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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722화 (717/1,794)

템빨 40권 - 21화

레전드리 아이템은 제작의 영역이 아니다.

이와 같은 상식, 이미 작년부터 파괴되었다.

기존까지는 보스 몬스터만 드롭한다고 알려졌던 레전드리 아이템을 플레이어들이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플레이어들의 제작 스킬 레벨이 발전하는 한편 클리어 퀘스트 난이도가 높아짐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현상이었다.

“이미 알고 찾아오신 거겠지만 정식으로 소개하도록 하죠. 제 이름은 엘리자베스. 직업은 세공사이고, 등급은 장인이에요. 모든 종류의 장신구를 제작할 수 있고, 레전드리 등급의 반지와 목걸이를 운 좋게 제작한 경험도 2번 있어요.”

엘리자베스는 솔직하게 말했다.

제작 아이템의 등급은 하늘이 내리는 것.

본인의 능력으로는 등급을 조절할 수 없었으니 ‘운 좋게’라는 말을 꼭 덧붙였다.

이는 겸손이 아니다.

당신이 내게 장신구 제작 의뢰를 맡길 경우, 그것이 반드시 레전드리 등급으로 뜰 보장은 없다는 일종의 경고였다.

만약 그리드가 제작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평범한 플레이어였다면.

그러니까 ‘장신구 공주’의 과장된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었다면 실망했을 테지만.

“나는 템빨왕 그리드다.”

그 누구보다 더 많은 숫자의 아이템을, 그 누구보다 더 다양한 아이템을 제작해 본 경험이 있는 그리드는 제작 시스템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장신구 공주에 대한 소문이 과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던 그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그가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는 눈빛에 깃든 기대감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

그리드가 청하는 악수에 응한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붉어진다. 왠지 모를 짜릿함이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다리에서 절로 힘이 빠졌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깜짝 놀라서 황급히 손을 뺀 그녀가 용기내서 말했다.

“구, 구해 줘서 고… 고마워요. 뭐, 유라 님을 구하는 김에 겸사겸사 구해 준 것일 테지만. 어찌 됐든 도움받은 것은 사실이니까요.”

엘리자베스는 그리드가 싫었다.

전설의 대장장이로 전직한 덕분에 손쉽게 좋은 결과물을 얻어 왔을 그를 시기했고, 천운을 타고난 덕분에 작금의 지위에 오른 것이면서 그게 마치 자신의 능력인 양 기고만장하게 구는 태도가 불쾌했다.

그런 사내가 유라의 연인이라는 점이 분통 터졌고.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만으로 사람을 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드에게 품은 감정이야 어찌 됐든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리드가 나타나 주지 않았으면 지금쯤 삼촌이 죽었을 거라 생각하니 끔찍했다.

그리드는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정말로 고맙다면 부탁 좀 들어줘. 공주에게 세공을 맡기려면 밟아야 한다는 절차를 생략해 주지 않겠어?”

공주를 만나려면 대기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공주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재료로는 공주에게 제작 의뢰를 맡길 수 없다.

엘리자베스에게 제작 의뢰를 맡길 때 요구되는 조건들이다. 단순하면서도 까다로웠다.

막말로 엘리자베스에게 제작 의뢰를 맡기려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녀의 흥미를 끌 만한 재료는 또 뭐고?

“알겠어요. 당신의 의뢰를 최우선 순위로 받아들이죠. 단.”

엘리자베스는 그리드에게 확실히 못 박아 두었다.

“저는 작업 과정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하면 능률을 못 뽑아요. 지루한 작업의 결과물은 늘 좋지 못했죠. 당신의 의뢰 내용이 제게 흥미를 주기를 바랄게요.”

‘그저 평범하게 반지 제작 의뢰를 맡기려고 했을 뿐인데…….’

그렇다.

그리드는 단지 반지를 원할 뿐이었다.

현재 그리드가 보유 중인 반지는 총 4개.

결혼반지, 도란의 반지, 부조리의 반지, 엘핀스톤의 반지이다.

이 중 결혼반지와 도란의 반지는 상황에 따라서 착용하고 있었고, 그가 늘 착용 중인 반지는 부조리의 반지와 엘핀스톤의 반지 단 2개뿐이다. 8개의 손가락이 늘 허전한 상태였다.

양쪽 손목에 하나씩 착용할 수 있는 팔찌는 <수호자의 팔찌>와 <니베리우스의 팔찌>가, 목걸이는 <수호자의 목걸이>, 귀걸이는 <다크 버스의 귀걸이>와 <흑수정 귀걸이>가 있었으니 반지만 8개 구비하면 충분한 입장이었다.

