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1권 - 7화
“쥐새끼 한 마리가 숨은 듯한데, 성하와 우리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쥐새끼부터 찾아 잡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쩌렁쩌렁!
연회장에 울리는 듀란달 황자의 외침이 수많은 사람들을 의문에 빠뜨렸다.
쥐새끼라니?
그림자 속 카심의 살기를 읽지 못한 타국 왕족들은 황자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황자가 괜한 트집을 잡고 소란을 피우는 거라고 보았다.
변덕스러운 제국의 권력자들이 무료함을 달래는 방법은 언제나 제멋대로였으니까.
‘낭패군.’
반면 템빨국 기사들은 큰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황자와 적기사들이 그림자 속 카심의 살기를 정확히 포착한 지금, 우리가 무슨 수로 카심을 변호하고 로드 왕자의 입장을 지킨단 말인가?
템빨국 기사들이 바짝 긴장하는 그때 그림자 속 카심은 한탄했다.
‘내 탓에 로드 왕자가 난처해지게 생겼구나...!’
충혈 된 눈으로 침음하는 카심의 뇌리에 과거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산속 깊은 곳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
네로족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욕심이 없는 네로족은 반목을 일으키는 법이 없었고,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가족처럼 아끼며 하루하루를 소중하고 평화롭게 보냈다.
하지만 행복은 짧았다.
제국의 군대가 마을을 찾아온 것이다.
수십의 적기사와 수백 병사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듀란달 황자가 소리쳤다.
“너희들은 피부가 밤보다 검고 팔은 에티보다 기니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 제국은 너희들이 영토와 종교를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집과 옷 또한 불허한다. 너희들은 짐승이다. 목숨을 연명하고 싶다면 가축이 되어야할 것이고, 가축이 되기 싫다면 죽어 가죽을 남겨야할 것이다. 항변하지 마라. 짐승은 인간의 언어를 써선 안 된다.”
비수로 날아왔던 잔인한 한 마디, 한 마디가 잊히지 않는다.
세상물정 몰랐던 청년 카심은 세상의 네로족에 대한 취급을 그날 처음 알았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짐승! 짐승이라니!
멀쩡한 인간에게 짐승이라니!!
카심은 분노라는 감정을 태어나 처음 느꼈다. 네로족이 타고난 온화한 성품을 붕괴시킬 정도로 거대한 분노였다.
비단 카심뿐만이 아니었다.
수천 명의 네로족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제국에게 공분했다. 자신들의 삶을 빼앗으려하는 제국에게 대항했다.
하지만 무력했다.
네로족 고유의 신체능력이 우수하다고는 하나 잘 단련 된 제국의 병사들과 기사들 앞에서는 갓난아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네로족은 처참하게 몰살당했고, 생존자는 카심 한 명이 유일했다.
“.....”
생존이라는 이름의 저주.
제국의 멸망만을 꿈꾸며 밤을 지새우게 된 복수의 화신이 느끼는 감정이 복잡하다.
지독한 현실을 잊게 해주었던 소년 로드와 철천지원수를 사이에 둔 채, 그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섣불리 판단할 수가 없었다.
듀란달 황자는 마치 그를 재촉하는 듯했다.
“쥐새끼는 개새끼와 달라 주인이 없으니, 이곳에 쥐새끼가 숨어든 것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릴 생각은 없소.”
네놈,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내게 지독한 살기를 보였으렸다?
나와라.
지금 당장 내 눈앞에 선다면 어린 왕자만큼은 무사할 것이다.
듀란달 황자는 이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 또한 제국과 템빨국의 관계를 신경 쓰는 것이다.
황제가 직접 맺은 휴전 협정을 자신 선에서 틀어지게 만드는 것은 듀란달 황자 입장에서도 부담이었다.
그는 쥐새끼 한 마리를 사냥하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고, 그 의도를 템빨국 기사들은 읽었다.
“.....”
척슬리가 로드의 그림자 속으로 시선을 보낸다.
책임을 지라는 뜻이었다.
카심이 템빨국에 있어서 귀중한 인재라는 사실을 척슬리라고 모르지 않다.
하지만 인재는 나라를 위해서 존재하는 법.
인재를 지키겠답시고 나라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 수는 없다.
척슬리의 마음, 카심에게 확실히 전달되었다.
‘그래.’
흔들리던 카심의 동공이 차츰 진정된다. 붉게 충혈 됐던 흰자위가 다시 하얗게 되돌아간다.
심호흡하며 마음을 진정시킨 카심은 미래를 그렸다.
앞으로 템빨국이 무사히 발전하고 희대의 천재 로드가 성장을 완료할 때쯤이면 템빨국이 어련히 제국을 처단하리라고.
‘직접 내 손으로 이룰 수 없는 복수라면, 남에게 맡기는 수밖에.’
