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744화 (42권) (739/1,794)

템빨 4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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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42권 - 1화

‘어떤 방법으로 정화시켜야 하려나.’

석화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최초의 성검>을 품에 안은 그리드가 고민해 본다.

크게 근심하는 기색은 없었다. 어차피 정화 방법이야 퀘스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알게 될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또 여신의 눈물을 쓰게 될 가능성이 높겠지.’

야탄교에 야탄의 정수가 있듯이 레베카교에는 여신의 눈물이 있다.

야탄의 정수가 만능의 독이자 저주라면, 여신의 눈물은 만능의 비약이었다.

이미 여러 번 여신의 눈물을 사용한 경험이 있는 그리드는 여신의 눈물을 제대로 활용할 자신감이 있었다. 이번 퀘스트 자체의 난이도를 높이 책정하지도 않았다.

‘오만이 아니야.’

파그마의 후예의 전직 퀘스트는 매번 공통점이 있었다. 전직 퀘스트를 획득하는 방법이 부정확한 까닭에 전직 퀘스트를 획득하기까지의 과정이 무척 험난한 반면, 정작 전직 퀘스트 자체의 난이도는 높지 않다는 점이었다.

지난 전직 퀘스트들을 상기하는 그리드의 표정이 밝다.

“좋아. 지금 당장 시작하겠어.”

성검의 정화, 내가 반드시 해내 보이겠다. 새로운 검무를 얻고, 여신의 축복을 받아 반신을 놓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겠노라.

다짐하는 그리드에게 데미안이 초를 쳤다. 아니, 초를 쳤다기보다는 그리드를 진정시켰다.

“오늘은 안 됩니다.”

“왜?”

“각국의 왕족들과 황자가 아직 이곳 교황청에 머물고 있지 않습니까? 모두 내일 오후에 떠날 예정이오니, 작업은 그때 가서 시작하시는 편이…….”

“흠…….”

확실히, 일리 있는 제안이다.

그리드의 본분은 대장장이인바, 성검의 정화 작업을 당연히 대장간에서 진행할 예정이었다.

교황청에 단 하나밖에 없는 대장간에서 망치질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분명히 누군가는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템빨왕 그리드가 작업 중이라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지게 될 것이다.

‘명확한 미래의 적과 그 끄나풀들에게 내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지…….’

집중도 안 될 것이고, 어떤 빌미가 잡힐 수도 있다. 여러모로 귀찮아질 것이다.

“그게 좋겠다.”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자신의 접속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 하루 총 14시간을 게임에 접속했다는 알림이 떠오른다.

‘쉬고 오는 편이 낫겠네.’

일 접속 제한 시간을 조절할 겸 식사를 비롯한 각종 생리 욕구를 해결할 타이밍이다.

그리드는 아이린과 로드가 기상하는 시간까지 로그아웃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스르륵.

그리드가 어둠 속으로 시선을 돌리자 달빛이 닿지 않는 곳에 숨죽이고 있던 여기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메르세데스였다.

알리번이 사망하고 교황청의 결계가 해제되자 그리드 곁으로 달려올 수 있게 된 그녀다. 이미 몇 시간 전부터 그리드 곁을 지키고 있었다.

“잠시 쉬고 올게. 내가 없는 동안 왕비와 왕자를 잘 부탁한다.”

“네.”

“…….”

군소리 없이 대답하는 메르세데스.

그녀를 바라보는 교황 데미안의 넋이 나갔다. 창백하게 느껴질 정도로 새하얀 피부와 달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백발의 미녀. 일본 괴담에 존재하는 ‘설녀’의 모습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에 피부가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사람 맞죠?”

멍한 얼굴로 질문하는 데미안에게,

“한눈팔지 마. 너한테는 이사벨이 있잖아?”

그리드가 핀잔을 주었다.

데미안이 손사래 쳤다.

“당연하죠. 저는 그저 순수하게 그녀의 미모에 감탄했을 뿐 일말의 흑심도 없습니다. 다만…….”

“다만 뭐?”

“…그리드 님께 더 많은 안티 팬이 생기게 될까 봐 걱정되네요.”

“왜?”

“아니, 꼭 미인만 곁에 두시니까…….”

현실 여친 유라와 지슈카, 게임 속 부인 아이린과 기사 메르세데스에 이르기까지. 어째서 그리드의 곁에는 절세미인밖에 없는가?

그리드의 열렬한 빠돌이인 데미안조차도 조금은 질투가 생길 지경이었다. 그리드에게 호감이 없거나 반감을 지닌 사람들 입장에서는 질투를 넘어서 분노를 느낄 만한 일이었다.

말뜻을 이해한 그리드가 한숨 쉬었다.

“나를 질투해서 뭐 해…….”

어차피 모태솔론데.

차마 뒷말은 잇지 못하는 그리드였다. 어느덧 나이 서른 줄을 코앞에 두고 있건만, 연애 한번 못해 본 스스로가 부끄러운 것이다.

