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2권 - 7화
‘영 찝찝하단 말이지.’
교황청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하늘 정원. 산 중턱을 통째로 깎아 만든 그 대정원 중심에 그리드가 있었다.
은으로 만든 테이블에 홀로 앉은 채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찻잔을 입가에 가져가는 그의 모습은 상당히 운치가 있었다. 그를 수발 중인 교황청의 시중들이 속으로 꺅꺅거리면서 볼에 홍조를 띠울 정도였다.
교황청을 구한 영웅이 멋까지 겸비하였으니 호감이 안 생기겠는가?
하지만 콩깍지는 금방 벗겨졌다.
“퉷!! 퉤퉤!!”
“…….”
입에 머금었던 홍차를 바로 뱉어 내는 그리드의 모습 때문이었다.
홍차의 떫은맛을 즐기지 못하고 파르르! 경기를 일으키는 그의 모습은 기품과 영 거리가 멀었다.
‘아 씨! 꿀 타는 거 까먹었네.’
신경질적으로 찻잔을 내려놓은 그리드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떫은 홍차에 달콤한 꿀을 타는 일조차 잊을 정도로!
‘찝찝해. 겁나게 찝찝해.’
그리드는 의심 중이었다.
‘왜 자꾸 퍼 주려고 하는 거지?’
히든 퀘스트 <선악의 기로>와 전직 퀘스트 <최초의 성검 정화>의 보상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신장>의 강화였다.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삭제’하는 패시브 스킬이 무려 백 퍼센트 확률로 발동한다는 것이다.
강화판 신장의 사기성은 백치가 아닌 이상에야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리드가 불안한 이유다.
‘여태까지 쭉 나를 견제해 왔던 S.A그룹이 이제 와서 막 퍼 주고 싶어 난리라니……?’
수상하다.
‘노말 클래스 전직자 또한 각성을 거듭할수록 히든 클래스 전직자만큼 강해질 것이다.’
임철호 회장이 직접 밝힌 바 있듯이 S.A그룹은 Satisfy 내 밸런스에 굉장히 민감했다.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라고 해도 영원히 최강일 수는 없을 거라고 못 박았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그런데 신장을 백 퍼센트 확률로 발동하게끔 강화시켜 준다고?’
모든 파그마의 검무를 무조건 2회 연속으로 사용할 경우 발생한 파급력은 상상보다 더 클 것이 분명했다.
크라우젤, 아그너스, 그리고 제국의 공작들을 비롯한 시대의 강자들?
군신 아레스의 강병들?
진혈족 뱀파이어들?
모조리 다 그리드 앞에서는 평등할 가능성이 높았다.
‘연살파극을 비롯한 융합 스킬들의 연발 타격을 대체 누가 버텨?’
신장의 강화는 막말로 절대 무적의 힘이나 다름이 없었다. S.A그룹이 지향하는 바와 거리가 먼 밸붕 파워인 것이다. 그리드 입장에서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 혼자 독보적인 최강자가 되는 걸 S.A그룹이 바라고 있다? 아니, 그럴 리 없어. 강화된 신장은 함정일 가능성이 높아. 분명히 엄청난 페널티가 발생할 거야.’
예를 들어서 신장이 일정 횟수 연속으로 발동할 경우 스태미나가 0으로 하락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된다거나 하는 식의.
‘확실해. S.A의 변태들이 대가 없는 혜택을 줄 리가 없으니까.’
낚여선 안 된다. 이건 함정이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 즐기는 S.A그룹의 변태 운영진들이 뿌린 미끼를 덥석 물어 버렸다가는 또 끔찍한 고통을 당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뒤통수 맞은 경험이 셀 수 없이 많은 그리드이기 때문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그는 강화된 신장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렸다.
‘애초에 여신의 축복이 더 중요해.’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개인의 강함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여신의 축복을 받고 대장장이 기술을 강화시키는 편이 압도적으로 더 좋았다.
‘그럼 일단 성검을 정화해야…….’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가 질투를 버리게 만드는 방법이 뭘까?
그리드가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템빨왕 전하께서 여기 계셨군요.”
일단의 무리가 다가왔다.
깔끔한 백색 의복 차림의 노인들. 레베카교의 장로들이었다.
