는 중이라고 했다.

‘그래, 분신일 가능성이 높아.’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분신에게 지옥을 탈출할 능력이 있었다고?’

유라가 묘사한 분신의 생김새는 흑화 상태의 그리드였다.

분신은 흑화 상태로 죽었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것이며, 이후에도 흑화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멸하지 않고 지옥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놈이 지옥에서 기어 올라오기 위해서는 흑화를 해제해야 했고, 흑화를 해제하는 순간 사망 판정을 받아 소멸함이 정상이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그리드의 개인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삼은 추측이다.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 애초에 분신과 나는 다른 존재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그리드가 상념을 털어 냈다.

분신이 어떤 방법으로 지옥에서 탈출한 것인지는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대악마 벨리알조차도 경계했던 분신은 이미 지상에 오른 상태였고, 대악마가 아닌 놈은 지상에서 그 어떤 페널티도 받지 않는다. 지옥에서도 벨리알의 경계를 산 놈이니만큼 지상에서는 벨리알 이상의 강함을 뽐낼 가능성이 높았다.

놈이 그리드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놈의 진격 경로는 당연히 이곳 템빨국일 터였고,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드는 막아야 했다.

하지만,

‘어딘데?’

놈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반면 나는 놈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어째야 하지?’

그리드는 마냥 고민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동료들이 있었으니까.

“지금 당장 십공신과 현자 스틱세이를 소집해라.”

“예!”

혼자서 고민해 봤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도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면 해결할 수 있으리라. 수많은 인재를 거느리고 있는 템빨왕 그리드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에에에에에에에엥---

붉은 등이 점멸하며 사이렌이 울린다.

[TEX-214098이 프로세서를 가동하였습니다.]

이어지는 경고음에 Satisfy 운영팀장 윤나희가 얼굴을 찌푸렸다.

“모델명 TEX는 분신 개체 아니야? 분신이 뭐가 문제라고 이 사달이야?”

현재 Satisfy에는 도플갱어 계열 몬스터와 온갖 마법을 매개로 탄생한 누군가의 분신들이 수십 만 개체나 존재하고 있었다. 흔하디흔한 것이다.

고작 분신 한 개체의 특정 행동이 Satisfy 세계관에 악영향을 초래할 리 없었다. 한데 슈퍼컴퓨터 모르페우스는 위험을 알리고 있다.

왜?

‘…아?’

모르페우스가 요란 떠는 상황을 납득하지 못한 채 ‘오늘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야근이야?’ 생각하며 손톱을 깨물던 윤나희가 문득 잊고 있던 존재를 떠올렸다.

온갖 변수가 응집된 끝에 소멸하지 않고 버텨 온 개체.

“그자의……?”

퇴근은 글렀다.

기껏 챙겨 들었던 백을 의자에 던져 버린 윤나희 팀장이 백색 코트를 다시 걸치자,

“코드 네임 214098 확인……. 그, 그리드의 분신입니다!”

때마침 팀원들이 보고해 왔다. 윤나희의 예상대로였다.

사무실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백 대의 모니터는 이미 그리드의 분신 영상을 송출하고 있었다.

한데 어째 배경이 이상하다? 용암과 마기가 들끓는 캄캄한 지옥이 아니고 푸른 산림이다.

“214098의 위치는 지옥 아니었어? 어떻게 지상에 나타난 거지?”

탁! 탁탁탁!!

팀원들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빨라졌다. 그들은 214098의 경로를 계산함으로써 작금의 결과가 발생한 원인을 분석할 계획이었다.

그때,

“바알의 오락일세.”

임철호 회장이 등장했다. 한눈에 봐도 흥분한 상태인 그의 혈색은 무척 좋았다. 평소보다 수십 년은 젊어 보였다.

“바알……? S-003 말씀이신가요?”

“그래, 제1위 대악마 바알.”

가장 발전한 상태의 인공지능이 탑재된 존재. 그는 Satisfy의 모든 가상 생물체를 통틀어서 최초의 ‘무료’를 경험했고, 최초로 ‘유희’를 추구했다.

Satisfy의 역사, 즉 Satisfy의 정식 오픈 전 선행됐던 시뮬레이션에서 그는 본래 적으로 인식했어야 할 파그마를 돕는 등 온갖 변수를 창출했고, 그 덕분에 Satisfy의 세계관은 보다 방대하고 복잡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

“아그너스에 이어서 그리드까지 바알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어. 바알은 이미 감지했겠지. 기적의 5인방이 자신의 오랜 무료를 달래 줄 것임을.”

“…결국 그리드의 분신이 지옥을 벗어나 지상에 출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네의 추측이 맞네. 어떤 오류 따위가 아니라 바알의 의지일세. Satisfy 내에서는 그것을 신의 축복, 혹은 악마의 저주라고 서술하겠지.”

“…….”

모니터 속 그리드의 분신은 이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여신의 축복으로 새로운 스킬을 개방한 전례가 있듯이 분신 또한 새로운 스킬들을 개방한 상태였고, 그리드가 전투와 퀘스트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강해졌듯이 분신 또한 강해진 상태였다.

바알의 도움을 받아 지상에 출몰한 저 거대한 재앙을 과연 현재의 플레이어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

‘…기적의 5인방이 힘을 합치지 않는 이상은 힘들 것 같은데.’

군대를 동원한 수적 우위를 앞세워도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분신의 기본 능력치와 분신이 보유하고 있는 광역 스킬의 종류가 너무 많았다. 수천수만 단위가 아니라, 수십 수백만 단위 학살이 가능하리라.

“…하.”

윤나희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본래라면 광룡 네바르탄 에피소드, 혹은 이종족 에피소드 때 대부분의 인류가 전멸할 예정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리드가 크라우젤, 키르에게 개입하면서 예정을 비껴가게 만들었고, 인류를 구원했다.

그리고 지금은,

‘인류가 그리드로 인해서 다시 한 번 위험에 빠졌어.’

무엇을 뜻하는가?

운명이다. 초인간적인 무엇인가에 의해서 이미 정해진 결과는 무슨 수를 써도 바꿀 수 없다는, 그 비과학적인 논리가 현대 과학의 정수인 가상현실 속에서 구현되고 있었다.

“하하…….”

과학자인 내가 운명론을 떠올리다니? 웃음밖에 안 나온다.

실없이 웃는 윤나희 팀장의 귓가로 임철호 회장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겪은 일일세.”

지금 윤나희 팀장이 운명론을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임철호 회장은 눈치채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럴 때면 반드시.’

그리드가 크게 한 건씩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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