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1권 - 17화
스윽...
아이린의 붉어진 눈시울을 어루만지는 그리드의 손길이 무척 상냥하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보물을 다루는 태도였다.
“이곳까지 달려오는 내내 그대가 무사하기만을 빌었소. 고맙소. 무사해줘서 정말로 고마워.”
“전하....”
그리드의 눈빛이, 손짓이, 따스한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아이린에게 큰 감동과 행복을 선사했다.
그리드를 향한 아이린의 애정은 이제 깊은 수준이 아니라 무한에 가까웠다.
“전하께서 와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만약, 위기에 빠진 사람이 자신 혼자였다면, 기쁨보다 미안한 마음이 더 앞섰을 아이린이다.
국가와 백성에게 헌신하느라 누구보다 바쁜 전하께서 고작 자신 때문에 먼 길을 달려오게 만들었다며, 죄책감마저 느꼈을 인물이 바로 그녀였다.
하지만 오늘 위기에 처했던 사람은 아이린 혼자만이 아니었다.
아들 로드도, 충신 카심과 척슬리도,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기사들도 모두 위험했다.
그들 모두를 구원해준 그리드에게 아이린은 그저 깊은 감사와 존경을 느꼈다.
“....처음 만났던 그날에도, 당신께서는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 싸우고 계셨었죠.”
아이린은 회상했다.
백작 가문의 장녀였던 시절.
그러니까 아직 도란이 살아있던 시절에 야탄교에 납치당했던 자신을 구원해주었던 인물, 다름 아닌 그리드였다는 사실을.
“윈스톤의 영주로 취임했을 때도 당신의 소식을 가장 먼저 접했었어요.”
악독한 전대 영주로부터 칸이라는 늙은 대장장이를 비롯한 힘없는 백성들을 구원한 영웅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그 영웅 또한 그리드였다.
이후로도 그리드는 야탄교에 납치당한 아이린을, 수많은 고렘 대군으로부터 침략당한 라인하르트를, 동대륙 판게아의 25만 주민들을 구해왔다.
“존경해요.... 진심으로....”
오직 타인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
그게 바로 그리드의 삶이었다.
아이린이 봤을 때는 말이다.
“험... 험험....”
삐질, 식은땀을 흘린 그리드가 민망해서 헛기침했다.
자신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아이린을 볼 때마다 마음이 다소 불편한 그리드였다. 언젠가 아이린이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된다면 실망할 것이라는 걱정이 들었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아이린이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알아주세요. 비록 당신께서 영웅이 아니셨을지라도, 저는 결국 당신만을 사랑하게 됐을 거예요.”
조금 전.
찬란하게 빛나던 성검이 그리드가 내뿜는 어둠에 잠식당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아이린은 무척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설령 그리드가 자신과 로드를 비롯한 모두를 버리고 타락의 길을 걷게 될지라도, 자신은 그를 끝까지 응원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세상에서 당신이 가장 소중해요.”
확신에 찬 음성.
그리드를 감격시키고도 남는 것이었다.
“아이린....”
아이린이 그리드를 바라보는 눈빛과 마찬가지로, 아이린을 바라보는 그리드의 눈빛에도 무한한 애정이 담긴다.
더 이상 긴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힘껏 끌어안은 채,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었다.
다른 이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온전히 서로만을 느꼈다.
물론 로드는 잊지 않았다.
두 사람의 한쪽 손에는 로드의 작은 손이 꼭 감겨있었다.
‘가족’이라는 형태가 아이에게 평온을 선사한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서로를 누구보다 아끼는 부모의 모습이 로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오늘 아이는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대의를 위해서 원한을 삼키는 인내를.
신하의 충의와 군주의 도리를.
여인의 현명함과, 어머니의 사랑을.
교황의 의리와 저력을.
자신의 무력함을.
그리고....
‘아버지의 힘과....’
꼬옥....
그리드의 옷깃을 쥔 손에 힘을 싣는 로드의 시선이 저 멀리, 묵묵히 서있는 해골에게 향한다.
갈비뼈가 몇 대나 부러지고 두개골에는 커다란 금이 가 볼품없는 해골이었다.
