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741화 (736/1,794)

템빨 41권 - 19화

새근새근.

오늘 하루 얼마나 고됐을까. 침대에 눕자마자 깊이 잠든 모자의 모습이 마치 천사 같다.

이처럼 고운 여인이 내 아내라는 사실이, 이 선하고 똘똘한 아이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이 늘 감사한 그리드였다.

“…….”

혹 깰까,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모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는 그리드의 표정이 썩 어둡다.

그는 큰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아그너스가 왜…….’

아그너스의 도움을 받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는 아이린과 로드의 주장은 그들의 착각이 아니었다. 레베카교 신도들과 템빨국 기사들, 심지어 교황 데미안조차도 그들과 똑같이 증언하였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아그너스 덕분에 아이린과 로드가 무사했노라고.

‘그러니까, 대체 왜?’

증언에 따르면, 본래 아그너스는 야탄교와 한패였으나 아이린과 로드를 돕기 위해서 야탄교를 배신했다고 한다.

그 한 번의 선택으로 아그너스가 잃게 됐을 것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드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아그너스는 어째서 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아이린과 로드를 구한 걸까?

‘싸움을 즐기며, 타인을 짓밟고 괴롭히는 행위를 통해서 희열을 느끼는 미치광이…….’

아그너스에 대한 세간의 평가다.

실제로 그리드가 직접 만난 아그너스는 소문과 다르지 않았다. 놈은 언제나 누군가를 짓밟으며 웃고 있었다.

그 미친놈이 타인을 위해서 싸우다니? 심지어 내 아내와 아들을 위해서?

그리드는 아그너스의 의도를 읽으려고 노력해 봤지만 도무지 불가능했다.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아그너스가 무엇을 노리고 아이린과 로드를 구한 것인지 납득할 수 없었다.

“…애초에 이해하려는 게 욕심인가?”

이해할 수 있으면 미친놈이 아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단순히 변덕이려니 넘기고 깊이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을 수도…….’

그래, 생각해 봤자 무의미한 일에 시간과 심력을 낭비하지 말자.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털어 낸 그리드가 다짐한다.

‘그저, 나 또한 언젠가 녀석의 소중한 사람을 지켜 주면 돼. 그걸로 족해.’

반드시 지켜질 다짐이다.

아그너스에게 품은 감정이야 어찌 됐든, 아이린과 로드를 지켜 준 아그너스의 행동에 대해서는 무한한 감사를 느끼는 그리드였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은혜였다.

“후우…….”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아이린과 로드의 숨소리가 그리드를 안정시킨다.

심호흡하며 정신을 바로 세운 그리드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시야 한편에 머물러 있는 알림창이었다.

확인하지 않은 알림 내역이 접혀 있었다.

“아…….”

자신이 퀘스트를 진행 중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상기하는 그리드였다.

그는 퀘스트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오로지 아이린과 로드를 구하기 위해서 애썼던 오늘 하루, 그에게 있어서는 게임이 아니었으니까.

‘맞아. 나, 성검을 포기했지…….’

성검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일약 반신(半神)의 경지에 올랐을 테고, 신마저 경계하는 초월자로서 세계를 압도했으리라.

“…핫.”

그리드가 자조적인 냉소를 흘렸다. 이미 가족과 동료, 그리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포기했던 힘을 이제 와 다시 아쉬워하는 스스로의 탐욕이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아쉬울 수밖에 없잖아.’

[불완전한 성검 획득 시 보상:

칭호 <성검을 손에 넣은 4악> 획득

*종족이 인간에서 반신(半神)으로 진화합니다. 반신은 인류를 초월하며 신에 근접하는 새로운 종입니다. 능력치 전부가 대폭 상승할 여지가 큽니다.

*패시브 스킬 <신장(神將)>이 강화됩니다. <신장(神將)>의 발동 확률이 100퍼센트가 됩니다. 단, <신장(神將)>에는 치명타가 적용되지 않게 됩니다.

*스킬 <타락한 성검> 개방

*레베카 여신, 도미니언 신, 쥬다르 신, 제라툴 신의 저주를 삽니다.

*레베카 교단, 도미니언 교단, 쥬다르 교단과의 호감도가 마이너스로 하락합니다.

*무신의 추종자들에게 추격을 받게 됩니다.

