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0권 - 16화
포식이불족발은 각 직업군 상위 랭커들로부터 다양한 정보를 매수 중이다. 블러드 카니발을 운영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생긴 습관으로, 막대한 정보력을 기반으로 삼은 그의 저력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다.
“이 멍멍이 새끼!! 당장 그 손 놓으라고!!”
번쩍!
아그너스에게 돌진하는 포식이불족발의 몸이 녹색 휘광에 휩싸였다. 미스릴 재질의 장검과 방어구들이 던전 곳곳에 설치된 야명석에 반사되어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그렇다.
포식이불족발은 대언데드 아이템을 완비한 상태였다. 침입자의 정체가 아그너스라는 사실을 안 이상 대비책을 철저히 갖춘 것이다. 블러드 카니발을 운영하면서 쌓은 재력이 그에게 많은 종류의 예비 아이템을 구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레전드리 등급의 성검 <루아의 축복>과 유니크 등급의 미스릴 방어구들을 도배한 그는 아그너스가 소환한 수십 구의 스켈레톤을 순식간에 도륙했다.
던전에서 강해지는 던전 제작자의 특성과 대언데드 전용 무구의 시너지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킥? 어디를 가나 강한 놈 천지로군.”
아그너스가 감탄사를 뱉었다. 하지만 입꼬리에 번진 미소는 사라질 기색이 없었다. 여전히 여유가 넘쳐흘렀다.
포식이불족발의 심기를 건드리고도 남는 태도였다.
“놈……!”
포식이불족발은 자신과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조카의 멱살을 놓지 않는 아그너스에게 강한 살의를 품었다.
저놈의 여유 넘치는 낯짝에 어서 빨리 충격이 번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거리를 좁히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험난했다.
딱! 딱딱!!
쿠워어!!
땅에서 새롭게 솟구쳐 나온 언데드들이 훼방을 놓았다.
스켈레톤 워리어!
어지간한 랭커들에게도 까다로운 상급 언데드다. 발군의 실력을 뽐내는 만큼 지배력 소모치도 높기 때문에 일반적인 3차 전직 네크로맨서는 많아 봐야 2마리의 스켈레톤 워리어를 동시 소환하는 게 한계였다.
하지만 아그너스는 무려 4마리의 스켈레톤 워리어를 동시에 소환했고, 포식이불족발은 순식간에 고립됐다.
국가대항전에서 포식이불족발의 실력을 목도한 사람들일지라도 포식이불족발이 위기를 겪고 있다고밖에는 해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작 아그너스는 본인이 위기에 처했음을 엿보았다. 그가 엘리자베스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놓은 순간.
“시멘트 뿌리기!!”
콰르르륵!!
4마리 스켈레톤 워리어를 단 하나의 스킬로 ‘행동 불가’ 상태에 빠뜨린 포식이불족발이 그대로 아그너스에게 도달, <벽돌 자르기>를 연계시켰다.
만약 아그너스가 여전히 엘리자베스의 멱살을 붙잡고 있었다면 몇 차례나 베이고도 남았을 예리한 공격이었다.
“큭! 크크큭! 크하핫!! 너도 이쪽인가!!”
미리 회피 동작을 취한 덕분에 몸을 지킬 수 있었던 아그너스가 극도의 유열이 깃든 광소를 터뜨렸다.
“이쪽?”
알아듣지 못한 포식이불족발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0.1초 단위의 시간으로 승부를 가르는 괴물 말이야. 킥킥!”
아그너스는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어느새 검을 꺼내 쥔 그의 평타가 <패왕>의 힘을 업고 포식이불족발을 강하게 압박했다.
채앵! 채챙!!
‘소문대로……!’
아그너스의 검을 막아 내는 포식이불족발의 얼굴이 굳는다.
네크로맨서 계열 클래스임에도 불구하고 빠르고 강력한 아그너스의 평타에 경각심을 느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전에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알고 있던 사항이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이 차이는 컸다.
아그너스와 싸워서 패배했던 플레이어들의 가장 큰 패인은 그의 평타 위력을 예측하지 못한 부분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예측하고 있었다고 해도 문제다.
아그너스는 진화한 상태였다.
챙강!
‘뭐?’
아그너스와 4회째 검격을 교환해 나가던 포식이불족발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루아의 축복>에 악마의 저주가 걸립니다.]
[<루아의 축복>에 깃든 신성력이 일시적으로 사라집니다.]
[<루아의 축복>의 내구력이 27 하락하였습니다.]
[<루아의 축복>의 공격력이 20초 동안 50퍼센트 하락합니다.]
스킬? 아니면 검 그 자체에 깃든 저주인가?
무엇인가의 뼈로 만들어진 아그너스의 검과 맞부딪칠 때마다 기운을 잃는 루아의 축복을 확인한 포식이불족발의 동공이 떨렸다.
아그너스의 음침한 목소리가 던전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악당을 토벌하려는 성검의 용사가 어디 너 하나뿐이었을까?”
성스러운 무기에 대한 대비책쯤이야 확실히 준비해 뒀다는 선고다.
