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709화 (704/1,794)

템빨 40권 - 15화

[<게아르 제1던전>에 침입자가 발생했습니다.]

경고와 결과 사이의 텀이 비상식적으로 짧았다.

[<게아르 제1던전>의 1구역이 완전히 파괴당했습니다!]

[<게아르 제1던전>의 2구역이 완전히 파괴…….]

[<게아르 제1던전>의 3구역이…….]

[<게아르 제1던전>이 완전히 파괴당했습니다!!]

“뭐라고?”

게아르 산에 설치한 총 6개의 던전은 모두 <공주>를 지키기 위한 방위 시설이었다. 침입자를 철저히 배제시키게끔 설계됐다.

한데 고작 수십 분 단위로 던전 하나가 통째로 공략당한 것이다. 완벽하게 파괴당해 버렸다.

“대체 누가……!”

일단 플레이어는 아니다.

지존 그리드조차도 이토록 빠르게 던전을 공략하진 못했었으니까.

특히 게아르 던전은 과거 그리드가 공략했던 개조심 던전보다 난이도가 훨씬 더 높았다.

플레이어가 게아르 던전을 수 분 단위로 격파한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드래곤이라도 나타난 건가!”

국가대항전에 출몰했던 드래곤의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놈의 그 거대한 몸뚱이가 게아르 산 정상에 착륙하기만 해도 진동으로 던전 몇 개가 날아가지 않을까 싶다.

[<게아르 제2던전>에 침입자가 발생했습니다.]

“최소한 드래곤은 아니구만!!”

침입자는 던전을 순차적으로 공략하고 있었다.

물약을 종류별로 구비, 서둘러서 채비를 마친 포식이불족발이 만사 제쳐 두고 게아르 산으로 향했다.

***

[<게아르 던전(4)>에 입장하였습니다.]

[함정이 발동합니다!]

촤촥! 촤촤촤촤촤촥!!

쿠르르르르르릉!!

네 번째 던전에 입장함과 동시였다.

지면과 양옆의 벽에서 날카로운 창이 솟구친다 싶더니 천장에서는 족히 수백 킬로그램이 넘을 것 같은 거대한 쇠구슬이 떨어졌다.

일당백의 거인도, 수백의 군대도 멸절시킬 수 있을 법한 함정이었다.

“흥.”

콧방귀 뀐 아그너스가 눈짓하자 리치 무무드가 마법을 전개했다.

자신과 아그너스의 몸을 공중에 띄우더니 무지갯빛의 실드로 감싸 보호했다.

그러자.

챙! 쩌적! 쩌저적!!

쿠우웅!!

실드와 충돌한 창날들이 그대로 균열을 일으키면서 산산조각 났고, 천장에서 떨어진 쇠구슬 또한 실드를 뚫지 못하고 멈췄다가 또르르 굴러서 지면에 처박혔다.

탁.

쇠구슬을 밟고 오른 아그너스가 길게 뻗은 던전의 복도를 시야에 담았다.

“한 사람밖에 못 지나가는 구조군. 킥!”

던전의 난이도가 급격히 오르고 있었다.

한 번에 대량의 언데드를 소환, 물량으로 밀어 버릴 수 있었던 제1, 제2던전과 달리 제3던전부터는 급격히 협소해졌고, 함정의 숫자도 늘어났다.

온갖 모험을 경험해 왔던 아그너스에게도 게아르 산의 던전들은 만만치 않았다.

‘무무드를 남발할 수는 없고.’

딱!

잠시 고민해 본 아그너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우워어어…….

스켈레톤 한 마리가 땅속에서 느릿느릿 기어 나왔다.

아그너스의 의지에 따라서 행동하는 녀석은 눈앞에 보이는 작은 길목으로 발을 들였다.

턱!

스켈레톤이 길목에 진입하는 순간.

화르륵!

화염이 솟구치면서 스켈레톤을 불태웠다. 하지만 스켈레톤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존재답게 앞으로 한 걸음, 두 걸음 계속 나아갔다.

녀석이 네 걸음째 걸었을 때.

파사삭!

네 번째 화염이 솟구쳤고, 폴싹 주저앉은 스켈레톤의 몸은 그대로 재가 되어 버렸다.

‘네 번째 블록까지 5천의 고정 데미지를 입히는 화염 함정인가.’

딱!

아그너스가 재차 손가락을 튕기자 네 번째 블록 지점에서 새로운 스켈레톤이 튀어나왔다.

언데드가 소멸한 자리에 새로운 언데드를 생성시키는 바알의 계약자 고유 스킬 <죽음의 연쇄>였다.

화르륵! 화르륵! 화르륵!

두 번째 태어난 스켈레톤이 8번째 블록까지 도달하는 순간 소멸했고, 그 자리에서 또 새로운 스켈레톤이 태어나 마지막 12번째 블록까지 도달했다.

