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1권 - 9화
‘이게 무슨?’
실베나스의 입장에서는 아예 예측하지 못한 공격이었다.
설마 어린 왕자가 검을 휘두를 줄이야?
아니, 단순히 휘두른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이건 정제 된 검술이다.
일대의 마나 흐름을 단절시켜버리는 강력하고, 흉포하며, 집요한 검술!
콰르르르르륵!!
“큭....!”
폭풍과도 같이 펼쳐진 검기 속에 갇힌 실베나스가 무력해진다.
암마족의 ‘어둠과 동화’되고 ‘바람에 순응’하는 특성은 암마족이 타고난 마나 순환 회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바.
마나의 순환 자체를 방해하는 폭풍 속에서 실베나스는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신속을 잃었다.
아직 어려 체력이 약한 로드가 금방 지친 탓에 그 순간이 비록 찰나였다고는 하나.
“히야아아압!!”
로이먼과 코크를 비롯한 템빨단의 젊은 기사들에게 시간을 벌어줄 정도는 되었다.
전력의 검술로 주변을 정리, 흑마법사들의 포위를 돌파한 젊은 기사들이 폭풍에 갇힌 실베나스에게 맹공을 쏟아부었다.
특히 로이먼의 검술이 눈부셨다.
찌르기 이후 올려치기, 혹은 찌르기 이후 내려치기로 연계되는 그녀 고유의 검술은 실베나스의 몸을 계속 경직시키고 넉다운시킴으로써 그녀의 행동에 큰 제약을 걸었다.
“으윽....!”
끝나지 않는 CC기가 실베나스의 속을 터지게 만든다. 답답함을 느낀 그녀가 결국 숨겨두었던 날개를 펼쳤다. 정확한 표현은 날개의 형상을 한 마기의 분출이었다.
쿠와아아아앙!!
마기가 증폭되는 순간 슈퍼아머 상태에 돌입한 실베나스가 모든 CC를 저항, 신속을 되찾고 비행하며 태도를 휘둘렀다.
허공에 수놓이는 붉은 검광이 템빨국의 젊은 기사들을 한 명, 한 명 순차적으로 벤다.
채애애애앵!!
“피해!!”
상공으로부터 날아오는 검격을 아슬아슬하게 막아낸 로이먼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녀 다음으로 실베나스의 표적이 된 인물은 다름 아닌 코크였다.
다른 기사들이 흑마법사들에게 발이 묶인 동안 홀로 아이린과 로드를 지켰던 그는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로이먼은 걱정했다.
지금의 코크는 실베나스의 공격을 방어할 수 없을뿐더러, 공격을 허용하는 순간 죽게 되리라고.
그녀의 판단은 정확했다.
‘끝이구만.’
코크의 생명력은 5퍼센트 남짓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흑마법사들의 마법 폭격을 받고 떨어지는 생명력을 물약을 통한 회복 속도가 따라잡질 못했기 때문이다.
코크는 겸허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로이먼을 제외한 다른 젊은 기사들 모두가 방어하지 못한 실베나스의 공격을 방어할 자신감이 그에겐 없었다.
실제로 퍼엉-! 퍼엉-! 연신 파공성을 터뜨리며 허공을 대쉬하는 실베나스의 속도는 코크의 인지를 넘어서고 있었다.
퍼엉-!
가까이서 터지는 파공성에 이어서 머리카락이 찰랑인다.
콧날을 간질이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느끼며, 쓴 미소를 그린 코크가 로이먼에게 부탁했다.
“왕비님과 왕자님을 꼭 무사히....”
“코크 경!!”
이미 로이먼은 피아로 밑에서 터득한 보법 <논밭 걷기>를 전개하고 있었다.
코크가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축복자라는 사실을 그녀 또한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동료가 죽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애초에 축복자들 또한 죽음으로 얻게 되는 페널티가 크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았다.
터엉-!
<순보>의 절반 거리를 순간적으로 도약하는 논밭 걷기!
도약을 반복한 로이먼이 코크와의 13미터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보지만.
“히힛!”
늦었다.
상공의 실베나스는 이미 코크의 후위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녀가 휘두르는 태도가 코크를 덮치기 직전.
[템빨국 왕자 ‘로드’가 당신을 자신의 기사로 임명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붉게 점멸하는 코크의 시야로 이와 같은 알림창이 떠올랐다.
영민한 코크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왕자님께 충성을!”
[템빨국 왕자 ‘로드’의 기사가 되었습니다.]
[로드가 당신을 소환합니다.]
[주인의 부름에 응하시겠습니까?]
찰나였다.
실베나스의 태도가 코크의 등가죽에 맞닿는 순간.
파앗-!
로드의 <기사 소환>에 응한 코크가 로드의 바로 곁으로 순간 이동해버렸다.
