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1권 - 4화
‘아주 좋아.’
그 이름도 찬란한 템빨왕관의 결과물은 그리드의 기대 이상이었다.
파그마가 교황을 위해서 제작한 레전드리 ‘세트’ 아이템 <성스러운 빛의 왕관>보다 모든 부분에서 뛰어났으니 솔직히 놀라울 정도였다.
‘지력이 낮은 거야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템빨왕관에 숨어 있는 제작자의 의도는 물리적인 전투력의 상승이다. 지력이 아니라 방어력 옵션이 붙는 게 당연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65의 지력이 추가된 이유는 순전히 벨리알의 보석들 덕분이었다.
‘무력이 안 붙은 건 조금 아쉽지만…….’
그리드는 현혹 스킬의 위력을 알고 있다. 현혹에 당한 대상은 공격력을 상실하고 방어력이 낮아진다. 템빨왕관에 귀속된 현혹 스킬은 그리드의 아쉬움을 달래 주고도 남았다.
심지어 템빨왕관에 귀속된 현혹은 착용자를 바라보는 모든 대상을 현혹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마나 소모도, 재사용 대기 시간도 없는 패시브 스킬인데도 광범위한 CC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건 사기도 그냥 사기가 아니라 개사기 수준의 옵션이었다.
“흠… 그건 그렇고…….”
거울 앞에 선 채 자신의 ‘썩 괜찮은 것도 같은’ 외모를 관찰하고 있는 그리드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유라가 말해 준 분신의 존재가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그였다.
‘정황상.’
그리드는 떠올렸다.
번헨 열도에서 만났던 자기 자신의 분신.
녀석은 <파그마의 후예>라는 직업의 잠재력을 완전히 이해하고, 이용하고 있었다. 아직 그리드가 사용하지 못했던 융합 스킬들을 선보이며 그리드에게 큰 시련을 안겼고, 그리드는 큰 무력감을 맛봤다.
분신 앞에서 그리드는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어린아이 수준에 불과했다. 전투가 지속될수록 분신과의 격차를 좁히기는커녕 도리어 벌어졌고,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확신을 품는 단계까지 이르렀었다.
최후의 수단으로 <알쏭달쏭 도리깨>에 의지해서 운 좋게 쓰러뜨렸다지만…….
‘녀석은 흑화 상태로 죽었었다.’
그리드는 직접 체험했었다.
흑화 상태로 사망 시 지옥에 떨어지는 경험을.
만약 분신 또한 마찬가지였다면?
‘그리고 어떤 오류 때문에, 아니 애초에 안배된 시스템 때문에 그대로 지옥에 정착하게 됐다면?’
유라는 말했다. 분신은 흑화 상태였다고.
‘확실해. 흑화가 풀려야 지옥에서 추방되는데, 흑화가 안 풀리니까 그대로 지옥에 머물게 된 거야.’
까드득.
손톱을 깨무는 그리드의 얼굴에 초조함이 묻어난다.
자신이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었던 상대가 죽기는커녕 살아 있을뿐더러 여전히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소름이 돋고 두려웠다.
십만대군 대적검을 얻고, 템빨을 꾸준히 강화시키고, 대악마의 힘을 얻는 등…….
그리드 또한 그동안 강해졌으니 두려워할 필요 없는 거 아니냐고?
그게 쉽지가 않다.
유라의 보고에 따르면 분신은 무려 다섯 개의 검무를 융합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화(花)라는 이름의 전혀 새로운 검무 또한 선보였다고 하고.
새로운 검무야 <파그마의 후예>의 잠재력이 개방된 것이라고 해석하면 쉬웠고, 언젠가 그리드 또한 습득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지만…….
‘다섯 개의 검무를 융합한 건 도대체 뭐지?’
연살파극(聯殺派劇).
그리드가 이 4개의 검무를 융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레베카 여신의 축복 때문이었다. 신이 뒤를 봐준 덕분에 신마저 위협할 수 있는 검무를 터득한 것이고, 그 여파로 다른 신들의 반발을 샀었다.
‘네 개의 검무가 그 정도였는데…….’
5개의 검무를 융합했다고?
그리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유라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의심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한 가지 가설을 세우는 데 성공한다.
‘설마 그놈은 야탄 신의 축복이라도 받았나? 그게 아니면 파그마의 후예라는 직업의 고유 잠재력만으로 5개 검무를 융합하는 게 가능하다는 뜻인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머리가 복잡해지자 신경질적이 된 그리드가 치를 떨었다.
