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2권 - 4화
‘꿈 아니지?’
검정색 원탁과 이를 둘러싼 10개의 석좌.
왕도 라인하르트에 귀환하자마자 재상 라우엘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코크는 흥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악마적 두뇌의 지략가 라우엘, 주작을 부르는 신궁 지슈카, 섬광의 극검, 냉혈 귀공자 폰, 정의의 철권 레가스, 대머리 반트너. 석좌에 앉은 인물들은 전원 템빨국의 개국공신이었다.
저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없었다면 템빨국의 탄생은 힘들었을 수도 있다. 코크가 그리드 다음으로 존경하고 선망하는 인물들인 것이다.
비어 있는 4개 석좌의 주인들은 누굴까?
‘페이커 님과 후로이 님, 그리고 카츠 님과 크리스 님의 자리겠지? 아니, 페이커 님은 성격상 자리를 거부하셨을 수도……. 유페미나 님의 자리인가?’
꿀꺽!
코크는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자신 같은 무명소졸이 각 분야 최고의 랭커이자 그리드의 최측근들을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는 꿈만 같이 기뻤다.
물론 긴장도 됐다.
쨍그랑-!
“앗……! 죄, 죄송합니다!!”
떨리는 손으로 물 잔을 들다가 급기야 떨어뜨리고 만 코크가 어찌할 바를 모른다.
깨진 유리잔을 치우려고 호들갑 떠는 그에게 정의의 철권 레가스가 상냥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괜찮아요. 걱정 말고 자리에 앉으세요.”
대머리 반트너가 쯧쯧 혀를 찼다.
“흥! 저딴 애송이가 아이린 왕비와 로드 왕자를 지켰다고? 잘못된 정보 아니야?”
“…….”
냉혈 귀공자 폰은 침묵을 지킬 뿐이었고,
“역시 한국인.”
극검은 코크에게 애정 가득한 눈길을 보낸다. 마치 몇 년 만에 재회한 친동생을 보는 듯한 태도였다.
“푸하하핫!! 코크! 나는 너를 진작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고!! 여윽시 갓국인!! 피, 땀, 눈물로 진화시켜 온 한국인의 DNA는 과연 최고란 말이지!! 푸핫! 푸하핫!! 좋아! 마음에 들었어!! 너, 이번에야말로 대한애국협회에 가입해라!! 회비는 월 80만 원밖에 안 해!! 단돈 80만 원으로 애국할 수 있는 기회라고!!”
“…….”
아니, 친동생이 아니라 호구 보는 듯한 눈빛이었던 건가?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내 주는 극검의 태도에 감격하다가 이내 당황하고 실망하는 코크의 귓가에,
“다들.”
‘아……!’
남미 최고의 미녀로 손꼽히는 구릿빛 피부의 여인, 지슈카의 음성이 들려왔다. 듣는 이의 오감을 짜릿하게 자극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혼을 쏙 뺏어 버리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녀는 과연 무슨 이야기를 꺼낼까?
두근! 두근!
지슈카의 이어질 말을 기대하며 경청하던 코크가 이내 당황한다.
“닥쳐.”
지슈카의 도톰한 입술이 벌어지면서 흘러나오는 멘트가 코크의 예상과는 달리 무척 험했던 까닭이다.
“다들 닥치라니까?”
“으, 응…….”
시끄럽게 떠들던 극검과 반트너가 사자 앞의 고양이처럼 기가 죽더니 바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국가대항전에서 전대 영웅 크라우젤을 물리쳤던 섬광의 극검과 템빨단의 방패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대머리 반트너. 처음 세상에 이름을 알렸을 때부터 거물이었고, 이제 지금은 거물 중의 거물이 된 그들조차도 지슈카 앞에서는 기도 못 펴는 것이다.
‘과연 주작을 부르는 신궁……!’
지슈카의 미모에 홀려 있던 코크가 바짝 정신을 차렸다.
