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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752화 (747/1,794)

템빨 42권 - 9화

자신의 분야에서 경험과 실력을 쌓은 인물은 언제, 어디에서나 존중받고 대접받기 마련이다.

하물며 정점은 존경심마저 불러일으켰다.

삐까소는 정점이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해!”

템빨단에 새롭게 합류한 삐까소를 환영하는 자리.

대륙 각지에 흩어져 있던 템빨단원들이 몰려와 그녀를 반겨 주었다.

랭킹 유지와 영지 관리로 바쁜 십공신들까지 없는 시간을 쪼개어 달려왔을 정도였다.

물론 십공신들의 방문에는 의도가 있었다.

“라인하르트에서 작업이 다 끝나면 바이란부터 들러 줘.”

“아니, 레이단이 먼저다. 지슈카 너는 레이단이 제2의 수도라는 사실을 잊었나? 라인하르트 다음 차례는 당연히 레이단이야.”

“레이단은 너무 크잖아. 거기 있는 시설물이 어디 한두 개도 아니고, 작업에 또 한참이 걸릴 텐데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라고? 상대적으로 작은 바이란부터 먼저 작업하는 편이 서로에게 좋지.”

“시골 입맛에 맞춘 궤변이군.”

“시골……? 헤에, 우리 크리스 많이 컸네? 엉덩이에 화살 박혀서 훌쩍일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말이지.”

“이제 와서 L.T.S 시절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웃기지 않나? 옛일에 얽매이는 것을 보니 마치 지르칸 같군.”

“지르칸? 그 영감님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너도 꼰대 같다고.”

“뭣……! 그게 젊은 처녀한테 할 말이야?! 야! 오랜만에 붙어 볼까?!”

“주작궁 안 쓰면 싸워 주지.”

“템빨단원이라는 놈이 템 핑계 대고 앉았네!”

명작은 사람에게 큰 영감을 주는 법이다.

현실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명작을 감상하고, 이에 영향을 받아 고양되어 더 나은 삶을 개척하는 에너지로 삼았다.

Satisfy에서 화가의 그림이 단순한 감상용일 리 만무한 것이다.

화가의 그림은 수많은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었다.

화가가 그린 용맹한 병사의 초상을 병영에 장식하면 병사들의 사기와 훈련 능률이 상승했고, 먹음직한 요리 그림을 식당에 장식하면 주방장의 요리가 더욱더 맛있게 느껴졌으며, 바다나 녹음을 담은 시원한 풍경화를 거리에 비치하면 도시를 잠식하고 있던 여름의 폭염이 사그라졌다.

화가의 실력이 좋을수록 그림의 효과가 다양해지고, 강력해지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말인즉.

‘삐까소 님의 합류는 본국 역사에 길이 남게 될 대사건이다.’

삐까소의 가치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는 뜻!

라우엘은 크게 흥분한 상태였다.

그림 한 장 그려 달라는 의뢰조차 대부분 거절한다는 콧대 높은 상대가 설마 템빨단에 가입을 신청할 줄이야?

‘헥세타이아의 초상을 그린 일이 그만큼 그녀에게 특별한 사건이었다는 뜻이겠지?’

결국.

‘헥세타이아 신의 생김새를 묘사해 준 그리드 님의 공로가 컸군.’

라우엘은 상기한다.

본인을 비롯한 템빨단 인재 대부분이 오직 그리드 한 사람에게 매료되어, 혹은 그리드에게 바라는 것이 있어서 템빨단에 가입한 것임을.

템빨단이 즉 그리드였고, 오로지 그리드 덕분에 템빨국이 탄생할 수 있었다.

“큭… 크크큭! 그리드 전하 당신은 정녕 마성의 남자로군요. 당신을 보고 있노라니 잊고 있던 전생의 기억 파편이 뇌리에 꽂혀 옵니다. 전생의 당신 또한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냈었지요. 마치 태양처럼……. 큭! 크큭! 짜릿합니다! 나의 쏘울이 불타 녹아내릴 정도로……!”