“아니, 대악마 놈들은 그 빌어먹을 놈 안 잡고 뭐 하는 거… 아?”
소스라치게 놀라는 그리드였다.
32위 대악마 벨리알이 자신을 보고 ‘영혼 없는 놈’이라며 놀라던 모습이 뒤늦게 떠오른 탓이다.
‘분신을 말했던 거였어?’
말인즉, 대악마들 또한 분신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다는 뜻.
특히 벨리알은 지극히 경계하는 눈치였다. 결코 좋은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신이 죽기는커녕 살아서 지옥을 활보한다?
답은 하나다.
지금의 분신, 대악마들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무력을 지녔다는…….
“와, 진짜 환장하겠네.”
분신은 그리드를 죽이기 위해서 탄생한 존재다. 살아 있는 한 그리드 입장에서는 영원히 경계해야 할 적이었다. 놈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리드의 입장에서는 절망이었다.
쭈그리고 앉아 좌절하고 있는 그에게.
“아바마마.”
작은 소년이 다가왔다.
크고 긴 눈매 속에 자리 잡은 푸른 눈동자가 크고 깊다.
모친을 닮아 우유처럼 흰 피부와 부친의 것을 닮아 검은 머리카락의 조화가 훌륭하다.
미래가 아주 기대되는 생김새를 지닌 아름다운 소년의 이름, 로드였다.
“우리 로드 안 자고 무슨 일이야? 내일 교황청에 가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리드에게 있어서 로드는 진짜 피붙이였다. 그는 진정으로 로드를 아끼고 사랑했다.
아들이 혹 걱정할까, 굳었던 표정을 활짝 편 그리드가 로드를 꼭 끌어안는다.
아버지의 크고 따뜻한 품에 안긴 로드가 헤헷! 수줍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그냥요. 아바마마가 보고 싶어서 왔어요.”
“그것참 잘했네. 우리 로드, 아빠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렴. 아빠는 언제나 대환영이다.”
“으응, 아니요. 로드의 욕심 때문에 아바마마를 방해하기는 싫어요. 아바마마는 나라와 백성을 지키느라 바쁘잖아요. 가끔씩만 찾아올래요.”
“녀석…….”
기특하게도 배려해 주는 로드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리드의 눈가가 촉촉해진다.
따뜻한 온기를 느낀 까닭이다.
그래, 로드는 실제하고 있었다.
최소한 이 세계 안에서만큼은 로드 또한 진짜 인간이었고, 진짜 혈연이었다.
쪽.
현실에서도 함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움을 삼키며, 아들의 작은 뒤통수에 입을 맞추는 그리드의 귓가로 한없이 상냥한 음성이 들려온다.
“아바마마, 혹시 힘든 일이 있으면 뒤로 미루세요. 로드가 어서 빨리 커서 아바마마를 도울 테니까요.”
“…그래.”
이 순간 그리드는 결심했다.
로드가 성인이 되기 전에 템빨국에 안녕과 평화를 불러오겠노라고. 이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힘든 일을 떠넘기는 일은 결단코 없을 거라고.
‘분신이고, 나발이고.’
나와 내 주변을 위협하는 모든 존재들을 반드시 멸하리라.
다짐하는 그리드의 눈동자가 달빛보다 서늘하다.
***
“잘 다녀올게요.”
아침 햇살에 젖은 라인하르트는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른 아침의 한산한 거리 어디를 둘러봐도 평화롭고 아름답다.
하지만 도시의 풍경 전부를 합쳐도 그녀보다는 못하리라.
“편안한 여행이 되길 바라오.”
그리드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아이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는 그리드의 눈빛에 담긴 애정이 짙다. 그는 한결같이 사랑스럽고 현명한 자신의 부인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아바마마! 저도요!”
자신에게도 입을 맞춰 달라며, 두 팔을 활짝 펼친 로드가 깡충깡충 뛴다.
귀여운 녀석의 뺨에도 입을 맞춰 준 그리드가 카심에게 당부했다.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 사람의 안전을 책임지도록.”
“당연합니다.”
그림자 속에 숨은 채 답하는 카심의 음성이 그리드에게 강한 신뢰를 주었다.
애초에 교황 데미안의 초대를 받고 교황청을 방문하게 된 아이린과 로드였다.
행선지부터가 안전했고, 호위는 화려했다.