12번째 블록은 화염을 분출하지 않고 폭발을 일으켰다.

[당신의 스켈레톤이 2만의 데미지를 입고 소멸하였습니다.]

쿠콰콰콰콰콰쾅!

폭발의 여파로 길목 전체가 파괴됐다. 11블록까지 설치돼 있던 화염 함정들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면서 던전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하지만 멀찍이 떨어져 있는 아그너스에게는 작은 데미지조차 입히지 못했다.

“킥킥.”

미소를 피어올린 아그너스가 폐허처럼 부서진 길목을 느긋하게 걸어서 이동했다. 새롭게 기어 나온 스켈레톤들이 다음 함정과 그다음 함정들 또한 모조리 몸으로 격파해 줬다.

***

게아르 산 정상.

작은 던전 안에 작은 소녀, 아니 여인이 홀로 있었다.

일자로 자른 앞머리 아래에 위치한 두 개의 검은 눈동자는 무척 컸고, 반면 얼굴은 작아 마치 인형을 보는 듯한 생김새다.

-포식이불족발:적이다! 지금 당장 로그아웃해!

“…….”

여인은 포식이불족발의 귓속말을 무시했다.

이곳은 자신만의 공방.

장신구 제작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장치가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가 이곳을 버리고 떠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포식이불족발:야! 복자야!

빠직!

자꾸만 재촉하는 포식이불족발의 귓속말을 무덤덤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여인의 관자놀이에 갑자기 핏줄이 솟구쳤다.

도끼눈 뜬 그녀가 버럭 성을 냈다.

-엘리자베스:바보 삼촌! 내가 본명으로 부르지 말랬잖아!!

-포식이불족발:네가 대답을 안 하니까 그렇지! 그러게 누가 귓말 씹으랬냐!!

포식이불족발의 외침에는 다급함이 묻어나 있었다.

-포식이불족발:다섯 번째 던전이 돌파되기 직전이야! 당장 로그아웃해!!

재차 재촉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엘리자베스:싫다고!!

복자, 아니 엘리자베스는 장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이 있었다.

그녀는 단지 전설로 전직한 덕분에 손쉽게 고등급 아이템을 찍어 내는 누군가와는 달랐다.

노말 등급의 장신구 수천수만 개를 만든 끝에 레어 등급의 장신구를 만들 수 있었고, 또 레어 등급의 장신구를 수천수만 개, 에픽 등급의 장신구를 수천수만 개 만든 끝에 지금의 실력을 쌓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믿고 제작 의뢰를 맡겨 준 사람들에게 확실한 결과를 보여 주고 싶었고, 보여 줄 의무가 있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 공방이 꼭 필요했다.

-엘리자베스: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내 기술이 필요해서 찾아온 손님일 거 아니야? 비록 불법 침입자라고는 해도 내가 응대하는 게 맞아. 내가 없는 사이에 그놈이 내 공방에 무슨 짓을 할지 알고 나보고 도망치라는 거야?

-포식이불족발:상대가 플레이어라면 네 말이 맞다! 하지만……!

하지만 누굴까?

무시무시한 몬스터? 네임드 NPC?

섣불리 추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안다.

플레이어가 아닌 그들은 조카 복자의 가치를 정확히 가늠하지 못할 것이다. 수틀리면 쉽게 해칠 가능성이 높았다.

-포식이불족발:복자야……!

포식이불족발은 조카가 낭패를 겪는 일을 원치 않았다.

제작 계열 직업군을 선택한 조카가 지금까지 얼마나 힘겹게 성장해 왔는지 알고 있어서?

그건 부차적인 문제다.

위협이나 죽음 등의 끔찍한 경험 자체를 체험하지 않기를 바라는 게 삼촌으로서의 심정이었다.

애타게 소리치며, 게아르 산을 향해서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는 포식이불족발의 귓가로.

-엘리자베스:불법 침입자 말인데, 플레이어 맞는데?

조카의 예상치 못한 귓속말이 들려온다.

-포식이불족발:뭐? 플레이어라고? 숫자가 수백 명은 돼?

최소 10,000위권 랭커 수백 명이 함께 움직이지 않은 이상 던전이 모조리 파괴당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짧다는 게 납득되지 않는다.

당황하는 포식이불족발에게 엘리자베스가 대답해 주었다.

-엘리자베스:아니, 한 명.

-포식이불족발:농담을 할 때가 아니……!

-엘리자베스:아이디는 아그너스야.

-포식이불족발:뭐라고!!

포식이불족발의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던전을 광속으로 돌파한 침입자의 정체가 고작 한 명의 플레이어였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 아니다.