그는 상기했다. 에트날 전쟁 당시 활 한 자루로 수천의 적군을 몰살시켰던 신궁의 위용을!
그렇다. 눈앞의 여성은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템빨단 내에서도 최강의 실력자인 것이다. 단지 미모만으로 그녀를 평가한다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척!
저도 모르게 차렷 자세를 취하는 코크였다.
“자, 이제 말해.”
분위기가 진정된 것을 확인한 지슈카가 바통을 라우엘에게 넘긴다.
라우엘. 온갖 계략과 책략으로 적들에게 절망을 선사하고 종국에는 그리드를 왕으로 만든 악마적 두뇌의 지략가! 현재는 템빨국의 국정을 돌보고 있는, 그야말로 템빨국 최고의 실세였다.
“…꿀꺽!”
바짝 긴장한 코크가 또다시 마른침을 삼켰다.
커다란 석좌에 눕듯이 등을 기대고 앉은 채 한쪽 손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는 라우엘은 묘한 카리스마를 풍기고 있었다.
실로 2인자의 위용이랄까. 그 누구라도 라우엘과 대면하게 되면 긴장할 것 같았다.
‘으으…….’
영원 같은 찰나다. 라우엘과 시선을 마주치고 있는 단 2~3초의 시간이 코크에게는 몇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라우엘의 푸른 눈동자에는 마치 우주가 담겨 있는 것 같았고, 그에 관조당하는 코크는 벌거벗겨진 심정이었다. 라우엘에게 모든 것을 낱낱이 파헤쳐지는 느낌인지라 한없이 작아졌다.
꿀꺽!
목이 바짝 마른다.
연신 마른침을 삼키는 코크의 긴장감이 극대화됐다. 그는 자신을 소환한 라우엘이 부디 빨리 어떤 말이라도 해 주길 바랐다.
바람을 읽은 것일까?
“당신.”
라우엘이 드디어 운을 뗐다.
“예……!”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코크의 음성이 갈라진다. 목이 말라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라우엘은 거만하게 턱을 괴고 있었다.
씨익!
세워진 옷깃 틈새로 엿보이는 라우엘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걸까?’
동경하던 개국공신들을 만나게 됐다는 기쁨은 이미 진즉부터 잊게 된 코크였다. 개국공신들의 포스는 코크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기에!
라우엘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코크라고 했지요?”
“예……! 그렇습니다!”
“어떻습니까?”
“예?”
코크는 연달아 계속되는 질문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스윽.
라우엘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두 팔을 활짝 펼친 그가 기고만장한 미소를 머금고 소리친다.
“우리들 십공신의 위용! 대단하지 않습니까!!”
“십… 공신?”
“큭……. 크크큭……! 그렇습니다. 과거에는 신을 섬기던 칠악성이 있었다면, 당대에는 템빨왕을 섬기는 십공신이 있는 거지요.”
“…….”
교황청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상세한 내막을 그리드에게 연락받아 알고 있는 라우엘이었다.
라우엘은 칠악성에 꽂혔다. 중2병인 그가 봤을 때 칠악성은 무척 멋지고 매력적인 존재들이었다. 하여 십공신을 떠올린 것이다. 템빨왕을 섬기며, 템빨왕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10인의 영웅들!
“멋지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 모두가 우리들 십공신을 찬양하게 될 것이며, 십공신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템빨왕 전하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게 될 것이라고요? 후후훗!”
“아, 네……. 십… 공신…….”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지? 나를 부른 이유가 있기는 할까?
어안이 벙벙해진 코크가 별 의욕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에게 극검이 속삭였다.
“발음에 주의해. 공이야, 공. 등이 아니라고.”
“…….”
십공신이라는 어감이 썩 좋지 않다고 느끼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구나. 같은 한국인인 극검도 느끼고 있었구나.
극검을 바라보는 코크의 눈에 측은지심이 담기는 그때 라우엘이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코크 경, 전하께 당신의 무용담을 들었습니다. 머잖아 단신으로 적기사단을 격파할 인재라면서요?”