덕분에 허공만 베어버린 실베나스의 눈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같잖은 수작을...!”
꽈드득!
이를 간 실베나스가 어느새 코앞에 덤벼온 로이먼을 무시하고 지나친다.
그녀의 표적은 자신을 벌써 몇 번이나 방해하고 있는 어린 왕자였다.
검술 한 번 사용한 여파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그 어린아이에게 실베나스의 자비 없는 일검이 떨어졌다.
동시에.
“하늘 찢기.”
목검에 이어서 부친에게 새롭게 선물 받았던 <어린이용 장검>을 발도한 로드는 방향이 상단으로 국한 되는 반격기를 전개했다.
크라우젤이 검호였던 시절부터 검성이 된 지금까지 쭉 애용하고 있는 검술 중 하나다.
스승의 힘이, 의지가 제자를 통해서 고스란히 발현되었다.
콰작-!
콰자자자자작!!
거대한 짐승의 발톱을 보는 듯하다.
실베나스의 몸과 그녀가 등지고 있는 연회장의 천장에 커다란 검광이 연속적으로 아로새겨졌고.
“쿨럭....!”
처음으로 치명상을 입은 실베나스는 입에서 검붉은 피를 토했다.
받은 피해를 고스란히 되돌려주는 반격기 <하늘 찢기>는 시전자의 공격력과 비례해서 데미지를 입히는 <폭풍검>과 위력이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아직 60레벨밖에 되지 못한 로드일지라도 실베나스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게 해줬다.
“크으....! 크윽윽....! 이 놈...! 이 어린 놈이이!!”
생명력 게이지가 10분의 1 가까이 떨어진 실베나스가 이성을 잃었다.
그녀는 교황청의 개들과 각국의 왕족들, 그리고 자신을 존경해야할 수천 명의 흑마법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작 꼬맹이 한 명에게 망신당했다는 사실이 모욕적이었다. 태어나 이만큼 큰 수치를 느껴본 경험이 없을 정도였다.
결국.
“죽인다...! 전력으로 죽인다아!!”
실베나스는 거짓으로 만든 미인의 탈을 벗어던졌다. 지옥에서 가장 못생긴 종족이라고 조롱 받는 <암마족>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히익...!”
“저, 저게 뭐야?”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곳곳이 벗겨지고 일그러진 살가죽.
뒤죽박죽 섞인 눈, 코, 입.
실베나스가 원망해온 추악한 암마족의 실체가 연회장 모든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선사한다.
심지어 야탄교 신도들조차도 실베나스의 모습에 경악하고, 실망하며, 토악질을 하였다.
연회장 한쪽에서 적기사들과 대적하고 있던 야탄의 여섯 번째 종 카디오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린다.
“단 한 놈도 살아나갈 수 없게 되었군.”
과장이 아니다.
실베나스가 자신의 추악한 실체를 드러낸 것은 주변 모두를 죽이겠다는 뜻이었으니까.
적도, 아군도, 모조리 다!
“키에! 키에야아아아아아!!”
실베나스의 기성이 연회장 안 모든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안겼다.
자신의 추악함을 한탄하는 암마족의 <절규>는 듣는 이들의 기분을 불쾌하고 불안하게 만들 뿐더러 마나의 흐름을 방해하고 청각을 손상시키는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왕비님!”
이건 위험하다.
물리적인 타격은 없다고 해도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아이린은 감당할 수 없으리라.
바로 눈치 챈 척슬리가 왕비를 보호하고자 달려가려고 했지만.
“어딜?”
로제가 그를 놓아주질 않았다.
과거, 제32위 대악마 벨리알을 무사히 소환한 대가로 획득했던 <벨리알의 지팡이(신화급 모작)>에 집약시킨 마력으로 흑마법을 연사하며 척슬리를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런 낭패가...!”
척슬리는 아찔해졌다. 근위기사인 자신이 아무 것도 못하는 바람에 아이린 왕비께서 위험에 처하게 생겼다며 자책했다.
하지만 사실 자책할 이유는 없었다.
야탄의 여덟 번째 종을 혼자서 잠시나마 묶어두고 있는 것 또한 이미 충분한 활약이었으니까.
이사벨과 카심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도 엄청난 활약을 하는 중이었다.
“킥킥킥!”
바알의 계약자 아그너스가 연회장 외부에 소환하고 있던 모든 언데드를 회수하게 만든 것이다.
혼자서는 이사벨과 카심의 협공을 감당할 수 없었던 아그너스는 결국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데스나이트와 악마들을 곁으로 불러들였다.
전력이나 다름이 없는 셈이다.
홀로 인류를 적대하는 <바알의 계약자>조차도 근본이 플레이어인 이상 명확한 한계를 지녔다는 뜻이 된다.
만약, 바알의 계약자가 NPC였다면?
