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1권 - 6화
야탄의 여덟 번째 종 유라.
배신.
야탄의 일곱 번째 종 다크버스.
사하란 제국에서 잠입 임무 수행 중 사망.
야탄의 여섯 번째 종 말락서스.
윈스톤에서 제사 준비 중 사망.
야탄의 네 번째 종 니베리우스.
바이란 침공 전투에서 사망.
야탄의 첫 번째 종 탈로스.
야탄 본단에 침입한 정체불명의 마법사에게 사망.
전대 야탄의 종들의 전적이다.
야탄교 입장에서는 지워버리고 싶은 수치였다.
분쟁의 대악마 아모락트에게 선택받고 악신 야탄에게 봉사할 기회를 얻은 초월자들이 대업을 이루기는커녕 정체도 모를 놈들(?)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탈로스 사후 아모락트의 대리인으로 간택 된 리카오스.
표면적으로는 야탄의 첫 번째 종인 그가 다른 종들에게 내린 지령은 다음과 같았다.
“레베카를 섬기는 짐승들과 놈들의 비위를 맞추는데 혈안이 된 우민들이 교황청에 모일 것이다. 놈들을 일거에 소탕할 기회다. 교황청을 파괴하고 야탄교의 무너진 위상을 다시금 드높여라!”
리카오스가 계산하기로 당대 레베카의 딸들은 수명이 끝나기 직전이었다. 레베카의 3신기에 저주 받은 그녀들은 이제 죽기 직전의 시체나 다름이 없었고, 반면 새로운 인재들을 충원한 당대 야탄의 종들은 젊고 강했다.
리카오스는 절호의 기회라고 보았다.
저주받을 레베카교 놈들은 물론이고 놈들을 추종하며 야탄교를 핍박하는 제국과 다른 왕국들 전부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기회!
하여.
“킥? 미친 괴물들만 모였군.”
무려 다섯 명의 야탄의 종을 파견했을 뿐더러 바알의 계약자에게 협력 요청까지 보낸 것이다.
콰르르릉!!
쏴아아아아아아....
쏟아지는 폭우에 젖어가는 케이산 정상.
흑마법사 랭킹 1위이자 야탄의 여덟 번째 종인 로제와 바알의 계약자 아그너스, 그리고 다른 네 명의 야탄의 종들이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교황청을 내려 본다.
템빨왕이라고 불리던가?
고작 한 명의 인간에게 두 차례나 쑥대밭이 되었던 전력이 있는 교황청 따위, 그들에게는 조금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황자를 호위하는 적색 갑주의 기사들?
황제의 신뢰를 잃고 애물단지로 전락한 놈들 또한 경계의 대상이 아니다.
레베카의 딸들?
신기에 수명이 갉아 먹혀 속은 엉망진창이 되었을 퇴물들에 불과하다.
“시시하겠는데.”
야탄의 종들의 감상이었고, 아그너스 또한 공감했다.
이쪽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판단하는 아그너스의 등 뒤로 그림자의 파도가 스멀스멀 움직이고 있었다.
약 보름에 걸친 기간 동안 비밀리에 케이산까지 이동해온 수천 명 흑마법사들의 인영이었다.
***
“하하, 그렇군요.”
“역시 듀란달 황자 전하이십니다.”
“감탄을 금할 수가 없군요!”
저녁 만찬회장의 풍경은 사람들의 예상과 썩 다르지 않았다.
각국의 왕족들 대부분이 제국 2황자 듀란달 곁에 모인 채 알랑방귀 뀌고 있었다.
대신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1황자와 황비 마리를 등에 업은 4황자 사이에 끼어 황위계승서열과는 거리가 멀어진 인물이라고 하나, 그래도 명색이 황자다.
소국 따위 하루아침에 붕괴시킬 수 있는 권력과 배경이 듀란달에게는 있었고, 제국의 속국이나 다름이 없는 소국의 왕족들은 그의 비위를 맞추느라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흐음....”
왕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술잔을 기울이는 듀란달의 시선이 자꾸만 회장 구석으로 향한다.