천하의 미친놈이 내 조카와 일대일로 대면하게 되었다는 부분이 절망적이었다.

-포식이불족발:눈 감고 귀 닫아! 그 미친놈하고 상종하지 마라!!

얼굴이 하얗게 질린 포식이불족발이 소리쳐 봤지만 소용없었다.

뒤늦게 시작된 사춘기인지, 새내기 대학생인 조카의 반항기는 매번매번 삼촌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상대방이 당신의 귓속말을 차단하였습니다.]

“빌어먹을! 아그너스 이 개새끼, 내 조카한테 손대면 죽여 버린다!!”

악귀처럼 일그러지는 포식이불족발의 얼굴로부터 주체할 수 없이 큰 분노가 표출되고 있었다.

블러드 카니발과 광룡의 알을 잃었던 그날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분노였다.

***

“따로 절차를 밟지도 않고 불법 침입을 하다니요. 유명하신 분께서 이런 식으로 폭력적으로 행동해도 되나요?”

손가에 식은땀이 번진다.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애써 태연한 척 노력했다.

이곳은 자신의 공방.

장인된 도리로서 당당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절차를 밟으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에 말이야.”

저벅, 저벅, 저벅.

아그너스가 천천히 한 걸음, 두 걸음씩 가까이 다가왔다.

소문과 달리 광소는 없었다.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단지 사나웠다. 마치 맹수처럼.

“뭐, 뭔가요?”

아그너스가 점차 가까워지자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태연할 수 없었다. 조금씩 뒷걸음치는 그녀에게.

“이거.”

아그너스는 붉은 돌을 건넸다. 세공 과정만 거치면 루비보다 아름다운 보석이 될 법한 돌이었다.

하지만 그 돌의 정체가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본 엘리자베스는 결코 아름답다는 감상을 꺼내지 못했다.

“생명의 돌……!”

생명의 돌.

활력이 느껴지는 이름이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이 돌의 정체는 끔찍한 것이었다.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은 젊은 처녀의 심장에 666개의 영혼을 봉인시켜야 비로소 완성시킬 수 있는 살상의 상징, 그것이 바로 생명의 돌이었다.

“역시 알아보는군. 너라면 이걸 세공할 수 있겠지?”

질문하는 아그너스의 눈빛에는 기대와 희망이 깃들어 있었다.

간접적으로 들어왔던 아그너스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되는 눈빛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걸 세공해서 어쩌려는 거죠? 자수정 방패와 붉은 거울까지 모아 고위 대악마라도 소환할 작정인가요?”

“아니. 그깟 시시한 일에나 쓰려고 개고생을 해 온 게 아니야.”

아그너스는 즉각 부정했지만 엘리자베스는 믿지 못했다.

“그게 아니면 무슨 용도로 사용하려고요?”

꼬치꼬치 캐어물은 것이 실수였다.

아그너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덥석! 엘리자베스의 멱살을 움켜쥔 그의 금안에 노여움이 깃들었다.

“너는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거부권은 없어. 네가 내 의뢰를 받아 줄 때까지 평생토록 쫓아다니면서 괴롭힐 테니까.”

“예절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아그너스의 난폭한 언행에 분노를 표출하던 엘리자베스가 멈칫했다. 자신의 멱살을 붙잡고 있는 아그너스의 손에 딱히 큰 힘이 실리지 않았음을 눈치챈 까닭이다.

“당신…….”

인간이 이토록 슬픈 얼굴을 할 수 있는 생물이었던가?

엘리자베스가 아그너스의 낌새에 의문을 품게 된 그때.

“너 이 개새끼가!!”

던전 입구 쪽에서부터 한 사내의 포효가 들려왔다.

포식이불족발이었다.

“그 아이한테서 당장 손 떼!!”

[던전에서 당신은 강해집니다!]

검을 뽑아 든 포식이불족발이 그대로 아그너스에게 쇄도했고, 아그너스는 예의 광소를 터뜨렸다.

같은 시각.

“야.”

불렛의 안내를 따라서 이동하던 그리드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벌써 몇 시간째 같은 장소가 반복해서 보이기에 결계에 당한 건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결계 따위는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 설마 길치야?”

“…미안하다.”

“…….”

“너무 걱정 마. 금방 도착할 거야. 아마도.”

“…….”

그리드는 내심 놀랐다.

지독한 길치인 탓에 사냥터 이동이 수월하지 못했을 불렛이 네크로맨서 랭킹 2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감탄이었다.

만약 불렛이 길치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네크로맨서 랭킹 1위는 불렛이 아니었을까?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서, 그리드는 불렛과 함께 다시 길을 걸었다.

그리고 한참 후, 또 같은 장소에 도착했다.

“…….”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지금 그리드는 허투루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길을 걸으면서 계속 속옷을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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