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2권 - 3화
아이템 이해도라는 개념이 있다. 아이템 관찰, 사용, 분해, 조립의 과정을 토대로 최대 백 퍼센트까지 올릴 수 있는 개념으로, 파그마의 후예가 아이템 이해도 백 퍼센트를 달성할 경우 해당 아이템의 제작법을 획득할 수 있었다.
“아이템 분해!”
그리드는 최초의 성검을 정화하기에 앞서서 이해도를 높일 계획이었다. 성검을 깊이 이해할수록 정화의 과정이 수월해질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해도를 백 퍼센트까지 올리는 건 사실상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왜? 최초의 성검은 빛의 여신 레베카가 지상에 직접 내린 신물이며, 대륙 최고 종교의 상징이자 긍지니까? 신화급 아이템 중에서도 특출하기 때문에 고작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해도를 높이는 게 불가능하다?
아니다. 신화급 아이템은 모두 똑같이 특별했다. 성능이야 각기 다를지 몰라도 신화급 아이템에 담긴 ‘의미’의 고하를 논하는 건 가당치 않다.
그리드가 최초의 성검의 이해도를 백 퍼센트로 만드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는 이유는 단지 최초의 성검이 <퀘스트 전용 아이템>의 성질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화되어 가는 최초의 성검>
등급:신화
인류 최초의 성검입니다. 칠악성에 의해 <원죄의 돌>에 봉인당했지만 파그마의 후예 그리드가 일시적으로 봉인을 풀었습니다.
아직 저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원죄의 돌에 다시금 잠식되어 가는 중입니다.
히든 퀘스트 <선악의 기로>가 발생했을 당시, 그러니까 성검의 이름이 아직 <칼끝이 바위 조각에 박혀 있는 검>이었을 때도 지금과 같았다. 아이템 정보에 공격력, 내구력 등의 옵션은 일체 표기되지 않고 간략한 경위만 나열돼 있을 뿐이다.
그리드는 성검을 무장한 교황 데미안이 단 일격으로 알리번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장면을 목격하는 시점에 확신한 바 있다.
‘최초의 성검은 퀘스트용 아이템이야. 보통 아이템처럼 평범하게 사용할 수 없어.’
평소에는 별다른 기능이 없는 예식품일 뿐이며, 특별한 순간에만 기능을 발휘하는 형태의 아이템.
특정 퀘스트와 에피소드를 위해서 존재하는 아이템을 양산할 여지를 준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상징물로서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버그 방지를 위해서라도 이해도를 백 퍼센트까지 올리는 건 막아 놨겠지.’
하지만 99.9퍼센트까지 올리는 건 가능할 터. 아이템 제작법을 습득할 수는 없되, 그 아이템에 숨겨진 기능과 의도까지는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
딱 그만큼만 돼도.
‘정화할 수 있는 방법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우선 저주가 어떤 식으로 검을 잠식했는지 확인해야 한다.
판단한 그리드가 징과 망치를 손에 쥐었다.
따앙-!!
교단의 성물을 거침없이 후려치는 그리드!
레베카 교인들이 봤다가는 천인공노하고도 남을 광경이었다. 하지만 정작 교황 데미안은 잠자코 그리드를 지켜보았다.
따앙! 따당!! 따다당-! 따아앙-!!
각종 도구를 이용한 그리드가 성검에 온갖 자극을 전달해도,
화르르르륵!!
뜨거운 불길이 치솟는 용광로 속에 성검을 집어 던져도 데미안은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그저 지켜보았다. 그리드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였다.
신뢰를 품을 수밖에 없다. 이미 그리드에게는 전력이 있지 않은가. 리파엘의 창을 수십 번 더 분해, 조립하고 이사벨을 구원해 준 전력이!
‘근데…….’
한 시간쯤 지났을까. 잠자코 선 채 그리드를 지켜보고 있던 데미안의 얼굴에 차츰 불안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리드가 최초의 성검을 잿더미로 만들 기세로 용광로에 처박아 둬 봤자, 부서지라는 기세로 힘껏 후려쳐 봤자 성검의 형태가 변하거나 분해되기는커녕 온전한 형태를 계속해서 유지했기 때문이다.
‘착각인가……. 어째서 진척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아무래도 착각은 아닌 듯하다.
‘혹시 뭔가 잘못됐나?’
데미안이 설마 하며 품는 불안, 정확했다. 현실이었다.