그림자의 왕 카심과 근위 기사 척슬리, 그리고 로이먼 등의 템빨국 젊은 기사들, 레베카의 딸 후보였던 여성 수백 명이 아이린과 로드의 호위로 붙은 것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아그너스가 나타나서 덮치더라도 돌파하지 못할 호위였다.
‘충분하겠지?’
생각하는 그리드의 시선이 곁에 선 메르세데스에게 향한다.
그리드의 불안을 읽은 메르세데스가 질문했다.
“저도 호위에 동참할까요?”
메르세데스의 최우선 과제는 그리드의 안전이다. 하지만 상왕 키르와 조우했던 그날, 메르세데스는 그리드가 자신에게 융통성을 바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메르세데스는 그리드의 안전을 뒤로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드가 그것을 원한다면 그리드의 곁을 잠시 떠나 있을 의향이 있었다.
골똘히 생각해 보던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호위는 이미 충분했다. 또한 데미안이 별도의 호위를 보내겠노라고 약조까지 한 상태였다.
어떻게 봐도 아이린과 로드는 안전했고, 이 이상의 호위는 인력 낭비다.
그리드는 왕으로서 공과 사를 구분하며 가신들에게 신뢰를 주어야 하는 입장이었고, 메르세데스에게는 별도의 역할이 있었으니 그녀까지 호위에 붙이는 건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잘 다녀와.”
미소 지은 그리드가 손을 흔든다. 그는 아이린과 로드를 태운 마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
“킥? 뭐라고?”
녹발의 사내가 실소를 터뜨린다. 안 그래도 커다란 입이 좌우로 쭉 찢어지자 희고 뾰족한 어금니가 드러난다.
광기 깃든 금안에 잠시 위축되었던 로제가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계약 내용에 의거해서 교황청 습격을 도와주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아그너스와 야탄교 사이에 존재하는 계약을 뜻함이다.
아그너스는 생명의 돌을 만드는 과정에서 야탄교에 큰 도움을 받았고, 야탄교는 이를 빌미로 그의 힘을 이용하려고 했다.
애초에 바알의 계약자와 야탄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흐음…….”
아그너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기다란 혀를 날름거리며 퀘스트 내용을 확인한 그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어쩔 수 없지.”
아그너스의 입장에서 야탄교는 꼭 필요한 세력이었다. 그는 야탄교와의 호감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퀘스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의 대답을 들은 로제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이때까지 그녀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기껏 준비한 비장의 패가 도리어 자신들의 발목을 붙잡게 될 줄이야……. 당연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
교황청이 분주하다.
레베카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템빨국의 왕비와 어린 왕자가 직접 교황청을 방문한다고 하니 이래저래 준비할 일이 많았다.
데미안은 기대 중이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로드의 신성력이 그동안 얼마나 강해져 있을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연신 히죽거리는 그에게 레베카의 딸 이사벨이 핀잔을 주었다.
“체통을 지키시길.”
“험험, 이사벨 쨩이 그러라면 그래야지.”
저 멀리, 산기슭을 타고 올라온 마차가 교황청 입구에 진입하고 있었다.
백색 건물들 사이를 가로질러 곧 레베카 여신상 앞에 당도한 마차는 크고 화려했다. 템빨국이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음을 누구라도 엿볼 수 있었다.
“오오……!”
마차에서 내리는 어린 소년을 발견한 레베카교 신도들이 일제히 탄성을 터뜨린다. 특히 장로들의 감탄이 컸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있던 그들이 갑자기 태도를 싹 바꿨다. 허겁지겁, 계단에서 내려와 친히 로드를 마중해 주었다.
그들은 로드를 이렇게 평했다.
“진정한 교황감이로다!”
“아니, 템빨왕이 될 애한테 무슨 교황…….”
데미안의 태클이 가볍게 묻힌다.
로드를 둘러싸고 선 장로들은 저들끼리 떠들기 바빴고, 소외감에 휩싸인 데미안은 이사벨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뒤늦게 그를 발견한 로드가 힘껏 소리쳤다.
“데미안 사부니임!!”
“어서 와!! 우리 귀여운 로드 쨩!!”
레베카의 딸과 레베카의 딸 후보들의 마음을 훔친 공통점을 지닌 사내들, 오래간만에 만나 의기투합한다.
그들을 내려다보는 레베카 여신상의 표정이 오늘따라 어두운 것은 착각일까?
이사벨은 왠지 모를 불안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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