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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724화 (719/1,794)

템빨 41권 - 2화

“보석 말이야. 경도에 따라서 검이나 갑옷 등의 실전 장비에 부착시켜도 나쁘지 않겠지?”

벨리알의 보석에 있는 스탯과 저항력 상승 옵션을 장비에 고스란히 귀속시킬 수 있을 터.

무구와 보석의 결합은 템빨의 발전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기대감을 품고 질문하는 그리드에게 엘리자베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이상적이죠. 이미 다수의 세공사들과 대장장이들이 합작을 시도했던 바 있고요. 다만 모두 실패했죠.”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보석의 인성(靭性:파괴에 대한 저항도)은 경도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특수한 일부 보석을 제외하면 무척 쉽게 깨지죠. 세간에 잘 알려진 다이아몬드도 실상은 충격에 약해요. 오늘 보니까 벨리알의 보석 또한 마찬가지고요.”

예식용과 장식용 무구가 아닌 실전용 무구에 보석을 부착시키는 경우가 드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제아무리 단단한 보석이라고 해도 창칼과 맞부딪치는 식의 충격을 지속적으로 받게 될 경우 금방 깨져버렸다.

“충격에 강한 특수한 보석들은 뭔데?”

“대표적으로 흑금강석이 있죠. 하지만 그 특수한 보석들은 저도 세공할 수 없어요. 아마 전설의 세공사의 영역이거나, 세공하라고 만든 보석이 아닌 걸 수도....”

“흐음....”

이야기 듣는 그리드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세상일이 죄다 호락호락 하지 않으니 짜증도 났다.

하지만 그도 잠시.

‘가만?’

그리드가 문득 왕관을 떠올렸다.

<최초의 왕>이 된 이후 지금까지 왕관의 제작을 미뤄왔던 이유가 무엇인가?

권력과 명예를 상징하는 왕관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화려한 보석 장식이었고, 실력 좋은 세공사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작을 미뤄왔던 왕관.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그것을 지금 와서 떠올려 보면....

‘나는 투구와 왕관을 동시에 착용할 수 있고, 둘 중 하나의 모습을 숨기는 게 가능해.’

자, 실력 좋은 세공사는 구했다.

좋은 보석도 다량 보유 중이다.

제국 황제가 썼던 관처럼 보석 10개를 부착시킬 수 있는 왕관을 제작해서 착용한다고 치자.

능력치가 큰 폭으로 상승하게 된다.

다만, 평범한 다른 사람들은 그 왕관을 쓰고 전투에 임하지 못한다. 보석이 금방금방 파괴될 테고 막대한 재산적 손실을 입게 될 테니까.

반면 자신은?

‘왕관 위에 투구를 덧쓸 수 있어. 왕관의 능력치는 고스란히 적용 받되 왕관에 박힌 보석들이 파괴 될 염려는 사라진다.’

<최초의 왕>이 된 그리드가 얻은 가장 큰 혜택 중 하나는 남들에게 없는 ‘장비 슬롯’이 하나 추가된 것이었다.

남들은 ‘머리’에 쓸 수 있는 아이템의 종류를 투구, 모자, 왕관 등 중 하나로 택일해야하는 반면 그리드는 ‘왕관 외 1개’의 것을 머리에 쓸 수 있었다.

실제로 그리드가 <성스러운 빛의 왕관>으로 실험해 봤을 때, 왕관 위에 투구를 덧쓰거나 투구 위에 왕관을 덧쓰는 방식이었다.

즉, 투구 아래에다가 왕관을 씀으로써 왕관의 능력치를 고스란히 적용 받는 한편 왕관의 내구도는 투구로 보호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다른 장비 아이템은 몰라도, 최소한 왕관에만큼은 보석을 부착시키고 보석을 통한 능력치 상승효과를 안전하게 받을 수 있다는 뜻!

다만 문제는.

‘투구를 왕관위에 덧쓰려면 투구가 커야 돼.’

지난 수년 동안 그리드는 삼겹갑을 제작할 당시 함께 제작했던 <두꺼운 투구>를 애용 중이었다. 두꺼운 투구는 이름 그대로 두껍게 만든 투구로 높은 물리 방어력을 자랑했고 그러다보니 규격도 컸다. 머리에 살짝 얹어 쓰는 성스러운 빛의 왕관 위에 덧쓰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새로 제작할 왕관 위에도 덧쓸 수 있을까?

대답은 NO다.

그리드는 새롭게 제작하는 왕관에 최대한 많은 보석을 부착시키고 싶었고, 그러는 한편 왕으로써의 위엄을 위해 디자인에도 신경을 써야만 했다.

새롭게 제작하는 왕관의 규격은 당연히 성스러운 빛의 왕관보다 더 커질 수밖에 없었고, 그 위에 덧쓸 투구 또한 자연스럽게 더 커져야했다.

‘투구를 크게....’

그리드의 미간이 좁혀진다.

투구를 왕관 위에 덧쓸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만들면 투박해 보이는 건 둘째 치고 시야도 방해 받아 움직임이 둔화되지 않을까 염려되는 것이었다.