“예? 아, 아니, 그건 그리드 전하께서…….”
“우리 십공신은 회의 끝에 결정했습니다. 당신을 직접 육성하기로.”
“……?”
“당신, 오늘 이 시간부로 우리들 십공신 밑에서 공부하도록 하세요. 저에게는 책략을, 지슈카 님에게는 궁술을, 극검 님에게는 검술을, 폰 님에게는 기마술과 창술을, 레가스 님에게는 격투술을, 그리고 반트너 님에게는 둔기술과 방패술을 배우는 겁니다.”
소드 마스터리, 보우 마스터리, 스피어 마스터리 등 기사라는 직업은 다양한 종류의 마스터리 스킬을 습득할 수 있다. 육성하기에 따라서 만능의 직업이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스킬을 습득하고 레벨을 올리는 과정이 무척 험난하다는 점이었다.
당연하다. 마스터리 스킬의 경험치는 그 마스터리에 적합한 무기를 ‘사용할 때’만 비로소 축적되는 것. 어느 세월에 소드 마스터리, 보우 마스터리, 스피어 마스터리 등의 모든 마스터리 스킬 레벨을 올리겠는가? 모든 무기에 통용, 적용되는 <웨폰 마스터리> 스킬 하나만 보유하고 있는 일부 직업군들과 비교해서 기사의 성장 기반은 훨씬 불리한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기사 플레이어들은 한 가지 무기에만 파고들었다. 검이면 검, 창이면 창, 둔기면 둔기. 오직 하나의 무기만 반복 사용함으로써 한 가지 마스터리 스킬만 육성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직업. 그것이 기사인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스킬 레벨이 자연 상승하는 NPC 기사들은 사정이 달랐지만…….
“배려는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코크는 플레이어다. 그의 시간과 성장에는 한계가 있었다.
<석좌의 방>에 들어온 이후부터 내내 긴장하고 있던 그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떨림이 사라졌다. 흔들림 없는 시선이 라우엘과 십공신들을 똑바로 바라본다.
“스승이 훌륭하면 뭐 합니까? 시스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십공신 여러분께 가르침을 받는다고 해 봤자 마스터리 스킬의 레벨이 오르는 속도는 무척 더딜 수밖에 없고, 결국 저는 이도저도 아닌 잡캐로 전락하게 되겠죠. 차라리 여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검술에만 집중하겠습니다. 단.”
“단?”
“라우엘 님께 책략을 사사할 기회는 꼭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시다시피 기사는 책략과 전술 스킬을 습득할 수 있고, 이를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기 때문에…….”
“후훗! 당돌하네.”
자신이 속한 국가의 재상과 개국공신들이 선심 써서 내린 제안에 맹점이 있음을 가감 없이 밝히고, 명령을 거부한 것으로 모자라서 이득은 취하겠다?
코크의 태도는 자칫 괘씸해 보였다. 만약 이 자리에 모인 개국공신들이 머리 굳은 꼰대들이었다면 역정을 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템빨국의 개국공신들은 꼰대가 아니다. 그들은 도리어 코크를 좋게 보았다.
“우리랑 성격이 비슷하네.”
“재목이라는 뜻이지.”
“그리드의 평가가 정확했어.”
“……?”
혹 밉보이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던 코크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분위기가 사늘해지기는커녕 좋아졌으니 당혹스러웠다.
그에게 라우엘이 설명했다.
“아이템의 옵션은 셀 수 없이 다양합니다. 착용자를 강하게 만들어 주는 아이템이 있는 반면, 착용자의 성장을 돕는 아이템도 있죠.”
대표적인 예가 착용자의 스킬 숙련도가 상승하는 속도를 높여 주는 아이템이다. 특히 저레벨 필드 보스를 잡을 때 종종 드롭되는 아이템이었다.
“당신을 위해서 성장을 돕는 온갖 무구를 준비해 뒀습니다.”