리치 무무드다.
‘....슬픔...’
도리어 어리기 때문일까.
로드는 자신과 어머니를 바라보던 아그너스의 눈빛에 담긴 슬픔과 후회, 증오를.
그리고 리치 무무드로부터 느껴지는 고독을 누구보다 더 적나라하게 느꼈다.
로드는 알게 됐다.
스승 카심이 제국을 원망하고 있듯이, 어머니가 야탄교를 두려워하듯이 인간에게는 누구나 상처가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그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해.’
그것이 나의 길이다.
깨닫는 로드의 사고가 정립된다.
부친께서 나라를 세우고자, 지키고자 패도의 길을 걷게 되셨다면, 나의 역할은 부친을 보좌하는 것이며, 부친이 미처 살피지 못하고 놓치는 부분들을 챙겨야하는 것이라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아바마마 곁에 서게끔 만들께요.’
로드는 믿었다.
그림자의 왕 카심과 교황 데미안, 그리고 검성 크라우젤과 농부 피아로. 끝으로 아버지라는 훌륭한 스승을 둔 자신이라면 훗날 기필코 강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의 무력함을 언젠가 반드시 극복하리라 의심치 않았다.
‘강해지고, 또 강해져서.’
언젠가 아버지와 나란히 서게 될지라도.
‘저는 오로지 아바마마를 위해서 일할 거예요.’
왕자는 왕이 약해지는 기회를 엿보고, 왕은 왕자를 경계한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수많은 역사가 이미 증명하듯이, 왕과 왕자의 관계라는 것은 일반적인 부모자식의 관계와 많이 달랐다. 늙은 사자와 젊은 사자의 관계처럼 잔혹했다.
그렇다.
이 순간 왕에게 충성하겠노라 맹세하는 어린 왕자의 다짐은 역사적으로도 무척 중요한 대사건이었다.
‘저 새끼가 아직도....!’
아이린과의 입맞춤 후.
아들 로드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뒤늦게 확인한 그리드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리치 무무드가 멀뚱멀뚱 선 채 자신의 가족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뒤늦게 목격한 것이다.
생전의 무무드는 어떤 존재였을지 몰라도, 리치가 된 무무드는 미친개 아그너스의 수족인 바.
아그너스를 명확한 적, 그것도 무척 위험한 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그리드 입장에서는 무무드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아그너스!! 나와라!!”
쩌렁쩌렁!!
그리드의 커다란 외침이 이른 새벽의 잿빛 하늘에 울려 퍼진다.
이미 열망의 검을 꺼내 쥔 그리드는 리치 무무드에게 쇄도하고 있었다.
“아바마마!! 해골님은 적이 아니에요!!”
“전하! 그 리치는 우리를 도와주었습니다!!”
아이린과 로드가 다급히 외쳐보지만 이미 그리드는 무무드의 지척이었다. 또한 아이린과 로드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무무드가 아이린과 로드를 도와주었다니?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드는 아이린과 로드가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쩌정! 쩌저정!!
열망의 무아검이 리치 무무드가 반사적으로 생성한 무지갯빛 마력 방패와 충돌한다.
폭발하는 검은 불꽃이 이미 무너지기 직전인 연회장 벽면을 날려버렸지만 리치 무무드의 실드는 온전했다.
“네놈의 주인은 어디에 있지?!”
이를 갈며 외치는 그리드의 머릿속에 아그너스의 모습이 그려진다.
어딘가에 몸을 숨긴 채, 모진 고통을 당하고 있던 내 아내와 아들을 킥킥거리며 감상하고 있었을 놈의 모습이....!
“.....”
리치 무무드는 반응하지 않았다.
깊은 눈덩이로 그리드를 말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딱히 반격도 없었다.
그리드에게는 그 모습조차 마치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그너스으!!”
아그너스는 미쳐도 단단히 미친 놈이다.
정말로 위험하다.
놈이 내 아내와 아들의 위기를 어떤 심정으로 감상했을지,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고 화가 치밀었다.
쾅!! 쿠콰쾅!!
그리드의 공세가 점차 더 강력해졌다.