조명 아래 반짝이는 은발의 여인.
제국에서조차도 보기 드문 미녀의 찬란한 미모가 듀란달의 시선을 끄는 것이었다.
듀란달은 여인의 온화한 인상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저분은?”
듀란달이 관심을 보이자 왕족들이 설명해주었다.
“템빨 왕비십니다.”
“호오.... 템빨왕의?”
템빨왕.
사하란 제국이 역사상 최초의 ‘외교’를 하게 만든 상대.
두려울 것 없이 대륙을 호령해왔던 황제 쥬앙데르크조차도 경계하며 국빈으로 초대했을 정도의 거물.
“아쉽군.”
술잔을 비운 듀란달이 입맛을 다신다.
하필이면 첫눈에 반한 상대가 템빨왕의 비라고 하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었다.
다음으로 그의 시선을 끄는 인물은 어린 소년이었다.
조금 전 자신의 마음을 끈 템빨왕비와 마찬가지로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를 지닌 소년.
흰 피부와 흑단 같은 머리카락에서 느껴지는 타고난 기품이 꽤나 제법이다.
“저 아이는?”
“템빨 왕자입니다.”
“호오....”
템빨왕의 아들이라.
과연 어느 정도의 그릇일까?
흥미가 동한 듀란달이 걸음을 옮겼다. 그가 점차 다가오자, 다른 나라의 왕족들과 달리 로드의 곁을 지키고 있던 폴드 왕국의 왕자는 아연실색하였다.
‘황자께서 직접 방문할 줄은 몰랐다고....!’
템빨국 건국식에서 템빨국의 위광을 엿본 폴드 왕국은 템빨국의 속국이 되기를 자처했다.
이후 제국과의 교류를 일방적으로 끊고 템빨국에 운명을 맡긴 상태였다.
하지만 몇 세대에 걸쳐서 유전자에 각인 된 노예근성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폴드 왕국의 1왕자 샤이닝은 듀란달 황자가 자신을 해코지할까 두려웠다. 이제는 템빨국이라는 든든한 우방이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자신 탓에 폴드 왕국이 제국에게 멸망당하는 건 아닐까 염려했다.
덜덜덜!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떠는 샤이닝 왕자의 손을.
“뒤로 물러나 계세요.”
로드 왕자가 붙잡아주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신기한 일이 발생했다.
샤이닝 왕자는 평온해졌다.
로드 왕자의 앳되고 상냥한 목소리가 샤이닝 왕자의 마음 속 불안과 두려움을 눈처럼 녹여주었고, 작고 따뜻한 손길이 몸을 뜨겁게 달궈주며 용기를 주었다.
“아니요. 당신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꾸욱.
로드가 잡아준 손에 힘을 싣고 이를 악 문 샤이닝 왕자.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듀란달 황자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시선조차 회피하지 않으며 로드의 곁을 지킨다.
“폴드 왕국의 1왕자 샤이닝입니다. 위대한 제국의 황자 전하께 인사를 올릴 수 있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호오...”
정중하면서도 당당하게 인사하는 샤이닝의 태도가 듀란달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세상 그 어느 왕족이 제국의 황족 앞에 이토록 당당할 수 있던가? 두려움을 엿볼 수 없는 눈빛이 신기하면서도 괘씸하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 불쾌함을 내색해서야 그릇의 크기를 의심 받을 터.
만면에 미소 지은 듀란달 황자가 샤이닝 왕자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사사로운 감정이 아닌 정치적인 현실로 압박을 준다.
“폴드 왕국은 더 이상 우리 제국에 의지하지 않겠노라 선언하였다지?”
“예.... 저희처럼 작고 가난한 소국이 무슨 염치로 이 이상 제국에 의지하겠나이까? 사하란 제국이 심력을 소모해가면서까지 지켜줄만한 가치가 우리나라에는 없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더 이상 제국에 민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고작 소국 하나 돌봐주는데 심력을 소모할 것까지야.”
“.....”
“독립은 그대들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황제께서 결정하셨어야할 문제지.”