***

정오.

교황 데미안은 어젯밤의 전화로 지쳤을 각국의 귀빈들을 위해서 만찬을 준비했다.

아이린 왕비와 로드 왕자를 수행하게 된 메르세데스가 식당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황제 폐하께 기사의 자격을 박탈당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설마 이런 형태로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군.”

제국의 2황자 듀란달이 템빨국 일행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나타났다. 그는 메르세데스에게 지대한 흥미를 보내고 있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어제보다 한층 더 아름답구려.”

아이린 왕비의 인사에 화답한 듀란달 황자가 다시금 메르세데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황실을 수호하고자 단련했던 힘을, 황실에 충성했기에 얻을 수 있었던 힘들을 이제는 다른 왕가를 위해서 사용한다? 모순된 결과로군. 괘씸할 정도로.”

“…….”

비꼬는 듀란달 황자에게 메르세데스는 그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듀란달 황자의 분노를 이해했다. 적기사들이 강한 이유는 타고난 재능뿐만 아니라 황실의 지원이 뒷받침됐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원받는 것 이상의 공로를 세워서 보답하기는 했지만, 듀란달 황자의 입장에서 메르세데스는 명백한 배신자였다. 기껏 공들여 키운 사냥개가 다른 집을 지키고 앉았으니 아니꼽살스레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자비로운 폐하께서 그대에게 자유를 주셨다고는 하나, 그대에게 일말의 충성심, 아니 양심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산골 깊은 곳에 처박혀 있었어야 도리가 아니었을까? 곧바로 다른 주인을 찾아 꼬리를 흔들어 대다니, 정녕 지조 없는 계집이다.”

분위기가 점차 더 험악해진다.

지금 듀란달 황자는 명백한 실례를 범하고 있었다. 아이린 왕비와 로드 왕자 앞에서 그들의 기사를 조롱하고 비하한다는 것은, 즉 템빨 왕가 자체를 우습게 본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보다 못한 척슬리가 나서려 했으나,

“황실의 은덕을 잊은 배은망덕한 자에게 전하께서 관심을 주는 것조차 사치입니다.”

척슬리보다 적기사가 먼저 나서서 황자를 말렸다.

다수의 적기사들이 사망하고 메르세데스가 제국을 떠난 이후, 기사에 대한 편견을 버린 황제가 직접 새롭게 개편한 네오 적기사단의 솔로 넘버 나이트, 아홉 번째 기사 수잔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뒤늦게 확인한 메르세데스가 깜짝 놀랐다. 수잔은 메르세데스의 사촌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재능이 특출하다는 소문이야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이제 고작 약관의 나이밖에 안 된 그녀가 황자의 곁을 지키고 있다니?

‘불과 몇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떨리는 메르세데스의 눈빛을 읽은 듀란달 황자가 냉소를 흘렸다.

“악독한 피아로의 배신 이후, 기사라는 존재 자체를 믿지 못하게 되셨던 폐하께서 어느 날부터 다시 기사들을 중용하기 시작하셨다.”

“…….”

황자는 모르는 건가. 피아로 님께서는 배신하셨던 것이 아니며, 모든 일은 대악마 아스타로트의 계략이었음을. 진실을 알게 된 황제 폐하께서 회한의 눈물을 흘리셨음을.

‘…듀란달 황자께서는 아직도 폐하의 신임을 얻지 못하신 거구나.’

1황자, 4황자와 비교하면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고 했던가. 2황자 듀란달에 대한 황제의 평가는 각박하고 냉혹하다는 소문이었다.

듀란달 황자는 자랑스레 떠들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새롭게 편성한 적기사단에게 대륙 최강의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되찾아 주겠노라는 기치를 내거셨고, 이에 그랜드마스터께서 적극 협력하셨다. 작금의 적기사들, 그대가 있던 시절의 적기사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야. 충성심과 무력 무엇이든 더 낫다.”

‘그랜드마스터……!’

메르세데스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 일설에 의하면 100년 전 제국 역사에도 존재했다는 기이한 인물이다.

검술과 마법은 물론이고 소환술과 사령술까지 통달했다는 수수께끼의 인물로서, 황제 쥬앙데르크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상대였다.

황제조차도 통제하지 못한다는 소문인데…….

‘그자가 직접 적기사단의 육성에 협력했다고?’

메르세데스의 등골이 오싹해진다. 떠오른 것이다. 자신을 낱낱이 해부하는 듯했던 지크프렉터의 눈빛이.

“…….”

메르세데스의 떨리는 시선이 사촌 동생 수잔을 살폈다. 그녀가 고작 약관의 나이에 적기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랜드마스터에게 어떤 모진 일을 겪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절세미인이라고까지는 평할 수 없으나 그래도 조금은 언니를 닮아 썩 예쁜 수잔이 눈을 반달로 그린다.

“그랜드마스터께서 말씀하셨어.”

“……?”