그래, 죽자.
제국의 멸망은 템빨왕과 그의 아들에게 맡기고, 그날을 위해서 내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애초에 내가 범한 실수. 내가 책임지는 게 맞아.’
다짐한 카심이 그림자 속으로부터 빠져나오려는 순간이었다.
“가만히 계세요.”
누군가가 카심을 말렸다.
로드?
아니다.
로드가 미처 말을 꺼내기 전에 다른 이가 먼저 나섰다.
그녀는 다름 아닌 왕비 아이린이었다.
“호오...?”
자신은 정치와 관계없다는 듯, 연회장 구석에 홀로 고상하게 서있던 여인이 정작 중요한 순간에 나서다니?
듀란달 황자의 적안이 흥미로 물들었다.
안 그래도 자신이 첫 눈에 반한 여성이 어떤 용기와 지혜를 보여줄지 그는 무척 큰 관심이 생겼다.
‘이거 더 깊이 반하겠는걸.’
강자의 특권은 ‘여유’다.
누군가는 조국을 걱정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노라 다짐하고 있는 이 심각한 상황 속에서 듀란달 황자만큼은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를 두 눈으로 똑바로 마주 본 아이린이 말했다.
“전하께서 찾는 상대는 쥐도, 개도 아닙니다. 로드 왕자의 정당한 호위이며, 우리 템빨 왕국의 소중한 인재입니다.”
“하?”
괜한 기대를 하였다.
바보 같은 계집이다.
눈살을 찌푸린 듀란달 황자가 콧방귀 뀌었다.
“말인 즉, 왕비께서는 로드 왕자의 호위가 나를 해치려했다고 주장하는 것이오? 이는 결과적으로 템빨국이 제국의 2황자를 해치려했다는 뜻이며, 결국 템빨국은 제국과 적대할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셈이군? 휴전 협정도 무시한 채 말이외다.”
“아니요. 전하의 호위 기사들께서 칼을 뽑으신 이유를 생각해보세요. 전하를 지키기 위함이었죠?”
“....흠? 그렇소만.”
“왕자의 호위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직 어린 왕자의 곁으로 장성한 기사들을 대동한 전하께서 가까이 다가오자 위협을 느끼고 호위의 자세를 취한 것뿐이었죠.”
“살기를 쏘는 게 호위의 자세라고?”
“직접 칼을 뽑는 것보다야 살기가 덜 위험하지 않나요?”
“하...?”
외통수를 맞고 말았다.
적기사들이 칼을 뽑은 행동을 ‘나를 지키기 위한 행위’으로 인정해버린 것이 패착이다. 감히 내게 살기를 보낸 쥐새끼의 행동 또한 정당한 것이 되어버렸다.
황당하고, 당황스럽다.
화도 난다.
하지만 금방 억눌러지는 화였다.
얼굴을 종잇장처럼 구겼던 듀란달 황자가 금세 다시 얼굴을 활짝 펴더니 하하하하! 대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정중한 태도로 아이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왕비의 영민함에 감탄하였소. 사죄의 의미로 그 하얀 손등에 입을 맞출 수 있게 해주시겠소?”
“영광입니다.”
황자가 정식으로 건네는 인사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애초에 거절할 이유도 없는 상황이다.
아이린이 흔쾌히 손을 내밀었고, 듀란달 황자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순간.
“.....”
사건 내내 또랑또랑한 눈으로 황자를 지켜보고 있던 로드의 눈매가 사납게 변했다.
아버지 그리드를 쏙 빼닮은 도끼눈이다.
자신의 모친을 대하는 황자의 눈빛에 욕정이 담겼음을 엿본 까닭이었다.
‘무슨....’
황자의 곁을 지키고 선 적기사들이 흠칫 놀랐다.
이제 여섯 살쯤 될까 싶은 어린 왕자로부터 강한 위압감을 느껴 착각인가 싶었고, 꿈인가 싶었다.
사건의 전개를 잠자코 지켜보던 데미안의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아이린 왕비 덕분에 기껏 일이 잘 해결되고 있었는데....’
어째 도리어 더 위태로워지게 생겼다?
“잠....”
자칫 로드가 사고라도 쳤다가는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리라 판단한 데미안이 나서려하는 순간이었다.
번쩍!!
갑자기 연회장 전체에 빛이 폭사했다.
레베카 여신을 상징하는 따스한 빛과는 전혀 다른, 눈을 뜰 수조차 없게 만드는, 그저 극도로 밝기만한 고약한 빛이었다.
이 섬광을 데미안은 알고 있다.
일시적으로 실명 된 그가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흑마법이다....! 성기사들은 황자와 왕족들을 호위....!! 큭....!”