푸우욱-!!
일시적으로 공격력이 약화된 포식이불족발의 검이 아그너스의 복부를 맥없이 찌르고,
콰자자작!!
아그너스의 묵직한 검이 포식이불족발의 어깨를 찢어발겼다.
표면적인 이펙트는 포식이불족발이 치명상을 입은 것으로 표현됐지만, 실질적으로는 서로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패왕의 힘과 룬에 각인된 소드마스터리 스킬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기본 능력치의 차이다.
던전 제작은 중노동!
포식이불족발의 근력과 체력은 그리드처럼 비상식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무기가 약화됐다고 해도 공격력이 강했다. 성스러운 방어구 세트도 단단히 한몫했다.
다만, 문제는.
쿠워어!!
아그너스는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름 돋는 흉성에 놀란 포식이불족발이 아그너스가 날려 오는 연격을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데스나이트가 있었다.
짙은 보라색의 오러가 피어오르는 검을 높이 치켜드는 녀석의 공격에 대비하고자, 아그너스의 연속되는 공격에 무방비하게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던 포식이불족발의 시야로 뼈아픈 알림창이 떠오른다.
[<소서산의 미스릴 갑옷>에 악마의 저주가 걸립니다.]
[<소서산의 미스릴 각반>에 악마의 저주가 걸립니다.]
[<소서산의 미스릴 갑옷>에 깃든 신성력이 일시적으로 사라집니다.]
[<소서산의 미스릴 각반>에 깃든…….]
[<소서산의 미스릴 갑옷>의 내구력이 47 하락하였습니다.]
[<소서산의 미스릴 각반>의 내구력이…….]
[<소서산의 미스릴 갑옷>의 방어력이 20초 동안 20퍼센트 하락합니다.]
[<소서산의 미스릴 각반>의 방어력이…….]
“뭔……!”
무기뿐만 아니라 방어구에까지 통용되는 저주였다고?
이를 악무는 포식이불족발의 머리 위로 데스나이트의 거검이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아앙!!
“큭……!”
포식이불족발의 검과 데스나이트의 검이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폭음이 던전을 격동시킨다.
이대로 승기를 잡겠다는 듯이, 아그너스는 데스나이트와 함께 포식이불족발에게 쉬지 않고 공세를 가했다.
앞뒤에서 쏟아지는 검격이 포식이불족발의 생명력을 빠른 속도로 소진시켰고, 포식이불족발은 반격을 시도해 봤지만 낮은 확률로 높은 디버프를 거는 흑마법에 재수 없게 당해 버려서 도리어 더 무력화될 뿐이었다.
“삼촌……!”
일찍이 여읜 할머니와 부모님을 대신해서 나를 키워 준 삼촌이다.
친구같이 편하게 대하고 있다고는 하나,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사랑하고 우러러보는 인물이었다.
언제나, 대상이 그 누구일지라도 나를 굳건히 지켜 주었던 삼촌이 무력하게 당하는 모습, 엘리자베스는 보고도 믿기지 않을뿐더러 보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삼촌의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은 현실이었기에 가슴이 찌릿찌릿 아팠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사망 페널티의 끔찍함이었다.
“알았어! 부탁을 들어줄 테니까 삼촌을 놓아줘!!”
결국, 엘리자베스가 소리쳤다.
이에 아그너스가 멈칫했고, 포식이불족발은 틈을 노렸다.
“싸움 중에 한눈파는 쪽이 나쁜 거야. 내가 비겁한 거 아니다?!”
쿠구구구구구구구!!
“……?!”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던전이 지진이라도 맞은 것처럼 흔들린다 싶더니 구조를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지면은 위로 솟구쳤고, 어떤 천장은 아래로 내려앉다 싶다가 빙글빙글 회전했으며, 벽들은 서로의 위치를 바꿨다.
포식이불족발이 335레벨을 달성하고 얻은 스킬 <던전 개조>였다.
<던전 개조>Lv.1
자신이 직접 제작한 던전에 한해서 던전의 내부 구조를 일시적으로 변화시킵니다. 구조 변화 방식은 무작위로, 던전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에게 저항할 수 없는 ‘혼란’ 효과를 안기거나 고립시킵니다. 시전자 본인 또한 이 효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중요 포인트로 설정한 지점은 던전 개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온전한 형태로 보존됩니다.
*변화시킨 던전은 언제든지 정상 구조로 복원시킬 수 있습니다.
스킬 자원 소모:현재 마나의 20퍼센트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6시간
시전자 본인조차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스킬!
변수가 워낙 많지만 위기 속에서는 의지해 볼 만하다.
“사, 삼촌……! 어지… 러어…….”
“큭……!”
아그너스는 물론이고 포식이불족발과 엘리자베스의 눈이 모두 핑글핑글 돌았다.
전설로 승급한 후 모든 상태 이상에 저항해 온 아그너스의 입장에서는 예상하기 어려웠던 변수였던 반면, 포식이불족발과 엘리자베스에게는 상태 이상을 빠르게 회복시켜 주는 <겔-데나의 반지>가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직접 제작한 반지였다.
