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2권 - 18화
-파그마가 탄생하기 한참 전 시대에 불타르라는 대장장이가 있었다. 파그마와 그대처럼 전설이라 숭배받았느냐고? 아니, 지극히 평범한 대장장이였지. 하지만 노력하는 자였다. 자신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서 용광로 앞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던 그의 피부는 늘 붉게 그을려 있었지.
냉소가 깃든 이 차가운 음성의 주인은 누구일까? 벌써 2번째 듣는 목소리의 주인이 칠악 중 정확히 누구인지 그리드는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신장의 힘이 4악성 타렌의 힘이라고 했으니까 타렌의 목소리이려나?’
뭐, 딱히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어둠에 잠식되는 시야를 자각한 그리드가 잡념을 털어 냈고, 그가 선 장소는 교황청 지하 창고에서 허름한 대장간으로 변했다.
따앙-! 따앙-! 따앙-!!
“…….”
미숙하고 조잡한 솜씨로 각종 도구를 제작 중인 대장장이가 보였다. 대장간의 열기를 감당 못하고 붉게 달아오른 피부가 온통 땀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불타르였다.
피로와 고통을 인내하며 이를 악문 채 망치질하는 그는 필사적이었다.
‘어째서 저렇게까지?’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이봐! 불타르! 아직인가!!”
“거의 다 됐습니다……!”
도대체 며칠 동안 잠을 못 잔 거지?
망치질하면서 꾸벅꾸벅 졸다가 타오르는 용광로에 얼굴을 그대로 떨굴 뻔했던 불타르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번쩍 정신을 차렸다.
달려와 불타르를 부른 이들은 흠뻑 젖은 마을 주민들이었다.
열린 대장간 문 틈새로 엿보니 쏟아지는 폭우에 작은 마을이 가라앉고 있었다. 제방이 터져서 온 마을이 물 천지다.
마을 주민들은 재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안간힘이었고, 마을의 유일한 대장장이인 불타르는 주민들이 사용할 도구를 며칠 밤낮으로 작업해 만들어 주는 중이었다.
“불타르! 삽이 스무 자루 더 필요하다니까!!”
“서두를게요!”
“…….”
누구에게나 한계가 있다. 전설이 된 그리드 또한 마찬가지다. 하루 이틀 밤이야 샐지 몰라도 그 이상은 어렵다.
하지만 불타르는 견뎌 내고 있었다. 나흘이고 일주일이고 제자리에 버티고 선 채 망치질에 열중했다.
놀라운 사실은 마을 주민 누구에게도 자신이 힘들다는 사실을 토로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발설할 경우 마을 주민들이 더욱 큰 불안에 휩싸일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군소리 없이 작업에 임했다. 끝까지 인내했다. 정신이 육체를 초월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결국 마을을 지키는 데 성공한 그의 귓가로,
-레베카의 목소리가 들려왔지.
불타르는 빛의 여신에게 부름을 받았다.
오로지 타인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한계를 극복한 끝에 마을을 지켜 낸 그를 여신은 갸륵한 인간이라 평하였고, 의지와 비교해 부족한 재주에 힘을 더해 주리라 약조했다. 불타르가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에게 축복을 받게 된 경위다.
헥세타이아의 축복을 받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대장장이가 된 불타르를 사람들은 ‘일곱 선자’ 중 하나라고 칭송하였다.
-이후 불타르는 더욱더 노력했다. 자신에게 축복을 내려 준 레베카와 헥세타이아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최고의 대장장이가 되겠노라는 열정을 품었다. 그 열정이 독이 될 거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지.
대장장이 실력을 갈고닦은 끝에 <창조>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 불타르. 그는 헥세타이아가 지상에 내린 백만 도구 외에도 인류에 유익한 각종 도구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고, 급기야 새로운 광물을 만들었다.
결과는?
-헥세타이아의 질투를 샀다.
자신과 비교하면 하찮은 업적을 남겼을 뿐인 불타르가 인간들에게 칭송받기 시작하자 헥세타이아는 격노했다. 괘씸한 인류를 멸망시키겠노라고 신벌을 내렸다.
온갖 광물이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졌고, 대지에는 용암이 끓어올랐다.
-불타르가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최후에 남긴 작품이 바로 원죄의 돌이었다.
최초의 성검. 헥세타이아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이다. 인류가 헥세타이아를 잊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최초의 성검 때문이었다.
불타르는 그것을 부정했다. 헥세타이아가 남긴 질투의 죄를 돌에 각인시켜 성검을 봉한 후 헥세타이아가 인류에 남긴 업적의 증거를 말살시켰다.
신들과 맞서 싸우며 이를 도운 이들이 바로 일곱 선자다. 불타르와 마찬가지로 다른 신들에게 축복을 받았던……. 신이 직접 악(惡)이라 명명한 무리 <칠악성>의 탄생이었다.