“템빨국과 휴전 협정이 끝나는 즉시 내가 받게 될 임무 말이야. 언니로부터 아스타로트의 전리품을 탈취하는 것이라고 하더라고. 기대하고 있어, 본가의 천재님.”

“……!!”

메르세데스는 물론이고 템빨국 일행 전원이 술렁였다. 아스타로트의 전리품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수잔의 말뜻은 명확했기 때문이다. 휴전 협정이 끝나는 즉시 제국은 템빨국을 적대하게 될 것이라는…….

물론 각오하고 있던 일이기는 했지만,

‘그딴 말을 감히 왕비 전하와 왕자님 앞에서 대놓고 하다니……!’

척슬리와 템빨국의 젊은 기사들은 템빨 왕가를 대놓고 무시하는 황자와 적기사들의 작태를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었다.

특히 코크의 분노가 컸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그리드가 쌓아 올린 국가를 업신여기는 저들의 행태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코크의 살기를 읽은 수잔이 콧방귀 뀐다.

“같잖은 애송이가.”

코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그때,

“거기까지.”

사나운 눈매를 지닌 흑발의 사내가 등장했다. 그리드였다.

일행이 있는 곳까지 성큼성큼 다가온 그는 우선 아이린과 로드의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듀란달 황자에게는 목례조차 없었다.

명백히 무시당하고 눈살을 찌푸리는 듀란달 황자와 적기사들에게,

“기대되는걸?”

그리드가 흰 이를 드러낸다.

“휴전 협정이 끝나는 날 너희들이 내게 보여 줄 표정이.”

“무례한……!!”

‘너희’라니? 수백 년 동안 군림해 온 위대한 황가의 핏줄에게……!

분노한 적기사들이 즉각 성을 내는 반면 듀란달 황자는 잠자코 있었다.

황자는 흥미로웠다. 당대의 영웅왕은 자기 자신을 어디까지 평가하고 있을지.

‘야탄의 종들과 싸웠을 때 보였던 신위는 필시 대단했다. 메르세데스 못지않았어. 단지 무력만으로 새로운 국가를 세운 인물다웠다.’

하지만 혼자서 뭘 할 수 있을까?

템빨국과 제국의 전력을 비교했을 때 템빨국이 내세울 수 있는 건 극히 소수 인물들의 강함뿐이었다. 종합적인 전력은 제국이 압도적으로 앞섰다.

대륙을 지배하는 제국을 상대로 템빨왕 그리드는 무엇을 내세울까? 고작 개인의 힘? 만약 그렇다면…….

‘주제 파악 못하고 설치는 날짐승이나 다름없지……. 템빨왕은 황제 폐하의 염려처럼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쉽게 짓밟을 수 있는 하찮은 상대다.

예상하며 그리드의 같잖은 도발 따위 우습게 넘기려는 듀란달 황자에게 그리드가 의외의 말을 던졌다.

“새로운 적기사단? 여기 있는 젊은 기사가 혼자서 모조리 박살 낼 거야.”

“……?”

황자와 적기사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리드가 지목하는 젊은 기사, 조금 전 수잔에게 애송이 취급 당했던 코크였기에.

“핫……?”

수잔이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그녀의 반응은 당연했다. 코크의 레벨은 자리의 누구보다 낮았고, 그 사실을 NPC들이 모를 리 없는 것이다.

야탄의 종에게 나름 선전했던 저 어린 왕자보다 나약한 건 아닐까, 의심이 생길 지경의 허접한 놈이 우리 적기사들을 처단할 거라고?

‘폐하께서는 고작 이딴 망언이나 지껄이는 놈을 굳이 왜 경계하신 거지?’

듀란달 황자와 적기사들 모두 심각한 의문을 품는 그때,

“기대해. 휴전 협정이 끝나고 제국이 우리에게 칼을 겨누는 그날, 내 말은 현실이 될 거니까.”

약자를 강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템빨왕의 힘이다.

여신의 축복으로 <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을 강화시킬 예정인 그리드는 누구보다 황당해하고 있는 코크에게 속삭였다.

“겁먹지 마. 아직 시간은 많아. 그때까지 진정한 템빨이 뭔지 내가 보여 줄게.”

사하란 제국은 거대한 나라다. 제국의 일개 도시가 템빨국 전체 규모와 맞먹을 정도다. 황제 혼자만으로 제국 신민 모두를 통제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 그리드는 이미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제국과의 휴전 협정이 끝나는 날, 아니 어쩌면 끝나기도 전에 황제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제국의 누군가가 템빨국을 위협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에 대비해서 그리드가 해야 할 일은 인재의 육성이었다.

‘이번 퀘스트를 클리어한 후에 진정한 템빨러 군단을 보여 주지.’

‘콧대가 너무 높군. 폐하께서 잘못 길들이신 결과다.’

생각하는 그리드와 듀란달의 눈싸움이 팽팽하다.

코크는 가시방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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