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1권 - 5화
나이 서른에 접어들었던가.
아이린은 여전히 청초하고 아름다웠지만 앳된 모습이 전혀 없었다. 타고난 동안조차도 무색하게 만드는 세월 앞에서 완숙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리드 님보다 연상이 되신 거네.’
찻잔을 내려놓으며 아이린을 살피는 데미안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린다.
그 또한 이사벨을 사랑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플레이어와 NPC들 사이의 괴리가 뼈아프게 다가왔고, 슬펐다.
아이린은 저 멀리, 대머리 장로들 틈에 껴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들 로드를 애정 가득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좇아서 로드에게 시선을 돌린 데미안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로드 왕자는 해가 거듭할수록 예절이 좋아지는군요. 타고난 재능과 권력이 하늘을 찌름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고, 올곧은 것은 모두 왕비님의 지혜와 노고 덕분이겠지요.”
“아니요. 왕자가 타고난 심성이 고운 것뿐이에요.”
인성은 교육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구 에트날 왕국의 명문 귀족 출신인 아이린은 수많은 타락 귀족을 목격했었다.
약자를 쉽게 해치고,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었던 그들이라고 해서 과연 교육을 못 받았으랴?
아이린은 늘 로드에게 감사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리드 님을 닮은 걸 테지.’
남편을 떠올릴 때면 싱글벙글 미소 짓게 되는 아이린이었다. 그리드의 본성을 알게 될지라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리드는 전부였으니까.
“…….”
따사로운 햇살 아래 미소 짓는 아이린의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럽다. 그녀를 지켜보는 데미안과 이사벨 모두 뺨에 홍조를 띠우고 말았다.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린 데미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험험, 장로들께서 하도 귀찮게 굴어 로드 왕자께서 피곤하시겠군요. 이만 물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이린에게 꾸벅 인사한 데미안이 푸른 잔디를 터벅터벅 가로지른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성직자의 고상함보다 성기사의 호전성이 담겨 있었다.
장로들이 데미안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세상에 단점이 없는 인간이 어디에 있는가?
장로들은 데미안에게 아쉬움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인정하는 부분은 인정했고, 또 크게 기대하는 부분들도 있었다.
타락한 교황 드레비고와 독사 같았던 파스칼과 비교해서 데미안은 충분히 훌륭한 교황이었다. 장로들이 벌써 3년째 데미안의 교황 역임을 지지한 것은 교단을 위한 최선이었던 것이다.
“장로님들, 이만 왕자를 놓아주시죠. 왕자께서 홀아비 냄새에 질식하시겠습니다.”
“크흠…….”
로드 왕자로부터 느껴지는 강대한 신성력에 사로잡혀 있던 장로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자신들이 체통조차 잊고 어린 소년에게 헬렐레 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그들이었다. 하지만 얼굴을 붉히지는 않고 선한 미소만 그린다.
“로드 왕자, 저녁 만찬 때 뵙겠소. 그때 또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레베카 여신께 기도드리는 것 잊지 마시오, 왕자.”
“여신께서 왕자께 축복을 내릴지니…….”
저마다 한마디씩 인사를 건넨 장로들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로드의 신성력에 완전히 반한 그들은 로드야말로 여신의 사자라고 떠들어 댔다.
그들이 물러나자 드디어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로드가 후! 짧게 숨을 뱉자 데미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가끔씩은 철없이 굴어도 괜찮아. 그 나이에 벌써부터 사람들 시선을 신경 쓰다가는 빨리 늙을 거라고.”
“아바마마를 부끄럽게 만드느니 차라리 빨리 늙을 거예요.”
“거참…….”
기특한 아이다.
자신도 모르게 로드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데미안이 아차 싶었다.
“이거 미안하구나.”
로드가 아무리 어리다지만 일국의 왕자다. 그의 머리 위에 함부로 손을 얹는 것은 무척 큰 실례였다.
당황하며 사죄하는 데미안의 품에 로드가 안겨 들었다.