-결국 우리는 신들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신들은 쇠퇴한 인류에게 칠악성이야말로 지상을 위협한 원죄라고 전파했다. 인류를 위해서 싸웠던 우리가 희대의 악당이 된 것이지.
“…….”
억울함과 분노 등의 마이너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정확히 누구인지 모를 목소리의 주인공은 끝까지 냉소할 따름이었다. 수백 년, 아니 어쩌면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구천을 떠돈 끝에 원한을 제어하는 방법을 터득한 듯싶었다.
-사후 지상과 지옥의 사이에 봉인된 우리 일곱……. 그래, 우리들 칠악성은 신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때는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들었던 그들의 찬란한 ‘빛’이 다음 세대의 앞길만큼은 제대로 밝혀 주길 바랐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칠악성은 신들의 본성에 자애가 깃들어 있으리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또 같은 짓을 반복하더군. 파그마를 질투한 헥세타이아는 인류를 위협했고, 다른 신들은 이를 방관하거나 역으로 도울 따름이었다. 우리는 확신했다. 인류의 흥망성쇠는 저들의 변덕으로 정해질 뿐이며, 세계 그 자체가 저들의 유희를 위한 오락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칠악성은 절망했다. 우리들이 없는 이번 세대야말로 멸절의 위기를 겪게 되리라고 보았다. 전 인류가 세계에서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과 전혀 달랐다.
과거 칠악성과의 전쟁에서 큰 힘을 소모했던 신들은 아직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고, 어쩔 수 없이 지옥에 손을 빌렸으며, 제1위 대악마 바알은 신들의 요구를 들어줌과 동시에 본인은 파그마의 편에 섰다. 이번에는 신들이 바알의 오락에 놀아난 것이다.
파그마와 바알 덕분에 인류는 지켜졌다.
그 후로 2백여 년의 세월이 흘러,
-시대는 지금에 도달했다.
칠악성은 더욱더 약해졌고, 전설들의 실력 또한 전대와 비교하면 한없이 미약하다. 특히 <영웅왕>이라는 초월적인 지위를 <검성>이 아닌 <파그마의 후예>가 거머쥐었다는 점과 <무패왕>을 대체할 만한 존재가 없다는 점이 낭패였다.
지금 이 타이밍에 헥세타이아의 질투가 발동한다? 인류는 이번에야말로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이 뻔했다.
하여 칠악성은 용단을 내렸다. 더 이상 망령으로 떠돌지 말고 자신들의 한 줌 남은 힘을 당대의 아직 미숙한 영웅들에게 나눠 주겠노라고. 자신들은 소멸하되 인류가 지켜지기를 소망한 것이다.
한데,
-…그대가 흐름을 바꾸었다.
일곱 죄의 근원이 되는 <질투>를 벗기다니?
칠악성은 헥세타이아를 변화시킨 그리드의 터무니없는 업적에 놀라고 말았다. 전대와 비교하면 한없이 초라하다 보았던 당대의 영웅왕이 사실은 그 누구보다 더 위대한 존재였음을 알게 됐다.
-앞으로 다른 신들이 범하게 될 남은 여섯 개의 죄가 뒤로 미뤄졌으니 당분간 인류는 평안의 길을 걷겠지.
물론 여기서 논하는 평안이란 신벌을 피하게 되었다는 것일 뿐.
-…신들보다 더 큰 죄를 매일 아무렇지도 않게 범하는 인간 간의 전쟁은 평생 끝나지 않고 계속될 테지만……. 뭐, 그건 우리가 개입할 만한 문제가 아니지.
대화가 끝나 간다.
점점 희미해지는 음성을 향해서 그리드가 질문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칠악 중 가장 큰 죄악이라 일컬어지는 존재.
-제7악, ‘타락’이다.
스파아아앗-!!
마지막 대답을 끝으로 어둠이 폭사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게 된 그리드의 의식이 멀어진다.
잠시 후,
“…그리드 님!!”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리드는 데미안과 레베카교 장로들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퀘스트의 흐름을 따라서 전이됐던 그리드의 정신이 현실로 복귀한 순간이었다.
“아…….”
정신을 차린 그리드의 손에는 온전한 형태의 <최초의 성검>이 쥐어져 있었다.
“도대체 저주를 언제 풀어 놓으신 겁니까!!”
“거참,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리드 전하의 활약이 언제나 본교를 돕는군요! 레베카 여신을 향한 전하의 신앙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하하하!!”
장로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들은 그리드가 최초의 성검을 정화하는 모습을 목격하지도 못했으면서 성검을 정화한 장본인이 그리드일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무한한 신뢰다.
하긴 당연했다. 이들 모두 그리드를 신격화하기 직전의 단계에 이르러 있었으니까.
“…이쯤이야 뭐, 별거 아닙니다.”
백발의 노인들이 초롱초롱한 시선을 보내오자 부담감을 느낀 그리드가 머쓱하게 웃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데미안에게 성검을 건네주었다.