불완전한 성검 포기 시 보상:

레베카 여신의 축복. 레베카 교단과의 호감도 최대치

*레베카 교단과의 호감도가 이미 최대치입니다.]

히든 퀘스트 <선악의 기로>의 보상 내용이다.

성검을 포기했을 때와 포기하지 않았을 때의 보상 차이가 커도 너무 컸다.

‘여신의 축복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나도 알고 있어.’

무려 연살파극(聯殺派極)이 여신의 축복으로 얻은 스킬이었다.

그리드가 추측컨대, 이번 여신의 축복 보상으로 또 하나의 4융합 스킬을 얻을 가능성이 높았다. 또 하나의 최강의 스킬을 얻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100퍼센트 확률로 발동하는 신장(神將)보다 좋을까?

신장이 100퍼센트 확률로 발동할 경우, 그리드는 모든 스킬을 2번씩 연속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연살파극급 스킬 2개를 갖는 것보다는 100퍼센트 확률로 발동하는 신장의 가치가 훨씬 높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뭐.’

지금 와서 보상의 차이가 아쉽다고 해도 후회는 없다. 결국 나는 모두의 안전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애써 마음을 다스린 그리드가 [빛의 여신 레베카가 당신의 응답을 기다리는 중입니다.]라는 내용의 알림창에 응답했다.

“기다리셨습니까.”

-네, 기다렸어요. 가족을 아끼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군요.

“……!!”

빛의 여신 레베카의 대답이 그리드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만들었다. 그가 레베카 여신의 따뜻한 음성을 들은 횟수가 벌써 여러 번이라고는 하나, 이렇게 명확한 ‘대화’의 형식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종전까지의 커뮤니케이션은 ‘신탁’이라는 형태로 일방적이지 않았던가?

여태껏 신이라는 존재를 시스템의 일부로 인식해 왔던 그리드가 이제는 새로운 가설을 세울 수 있게 됐다.

‘NPC? 신도 NPC야?’

대장장이의 신의 질투를 샀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신들 또한 인격체였고, 결국 어딘가에 실체한다는 뜻이 된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신과 대면하게 되는 날이 올 수도……. 아?’

생각하던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과거, 전설의 대마법사 브라함에게 들었던 ‘진실’이 뇌리를 스친 까닭이었다.

‘인간들의 야욕이 극에 달하고 분쟁이 끊이질 않아 세상에 혼돈이 찾아올 경우. 즉, 레베카 여신이 더 이상 세상을 통제할 수 없게 될 경우가 돼야만 비로소 야탄 신의 파괴 본능이 발휘된다. 이때 야탄 신이 나서서 세상을 멸하고, 또다시 레베카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식이지. 표면적으로는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두 신이 사실은 협력 관계에 있던 거야. 악마들도, 천사들도, 인간들도 모두가 신들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는 셈이다.’

브라함은 주장했다.

‘아니, 애초에 신은 없었다. 야탄? 레베카? 여태껏 신이라 믿어 왔던 대상들은 우리들의 생각처럼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야. 기계처럼 수동적인, 그저 세상의 섭리를 위해서 존재할 따름인 하나의 부속품에 불과하다. 그깟 존재를 섬길 이유도, 그깟 존재가 내린 시련을 감내할 이유도 하등 없다.’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신 또한 세계의 부속품일 뿐이다.

브라함의 이 같은 주장은 Satisfy가 게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드 입장에서 꽤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야탄과 레베카 모두 임철호 회장이 만든 시스템의 일부일 뿐이며, 브라함이 인식한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임철호)의 의지에 순응하는 수동적인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이 NPC임을 알게 된 지금 이 순간 그리드의 생각이 바뀐다.

신은 인격체였다. 예상과 달리 수동적인 존재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개인의 판단으로 시스템에 반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선악의 기로>

★히든 퀘스트★

당신이 온갖 모험 끝에 쟁취한 권능 <신장(神將)>은 제4악성 <타렌>이 후대를 위해서 남겨 놓았던 안배입니다.

이 퀘스트 내용이 주장하는 ‘타렌이 후대를 위해서 남겨 놓았던 안배’라는 것이 임철호 회장이 창조한 Satisfy의 설정. 말인즉 ‘진실’이며,

‘인간이여, 타렌의 안배가 아니다. 나와 도미니언의 안배다. 타락한 원혼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말지어다.’