오로지 레베카 여신만을 섬기는 이들. 교황은 물론이고 제국의 황제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그들이 그리드의 곁에 두런두런 모여드는 것이었다.
“장로들께서도 쉬러 오셨습니까?”
그리드가 예의 바른 태도로 묻자 장로들이 허허 웃었다.
“허송세월하는 늙은이들에게 휴식이 필요하겠습니까? 단순한 땡땡이죠.”
“우리는 본교를 자신의 집안처럼 돌봐 주시는 템빨왕 전하와 달리 부지런하지 못합니다.”
“……?”
그리드가 내심 당황했다. 장로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서 굉장한 호감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물론 그리드가 레베카 교단 전체와 높은 호감도를 쌓기는 했다지만…….
‘이 콧대 높은 장로들은 데미안에게도 매번 잔소리만 하던데?’
그리드는 장로들의 성향을 알고 있다. 제국 황자에게조차도 고개 빳빳이 세우는 이들 아닌가?
‘물론 내가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내게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건 이상하다.
그리드는 일단 의심부터 하였다.
‘다른 꿍꿍이라도 있나?’
혹시 또 귀찮은 일을 떠넘기려는 속셈은 아닐까?
경계하는 그리드에게 장로들이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전하는 참으로 특별하신 분입니다.”
“특별……?”
“예. 마치 신처럼 신성하게 느껴집니다.”
“…….”
그리드가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장로들의 눈빛, 이사벨과 닮아 있음을.
그렇다. 이들은…….
“과거부터 몇 회나 본교가 위험에 빠질 때마다 절묘하게 등장하시어 모두를 구원하시니, 마치 신화 속의 신과 같습니다.”
“맞아요, 맞아. 과연 이게 영웅 중의 영웅이구나 싶어요.”
“하하…….”
그리드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딱히 겸손하게 대처하지 않았다. 그야 당연히 칭찬받을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장로들이 하는 말에 일말의 과장이라도 있는가? 없다. 사악한 교황 드레비고 사건 때도, 교황 후보 파스칼 사건 때도, 레베카의 딸 이사벨을 도울 때도, 이번에 교황청이 습격을 당했을 때도. 그리드는 매번 늦지 않은 타이밍에 나타나 악을 멸하고 모두를 구했다. 감사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리드는 장로들의 자신에 대한 호감도가 최대치를 넘어서 신격화하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고, 이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품게 되었다.
“혹시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그야 당연하지요. 빛의 여신을 섬기는 여섯 신 중 한 분이 아니십니까. 헥세타이아 신께서 계시기에 인류는 불을 다룰 수 있게 되었고, 철의 사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진화는 헥세타이아 신의 덕분이라고 할 수 있지요.”
“네, 그렇죠.”
그리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호응해 주었다. 레베카교 교인들에게 헥세타이아의 실체를 발설해선 안 되는 그의 입장에서는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장로들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들어 주면서 그들의 흥을 돋워 주었다.
그러자,
“하지만 헥세타이아 신의 행동은 모두 레베카 여신의 뜻에 의했던 것……. 결국 공로는 레베카 여신께 돌려야만 하지요.”
“맞아요, 맞아. 헥세타이아 신이 인류에게 불과 철의 사용법을 알려 준 이유는 순전히 여신의 명령 때문 아니었습니까? 진정으로 훌륭하신 분은 레베카 여신이시고, 헥세타이아 신은 여신의 사자일 뿐이지요.”
한껏 들뜬 장로들이 실컷 떠들기 시작했다.
헥세타이아는 어째서 타인을 쉽게 질투하고 시기하게 되었는가. 그리드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자존감이 낮구나.’
기껏 인류에게 가르침을 주었더니 정작 인류가 감사하는 대상은 레베카 여신이지 헥세타이아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리드는 헥세타이아를 섬기는 종교를 본 기억이 없다. 그 흔한 석상조차 못 봤다.
‘내가 헥세타이아였더라도 서운했겠네.’
자괴감을 느꼈을 테고, 그러면서도 또 여신을 원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자신의 재능을 위협하는 인간마저 나타났으니,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원망의 화살을 인류에게 겨눴으리라.
‘…어찌 보면 불쌍하네.’
자존감은 중요하다. 누구보다 그리드가 잘 알고 있다. 못난이 시절의 그리드는 자존감이 낮았고, 피해 의식이 심했으며, 타인을 쉽게 원망하고 질투했었다.