“더 쓰다듬어 주세요, 사부.”
“하앗! 로드 쨩, 너무 귀엽잖아!”
결국.
“교황 성하! 무슨 무례를……!”
“체통을 지키십시오, 성하!!”
로드를 목마 태운 데미안이 하하하하! 크게 웃으며 교황청의 정원을 뛰어다녔고, 기겁한 이사벨과 레베카의 딸들은 그를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나무 그늘 아래 앉은 아이린은 평화로운 광경을 눈에 담으며 행복에 잠겼고, 그녀와 로드의 호위로 붙은 템빨단 소속 기사들은 넋이 나갔다.
사하란 황제 다음가는 권력가로 꼽히는 레베카교의 교황이 자신들의 어린 왕자를 마치 조카 대하듯 하였으니 신기했다. 뿌듯하기도 했다. 등골이 오싹오싹할 정도로.
특히 코크가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템빨국과 레베카교의 관계가 소문보다 더 깊구나. 템빨국에 오기를 정말 잘했다.’
코크.
3세대 10인의 루키 중 하나인 그는 일찍부터 템빨국의 잠재력을 알아보았다.
자신이 천재라고 자부하며 기고만장했던 시절, 요새 도시 파트리안에서 피아로가 던진 갈비뼈에 얻어맞고 생사를 오갔던 그는 템빨단이야말로 미래라는 확신을 품었고, 이후 템빨단이 템빨국을 건국하자마자 템빨국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현재는 당당히 템빨국 기사에 취임한 상태이다. 순전히 실력으로 일궈 낸 성과였다.
코크는 비록 그리드가 자신을 모를지언정 그리드에게 충성했고, 템빨국을 위해서 분골쇄신하겠노라고 다짐했다. 템빨국이야말로 언젠가 반드시 대륙을 통일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훗날엔 자신 또한 템빨국의 귀족이 될 것을 꿈꿨다.
어째서 힘들게 돌아가는가?
누군가는 코크의 판단을 그릇됐다고 평가한다.
10인의 루키에 들 재능이라면 제국으로 귀화하는 편이 더 안정된 미래를 보장받지 않겠느냐며 코크를 어리석다고 보았다.
물론 코크도 망설인 적은 있다. 특히 템빨국 건국 초반에 템빨국이 제국과 적대하였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지금이라도 제국에 망명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하지만 코크는 한 번 결정한 일을 손쉽게 뒤집을 만큼 근성이 없는 인물이 아니었다. 또한 그리드를 향한 팬심은 견고했다.
코크는 그리드와 템빨단원들을 믿었고, 실제로 템빨국은 역사상 최초로 제국과 휴전 협정을 맺는 기염을 토했다.
이제 코크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나날이 발전하는 템빨국을 지켜보면서 본인의 실력을 연마하고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뿐이었다.
“코크 경?”
“아, 죄송합니다.”
하하, 호호 웃으며 초원을 노니는 데미안과 로드를 넋 놓고 지켜보던 코크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에게 기사 로이먼이 주의를 주었다.
“호위의 기본 수칙을 잊었나? 주위가 안전할 때야말로 우리는 더욱더 경계를 기울여야 하네.”
일부러 굵은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는 로이먼.
남장을 하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성별이 진즉에 들켰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샤워실이나 탈의실에 들어올 때마다 동료들이 자리를 비켜 준단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걸 보아 어지간히 둔한 듯하다.
하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진짜배기였다. 그녀의 레벨은 320. 코크보다 단 19가 높은 수준에 불과했지만 코크보다 족히 배 이상 강했다.
비단 코크와 비교할 게 아니라, 아스모펠이 육성한 템빨국의 젊은 기사를 통틀어서 그녀가 독보적으로 강했다.
피아로 밑에서 장기간 밭일을 했던 그녀가 히든 클래스나 스킬을 얻은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난무하는 중이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깍듯이 대답한 코크가 적절한 긴장감을 되찾았다. 아이린과 로드를 동시에 시야에 담을 수 있게끔 같은 선상에 둔 채 사위를 경계했다.