손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채, 기다란 손가락 틈새의 눈동자로 그리드를 바라보며 외치는 라우엘이었다.

그리드는 오래간만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고통을 느꼈지만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드의 머릿속은 이미 충분히 바빴기 때문이다. 별 헛소리에 어울려 줄 여력이 없었다.

‘아주 좋아. 기대 이상이야.’

헥세타이아 신전 건설 작업은 차질 없이 진행되기 시작한바.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그리드는 라인하르트로 귀환하는 길에 들렀던 사냥터에서 시험 삼아 사용한 <락(落)>의 잠재력을 가늠하고 있었다.

‘모션이 엄청 짧아.’

딱 한 걸음, 아니 정확히는 반걸음만 내딛음과 동시에 검을 하단으로 휘두르면 발동된다. 거의 즉발 스킬에 가까웠다.

2~4보 이상의 걸음이 강요되는 기존의 검무들과 비교하면 시전 속도가 압도적으로 빨랐다.

실제로 평타 직후에 연계가 가능했을 정도!

또 중요한 점은 CC에 완전 저항하는 대상에게 확률적으로 CC를 걸 수 있다는 부분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신이나 드래곤에게도 상태 이상을 걸 수 있다는 뜻!

제3회 국가대항전 당시에도 락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태산보다 더 거대한 드래곤을 일검에 위축시키는 장관을 전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보일 수 있었더라면…….

‘이건 엄청난 무기야.’

그리드가 특히 기대하는 부분은 융합 스킬이었다.

락의 모션이 짧다는 점을 고려해 봤을 때, 아무래도 다른 검무들과의 연계가 용이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연락, 살락, 파락, 회락, 극락…….’

…어째 영 어감은 좋지 않지만.

‘그건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런 걸 테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들을 때는 오히려 멋지고 환상적인 스킬명일 수도!

애써 마음을 달래고 있는 그리드의 곁으로.

“당신을 그리고 싶어요.”

삐까소가 다가와 청했다.

“나를?”

화가의 ‘그리다’는 표현은 액면 그대로 그림을 뜻하는 것일 터.

“갑자기 왜 나를……?”

어리둥절해져서 반문하던 그리드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라우엘과 지슈카, 그리고 크리스와 폰 등의 동료들이 놀라서 떡하니 입을 벌린 모습을 목격한 까닭이다.

라우엘의 다급한 귓속말이 들려왔다.

-그냥 넙죽 받아들이십시오! 그녀가 그리는 초상화의 주인공은 특수한 효과를 누린다는 소문이니까요!

-특수한 효과? 그게 뭔데?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녀가 각국의 대귀족들에게 초빙되어 그들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한 무렵부터 발생한 소문일 뿐, 아직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으니까요. 어쨌든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각국을 대표하는 대귀족들이 괜히 비싼 돈 들여가면서까지 그녀를 초대하고, 초상을 그려 달라 요청했겠어요?

단순한 초상을 그릴 수 있는 화가야 셀 수 없이 많다. 실물과 꼭 닮은, 혹은 실물보다 더 좋게 꾸며진 초상.

벽면 한편을 장식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초상쯤이야 어지간한 실력의 화가라면 완성할 수 있었다.

한데 귀족들은 굳이 삐까소를 지목해 왔다.

반드시 이유가 있을 거라는 것이 사람들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플레이어의 초상을 그린 전력이 단 한 번도 없고, 그녀의 초상에 숨겨진 기능을 누구도 엿볼 수 없었죠. 당신께서 최초가 되시는 겁니다.

-음… 그래.

뭐, 애초에 거절할 이유가 없다.

이유를 논하기에 앞서서 예절의 문제다.

지금 삐까소는 그리드에게 분명한 선의를 보내고 있었다. 앞으로 쭉 함께하게 된 동료의 선의를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드는 냉랭하지 않았다.

“좋아. 그려 줘.”

헥세타이아 신의 생김새를 완벽하게 재현한 삐까소이다.

그녀의 화폭에 담기게 될 나의 모습은 어떨까?