“시시한 필드 보스들 사냥하느라고 하품이 나왔을 지경이라고?”
“성능은 구리지만 뭐, 우리가 서포트해 줄 테니까 괜찮아.”
“시간이 부족하다. 바로 사냥터로 이동하자.”
“아…….”
이미 다 알고 준비해 두셨구나. 하긴 당연한가.
이들은 선배 랭커이자 템빨국의 개국공신들.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면 알았지, 모르는 게 있을 리 없다.
깨닫는 코크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는 한껏 고양되었다.
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여러분께서 제게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이유가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십공신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인물들이었다. 국정을 돌보는 것으로 모자라서 랭킹도 사수해야 했다. 그들이 내게 없는 시간을 쪼개서 투자해 준다는 것이다.
왜? 대체 내가 뭐라고?
이해하지 못하고 질문하는 코크에게 모두를 대표한 라우엘이 대답한다.
“그리드 전하의 선언을 현실로 만들어야 하니까요. 전하께서 괜한 허풍쟁이로 오해받게 되시면 열 받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간단명료한 대답이다.
납득하고 상기된 코크가 힘차게 소리쳤다.
“저 또한 최선을 다할 테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십공신님들!”
“…호칭 바꾸자.”
극검이 재차 부탁했지만 한 귀로 흘리는 라우엘이었다.
이날, 십공신의 비밀 병기 육성 프로젝트가 가동됐다.
***
따앙! 따앙!
치이이익-!
[<석화되어 가는 최초의 성검>의 이해도가 60퍼센트를 달성했습니다!]
작업 3일째. 그리드가 최초의 성검을 100회 이상 분해하고 재조립한 순간이었다.
[성검의 제작자가 범한 <죄>가 <원죄의 돌>을 자극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검 제작자의 죄?”
최초의 성검의 제작자는 신이다.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
신이 죄를 범했다?
의외의 전개에 사뭇 놀라는 그리드의 시야로,
쩍-! 쩌저저적!!
재조립된 최초의 성검이 석화되는 과정이 실시간으로 포착됐다.
석화는 전보다 훨씬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넓은 범위로 진행되며 성검의 칼날을 잠식해 갔다.
“무슨……!”
기겁한 그리드가 성검을 망치로 힘껏 때리기 시작했다. 석화되는 부분들에 충격을 줘서 돌을 떨어뜨리고 석화의 진행을 억제할 의도였다.
하지만 지난 3일 동안 먹혀들었던 그 방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
석화는 외부의 자극에 더 이상 취약하지 않았다. 아무리 망치로 힘껏 때려 봤자 날을 잠식하는 석화의 진행 속도는 느려지지 않았다.
“큭……!”
지난 3일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
등골이 오싹해진 그리드가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용광로 속에 성검을 집어 던지는 것이다. 다시 녹여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돌을 떼어 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콰아아아앙!!
용광로 속에 들어간 성검은 녹지 않았다. 도리어 큰 폭발을 일으키더니 용광로를 산산조각 내 버렸다.
“뭐?”
충격에 휩쓸리고 엉덩방아 찧는 그리드의 어안이 벙벙해진다.
어느덧 검신의 절반이 석화 상태에 돌입한 성검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신의 죄를 감싸는가?
알 수 없는 음성이 들려온다.
그리드는 직감했다. 현재 자신이 수행 중인 퀘스트가 드디어 본격적인 전개를 맞이하게 되었음을!
-4악의 힘을 계승한 자여, 신이 범한 죄를 보라!
알 수 없는 음성에 분노가 깃드는 순간,
파아아앗-!!
그리드의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고, 그의 의식은 교황청의 대장간을 떠나 전혀 새로운 곳으로 전송됐다.
아스가르드, 신들의 세상이었다.
같은 시각, S.A그룹 본사 회장실.
“이걸로 2명째…….”
그리드는 어떤 선택을 내릴까? 선악의 밸런스는 과연 맞춰질까?
지켜보는 임철호 회장의 표정에 긴장감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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