“복자야!!”
“삼촌!!”
아그너스보다 빠르게 상태 이상에서 회복한 포식이불족발과 엘리자베스가 서로의 손을 맞잡는다. 그들은 교차하는 벽들 사이에 고립되어 있는 아그너스를 피해서 던전의 탈출구로 달렸다.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공방을 지켜야 한다는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수년 동안 사용해 온 공방을 버릴 경우 발생할 피해는 심각한 것이었지만, 삼촌의 목숨보다 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에게는 아그너스를 따돌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섣부른 확신이었다.
“킥……! 킥킥킥!!”
간신히 혼란에서 회복한 아그너스.
이미 저 멀리 달려가고 있는 포식이불족발과 엘리자베스를 포착한 그가 소리쳤다.
“악마 소환.”
바알의 계약자는 이름 그대로 제1위 악마의 계약자를 뜻하는바.
“듀레블.”
사실, 바알의 계약자의 진정한 능력은 언데드를 소환하고 통솔하는 것보다 악마를 소환하고 통솔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단, 그 능력이 전설 등급으로 승급한 후에야 발현되었을 뿐.
쿠와아아아아앙!!
주둥이를 벌린 악마가 쏘아 낸 섬광이 포식이불족발과 엘리자베스를 덮쳤고,
“복자야……!”
혹 조카가 다칠까, 그녀의 작은 몸을 힘껏 감싸 안은 포식이불족발은 넝마가 되어 버렸다.
***
‘영우 씨는 알고 있을까?’
간신히 지옥으로부터 탈출한 유라가 생각해 본다.
지옥에 존재하는 그리드 NPC와 그리드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을 거라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그리드가 자신의 NPC의 존재 여부를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었다.
만약 그리드가 자신의 NPC가 지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유라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을 테니까. 하지만 유라는 아무런 언질도 듣지 못했다.
‘우선 영우 씨에게 알리는 게 맞아.’
어떤 해답을 요구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당신이 흑화를 사용했을 때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NPC가 지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굳이 비밀로 할 이유 또한 없었으니, 알려 놓는 편이 맞았다.
‘그리고 며칠 쉬어야겠어.’
지옥에서 수개월 동안 틀어박혀 있던 유라의 피로는 상당했다. 육체야 휴식을 통해서 회복된다지만 정신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지는 지옥의 황량한 풍경과 스산한 분위기는 그녀의 정신을 너무 황폐하게 만들었다.
또한 더 큰 문제는, 어느덧 레벨이 320을 향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데빌 슬레이어>라는 클래스가 빛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유라는 레벨을 아무리 올려도 만족할 만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자신의 클래스에 점점 더 큰 실망과 박탈감을 느꼈고, 멘탈이 무너졌다. 다른 전설들과 비교했을 때 초라한 기분이었다.
‘지옥 한정으로 검성이나 파그마의 후예에 뒤지지 않는다는 건 인정하지만…….’
게임의 무대는 지옥뿐만이 아니지 않은가?
평생을 지옥에 틀어박혀 있을 것도 아니고, 언제 어디서든지 강력한 다른 전설 클래스와 비교될 수밖에 없다.
‘전직 퀘스트를 모두 완료하면 좀 달라질까? 하지만 영우 씨도 아직 전직 퀘스트를 끝내지 못한 걸로 아는데……. 아니면 혹시 내가 놓친 히든 퀘스트가 있는 걸까?’
발걸음이 무겁다.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라인하르트로 향하는 유라의 얼굴이 한없이 어두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색되지 않는 미모가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유라에게는 도리어 방해였다.
그녀가 원하는 삶은 외견으로 타인을 현혹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실력으로 인정받는 것이었기에.
그리고.
[인계에 악마가 출현하였습니다! 어둡고 강력한 마력에 종속된 고위급 악마입니다.]
[새로운 스킬 <악마 추적>이 개방됩니다.]
[네 번째 전직 퀘스트 <숙적>이 생성됩니다.]
[바알의 계약자를 물리치십시오!]
기회가 도래했다.
“게아르 산……!”
천운일까?
무척 가까운 장소다.
환희에 찬 유라가 힘껏 내달렸다.
승부를 봐야 하는 상대는 무려 그리드와 비견되는 인물 아그너스였지만, 데빌 슬레이어인 그녀는 스스로를 아그너스의 카운터 격인 존재라고 인지하고 있었다. 충분한 승산을 엿봤다.
같은 시각…….
“가 봤던 곳 맞아?”
“벌써 세 번이나 다녀왔다. 그러니까 안심해도 좋아. 반드시 무사히 도착할 거다.”
“…….”
“시간 낭비하게 만든 점에 대해서는 재차 사죄한다. 정말로 미안해.”
“…차라리 염치까지 없었으면 욕이라도 하지.”
“…….”
그리드와 불렛은 여전히 길을 헤매는 중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그리드는 별다른 짜증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속옷을 제작하면서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입장이었고, 불렛과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다 보니 관계가 돈독해지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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