기껏 회복한 소량의 스태미나가 다시 바닥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무무드를 쉴 새 없이 때렸다.
와중에도 갓 핸드와 빛의 정령, 그리고 펫들을 아이린과 로드의 곁에 두고 있었으니 그가 모자를 걱정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 엿볼 수 있었다.
퍼엉-!!
까가가강!!
“.....”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검격과 연쇄적인 폭발 속에서, 침묵을 지키는 무무드는 살아생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저 어린 왕자 또래였을 때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부모의 얼굴조차 모르는 고아로 떠돌면서, 식량을 구걸했었다.
눈앞의 젊은 왕처럼 나 또한 누군가를 지키려고 했던 적이 있는가?
있다.
세이렌에서 만났던 부인을. 내 유일한 사랑을 영원히 행복하게끔 만들어주겠노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딱.... 딱딱....
무무드의 턱이 맞부딪친다. 커다랗게 금이 간 두개골이 부르르 떨린다.
슬픈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고아였던 나를 키워준 스승.
내게 많은 지식을 전수해주었던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으나 배신당했고, 배신의 상처를 뒤로한 채 한 여인을 만나 사랑을 나누었으나 불치의 병을 앓게 되었고....
딱! 딱딱!!
아아, 그렇다.
나는 영원히 고통 속에 살다가 죽었다.
내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의지하던 사람이 있었으나 눈앞의 가족과는 형태가 많이 달랐다.
내 삶에 안식은 없었다.
죽음이야말로 나의 안식이었고, 나는 이 죽음이 영원하기를 바랐었다.
하지만.
“무무드으!!”
“.....”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이 나를 죽음으로부터 끌어냈다.
마치 너는 안식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듯이, 너는 오로지 고통 받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라는 듯이 내게 새로운 고통을 선사했다.
딱딱!! 딱!!
점점 더 빠르게 턱을 맞부딪치는 무무드의 시선과,
“아그너스!!”
무무드를 공격하고 있던 그리드의 시선이 모두 동시에 아그너스에게 향한다.
아그너스는 반 백골 상태였다.
리치화의 흔적이다.
누구와 싸우고 있었는가?
그리드의 뇌리에 의문이 스쳤으나, 단지 그뿐.
“네놈....!”
그리드는 똑똑히 보았다.
리치 무무드가 아이린과 로드가 있는 방향으로 전개했던 마법을.
만약, 그때 자신이 스킬 삭제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이린과 로드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다.
“죽인다....!”
극도의 살기가 아그너스에게 향한다.
아이린과 로드가 뭐라고 외치기도 전에.
“무무드으! 저 개새끼를 죽이지 않고 뭐하는 거야!! 엉?! 킥! 키키킥!! 키햐하핫핫!!”
아그너스가 먼저 선을 넘었다.
묵묵히 방어태세만 갖추고 있던 무무드가 즉각 반응했다.
그는 아그너스를 증오했지만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퍼엉-!
“큭....!”
아그너스에게 몸을 날리려던 그리드가 옆구리에 마법을 강타 당하고 침음한다.
무지갯빛의 마력 구체가 그리드의 생명력을 무려 수천 단위로 앗아갔다.
“개새끼가....!”
“키햐하하하핫!!”
혼란이 극에 달했다.
가족의 안위부터 살피느라, 이후에 나타난 적에 신경이 쏠린지라 그리드는 여전히 퀘스트 보상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알리번을 죽이고 얻은 것들조차 무엇인지 몰랐다.
아그너스 또한 마찬가지다.
야탄의 종 실베나스를 단신으로 레이드하는 위업을 세운 그, 실베나스로부터 자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확인할 새도 없이 연회장으로 달려온 입장이었다.
힘없는 여인이 무사한지 확인해야했기에.
“우오오오오오오!!”
“와라!!”
콰르르르르르르르릉!!
기합을 토하며 충돌하는 사내들이 발생시키는 충격파, 이전까지와 비할 바 없이 크다.
이미 무너진 연회장은 물론이고 교황청 일대가 들썩였다. 산 아래 마을의 주민들은 산사태라도 일어난 것이 아닐까 근심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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