‘아?’

다음 보석을 세공하기 시작한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며 고심해보던 그리드가 묘안을 떠올렸다.

얼마 전,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서(?) 집에 방문했던 임철호 회장이 머리 위에 쓰고 있던 것.

‘꼬깔모자....!!’

표준어는 고깔모자다.

배 모양의 세모진 모자를 뜻한다.

‘투구를 고깔모양으로 높이 만들면 그 안에 충분히 왕관을 착용할 공간이 생길뿐더러 좌우 규격은 좁힐 수 있으니까 시야를 방해받을 일도 없잖아?’

와, 진짜 천재다.

스스로에게 감탄하는 그리드였다.

왕의 위엄 때문에 왕관 모양은 신경 쓰면서 투구 모양은 전혀 신경 안 쓰는 중이다.

그새 또 머리가 굳어서가 아니다.

<최초의 왕>칭호 효과로 그리드는 ‘노출되는 이미지’를 투구 혹은 왕관 중 하나로 택일할 수 있었다. 일단 투구를 왕관 위에 덧쓸 수만 있으면 그 후에 노출되는 이미지는 왕관으로 결정해서 ‘멋’까지 챙기는 게 가능했다.

“좋은 일 있으세요?”

그리드가 혼자서 골똘히 생각한다 싶더니 갑자기 싱글벙글 웃기 시작하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에게 그리드가 질문했다.

“각 부위 별로 부착시킬 수 있는 보석의 개수는 한정되어 있나? 예를 들어서 반지에는 몇 개의 보석을 부착시킬 있지?”

“보석을 아주 작게 세공하면 수십 개도 붙일 수 있죠. 대신 그 반지는 아무런 기능도 발휘하지 못해요.”

“왜?”

“보석이 성능을 발휘하려면 일정량 이상의 크기가 돼야 하거든요. 작게 세공해버리면 보석 고유의 성능이 사라져요.”

“아.... 그래서 플레이어들이 끼고 있는 반지에는 보석이 죄다 하나씩만 박혀있는 거구나?”

“그렇죠.”

“그럼 성능을 잃지 않는 선으로 세공한 보석을 왕관에는 최대 몇 개까지 부착시킬 수 있을까?”

“10개요. 제국 황제와 직접 대면한 당신이라면 알고 계시겠죠? 황제의 관에 박힌 보석이 총 10개라는 사실을요.”

“응.”

“그게 최대에요. 목걸이에 최대 3개의 보석을 부착시킬 수 있는 것과 비교하면 왕관은 보석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최고의 아이템인 셈이죠. 물론, 보석 달린 왕관을 쓰고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은 황제정도밖에 없을 테지만.”

아니, 여기에도 있다.

목구멍까지 치솟는 말을 억누르며 미소 짓는 그리드에게 엘리자베스가 질문해왔다.

“처음에 세공한 보석들은 당신이 쓸게 아니고 다른 템빨단원들이 쓸거죠?”

“왜?”

“제가 벨리알의 보석을 세공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잖아요. 아무래도 초반에 세공한 보석들의 퀄리티가 낮을 수밖에 없어요. 나중에 세공하게 될 보석들의 옵션이 조금이나마 더 좋을 거고요. 당신이 사용할 장신구들은 나중에 세공하는 보석들로 제작하면 되는 거죠?”

“아니. 처음에 세공한 보석들로 제작해줘.”

“제 설명을 이해 못하셨나요? 처음에 세공한 보석들은 상대적으로 별로라니까요? 이걸 보세요.”

엘리자베스가 밤새 세공한 <벨리알의 검은 보석>을 그리드에게 건네주었다.

보석 정보가 그리드의 시야에 떠오른다.

<평범하게 세공 된 벨리알의 검은 보석(C)>

*지력+6

*암흑 저항력+2퍼센트

세공사 장인 엘리자베스가 세공한 벨리알의 검은 보석입니다. 나쁘지 않게 세공됐습니다.

“앞으로 몇 개의 보석을 더 세공하다보면 제 솜씨가 더 능숙해질 거예요. 그때는 ‘섬세하게 세공 된’, 혹은 ‘완벽하게 세공 된’ 보석이 뜰 수도 있죠. 그럼 추가로 붙는 능력치 수치가 최소 1에서 3까지 높아질 거예요.”

애도 아니고,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해줘야 아나?

수많은 의뢰인을 만나온 엘리자베스는 인간의 욕심을 알고 있다. 특히 권력자들의 욕심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컸고, 권력자들은 늘 자신이 최고의 보석을 얻기를 바랐었다.

그렇다.

엘리자베스는 그리드가 자신의 장신구를 최고의 보석으로 제작해주기를 바랄 거라고 생각했다. 최고가 아닌 보석들은 부하들의 장신구를 제작할 때나 쓰라고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좋은 보석일수록 나 말고 다른 동료들에게 줘야지. 나는 보석 없이도 이미 충분히 강한 상태니까.”