“헉헉……. 염병?”
작업 내내 이를 악물고 망치질과 풀무질을 반복하던 그리드가 급기야 욕설을 토했다.
그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대상 아이템을 구성하고 있는 금속의 녹는점을 발견하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제련에 실패합니다.]
[대상 아이템의 결합 부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분해에 실패합니다.]
‘왜 이해도가 안 오르는 거야?’
그것이 설령 신화급 아이템이었을지언정 그리드가 특정 아이템을 감정하거나 분해할 경우 아이템 이해도는 무조건 조금씩이나마 상승했었다. 한데 최초의 성검의 이해도는 요지부동인 것이다. 그리드가 감정을 반복해도, 분해를 시도해도 이해도는 7퍼센트로 유지된 채 그 이상 오르질 않았다.
‘내가 100퍼센트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99.9퍼센트, 아니 정화의 실마리를 얻는 정도의 이해도만 바라는 건데 그게 안 돼?’
아니, 세상에 안 되는 건 없다.
‘계속 시도하다 보면 오르겠지?’
그리드의 최대 강점은 끈기다. 요지부동인 이해도를 보고도 좌절하거나 의욕을 잃기는커녕 어디 한번 해 보자는 식으로 의욕을 불태운 그가 감정과 분해를 재차 반복했다.
10회 반복해도 이해도가 안 오르니 10회 더.
20회 반복해도 이해도가 안 오르니 20회 더.
20회 반복해도 이해도가 안 오르니 30회 더.
30회 반복해도 이해도가 안 오르니 40회 더.
그렇게 계속, 계속 시도했다.
“헥헥……! 헉……! 컥……!!”
불현듯 칸이 떠오르는 그리드였다.
대장일은 높은 체력을 요구하는 중노동인바, 대장일하다가 스태미나 다 떨어지고 지쳐 죽겠다 싶었다.
‘이대로 죽으면 칸을 만날 수 있는 건가…….’
“…리드 님! 그리드 님!!”
“…헉!!”
모루 위에 널브러진 채 개처럼 혀를 내밀고 헉헉거리고 있던 그리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데미안이 바로 곁에 있었다. 근심 가득한 표정이다.
“우선 좀 쉬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쉬긴 뭘 쉬어?”
아이템 하나를 만드는 데 며칠씩 매진하는 것이 그리드의 일상이었다. 고작 아이템 이해도 높이는 작업 한두 시간 했다고 벌써 쉰다는 건 엄살…….
“응?”
호들갑 떠는 데미안에게 손사래 치던 그리드가 당황했다. 데미안이 등지고 선 창문 밖 풍경이 환한 대낮이었던 까닭이다.
“내가 밤을 샜다고?”
“벌써 정오를 넘겼습니다. 15시간 가까이 일하셨다고요.”
“뭐?”
체감하기로는 고작 한두 시간에 불과했는데?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무아지경의 상태에 돌입했었다?’
작업 집중력은 충분했다는 뜻. 근데 효율은 제로다. 여전히 최초의 성검의 이해도 게이지는 7퍼센트에 멈춰 있었다.
“무슨…….”
그리드가 절망한다. 무아지경의 상태에 돌입하고도 작업 결과가 엉망인 경우는 난생처음이었던 까닭이다.
‘이런 빌어먹을!’
꽈드득! 이를 간 그리드가 모루에 기대 세워 놓은 최초의 성검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사람을 개고생시켜 놓고도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채 고고하게 있는 꼴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었다.
데미안이 한숨 쉬었다.
“최초의 성검은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가 직접 창조한 광물로 제작했다는 구전이 있지요……. 아무래도 신의 영역이다 보니 이번 과제는 그리드 님께도 어려울 수 있겠네요.”
“핵쎄 뭐? 뭐가 쎄?”
띠링~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력이 영구적으로 10 상승하고, 대장장이 기술의 경험치가 2퍼센트 상승합니다!]
“…엉?”
새로운 지식의 습득은 때때로 큰 힘이 된다. 사람들이 각국, 각 도시에 존재하는 도서관 출입에 목매달며, 도서관에 존재하는 서적을 최대한 많이 열람하고자 노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대장장이 신의 정보를 처음으로 듣고 보너스 효과를 얻게 된 그리드가 당황하는 그때,
[<석화되어 가는 최초의 성검>의 제작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석화되어 가는 최초의 성검>의 이해도가 5퍼센트 상승합니다!]