“.....”
“폐하의 분노가 아주 커. 폴드 왕국이 제국의 은혜를 잊은 게 아닌지 의심하고 계시더군.”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국이 베풀어주셨던 은혜를 잊을 리가....”
샤이닝 왕자의 안색이 다시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목소리도, 몸도 다시 바들바들 떨기 시작하는 그였다.
황폐한 대지 위에 건설 된 폴드 왕국.
언젠가 반드시 황무지를 개간하고 백성들 모두를 배불리 먹이겠노라던 선왕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제국 때문에!
폴드 왕국을 언제든지 짓밟을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춘 사하란 제국은 벌써 2백 년 이상 폴드 왕국에 대량의 공물을 요구해왔고, 이 터무니없는 요구 탓에 폴드 왕국은 발전할 여력이 없었다. 안 그래도 배 곪는 백성들을 더욱 핍박해야만 간신히 공물을 바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다.
지난 2백 년 동안 폴드 왕국은 꾸준히, 확실하게 메말라갔다.
저항?
부질없었다.
제국에 반기를 들었던 몇 명의 국왕과 수많은 공신들이 ‘배반’이라는 터무니없는 죄목을 쓰고 주살 당했다. 폴드 왕국은 철저하게 무력했으며, 제국에 분노조차 억눌러질 공포를 차곡차곡 쌓아왔다.
그 공포가 유전자에 철저히 각인 된 인물이 바로 샤이닝 왕자였다.
듀란달 황자가 ‘황제’를 입에 담는 순간부터 한없이 작아졌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폴드 왕조도 머잖아 끝나는 것인가, 염려가 되었다.
꼬옥.
로드가 그의 옷깃을 붙잡는다.
순간.
샤이닝 왕자는 다시 한 번 두려움을 극복했다.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용기를 북돋았다.
몸을 감싸는 따뜻한 기운을 느낀 샤이닝 왕자는 똑똑히 알게 되었다.
이건 축복이라는 사실을!
‘이토록 어린 아이가 신성력을...?’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샤이닝 왕자에게 로드가 해맑게 웃어주었다.
“데미안 교황 성하께서 가르쳐주셨어요.”
“....?”
교황 성하께서 일국의 왕자에게 신성한 축복을 가르쳐주셨다?
말도 안 된다.
샤이닝 왕자는 로드의 말이 너무 허황되어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딱히 로드를 의심하진 않았다. 어린 아이가 뭔가를 착각하고 오해해서 잘못 말하는 것이려니 해석할 따름이다.
한편 듀란달 황자는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뭐지?’
벌써 두 번째다.
자신을 샤이닝이라고 소개했던가?
내일이면 이름조차 잊게 될 눈앞의 하찮은 왕자 놈, 무엇인가의 영향으로 자꾸만 주제파악을 잊는다.
‘아티팩트라도 있는 건가?’
스르륵.
듀란달의 검은 눈동자 중앙에 홍염이 타올랐다.
제국의 혈통만이 타고나는 <적기>의 발현이었다.
급기야 완전히 붉게 물든 눈동자로 샤이닝을 관찰하던 듀란달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샤이닝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의 곁에 서있는 작은 꼬마아이 때문에 놀란 것이다.
‘이 신성력은 뭐지?’
나를 제외한 모든 존재는 악하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신성함이 로드로부터 느껴졌다.
만약 이 아이가 신성력을 단련하게 될 경우 향후 10년 내에 교황 데미안조차 초월하는 신성력을 갖게 될 것만 같았다.
‘템빨왕의 자식 아니랬나?’
무인으로써, 혹은 대장장이로써의 재능은 꽤나 타고 났겠거니 추측했건만 생뚱맞게 신성력이라니?
‘일종의 돌연변이가 태어난 셈이군.’
템빨왕은 어째서 교황 역임 축하연에 이토록 어린 아들을 보낸 것인가?
그 의문, 듀란달은 해소할 수 있었다.