이처럼 외쳤던 무신 제라툴의 주장은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쫘악…….

그리드의 전신에 닭살이 돋는다.

-이번에도 역시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싸워 준 당신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한없이 따스하게 느껴지던 레베카 여신의 음성이 소름 돋게 느껴진다.

넋을 잃은 그리드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빛의 여신 레베카가 당신의 응답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또 이 같은 알림창이 그리드의 시야에 떠오르면서 그에게 대답을 강요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리드가 황급히 답했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드는 생각한다.

설령 신들이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음흉한 족속들이라고 해도, 시스템의 일부가 아니라 개개인의 인격을 지닌 NPC라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저 먼 천상에 머무르는 존재들이다. 인류에게 대악마들에게 대항할 힘을 주는 든든한 우군이기도 하다.

그래, 아무 문제 없다. 지금까지 그러했듯, 일개 플레이어에 불과한 나는 저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다만…….’

칠악성이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사악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은 꺼림칙하다.

영 복잡해서 눈살을 찌푸리는 그리드에게, 그의 몸을 포근하게 감싸는 환한 빛의 무리가 떨어져 내렸다.

-열심히 싸워 준 영웅에게 선물을.

[빛의 여신 레베카가 당신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빛의 여신 레베카는 <신장(神將)>의 힘을 강화시켜 주겠다던 칠악성의 유혹을 이겨 낸 당신을 무척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보상 <스킬 강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스킬 강화>

보유 중인 스킬 1개를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스킬의 위력이 상승합니다.

단, 직업 전용 스킬에만 적용됩니다.

직업 전용 스킬. 그리드의 경우에는 파그마의 검무와 각종 대장장이 기술을 뜻함이다.

강화 수치가 정확히 어떤 식으로 적용되는지는 몰라도, 그리드 입장에서는 무척 아쉬운 보상이었다. 그리드는 전혀 새로운 스킬을 원하고 있었으니까!

지옥의 분신이 사용했다는 5융합 스킬은 몰라도, 최소 4융합 스킬 정도는 기대하고 있었다.

한데 고작 강화로 끝이라고?

-영웅의 앞길에 축복만이 가득하기를.

마지막 인사인 듯하다.

여신의 음성이 점점 더 멀어진다.

그리드가 다급히 소리쳤다.

“저기! 여신님!!”

대화가 가능하다면 그만큼 융통성도 있을 터!

-무슨 일인가요?

역시나.

떠나기를 멈춘 레베카 여신이 그리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드는 단도직입적으로 부탁했다.

“이거 말고 제가 더 많은 검무를 한 번에 출 수 있게끔 도와주시죠!!”

-후훗.

과연 신은 신이다.

그리드의 말뜻을 바로 이해한 레베카 여신이 미소를 흘렸다.

높은 호감도를 기반으로, 그녀는 그리드에게 무척 귀중한 힌트를 주었다.

-그건 이제 당신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길이에요. 이번 축복은 무신 제라툴의 지지를 받고 내린 것이랍니다?

“……?”

-이전의 축복보다 더 가치 높은 축복이라는 뜻이에요.

레베카 여신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잠들어 있는 아이린과 로드를 미소 짓게 만들던 따스한 빛무리도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떠난 것이다.

홀로 남은 그리드가 스킬 강화로 강화할 수 있는 스킬 목록을 불러왔다. 모든 파그마의 검무와 각종 대장장이 기술이 <강화 가능 스킬 목록>에 명시되어 있었다.

‘더 많은 융합 스킬을 나 스스로 만들 수 있게 됐다는 말 같은데……. 어떤 식인 거지?’

그리드는 우선 단일 검무들을 강화할 시 발생하는 효과를 확인했다.

첫 번째로 확인한 검무는 연(聯)이다.

효과는 놀라웠다.

<眞-연(聯)>

연(聯)의 타격 횟수가 공격 속도와 상관없이 1초 동안 40회로 고정 상향됩니다. 공격 1회당 공격력의 200퍼센트에 해당하는 데미지가 적용됩니다.

연(聯)의 검무를 춘 직후에 또 다른 검무를 연계할 수 있게 됩니다.

*강화된 스킬은 레벨이 마스터로 고정됩니다.

“아…….”

그리드의 얼굴이 밝아졌다. 강화 버전 신장을 놓친 아쉬움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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