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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764화 (759/1,794)

템빨 42권 - 21화

그리드는 번헨 열도의 마흔한 번째 섬을 떠올렸다.

자기 자신과 싸우고, 이겨라.

간단명료한 임무를 부여했던 그 작은 섬에서 대면한 존재가 바로.

‘분신....’

그리드의 당시 정보를 고스란히 복제, 재현하였던 그리드의 분신이었다.

녀석은 그리드와 같은 능력치를 기반으로 똑같은 스킬을 사용했을 뿐더러 더 나은 전투 기술과 융합 검무를 선보였었고, 그리드와 똑같은 아이템을 착용한 것으로 모자라서 갓 핸드까지 복제했었다. 심지어 그리드와 비할 바 없이 뛰어난 갓 핸드 활용법으로 그리드를 압도했다.

전투에 집중하느라 갓 핸드에게 섬세한 명령을 내리지 못했던 그리드와 달리 초네임드급 NPC의 인공지능을 물려받은 분신은 전투 내내 갓 핸드를 완벽하게 통솔하는 기염을 토했었다.

어찌됐든 말인 즉.

‘분신에게는 갓 핸드가 있고, 내가 더 많은 파브라늄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은 녀석의 갓 핸드를 빼앗는 거다.’

그리드는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사실, 비교적 최근까지 그리드는 분신을 잊고 있었다.

자신이 마흔한 번째 섬에서 죽였던 분신이 아직까지 살아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으니 굳이 상기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라가 말했다.

지옥에 당신의 분신이 있노라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검게 물든 흉흉한 안광에 살기를 드리운 채 당신을 찾고 있노라고.

그리드는 알 수 있었다.

흑화 상태에서 죽은 분신이 그대로 지옥에 떨어진 후 지금까지 그대로 존재해왔음을.

‘대악마 벨리알이 나를 보고 놀랐던 이유도 분신 때문이었을 테지.’

흑화 상태로 죽어 지옥에 떨어질 경우, 흑화의 유지 시간이 끝남과 동시에 지옥에서 추방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분신은 지난 수 년 동안 지옥에 머물러온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이다.

왜?

라는 의문을 그리드는 품지 않았다.

게임 상 설정을 일개 플레이어인 그가 일일이 파악하고 이해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저 현재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것이 그의 최선이었다.

“흐음.....”

타악. 탁. 탁.

생각에 잠긴 그리드가 습관처럼 탁자를 두드렸다.

<신과 대적하는 망치>와 <신을 겨누는 칼날>을 그대로 보존하되 새로운 갓 핸드를 확보하고 싶다는 욕심을 품게 된 그의 입장에서 지옥에 있다는 분신은 당장의 사냥감이었다. 빠른 시일 내에 처치하고 갓 핸드를 빼앗고 싶었다.

물론.

‘분신을 해치운다고 해서 갓 핸드를 드롭할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현재로써는 새로운 갓 핸드. 정확히는 새로운 파브라늄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분신이었다. 도전해볼 가치는 있었다.

그럼 문제는.

‘지옥으로 이동하는 방법을 알아야한다는 건데....’

과거, 그리드는 자신의 분신과 싸워서 수차례 패배했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그리드보다 분신이 훨씬 더 강했다. 똑같은 능력치를 가졌다고 해도 둔재인 그리드와 달리 초네임드급 NPC의 인공지능을 지닌 분신이 압도적으로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했으니까.

하지만 그리드는 끝내 승리를 쟁취했다.

아이템 창조를 토대로 <알쏭달쏭 도리깨>를 제작, 순전히 행운에 의존해서 이겼다고는 하나 결국 이긴 건 이긴 거다.

‘그리고 지난 수 년 동안 나는 무지막지하게 강해졌어.’

분신을 쓰러뜨리고 얻었던 스킬 레벨 포인트 1개도 아직 남겨놓은 상태고 신장이라는 신위를 얻었으며, 최초의 왕과 영웅왕이라는 지위를 얻었고, 대악마 벨리알과 아스타로트 등의 네임드 보스들을 해치우고 얻은 룬의 힘, 이번에 획득한 여신의 축복 2개와 신화급 무구를 6회 제작한 시점에 얻은 특수한 일 등이 그리드의 손아귀에 있다.

번헨 열도 마흔한 번째 섬에 입장했을 당시와 현재의 그리드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인물이라고 봐도 옳았다.

그리드는 일단 지옥에 가서 분신과 만날 수만 있다면 분신 따위 가볍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한 손으로 싸워도 이길거 같은데.’

물론 이와 같은 믿음은 찰나에 불과했다.

‘아.... 가만?’

유라가 분신의 단 일격에 치명상을 입었다고 하지 않던가?

수 년 전 분신이 현재의 유라를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했던가?

‘아니다.’

수 년 전 분신이 대악마 벨리알을 당혹시킬 정도로 강했을까?