그리드는 살짝 호기심이 일었다. 하지만 기대감은 크지 못했다. 심지어 떨떠름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못난 얼굴을.

어린 시절부터 쭉 사랑받지 못했고, 도리어 조롱만 당했던 나의 모습을 화폭에 옮겨 봐야 괜한 수치심만 키우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생기는 것이었다.

“환영회도 슬슬 마무리이니 장소를 옮기고 싶어요. 당신의 진정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나의 진정한 모습……?”

삐까소의 요청에 잠시 당황하는 그리드였으나 이내 깨달았다.

‘대장간으로 가자는 거구나.’

마침 착용 중인 아이템들을 수리해야 할 시기이기도 하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래, 자리를 옮기자.”

***

“인간의 잣대를 대는 게 과연 옳은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헥세타이아 신을 동정하게 되었어요.”

“왜?”

오직 템빨국에서만 볼 수 있는 초대형 대장간.

망치질하는 그리드의 모습을 화폭에 옮기면서, 삐까소는 씁쓸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제가 헥세타이아 신의 모습을 재현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헥세타이아 신은 감격했는지 제게 높은 호감을 보였고요.”

헥세타이아는 인류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신이다. 하지만 헥세타이아가 베푼 은혜는 여신 레베카의 뜻이었고, 그렇기에 인류는 레베카에게 감사함을 느꼈으며, 그녀를 찬양하기 바빴다. 그 누구도 헥세타이아를 기억하지 않았다.

헥세타이아는 이야기의 서막에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진 조역에 불과했던 것이다.

“만약 제가 헥세타이아 신이었다면 서운했을 거예요.”

‘제대로 보네.’

누가 예술가 아니랄까 봐 감수성이 풍부하고, 그만큼 공감 능력이 강하다.

감탄하는 그리드에게 삐까소가 질문했다.

“당신은 헥세타이아 신의 모습을 어디서 보았죠? 그 누구도 재현한 적 없는 신의 생김새를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특별한 건 없고,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신의 모습을 보게 됐어.”

“…….”

퀘스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신의 모습을 보았다.

이런 경험이 가능한 플레이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삐까소는 지존의 영역이라는 것이 자신이 막연히 상상해 온 것보다 훨씬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해 있음을 확신했다.

그렇기에.

“화가의 작품이 명작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해요. 화가의 실력이 일정 수준 이상을 충족할 것이 첫째고, 둘째는 작품에 담기는 의도이며, 셋째는 작품을 그릴 당시 화가가 품는 마음가짐, 넷째는 작품의 주인공이 되는 대상의 가치죠. 여기서 말하는 가치는 대상의 신분이나 지위를 논하는 게 아니에요. 작품의 시대 배경에서 대상이 차지하는 비중을 뜻하죠.”

삐까소는 그리드를 주인공으로 삼은 새로운 명작을 노렸다.

여태까지 그녀가 완성시킨 명작은 단 4점.

4점 중 3점이 대자연의 위대함을 담은 풍경화였고, 나머지 1점이 바로 어제 완성시킨 헥세타이아 신의 초상이다.

그렇다.

‘인물’을 담은 작품이 명작으로 인정받은 경험은 그녀에게도 없는 것이었다.

여러 위업을 세운 대귀족들의 모습을 담아도 명작이라는 평가는 받지 못했다.

명작이란 만인의 공감을 사고 영감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법인데, 아무래도 대귀족들의 명성은 ‘만인’을 논하기엔 부족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 님은 다를 거야.’

나라를 세우고, 하늘이 되었으며, 종국에는 신을 엿본 인물이다.

시스템이 그의 비중을 낮게 평가할 리 없다는 것이 삐까소의 판단이었다.

‘당신에게도, 내게도 좋은 결과가 있기를…….’

슥슥, 슥슥슥.

간절하게 바라며, 삐까소는 어느덧 작업에 심취해 있는 그리드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 나갔다.

타오르는 불꽃과 뜨거운 열기를 대면하고 선 채, 어느덧 몰려온 수백 명의 대장장이들에게 존경 어린 시선을 받으며 강철을 두드리는 그리드의 모습.