“성검이 저주에 침식당하는 일은 앞으로 두 번 다시 없을 거야. 레베카교의 상징은 영원히 무탈할 거다.”
“그…….”
성검을 품에 안은 데미안이 입을 열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려다가 멈추기를 몇 회 반복하더니 간신히 말을 꺼냈다.
“모험은 즐거우셨습니까?”
데미안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월드 메시지를 목격했다.
사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레베카 교단과 엮일 때마다 고생하는 그리드에게 너무 고되지 않느냐고, 미안하다고,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굳이 말을 억누른 이유는 그리드의 얼굴에 그늘이 없음을 목격한 까닭이다. 그리드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고, 두 눈은 더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조금도 지치지 않은 것이다.
이전까지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세상을 탐험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그에게 고되지 않느냐 묻는 것은 실례였다.
그리드가 대답했다.
“응, 즐거웠어.”
신을 바꾸고 세상을 바꿨다. 신화 속 영웅이 된 기분이다.
거대한 충만감에 휩싸인 그리드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었다.
[퀘스트 완료!]
[<최초의 성검 정화> 진행 단계에서 파그마 에피소드가 개방되고 새로운 검무를 획득한 상태입니다. 완료 보상으로 여신의 축복을 얻습니다.]
[레베카 여신의 따스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대에게 축복을.
“…….”
이제 2개의 여신의 축복을 갖게 된 그리드이다.
대장장이 기술과 파그마의 검무를 강화하기에 앞서서 그는 묘한 이질감에 휩싸였다.
‘레베카 여신이 범한 죄는 뭐지?’
레베카 여신은 최고신이다. 그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칠악성과 교류하고 헥세타이아의 질투를 막아 낸 그리드를 경계하기는커녕 여전히 높은 호감을 보이고 있다. 마치 자신은 ‘죄를 범한 일곱 신’에 포함되지 않다고 부정하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칠악성은 여신을 경계하고 있었고, 그 옛날 브라함은 여신과 악신을 한통속이라고 표현했었다.
‘…흠.’
속내를 알 수 없는 상대야말로 진정 무서운 법이다. 그리드의 여신에 대한 경계가 짙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내려 준 축복을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오로지 노력 끝에 쟁취한 축복, 철저히 이용해 먹을 각오였다.
“아, 그 전에.”
지하 창고를 나서는 길. 그리드가 데미안에게 질문했다.
“나하고 싸우거나 대련할 때 어떤 느낌이야?”
“네?”
난데없는 질문에 당황하는가 싶던 데미안이 곰곰이 생각해 본 후 답했다.
“때려도 딜은 안 들어가고, 맞으면 한 방에 훅 갈 수 있으니 부담감이 엄청나죠. 최대한 안 맞고 때려야 그나마 승산을 엿볼 수 있는데, 갓 핸드의 장벽을 뚫기가 어렵고…….”
“…역시.”
아스가르드에서 제작한 신검을 놓고 그리드는 고뇌했다.
갓 핸드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해 주었던 비장의 아이템인바, 파브라늄을 지금처럼 검이라는 형태로 구속해도 좋을지 의문이었다.
‘공격 시 일정 확률로 갓 핸드 소환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무한 지속되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이번에 제작한 <신을 겨누는 칼날>은 <열망의 무아검>과 비교했을 때 물리 공격력이 크게 높을 뿐 마력 공격력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고, 광역 공격력은 한참 뒤떨어지는 등 명확한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나마 붙은 약자 멸시 스킬은 초월자들을 상대로 통하지도 않고.’
어차피 초월자 외의 평범한 플레이어들은 평타 한 방으로도 죽음에 몰아넣을 수 있다. 약자 멸시의 효용성은 크게 떨어지는 것이었다.
‘황금 구름 떼와 낙뢰의 효과를 정확히 실험해 보고 판단해야겠어.’
확인이 필요하다.
마음을 정한 그리드가 데미안의 어깨를 붙잡아 세우더니 씨익 웃었다.
“오래간만에 대련 한판?”
“…예?”
그리드가 열망의 무아검을 제작했을 당시 그리드와 대련하고 곤죽이 됐던 데미안이다. 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야, 야메떼 구다사이!!”
“싫다고? 흠, 그럼 이사벨한테 부탁해 볼까.”
“…대련에 응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샌드백 역할을 시킬 남자가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순정파 데미안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대결을 수락했다.
대결의 무대는 교황청이 자랑하는 아름다운 하늘 정원.
웅성웅성!
레베카교 소속 플레이어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왔다.
제3차 국가 대항전 이후부터 지금까지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진 교황 데미안의 실력을 알고 있는 플레이어들은 대련의 승자를 쉽사리 점치지 못했다. 몇 년 전부터 이미 최고였던 그리드보다 상대적으로 덜 발전했던 데미안의 성장 폭이 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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