‘그것도 아니야.’

지금 이 순간 그리드는 확실하게 인지했다.

지난 수 년 동안 자신이 강해졌듯이 분신 또한 성장했다는 사실을.

‘어쩌면. 정말로 최악의 경우에는....’

나의 성장이 분신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신장의 힘을 얻었던 시점에 분신 또한 신장을 얻었을 수도 있고, 내가 영웅왕이 되었던 시점에는 분신 또한 투기를 두르게 됐을 수도 있다.

분신이 그리드의 모습과 능력을 고스란히 복제하는 특성을 지녔던 점을 떠올리면 배제할 수 없는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싸울 맛 좀 나겠군.’

그리드는 두려워하지도, 위축되지도 않았다.

설령 여전히 분신이 자신보다 강하다고 해도 그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도리깨로 쥐어 패면 어떻게든 되겠지. 좋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결국 행운에 의존하면 된다는 계획을 세우는 그리드.

대책 없는 바보라서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어차피 직접 만나지 않는 이상 평가가 불가능한 미지의 적을 상대로 가설을 늘어놔 봤자 무슨 대책이 생기겠는가?

시간 낭비일 뿐.

“좋아....”

결정을 내린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옥의 분신을 사냥감으로 점찍은 이상 그가 찾을 사람이야 뻔했다.

-유라, 나 좀 지옥에 데려가줘.

다짜고짜 날아온 귓속말에 유라는 당황하지 않았다.

-분신과 맞서 싸우실 생각인가요?

-응. 언제까지고 방치할 수도 없잖아. 내가 싼 똥은 내가 치워야지.

단지 파브라늄만 욕심내는 게 아니다.

분신은 그리드로 인해서 파생한 존재인 바, 멀쩡히 살아서 행동 중인 녀석을 방치했다가는 언젠가 그리드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여지가 컸다. 그것도 아주 나쁜 방향의 영향력.

분신 사냥은 그리드의 사명이기도 한 것이었다.

분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야 어쩔 수 없었다지만, 분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까지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

유라가 잠시 말문을 닫았다.

그리드의 결단에 어떤 감명을 받아서가 아니다.

‘똥이라니....’

유라는 세계 최고의 미녀임과 동시에 재녀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칭송했고, 또한 남성들은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노력했다. 누구라도 그녀 앞에서는 몸짓 하나, 말 한 마디에도 신중을 기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아니었다.

이제는 심지어 똥이라는 단어까지 서슴없이 꺼냈다.

이쯤 되면 그리드는 유라를 이성으로 인식한다기보다는 편한 친구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

-유라? 님? 어디 가심? 왜 갑자기 말이 없어? 아, 혹시 아직도 타인을 지옥으로 데려가는 건 불가능한 거야?

-....아니요. 2명까지 가능해요. 저를 포함해서 총 3명을 지옥으로 전송할 수 있어요.

-3명?

그리드가 움찔했다.

자기 똥은 자기가 치우는 거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분신이 자신보다 강할 경우 사망 페널티도 불사해야했으니, 가능하다면 혼자서 싸우기보다 동료의 힘을 빌리고 싶었다.

그리드가 떠올린 사람은 당연히.

-1명 더 데려갈 수 있으면 유페미나도 데려가자.

그리드가 본인보다 강한 동료라고 인식하는 유일한 플레이어, 복제술사 유페미나였다.

유라도 동의했다.

-좋은 생각이네요. 그녀라면 의지할 수 있죠.

유라는 그리드와 달리 객관적으로 유페미나를 평가하고 있었다. 그리드처럼 유페미나를 마냥 두려워하는 게 아니고 그녀의 능력을 냉정하게 파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페미나가 최강자 반열에 있다는 점에 대해서 이견을 내지 않았다.

최강 스킬들을 복제한 상태의 유페미나야말로 지존의 위용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최근의 그녀는 무무드식 마법까지 사용하지 않던가.

‘우리 셋이 힘을 합치면 그 무지막지한 분신에게도 그나마 승산이 있을 수도....’

수일 전 교황청에서 진행됐던 그리드VS데미안의 대결 영상은 세계 최고의 게임 방송국 OGC를 통해서 중계됐고 유라 또한 이를 시청했다.

언론과 여론은 그리드의 전력이 데미안의 전력을 손쉽게 제압했다고 떠들어대며 경탄했지만, 유라는 알고 있다.

데미안과 승부하면서도 그리드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제3회 국가대항전부터였지.’

그리드는 플레이어를 상대로 전력을 드러낸 바가 없다. 크라우젤을 상대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라는 그리드의 저력이 자신의 상상보다 더 대단할 것임을 믿었고, 지옥에서 강해지는 자신과 조건부 최강자인 유페미나가 함께 힘을 합치면 분신도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계산했다.