데미안의 외침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밟은 지면 위로 붉은 오망성이 그려진다 싶더니 저주에 걸린 까닭이었다.
[악신 야탄의 의지 일부가 당신을 세상으로부터 단절시킵니다.]
[결계 속에서 당신은 그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습니다.]
[결계는 외부에서만 파괴할 수 있습니다.]
‘야탄의 의지라고?’
뒤늦게 실명을 극복한 데미안이 고개를 든다.
천장에서 마족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암흑에 둘러싸인 그녀의 이름은 실베나스.
야탄의 종이었다.
“실베가 해냈어! 교황을 무력화시켰어!!”
깡충 뛰면서 소리치는 그녀의 외침이 신호였을까.
콰르르르릉!!
쿠콰콰콰콰콰쾅!!
연회장 외부로부터 온갖 폭음이 들린다 싶더니 연회장의 문이 폭발에 휩쓸려 날아갔다.
자욱한 먼지가 연회장 내부를 잠식하였고, 간신히 실명을 극복하고 있던 듀란달 황자 일행과 각국의 왕족들은 곧바로 혼란에 빠졌다.
“빌어먹을 여신의 개들에게 단죄를 내릴지니!!”
“악신 야탄의 저주가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노라!!”
우르르, 멋대로 연회장에 난입한 흑마법사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각국의 기사들이 자신들의 주인을 지키고자 칼을 뽑았고, 레베카교의 장로들과 성기사들은 빠르게 태세를 정비하였으며, 템빨국 기사들은 로드와 아이린을 구석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저벅. 저벅. 저벅.
흑마법사 부대의 뒤를 이어서 다섯 명의 새로운 인물들이 연회장에 입장했다.
3명은 NPC였고, 2명은 플레이어였다.
하나 같이 거물이다.
야탄의 세 번째 종, 알리번.
야탄의 여섯 번째 종, 카디오라.
야탄의 일곱 번째 종, 구릉.
야탄의 여덟 번째 종이자 흑마법사 랭킹 1위 플레이어 로제.
끝으로....
“아그너스...!!”
바알의 계약자.
코크처럼 플레이어의 입장으로 이번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곳곳에서 경악성을 터뜨린다.
야탄의 종에 대해서 잘 모르는 그들은 아그너스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존재감에 압도당했으나....
‘실베나스를 비롯해서 네 명이나?’
결계에 갇힌 데미안은 아그너스보다 다른 야탄의 종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각자 신기를 꺼내든 레베카의 딸들이 데미안의 곁으로 달려왔다.
“....!!!”
결계 속 데미안이 뭐라고 소리치지만 결계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이사벨은 우선 이 결계를 파괴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쩌어어어엉-!!
“큭....!”
리파엘의 창으로 찔러봐도 결계는 요지부동이었다. 파괴되기는커녕 꼼짝도 안 했다. 물리적인 힘이나 신성력으로는 해칠 수 없는 형태의 결계였다.
“결계는 우리에게 맡기고 사람들을 지키시게!”
“특히 로드 왕자를 잘 지키도록 해!!”
장로들이 나섰다.
장로들의 지시사항이 결계 속 데미안을 안심시켰다.
데미안은 저 꽉 막힌 노인네들이 답답한 속을 긁어줄 때도 있구나, 생각하며 큰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안심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꺄아아아아아악!!”
“크아악!!”
손님들의 비명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소란을 듣고 달려오는 성기사들과 사재들은 연회장 외부에서 족족 끊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아그너스의 언데드들이 방해하는 듯했다.
그 사실, 이사벨 또한 눈치 챘다.
우선 로드 왕자의 곁으로 달려가던 그녀가 왕자의 안위를 확인한 후 그대로 몸을 돌려 아그너스에게 쇄도했다.
채애애애애앵!!
“킥...! 키키킥!!”
각국 왕족들의 비명과 호위들의 고함, 귀를 찢는 쇳소리와 소름 돋는 광소.
연회장의 혼란이 극에 달한다.
“괜찮단다. 괜찮아.”
처녀 시절, 야탄교에 납치당하고 야탄의 제물로 바쳐질 뻔했던 여성이 있다.
다름 아닌 아이린이다.
야탄교의 출현을 목격한 시점부터 옛 기억을 떠올리고 겁에 질린 그녀였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혹 아들이 불안하지 않도록, 어린 아들을 품에 안은 채, 애써 미소 지으며 등을 토닥여준다.
“....어마마마.”
어머니의 품 속에서, 어머니의 떨림과 사랑을 느끼는 로드였다.
어린 아이의 시선이 전장으로 향한다.
아이의 앞으로.
“안 됀다. 지금의 네가 어찌할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니야.”
“맞습니다, 전하. 물러나 계십시오.”
카심과 척슬리, 그리고 젊은 기사들이 나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