한데 흥미를 끌 만한 의뢰 내용을 요구하다니?

‘뭐 특이한 장신구라도 만들어 달라고 해야 하나? 피어싱? 체인? 그런 꾸미기용 장신구에도 능력치가 붙나?’

쓸데없이 깊이 파고드는 그리드였다.

잘그락.

고뇌가 묻어나는 내 천 자를 그린 그가 보석 꾸러미를 건네 오자.

“응……? 어, 어라?”

꾸러미 속 내용물을 확인한 엘리자베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보석들을 목격한 그녀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벨리알의 검은 보석(S)>

액세서리의 제작 재료로 가공할 수 있는 아름다운 보석입니다. 인계에서는 결코 구할 수 없는 이 대악마 보석의 가치는 도시 하나를 사고도 남을 수준입니다.

액세서리 제작 시, 지력 상승 옵션과 암흑 저항력 상승 옵션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공사의 솜씨에 따라서 패시브 스킬이 귀속될 가능성이 생깁니다.

단, 이 보석을 다룰 수 있는 세공사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울 것입니다.

<벨리알의 붉은 보석(S)>

…….

…….

액세서리 제작 시, 확률로 지력 상승 옵션과 화염 저항력 상승 옵션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공사의 솜씨에 따라서 패시브 스킬이 귀속될 가능성이 생깁니다.

단, 이 보석을 다룰 수 있는 세공사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울 것입니다.

‘스탯과 저항력 상승 옵션을 확정적으로 귀속시킬 수 있는 보석이라고? 심지어 패시브 스킬까지 귀속될 수 있어?’

셀 수 없이 많은 제작 의뢰를 맡아 온 엘리자베스.

그녀에게 의뢰를 맡기는 사람 중에는 하이 랭커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는 그녀에게 보스가 드롭한 보석을 재료로 건넸었다.

보스의 이름이 새겨진 보석들은 일반적인 보석들과 달리 ‘낮은 확률’로 스탯이나 저항력 상승 옵션을 달고 있었고, 이때 상승하는 스탯이나 저항력의 종류는 오로지 랜덤이었다.

한데 그리드가 가져온 보석은 특정 스탯과 저항력을 함께 확정적으로 올려 줄뿐더러 패시브 스킬까지 귀속시킨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여태껏 세공해 왔던 수백 종류의 보석을 통틀어 봐도 이런 보석은 없었다.

이 보석의 가치는 설명에 명시되어 있는 것과 같이 천문학적이었다.

“어, 엄청나…….”

벨리알을 레이드하고 얻은 것이라는 그리드의 설명을 듣고 감탄을 되풀이하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차츰 격양된다.

그리드는 한숨 쉬고 있었다.

“의뢰 내용이 너의 흥미를 끌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나는 그저 평범한 반지들을 원할 뿐인데…….”

“반지요?”

“응. 반지 여덟 개.”

“목걸이는요? 팔찌는요? 귀걸이는 필요 없나요!!”

“……?”

그리드가 당황했다.

의뢰 내용을 듣고 실망할 줄 알았던 엘리자베스가 대관절 흥분하더니 얼굴을 바짝 붙여 왔기 때문이다. 코앞에서 마주 보게 된 그녀의 커다란 검은 눈동자가 마치 식사를 눈앞에 둔 노에의 그것처럼 초롱초롱 반짝이고 있었다.

“너무 가까워…….”

“…….”

유라와 포식이불족발이 왠지 모르게 불편한 표정을 짓는다.

괜히 민망해진 그리드가 엘리자베스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며 설명했다.

“목걸이와 팔찌, 귀걸이는 보다시피 현재 사용 중인 것들이 있어.”

효과 또한 뛰어나다.

방어력과 불굴 상승 옵션을 보유한 수호자의 팔찌와 목걸이는 세트로 착용 시 100의 방어력을 추가로 올려 주는 유니크 등급의 액세서리였고, 니베리우스의 팔찌는 지력 30을 상승시켜 주는 한편 마법 캐스팅 시간을 무려 20퍼센트나 단축시켜 줬으며, 흑수정 귀걸이는 지력을 15퍼센트 상승, 다크 버스의 귀걸이는 흑화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줬다.

딜러이자 탱커이며, 또한 마법사의 역할까지 수행하는 그리드 입장에서는 하나같이 버릴 수 없는 진귀한 장신구들이었다.