‘그 자, 자신의 아들이 높은 신성력을 갖고 태어나자 차라리 교황청에 보내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거야.’
템빨왕자로서의 자질은 부족하되 교황청에서는 한 자리 꿰찰만한 재능이다.
이처럼 판단한 템빨왕은 자신의 아들을 미리 교황과 장로들에게 보여주고 언젠가 교황청에 맡길 계획을 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교황청과 확실한 끈을 맺게 되면 나라에 크게 이롭게 작용할 터이니....’
과거, 제국이 파스칼을 지지했던 이유가 괜히 있겠는가?
템빨왕의 의도를 파악한 듀란달 황자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어린 아들마저도 정치도구로 이용하는 철두철미함이라.... 과연 템빨왕. 폐하께서도 인정하신 적수답군.’
템빨왕 탓에 황제폐하의 말년이 평탄치만은 않겠다고 생각하는 듀란달 황자의 입가에 의미불명의 미소가 걸리는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전하. 저는 템빨왕 전하의 아들 로드라고 하옵니다.”
방글방글 미소 지은 로드가 꾸벅, 듀란달 황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여섯 살쯤 되었을까.
아장아장한 몸짓과 순수한 표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미래의 적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저 귀엽고 깜찍할 따름....
“험험.”
로드의 높은 매력에 현혹되었다가 뒤늦게 정신 차린 듀란달이 헛기침을 뱉었다. 그리고 애써 진지한 표정을 짓고 엄중하게 말했다.
“만나서 반갑군. 네 부친의 명성은 내 익히 들었.....”
듀란달의 인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채앵-!
듀란달의 바로 곁을 호위하고 선 적기사들이 갑자기 칼을 뽑아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장내가 술렁였다.
갑자기 칼을 보게 된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였고, 성기사들이 달려왔으며, 샤이닝 왕자는 로드를 감싸 안았다.
“이 무슨 짓입니까!!”
아이린의 곁을 지키고 있던 코크가 달려오며 소리친다.
그는 하필이면 로드 앞에서 칼을 뽑아 든 적기사들에게 지독한 적의를 보냈다. 적기사들이 로드를 해하려했다고 오해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의 상관인 로이먼은 해석이 달랐다.
코크를 말린 로이먼이 로드가 밟고 있는 그림자를 찌릿, 노려보았다.
‘그림자의 왕, 이 양반이....!’
카심.
로드의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그가 갑자기 황자를 향해서 살기를 쏜 탓에 적기사들이 반응한 상황이다.
‘이 일을 깊이 따지고 들었다가는 이쪽이 불리....’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데미안 교황 성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축하연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데미안은 현재 장내에 어떤 소란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도 모른 척했다. 화제 자체를 돌렸다. 로드가 혹 불리한 상황에 처하지 않게끔 의도하는 것이었다.
“익....!”
황자가 위협을 겪을 수도 있었건만, 이 일을 묻겠다고?
적기사들은 분통이 터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천하의 솔로 넘버나이트라고 해도 상대는 교황인 바. 특히 황자가 있는 자리에서 함부로 설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교황 성하!!”
듀란달 황자가 직접 나섰다.
연설 중인 데미안을 소리쳐 부른 그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쥐새끼 한 마리가 숨은 듯한데, 성하와 우리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쥐새끼부터 찾아 잡아야하지 않겠습니까?”
“.....”
로드와 척슬리가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고, 그림자 속 카심은 자신의 실책을 뼈저리게 후회한다.
한편, 연회장 천장 위의 누군가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야탄의 네 번째 종, 실베나스.
암마족 출신인 그녀는 어둠과 완전히 동화하고 어둠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최소한 은밀함에 있어서만큼은 전설의 어쌔신 란스티어와 비견되는 수준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한데 걸린 것이다.
‘놈들의 실력이... 예상보다 뛰어나?’
아니, 아직 위치까지 발각 된 건 아니다.
지금 당황해서 움직였다가는 그때야말로 비로소 위치를 발각당하게 되리라.
꿀꺽, 마른 침을 삼킨 실베나스가 바짝 움츠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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