‘비뚤어질 만해.’
그리드가 헥세타이아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헥세타이아가 과거에 범한 죄를 옹호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단,
‘…헥세타이아에게 필요한 건 위로야.’
이해한 만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알게 된다.
탁, 탁, 탁…….
신나서 떠들고 있는 장로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테이블을 두드리는 그리드. 그가 고민 끝에 결론을 내놓았다.
‘지금이라도 인정해 주면 어떨까?’
헥세타이아의 노고를 알아주고 감사함을 전달한다면 배배 꼬여 있는 헥세타이아의 심기가 조금은 풀리지 않을까?
그가 질투를 버리는 순간 성검 또한 저주에서 해방될 것이고.
‘충분히 가능성 있어.’
어찌 됐든 상대는 신이다. 굳이 적대하고 싸우기보다는 원만하게 해결하는 편이 좋다.
‘소외감을 해소시켜 주자.’
방법이야 간단하다. 명분도 있다.
자신이 대장장이임을 상기한 그리드가 장로들에게 의견을 내놓았다.
“헥세타이아 신의 신전을 건설하고 싶군요.”
“예……? 헥세타이아 신의 신전을요?”
“굳이 그러실 필요가……? 오직 레베카 여신을 섬기는 것만이 모든 신을 존중하는 길입니다.”
“맞습니다. 헥세타이아 신 본인 또한 달가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민망해하겠지요.”
장로들이 반발하자 당황한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따지면 도미니언교와 쥬다르교도 있을 필요가 없는 거 아닙니까?”
“아니요. 그건 경우가 다르지요. 도미니언 신과 쥬다르 신은 헥세타이아 신과 비할 바 없이 많은 공로를 세우신 분들이니…….”
“무신 제라툴은요? 제라툴 신을 추종하는 이들이 따로 있다고 들었는데요.”
“뭐, 비록 제라툴 신의 공로가 적다고 해도 신은 신이니……. 그를 공경하는 자들이 있어도 이상하진 않……. 아, 그렇군요. 전하께서는 대장장이이시니만큼 헥세타이아 신을 공경하는 마음이 있으신 거군요?”
“네.”
결국 모두가 이기적이구나.
장로들의 반응을 보면서 새삼 깨달은 그리드가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고, 뒤늦게 그리드의 입장을 이해한 장로들이 동의하기 시작했다.
“음, 전설의 대장장이이신 전하께서 헥세타이아 신을 섬긴다라……. 여러 가지 의미로 괜찮을 것 같군요.”
“맞아요. 템빨왕 전하께서 헥세타이아 신을 섬긴다는 말은, 즉 헥세타이아 신이 섬기는 레베카 여신을 섬긴다는 뜻이 되는 것이니 레베카 여신께서도 기뻐하실 테고요.”
“좋습니다, 전하. 우리 장로들이 새로운 신전의 건설을 허가하겠습니다. 헥세타이아 신을 섬기는 신전을 건설하도록 하십시오. 단, 헥세타이아 신의 동상 옆에는 그보다 큰 레베카 여신의 동상을 세우셔야만 합니다.”
“헥세타이아 신 또한 결국 레베카 여신 덕분에 존재하는 것임을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하니까요.”
“…네, 그러지요.”
레베카 여신 외의 신을 섬기는 신전을 세우려면 레베카 교단의 허락이 필요한 거였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그리드가 다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레베카 여신을 섬기는 장로들의 태도가 너무 맹목적으로 느껴졌다. 솔직히 좋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더,
쫘아악…….
소름이 돋는 것이다.
‘거의 세뇌 수준으로 레베카 여신을 섬기는 이들이 나를 신격화하기 직전의 상태까지 이르다니…….’
특히 이사벨은 나를 위해서라면 레베카 여신조차 등질 각오를 다지지 않았던가?
이거 어쩌면…….
‘내가 레베카교를 도운 일이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일이었던 건가?’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특히 여신의 분노라도 샀다가는 어떻게 되는가 싶었다.
‘아니, 지금은 그런 걸 걱정할 때가 아니야.’
고개를 저으며 복잡한 마음을 털어 낸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헥세타이아 신의 신전을 건설함으로써 질투를 잠재운다. 과연 이 방법이 먹힐지 확인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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