한데 문제가 있었다.

-유페미나한테 귓말이 안 보내지는데?

-....?

***

[귓속말이 도착했지만 듣지 못했습니다.]

“.....”

유페미나의 스킬 복제 스킬은 만능이 아니다.

복제 횟수 제한, 과다 사용 시 과부하 발생 등의 문제 말고도 현실적인 문제점이 또 하나 존재했다.

복제 스킬의 능력을 100퍼센트 재현하되 이때 의외의 페널티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현재 유페미나가 전개 중인 마스터 레벨 <은신>은 ‘집중력’을 핑계로 현실적인 페널티가 강요됐다.

은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집중해야한다는 이유로 집중력에 방해가 되는 고속 이동과 스킬 캐스팅, 대화 등이 금지당한 것이다.

정작 은신 스킬을 마스터한 어쌔신 유저들은 은신을 유지하는 한편 고속 이동과 스킬 캐스팅, 대화 등이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불합리한 수준의 페널티였다.

“.....”

하지만 유페미나는 담담했다.

복제술사로 전직하고 수년이 지난 그녀 입장에서 가끔씩 발생하는 이런 페널티는 익숙했다. 단련 된 어쌔신도 아닌 자신이 은신을 유지함에 있어서 페널티가 발생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받아들이는 수준이었다.

[귓속말이 도착했지만 듣지 못했습니다.]

연속으로 떠오르는 알림창을 유페미나는 애써 무시했다.

누가, 어떤 이유에서 보낸 귓속말인지 호기심을 품기보다는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그녀에게는 더욱 중요했다.

“킥.... 킥킥....”

벌써 3번째다.

아그너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각국에 존재하는 세공사 장인의 공방을 방문했고, 이때마다 세공사는 이미 죽어있었으며 기다렸다는 듯이 도시의 경비병들이 아그너스를 추적해왔다.

“히, 히익....!”

푸욱-!!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경비병이 전의를 상실하고 창을 손에서 놓았으나, 아그너스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차가운 칼날로 젊은 경비병의 심장을 꿰뚫어 잿빛으로 산화시켰다.

“.....킥.”

깊은 골목.

추적자들을 모조리 말살하고 혼자가 된 아그너스의 광소가 멈춘다.

“....루....나. 루나.....”

비틀비틀.

휘청휘청.

몸도, 마음도, 정신도.

이미 지칠 대로 지쳤다는 듯이, 위태롭게 걷는 아그너스의 눈빛이 공허하다. 그가 입에 담는 이름. 아니, 정확히는 애칭이 누구를 뜻하는지 유페미나는 알고 있었다.

‘루이나 카롤린....’

유페미나는 순위표에 이름이 없는 비공식 랭커다. Satisfy 초기부터 지금까지 정점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의 정보력과 수완은 수준급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전직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처리해야할 대상인 아그너스의 정보를 모를 리 없다.

그렇기에 가슴이 아팠다.

‘어째서.’

저 사내는 어째서 현실에서도, 게임에서도 이미 죽은 옛 연인만을 그리는가?

지켜보고 있노라면 지독한 슬픔이 전해진다. 슬픔을 덮으려는 광기가 가엽게 느껴진다.

이를 드러낸 짐승처럼 보이나, 실상은 덧없이 느껴질 정도로 가녀린 존재다.

“루....나.”

털썩!

휴식 없는 여정이었다.

그저 숨죽인 채 추적할 뿐인 유페미나조차도 지쳤을 지경이니, 몇 번이고 절망하며 적과 싸워왔던 아그너스는 이미 진즉부터 한계였다.

마치 세계에 부정당하듯이, 처음부터 무너지기 위해서 만들어진 모래성처럼 속절없이 무너지는 아그너스의 모습은 애처로웠다.

스르륵-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하는 아그너스의 곁으로.

또각. 또각.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금발의 소녀가 다가선다.

더 이상 잠자코 보고 있을 수 없었던 유페미나의 등장이었다.

“너....는....?”

차디찬 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곁으로 다가오는 소녀의 모습을 목격한 아그너스의 동공이 떨린다.

상처 입은 짐승의 겁먹은 모습이 이토록 슬픈 것이었나.

씁쓸한 표정을 지은 유페미나가 아그너스에게 작은 손을 내밀었다.

“당신, 그 돌을 세공하고 싶은 거죠?”

“.....”

“무무드를 해방시켜주겠다고 약속해줘요. 그럼 제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왜?”

오로지 좌절과 절망밖에 없는 세계.

구원 따위 환상 속에나 존재하는 줄 알았던 아그너스의 시야가 뿌예진다.

눈물에 잠긴 채 떨리는 그의 눈동자를 보고 다시 한 번 심장이 내려앉는 충격을 느낀 유페미나가 애써 담담한척 말했다.

“딱히. 그냥 피차 편할 것 같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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