단순히 로이먼과의 호감도를 쌓기 위한 가식 따위가 아니었다.
번성한 템빨국의 귀족이 되길 바라고 있는 코크는 그리드의 승승장구를 원했고, 그리드를 위해서라도 아이린과 로드의 안전을 반드시 책임지겠다는 사명감을 품고 있었다.
‘죄다 거물들뿐이군.’
코크의 시야가 언덕 아래로 돌아간다.
각국의 왕족들을 태운 마차의 행렬이 교황청에 계속해서 입장하고 있었다.
사하란 제국의 깃발을 단 마차도 보였다.
현재 전쟁 중인 발할라와 울티나 왕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 데미안을 축하하기 위해서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황자까지 오다니……!’
4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마차에서 내린 젊은 사내를 목격한 코크가 경악했다.
2황자 듀란달.
제국 최대의 권력가 중 하나인 그를 설마 이곳에서 볼 줄은 몰랐던 코크다.
코크는 레베카 교단이 대륙에서 얼마나 큰 위치에 있는지 절실히 실감이 났다.
데미안은 어깨에서 로드를 내려놓고 있었다.
“로드 쨩, 왕비님을 모시고 숙소로 돌아가 있어. 푹 쉬고 저녁 만찬에서 보자.”
“네.”
로드는 순순히 대답했다. 데미안과 더 놀고 싶다는 아쉬움을 일절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똘똘한 아이이니만큼 데미안의 입장을 이해해 주는 것이었다.
데미안이 황자를 비롯한 각국의 왕족들을 마중하기 위해서 자리를 떠나는 그때…….
“황금 여신상은 저쪽에 배치하도록 하게.”
“제4성기사단도 마을 어귀에 배치시켜. 귀빈들을 모신 만큼 치안 유지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장로들은 교황청 곳곳을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로드를 봤을 때와 달리 손님들에게 관심 없는 눈치였다. 제국의 황자조차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당연하다.
레베카교는 국가를 초월하는 집단인바.
권력 앞에 무릎 꿇지 않는다.
드레비고와 파스칼, 그리고 그들을 추종했던 세력이 그리드에게 정리당한 이후 레베카교는 이제 온전한 모습을 되찾고 있는 것이다.
아이린과 로드를 호위하며 이동하는 코크는 내심 더 뿌듯해졌다.
저 콧대 높은 장로들이 로드 왕자만 특별히 애지중지하게 대했다고 생각하자 재미있고 기뻤다.
저벅저벅.
붉은 융단이 깔린 복도.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향하는 길, 행렬의 선두에 선 로드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사부님, 어디가 불편하세요?”
그림자 속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아니… 괜찮다…….
카심이었다.
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떨림이 담겨 있었다.
사실 괜찮지 못한 것이다.
사하란 제국의 2황자 듀란달.
조금 전 막 이곳 교황청에 방문한 그야말로 네로족을 멸망시킨 장본인 중 하나였으니까.
철천지원수를 눈앞에 둔 카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잠재된 분노와 원한이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오른다. 냉정을 유지하기 힘들다.
힘겨워하는 그의 심경을 눈치챈 척슬리가 당부했다.
“혹여나 사고를 쳐선 안 되오.”
-알고 있어.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는 카심과 불안해하는 척슬리.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로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반면 그 세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분위기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린과 레베카의 딸 후보들은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며, 로이먼과 코크를 비롯한 젊은 기사들은 일행의 안전에만 신경 쓸 뿐이었다.
쿠르르르릉…….
기껏 걷혔다 싶었던 먹구름이 다시금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가 무겁고, 음산하다.
같은 시각.
“미친 괴물들만 모였군.”
교황청의 백색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케이산 정상.
뒤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한 아그너스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비에 젖어 흘러내린 그의 녹발 사이 황금안에 야탄의 종들이 투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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