[<석화되어 가는 최초의 성검>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의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석화되어 가는 최초의 성검>의 이해도가 7퍼센트 상승합니다!]
이 같은 알림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아.”
그리드가 탄식했다.
기뻐서? 전혀! 도리어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고자 노력하는 그리드였다.
미간에 내 천 자를 그린 채 이를 악물고 어색하게 미소 지은 그가 데미안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성검의 재질이 정확히 뭔데?”
“디바인 스톤이라고 하더군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대장장이 신 헥세타이아가 자신의 권능으로 직접 창조한 광물입니다.”
띠링~
[새로운 광물의 정보를 획득하였습니다!]
[대장장이 기술의 저변이 확대됩니다!]
[<석화되어 가는 최초의 성검>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의 정체를 알게 됐습니다.]
[<석화되어 가는 최초의 성검>의 이해도가 15퍼센트 상승합니다.]
“…….”
이불 킥. 자려고 누웠을 때 부끄럽거나 창피스러운 일이 불현듯 떠올라 이불을 걷어차는 행위를 뜻한다.
그리드에게는 이불 킥 할 만한 기억이 셀 수 없이 많았고, 그 기억 중 하나가 바로 파그마의 검무를 처음 얻었을 당시의 사건이다.
벽화에 그려진 파그마의 검무 동작을 일일이 보고 따라 했었던…….
“하……. XX…….”
오래간만에 삽질 제대로 했다.
이번 퀘스트 의뢰인이 NPC가 아니라 같은 플레이어인 나머지 ‘기본’을 잊고 말았다.
‘의뢰인에게 최소한의 정보를 획득하는 걸 잊다니…….’
부끄럽고, 화가 나고, 이미 날아간 시간이 아깝다.
‘…아니, 내 잘못도 내 잘못이지만 데미안 이 자식이 눈치껏 먼저 나서서 설명해 줬어도 되는 부분들이잖아?’
부들부들 몸을 떠는 그리드에게,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가끔은 일이 안 풀릴 때도 있는 법이니까요. 우선 식사부터 하시고 쉬었다가 다시 일을 진행하시는 건 어떨까요?”
데미안은 미소 띤 얼굴로 제안했다. 그리드가 자신 때문에 화났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 배고프다. 우리 이사벨 쨩도 나 기다리느라고 밥 안 먹었으면 어쩌지?”
활짝 웃는 낯으로 대장간을 떠나려는 데미안을,
“거기 서.”
“……?”
불러 세우는 그리드.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는 데미안을 노려보는 그의 얼굴이 마치 저승사자처럼 섬뜩하다.
“너, 내 작업 다 끝날 때까지 어디 가지 말고 내 옆에 앉아 있어. 밥 먹을 생각도 마.”
“하잇?”
“옆에 앉아서 네가 알고 있는 정보 죄다 토해.”
“하, 하지만 하라헷따…….”
“지금 이 상황에 밥이 넘어가냐!!”
“……?!”
그리드 님께서 갑자기 왜 내게 화를 내시는 걸까?
처음에는 낯선 모습에 당황하던 데미안이었으나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화내실 만해! 내 생각이 너무 얕았다!’
아직 성검의 저주가 풀리지 않은 상황이다. 외부에서 온 손님이 성검의 저주를 풀고자 고군분투하는 이때, 교황이라는 작자가 혼자서 나가 밥을 먹는다?
교인들이 실망할 것이 뻔했다. 성검이 어찌 될지도 모르는 마당에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느냐고 뒤에서 수군거릴 것이 분명했다.
데미안은 민심을 잃게 될 것이었고, 이로 인해서 입지가 줄어 내년부터는 교황 역임에 실패할 수도 있었다.
‘이, 이럴 수가…….’
데미안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든다. 그는 그리드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을 느꼈다.
“늘 그랬듯이 오늘도 또 한 번 저를 구원하시고 큰 가르침을 주시는군요……! 역시……! 역시 갓리드 사마십니다……!!”
“뭐? 뭐라는 거야?”
“겸손하시기까지……! 크윽……!! 과연 대단하십니다!!”
“…….”
분명하다. 내 주변에는 정상인이 지극히 적다.
새삼 깨달은 그리드가 용광로 속에 성검을 집어 던졌다.
화르륵!!
제련이 시작된다. 이번엔 실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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