헥세타이아 신과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는 위엄을 품고 있었다.

한편…

“동상의 젖꼭지를 초현실주의 조각법으로 제작해 줄 것으로 모자라서 불꽃까지 표현해 달라고요? 심지어는 색상까지 다르게?”

“그렇소.”

템빨국의 정치와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라빗 행정관이 한 명의 조각가와 대면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막 건설에 착수한 신전 앞에 세울 동상을 놓고 논의 중이었다.

“요구 한번 까다롭군요. 저쯤 되는 조각가 아니면 들어주지도 못할 요구네요! 염치가 없는 수준!!”

“젖꼭지에 붙은 불꽃을 표현해 달라는 게 그리도 어려운 요구요? 당신이 최고의 조각가라는 소문을 듣고 섭외한 것인데……. 고작 불꽃조차 표현하기 어렵다? 소문이 과장됐다고 시인하는 셈이나 다름이 없는 것 같소만……?”

“문외한이 봤을 때는 쉬운 일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전문가가 봤을 때는 황당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려운 요구가 맞습니다. 거의 보름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일만 하라고 강요하는 수준……! 당신 같은 악덕 고용주들 때문에 고통받는 노동자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하십니까!”

“아니, 그게 무슨 헛소리요? 나는 식음을 전폐하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잖소? 동상 제작 기한을 충분히 늘려 줄 테니까 괜한 물 타기 하지 말고 꼭 불꽃을 표현해 주시오.”

“800퍼센트.”

“……?”

“추가 수당 말입니다. 고용주의 요구가 늘어나는 만큼 수당 또한 늘어나는 것이 합리적인 거래 방식 아니겠습니까?”

“120퍼센트.”

“에이, 고객님 왜 이러십니까? 오고 가는 재물 속에 작업의 능률이 오르는 법이거늘……. 800퍼센트!”

“120퍼센트.”

“800!”

“120!”

“…….”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협상에 진척이 없다.

상대를 제대로 만났다.

동시에 깨달은 라빗과 조각가가 서로에게 큰 경계심을 품는 그때였다.

“600퍼센트로 조율하시죠.”

뒤늦게 나타난 라우엘이 크게 양보해서 협상에 여지를 주었다.

하지만 조각가는 소문대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있었다. 협상의 협 자조차 모른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799퍼센트!”

“…700퍼센트로 하시죠.”

“798퍼센트! 이 이상의 양보는 없수! 1퍼센트도 아니고 2퍼센트나 깎아 주는데, 따로 뇌물이라도 받지 않는 이상 나도 수지가 안 맞아!!”

“하…….”

저 나라 사람들은 왜 죄다 저 모양이지?

지끈지끈, 극심한 두통을 느낀 라우엘이 스트레스로 인한 탈모가 재발할 것을 우려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좋습니다. 798퍼센트의 추가 수당…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아이고~~ 헤헤! 감사합니다. 제가 서비스도 팍팍 넣어서 동상 재료를 무려 2.그.램. 정도 더 사용해 드리도록 합지요!!”

“…….”

괜히 섭외했나?

소문보다 더 악독한 조각가의 실체를 엿본 라우엘은 후회했으나 잠시뿐이다. 라우엘은 마치 치매 환자인 양 금방 후회를 잊었다.

조각가의 손끝에서 탄생하기 시작한 동상의 모습이 너무나도 완벽하고 훌륭했기에……!

‘실력조차도 소문 이상이었군!’

돈이 아깝지 않다, 라는 표현이 절로 떠오른다.

이건 마치 그리드 님께서 제작한 아이템을 목격한 기분이다.

따앙! 따앙! 따앙-!

하나는 대장간에서, 다른 하나는 신전 건설 현장에서.

라인하르트에 울려 퍼지는 두 개의 망치질 소리가 공명하며 템빨국을 단련시킨다.

서로를 느낀 대장장이와 조각가는 상대방에게 무한한 존경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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