하지만 <장인의 안목>을 토대로 그리드의 장신구 옵션들을 어렴풋이 엿본 엘리자베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 비취색 목걸이와 팔찌는 이제 그만 쓰도록 하세요. 보니까 세트 효과를 지닌 듯한데, 그래 봤자 유니크 등급의 장신구 아닌가요?”

“그래 봤자라니…….”

장신구처럼 구하기 힘든 아이템도 드물다. 특히 세트 장신구는 더욱더. 유니크 등급의 세트 장신구는 레전드리 등급의 장신구 하나와 비슷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를 저평가하는 엘리자베스에게 그리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자, 엘리자베스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때렸다.

하지만 출렁이지 않아서 그리드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멍하니 있는 그에게 엘리자베스가 소리쳤다.

“세트 효과까지 감안해도 그것들보다 훨씬 더 좋은 팔찌와 목걸이를 만들 수 있다고요! 운 따위 필요 없어요! 당신이 가져온 이 보석을 재료로 사용하면 충분히 가능해요!!”

다만, 문제는.

“이 커다란 보석들은 제가 세공하기 힘들 것 같지만…….”

S급 보석들은 세공할 자신이 없는 엘리자베스였다.

S급 보석이 요구하는 세공사의 등급은 장인 등급보다 높았다.

말인즉.

“S급 보석이 아니라 B급 보석으로도 유니크 세트 장신구보다 좋은 장신구를 제작할 수 있다고?”

이거다.

벨리알의 보석의 가치는 그리드가 기대하고 있던 것보다 몇 배나 더 컸다.

“네.”

S급 보석은 넣어 두고 B급 보석들을 꺼낸 엘리자베스가 확언했다.

“제작 결과물이 에픽 등급으로 떠도 지금 당신이 착용 중인 목걸이와 팔찌 세트보다 더 좋을 거예요.”

마침 수량도 충분하다.

그리드가 엘리자베스에게 넘긴 보석은 총 30개.

C급 보석 10개와 B급 보석 10개, 그리고 S급 보석 10개였다.

S급 보석 10개를 제외하더라도 목걸이와 팔찌, 그리고 8개의 반지를 제작하기에 충분한 수량이었다.

‘이런 좋은 기회를 얻다니.’

그리드보다 들뜬 사람이 바로 엘리자베스였다. 그녀는 오로지 대악마를 레이드해야만 얻을 수 있는 보석을 세공할 기회를 얻게 된 행운에 큰 기쁨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속내를 털어 낼 정도였다.

“조금 아쉽네요. 보석이 더 많았으면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볼 수 있어서 좋았을 텐데.”

“너한테 제작 의뢰 맡기는 사람이 줄을 섰다고 들었는데? 나 한 명한테 의뢰 여러 개를 맡아도 되겠어?”

“당연하죠! 이런 보석을 세공할 수만 있다면 당신에게 평생을 바쳐도 좋아요!!”

“평생…….”

“…….”

그리드에게 열렬히 소리치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마치 구애하는 것만 같았다.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유라와 포식이불족발의 심기가 또다시 나빠지는 그때였다.

“우리 길드원 수십 명 정도가 벨리알의 보석을 10개, 20개씩 갖고 있는데…….”

그리드가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네?”

엘리자베스가 귀를 의심했다.

그리드가 가져온 보석 30개가 벨리알이 드롭한 보석 ‘전부’라고 생각했건만, 아직 수백 개가 남아 있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부들부들.

전율에 휩싸인 엘리자베스.

고개 숙인 채 몸을 떨던 그녀가 이내 결심해 보였다.

“제가 직접 템빨국으로 갈게요. VVIP 손님들을 상대로 뻗댈 정도로 개념 없진 않거든요. 국왕 전하쯤 되면 작은 공방 하나 정도는 구해 주실 수 있죠? 이참에 템빨단에 가입하는 편이 좋을 수도 있으려나?”

“…….”

“아, 저로서는 가입 조건을 충족 못 시키나요?”

“그, 그럴 리가.”

이날.

“아니, 왜 어디 갔다만 하면 사람을 납치해 오는 겁니까? 대체 뭘 어떻게 하는 거예요? 인신매매 스킬이라도 따로 보유 중입니까? 써드 클래스로 전설의 인신매매범이라도 얻으셨어요? 네?”

“…….”

엘리자베스를 대동하고 귀환한 그리드는 라우엘에게 기분 좋은 핀잔을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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