“무슨....?”

그리드는 아이디부터가 탐욕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온갖 매체를 통해서 접한 그리드는 탐욕스러운 인간이었고.

한데 이제 와서 내숭을?

아니, 내숭이 아니다.

그리드의 표정과 태도에서 일체의 가식도 느껴지지 않는다.

당황하는 엘리자베스에게 그리드가 따스한 미소를 그려주었다.

“동료들이 강해질수록 나도 강해져. 그들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나는 일단 내 동료들이 강해졌으면 좋겠어.”

“당신.....”

“아, 물론 내게 S급 보석이 따로 없었다면 좋은 보석을 욕심냈을 지도 몰라.”

“.....”

“언젠가는 네가 S급 보석도 세공해줄 거잖아. 그렇지? 그때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릴게.”

아, 세상에는 참 많은 종류의 사람이 있구나.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구나.

올해 갓 대학교에 입학한, 스무 살 어린 여인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그녀가 그리드를 바라보는 눈빛에 적의가 옅어지고 신뢰가 깃들었다.

‘템빨단.... 한동안 계속 머물러 봐도 좋을 것 같네.’

***

“하으으으음.”

작업을 시작하고 나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무려 대악마가 드롭한 보석을 세공하다보니 스킬 경험치가 빠르게 쌓인 엘리자베스의 보석 세공 속도는 이제 소폭 상승한 상태였다.

밤새 보석만 만지고 있었더니 잔뜩 굳은 몸을 쭈욱, 펼치던 그녀가 그리드를 발견하고 실소했다.

“오빠도 정말 대단하네요.”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나흘 내내 곁에 앉아 작업을 지켜보는 그리드의 인내심은 엘리자베스가 예상한 것 이상을 넘어서 상식 이상의 수준이었다.

털썩, 그리드의 곁에 주저앉은 그녀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제 알겠어요. 오빠의 대장일도 결코 쉽지 않겠네요. 작업에 늘 신중하고 오랜 시간을 투자하시겠죠?”

“그렇지.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

이제 엘리자베스는 그리드를 자연스럽게 오빠라고 부르고 있었다. 같은 한국인 연장자를 상대로 당신, 당신 부르는 것이 민망하기도 했고, 함께 있으면서 편견을 벗고 보니 친숙해진 까닭도 컸다.

엘리자베스와 같은 또래의 여동생을 두고 있는 그리드 입장에서는 엘리자베스의 태도 변화가 썩 싫지 않았다. 귀여운 동생이 한 명 더 생긴 느낌이었다.

하여 그리드 또한 엘리자베스를 친숙하게 대해주었다.

“밤새 많이 지쳤지? 안마라도 해줄까?”

그리드 또한 많이 피곤한 상태였다. 밤새 엘리자베스의 세공을 견학하는 한편 새롭게 제작할 왕관과 투구를 설계하고, 엘리자베스가 로그아웃했을 때는 사냥터로 나가서 템빨골들의 레벨을 올리고.

몸이 2개, 3개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길 정도로 바쁜 나흘을 보낸 입장이었다. 그래서 머리가 굳은 상태였다. 함부로 안마를 논한 것이다.

“정말요? 그럼 기꺼이 부탁드릴 게요.”

활짝 웃으며 등을 내어주는 엘리자베스.

그녀에게 마찬가지로 활짝 웃어준 그리드가 아무런 사심 없이 엘리자베스의 가녀린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아....!”

그리드의 손길이 닿자마자 엘리자메스의 커다란 눈동자와 하얀 목덜미가 떨린다.

하지만 피곤에 절은 그리드는 그 미묘한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하고 그만 손끝에 힘을 주고 말았다.

“하앗....!”

그리드의 크고 단단한 손가락이 자신의 쇄골 위를 지그시 누르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대로 맥없이 그리드의 넓은 가슴에 몸을 기댔다. 빛을 잃은 눈동자로 천장을 바라본 채 바들바들 경기를 일으키는 그녀의 전신을 휘감는 감각은 형용할 수 없는....

“지금 뭐하냐아아아아!!”

엘리자베스의 공방.

조리실로 출근하기 전에 조카 얼굴 보러 찾아왔던 포식이불족발의 분노에 찬 음성이 쩌렁쩌렁 울린다.

“이 금수만도 못한 놈!! 여자 친구가 이미 둘이나 있는 놈이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는 내 어린 조카까지 건드려...!!”

“아니, 나 여자 친구 없....”

“뭐라고!! 그새 유라와 지슈카를 찬 거냐!! 이 부러운... 아니, 나쁜 놈 같으니!! 너는 모든 남자의 적이다!!”

“대체 뭔 헛소.... 힉!”

그리드는 눈에 불을 켜고 칼을 뽑아드는 포식이불족발 탓에 쫓겨나다시피 공방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대로 달려간 곳은 대장간이었다.

‘아침부터 족발이라도 잘못 먹은 거야, 뭐야? 어휴, 일단 왕관이랑 투구부터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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