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2권 - 10화
‘그림 그리는 일도 쉽지 않구나.’
따앙. 땅. 땅....
그리드는 이미 10분 전에 작업이 끝났다. 평소에 자신이 사용하는 모든 아이템의 수리 작업을 완료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망치질을 멈추지 못했다.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옮기고 있는 삐까소를 방해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스윽. 슥.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집중한 채, 그리드를 관찰하며 그의 모습을 온전하게, 그로부터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삐까소의 모습으로부터 뜨거운 장인 정신이 느껴진다.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삐까소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뭘할까?
팬티 만드는 모습이 화폭에 닮기는 건 좀 그렇고, 오래간만에 양산형 그리드 세트를 제작해 볼까?
고민하던 그리드가 <최초의 성검>을 떠올렸다.
성검에 각인 된 저주를 풀기 위해서 관찰과 분해, 조립을 반복한 그가 올린 이해도는 정확히 60퍼센트.
최초의 성검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모작’ 정도는 도전해 볼만 했다.
‘이참에 최초의 성검 모작을 만들어 보자.’
최초의 성검이 어떤 원리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인지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될 터.
‘운 좋으면 이해도도 더 오를 거고.’
기대감을 품은 그리드가 대장간 한쪽에 마련 된 광물 창고로 시선을 돌리자.
“무엇을 가져올까요?”
눈치 빠른 젊은 대장장이들이 대뜸 나섰다.
그리드의 가슴이 찡해진다.
‘일진들 빵이나 사다주던 나인데...’
이제는 남들이 내게 무엇인가를 해주려고 노력하는구나. 딱히 부탁하지 않아도, 내 바람을 읽고.
그것도 힘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존경심을 품고 선의에서!
“철광석과 미스릴을.”
“옙!”
그리드가 지시하자 명을 받든 젊은 대장장이들이 우르르 창고로 달려갔다. 그리고 곧 대량의 철광석과 미스릴을 가지고 돌아오자 미리 용광로의 온도를 높여놓고 있던 그리드가 그 안에 철광석부터 쏟아 부었다.
‘헥세타이아가 창조했다는 디바인 스톤과 비교하면 당연히 하찮겠지만.’
지상에 존재하는 광물 중에선 미스릴만큼 신성력을 수용할 수 있는 광물도 드물다.
그리드는 계획했다.
최소한의 철광석과 대량의 미스릴을 융합하여 성검을 재현하겠노라고!
화르륵!
치이이익!!
따앙! 따앙!!
반복되는 풀무질과 담금질, 그리고 이어지는 단조질!
최초에는 그저 돌덩이에 불과해 보였던 철광석과 미스릴이 제련과 단련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칼날로 변화되어간다.
‘최초의 성검...! 모습만큼은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지!!’
따앙-!!
극도로 집중한 그리드가 무아지경의 상태에 돌입했다.
아직 야탄의 종의 품속에 들어있던 성검.
그것을 처음 목격했을 때부터 시작해서 디바인 스톤이라는 재료를 파악하기에 이르기까지 느꼈던 온갖 감상들을 떠올리며, 그리드는 최초의 성검이 만들어진 경위와 의도를 끊임없이 상기했다. 그리고 최초의 성검을 온전한 형태로 재현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따앙-! 따앙-! 따앙...!!
완벽하다, 라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최소한 본질은 망치지 않았다.
모루 위에서 형태를 갖춰나가기 시작하는 성검의 모습은 원본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아, 신성력이....’
신성력의 부재였다.
그리드가 완성해나가고 있는 성검은 단지 형태만이 원본과 닮아있을 뿐, 신성력은 비할 바 없이 미약했다.
당연하다.
미스릴이라는 광물이 자체적으로 지닌 신성력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미스릴의 가장 큰 특징은 신성력을 ‘받아들이는 힘’인 바.
과거, <신성의 방패>를 제작했을 때와 같이, 그리드가 진정으로 성검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레베카교 사제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었다.
‘이런 실수를....!’
낭패다.
이대로는 성검이 성검이 아니게 된다.
본질에 집착한 주제에 정작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다니!
‘진짜 개멍청하네.’
그리드는 본인에게 크게 실망하였다.
성검을 제작하겠답시고 나선 주제에 사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잊은 이유가 본인이 멍청해서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심한 비약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게 마련이니까.