이사벨과 카심은 커녕 현재 교황청의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덤벼도 위협할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플레이어인 아그너스에게는 온갖 제약이 걸려있었고, 그 제약을 풀기까지 수많은 전직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림자 병사여!”
곳곳의 그림자로부터 병사들을 일으킨 카심이 아그너스에게 집중 공세를 날리고, 아그너스는 데스나이트들의 비호를 받으며 버틴다.
이틈에 창을 찌르는 이사벨에게는 악마들의 섬광이 꽂혀 시간을 벌었다.
“킥...! 킥킥킥!! 더...! 더! 더!! 더어!! 키하하하핫!!”
아그너스의 광기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지독한 현실을 외면하게 만들어주는 사투가 그에게는 달콤한 꿈이었다.
“교황 성하!!”
“로드 왕자님!!”
“황자 전하!!”
아그너스가 언데드를 물린 탓에 발이 묶여있던 성기사들과 레베카의 딸 후보들, 그리고 각국의 병사들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됐다.
우르르 몰려와 야탄교의 흑마법사들을 처단하기 시작한 그들이 데미안과 황자, 그리고 각국 왕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하지만 희망은 짧았다.
“하찮은 놈들이 늘어봤자.”
야탄의 세 번째 종 알리번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사제들과 성기사들의 마나를 태우며 그들을 무력화시키는 한편 흑마법사들을 통솔하던 알리번이 직접 전선에 뛰어들었다.
타인으로부터 빼앗은 마나를 마기로 전환, 흑마법을 사방으로 분출하는 그는 마치 살상을 위해서 만들어진 병기 같았다.
수십 명의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고 레베카의 딸 후보 중 몇 명도 잿빛으로 산화했다.
“리아!! 앤!!”
소중한 여자 친구들을 잃은 로드가 절망한다.
아이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알리번을 말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크게 지친 상태였고, 바로 눈앞의 실베나스가 어머니를 위협하고 있었다.
어머니를 지키는 게 먼저였다.
“키야아아아아아!!”
실베나스의 절규가 커진다.
“웃....!”
고통을 느낀 아이린이 휘청거렸다.
로드는 쓰러지려는 그녀를 자신의 작은 몸으로 지탱하였고, 기사 코크는 피투성이 손으로 두 사람의 귀를 막아주며 정작 자신은 귀에서 피를 쏟았다.
“이대로는 안 되요!”
“제길!”
이사벨과 카심의 최우선 과제가 바뀌었다. 그들은 더 이상 아그너스에게 집착하지 않고 표적을 실베나스로 변경했다.
덕분에 자유를 되찾고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아그너스가 뒤늦게 아이린과 로드를 발견한다.
“하아?”
고통 받는 모자의 정체, 언젠가 뉴스에서 보았던 그리드의 부인과 아들이 아니던가?
그래,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들 말이다.
아그너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잊고 싶은 기억.
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그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사랑했던 여인이 성난 사내들에게 유린당하던 광경이....
“...그리드 이 병신 새끼가.”
과거의 무력했던 나와 달리 넘치는 힘을 갖고 있는 주제에 소중한 이들을 방치해?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달을 작정인가?
분노가 솟구친다.
도끼눈 뜬 아그너스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아껴두었던 비장의 패를 소환했다.
리치 무무드였다.
쿠와아아아아아앙!!
무지갯빛의 마력이 아이린과 로드의 머리 위를 지나 그들의 앞에 서있는 실베나스를 강타한다.
“아그너스! 지금 뭐하는 짓입니까!”
당황해서 소리치는 로제에게.
“킥? 그럼? 아무런 힘도 없는 여자를 해치는 게 정상이야?”
반문한 아그너스가 진행 중이던 <교황청 습격> 퀘스트를 포기해버렸다.
“개 같은 새끼들이 정도껏 해야지.... 죽여 버리고 싶게 만드네.”
“당신 미쳤....!!”
쿠르르르르릉....!
거듭되는 폭발에 휩쓸렸던 연회장 천장이 급기야 무너지기 시작한다.
아그너스는 아이린과 로드 모자에게 몸을 날리고 있었다.
같은 시각, 템빨국 왕도 라인하르트.
“서두르라고!!”
그리드는 현자 스틱세이를 재촉하고 있었다.
십여 분 전, 코크라는 이름의 플레이어에게 받은 귓속말 때문에 그는 당장에라도 교황청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사정이 녹록치 않았다.
“조금만 더....”
아카데미 수업 때문에 대량의 마나를 소진한 상태인 스틱세이는 마나가 부족했다. 매스 텔레포트를 사용하려면 마나 물약을 복용함과 동시에 마나 드레인을 5분 동안 전개하고 있어야했다.
그리드에게는 10년, 100년 같은 5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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