그리드는 최초의 성검의 의도와 형태를 재현하려고 노력하는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한 가지를 놓치는 실수를 범했을 뿐이다.
‘...후, 그래. 진정하자.’
잠시 망치질을 멈추고 심호흡한 그리드가 마음을 다스렸다.
모루 위 성검은 이미 절반 이상 완성 된 상태였지만 초조해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이라도 신전에 사제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하면 되는 거고.’
설령 신전 측에서 인력이 부족하다고 통보해올지라도 다음을 기약하면 그만이다.
성검의 모작 제작에 도전해볼 기회야 언제든지 또 있었으니까.
그래, 한 번의 실패로 좌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가만?’
마음이 여유를 찾자 사고가 확장된다.
초조함을 떨쳐내고 침착하게 상황을 돌이켜보던 그리드가 떠올린 존재는 다름 아닌 빛의 상급 정령이었다.
그리드는 두 가지 부분에 주목했다.
첫째.
‘철광석 마법단련법...!’
그리드는 공격 마법을 이용해서 철광석을 단련할 수 있다. 사용하는 마법의 위력과 숙련도에 따라서 철광석의 단련 속도가 결정 됐고, 그 속도가 무척 느린 까닭에 중노동이라 마법단련을 쉽게 도전해오지 못했지만....
‘지금의 내게는 정령이 있어...!’
그렇다.
그리드가 두 번째로 주목한 부분은 바로 빛의 상급 정령이었다.
‘빛의 정령의 마법으로도 광물을 단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그리드가 정령 관련 칭호의 상세 정보를 상기했다.
<빛의 정령과 계약한 자(상급)>
빛의 상급 정령술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현재 빛의 상급 정령술 레벨:1
-사용 가능 정령술 목록-
*상급 정령의 에너지는 무한합니다. 상급 정령술은 계약자의 자원을 소모하지 않습니다.
<빛의 검>
빛의 정령을 검의 형태로 만듭니다.
빛의 검은 계약자의 곁을 따르며, 계약자가 어두운 곳에서도 시야를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암흑 속성의 적을 발견 시 스스로 움직이며 적을 공격합니다.
빛의 검의 공격력은 계약자의 물리 공격력, 혹은 마법 공격력 중 높은 쪽의 영향을 받습니다.
*항시 유지 가능한 스킬입니다. 단, 빛의 검 상태에서는 별도의 정령술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섬화>
빛의 정령이 계약자가 지목한 대상에게 ‘순간 이동’합니다.
대상이 적일 경우 강렬하게 빛나며 대상을 0.3초 동안 실명 상태로 만듭니다. 대상은 실명 효과를 저항할 수 없습니다.
대상이 계약자 본인이나 아군일 경우 영롱하게 빛나며 대상에게 1회 한정 ‘암흑 속성 공격 저항’ 효과를 부여합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5분
‘이거야! 빛의 검 상태로 계속 성검을 때리고 단련하라고 지시하는 거지!’
그리드가 그동안 <마법 무구 제작법>을 등한시해온 이유는 앞서 설명했듯이 너무 과도한 노동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과거, 매직 미사일을 통해서 금속을 단련하는데 그리드가 소요한 기간은 자그마치 보름이었다. 보름 내내 마법 사용과 마나 물약 복용, 스태미나 하락, 탈진을 무한 반복했던 그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끔찍한 지옥을 맛봤었다.
제아무리 그리드가 집념의 달인이라고 해도 마법 무구 제작을 섣불리 도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빛의 정령이 있어...!’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빛의 정령이며, 상급 정령의 에너지는 무한하다.
‘우선 칼날을 다시 녹이자. 그리고 정령한테 시켜서 빛의 검으로 1만회 때리고 단련시키면....’
신성력 주입으로 인해 당장 성검의 완성도가 올라가는 건 기본이오, 마법 무구 제작법의 레벨이 오를 여지가 크다.
그리드는 힘 한 번 안 들이고 말이다!
“크큭....! 푸하하하핫!!”
멍청이는 개뿔! 이쯤 되면 천재 아닌가?
플레이어 최초로 갖게 된 빛의 상급 정령을 대장일 노동력으로 활용할 발상을 하다니, 나도 참 대단하다.
스스로에게 감탄하고 전율한 그리드가 계획을 행동에 옮겼다.
기껏 노력해서 만든 성검을 다시 녹여 제련한 후, 빛의 정령에게 지시해서 단련을 시켰다.
채앵! 챙! 챙챙!!
빛의 정령의 사투가 시작됐다.
백광의 검이 모루 위의 광물을 쉬지 않고 때렸고, 그리드는 팔짱 끼고 선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건 뭐죠?”
처음 보는 광경에 놀란 젊은 대장장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배이자 스승인 장인들에게 그리드의 새로운 단련법을 놓고 질문했다.
하지만 그 누가 대답이 가능할까?
대장장이 장인들조차도 정령을 이용한 대장일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대답해주질 못했다.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문 채 과정을 지켜볼 뿐이었다.
과연 어떤 결과물이 탄생할지 상상하는 일조차도 그들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
삐까소는 화폭에 마지막 점을 찍고 있었다.
그림이 완성 된 것이다.
붉게 타오르는 배경은 강렬했고, 수십 명의 대장장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망치질하는 왕관의 사내는 진중했으며, 사내의 곁을 맴도는 빛의 정령은 찬란하되 경박하지 않았다.
‘결과는?’
시간을 초월하고, 혼을 불사르며 그림에 집중했던 삐까소.
완성 된 작품에 매겨질 등급을 기다리는 그녀가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이번 작품에 모든 것을 쏟아 부운 그녀는 완성 된 작품의 수준이 기대 이상이라고 자평하고 있었지만, 과연 시스템 또한 같은 평가를 내려줄지는 의문이었던 것이다.
결과는 금방 나왔다.
[새로운 작품을 완성하였습니다!]
[세상 모든 대장장이들에게 감명을 주는 전설의 대장장이이자 국왕이며, 영웅 중의 영웅인 입지전적 인물의 모습을 완벽하게 담아낸 명작의 탄생입니다!!]
[177년 만에 탄생한 <지존도(至尊圖)>입니다!!]
[당대 최고의 인물을 고스란히 묘사하고 후대에까지 전하게 될 당신의 업적은 찬사 받아 마땅합니다!]
[명작 완성 보상으로 모든 능력치가 +20 상승합니다!!]
[지존도 완성 보상으로 모든 능력치가 +50 상승합니다!! 모든 직업 관련 스킬의 레벨이 1씩 상승합니다!]
[전직 퀘스트 <역사에 길이 남을 화가...>가 생성됩니다!!]
[지존도의 주인공이 당신에게 깊은 감사를 느낄 것입니다.]
‘지존도?’
이건 또 무슨...?
의도치 않은, 예상치 못했던 결과물의 탄생에 삐까소가 당황하는 그때.
[<지존도(至尊圖)>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지존도(至尊圖)>가 파기되지 않는 한 당신의 모습과 위업은 후대까지 고스란히 전해질 것입니다.]
[당신의 현재 능력치가 <지존도(至尊圖)>에 각인 됩니다. 어떠한 계기로 당신이 쇠락하게 될지라도, <지존도(至尊圖)>에 각인 된 본인의 모습을 상기한다면 <지존도(至尊圖)> 시점의 힘을 복구할 수 있게 됩니다. 단, 이 기회는 1회에 한합니다.]
“...?????”
그리드는 수십 개의 의문부호를 띄우고 있었다.
그에게 삐까소가 말한다.
“당신이 지존이라는 사실을 시스템조차도 인정하고 있나 봐요.”
섣부른 추측이 아니다.
확신한 삐까소가 그리드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제게 당신을 그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어요. 영원히 잊지 못할 영광이에요. 앞으로 템빨국에 봉사하며 은혜를 갚아나갈게요.”
“...????”
천재라는 말 취소다.
도통 상황이 이해가 안 간다.
넋이 나간 그리드가 뒤늦게 지존도를 시야에 담았다.
착각일까? 아니면 삐까소가 의도적으로 미화해서 그려준 걸까?
대장일에 열중하고 있는 나의 모습, 고귀하게 느껴질 정도로 멋지다.
20일 후....
[템빨국 왕도 <라인하르트>에 대장장이 신 헥세타이아의 신전이 완공되었습니다!!]
[최초의 헥세타이아 신전입니다!!]
[헥세타이아 신과 레베카 여신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한 동상들의 예술적 가치가 하늘을 찌릅니다!!]
[새로운 문물이 당신의 식견을 높여줄 것입니다. 라인하르트에 방문하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Satisfy에 접속 중인 모든 플레이어에게 이와 같은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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