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0권 - 13화
쿠워어어어어어어-
쿵-----!!
세눈박이의 계곡.
크라우젤이 그리드에게 좋은 사냥터라고 추천해줬던 <결계의 숲(세계수의 숲)> 이후 새롭게 발견한 최고의 사냥터였다.
그곳에서 몇 달을 틀어박힌 채 눈 3개 달린 거인들과 싸워온 크라우젤이 드디어 목표를 달성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축하합니다! 300레벨을 달성하여 주력 능력치들이 3차 각성을 맞이하였습니다!]
[체력 1당 생명력 수치가 25, 방어력 수치가 0.9로 상향 조정 됩니다.]
[근력 1당 생명력 수치가 7, 공격력 수치가 0.6으로 상향 조정 됩니다.]
[지력 1당...]
“후....”
끓어오르는 힘이 느껴진다. 바로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자신이 된 감각이다.
벌써 2번째 달성한 위업에 들뜰 만도 하건만, 크라우젤은 침착한 표정으로 심호흡하며 눈을 감았다.
“.....”
머릿속에 과거가 그려진다.
3대 공격 패시브 스킬 중 하나인 <비장(飛將)>을 얻고자 7악성 퀘스트를 진행 중이던 크라우젤은 ‘붉은 현자’가 있다는 깊은 산골을 찾아갔다.
그리고 작은 오두막 앞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사내를 만났다.
하스터.
옛 영광의 주인공.
붉은 현자는 병들어 지친 상태이니 그냥 물러나라는 그의 권고를 크라우젤은 듣지 않았다.
붉은 현자를 만나야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과 하스터와 검을 맞대게 되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아직 천외천이라고 불리던 시절의 크라우젤이 패배한 것이다.
검성으로 전직하고 갓 200레벨을 넘겼을 뿐인 크라우젤은 하스터를 꺾을 수 없었다.
온갖 무기를 사용하는 한편 무기를 스왑할 때마다 얼음의 장막을 소환하는 하스터의 전투 방식은 독특하고 창의적이었다. 예측이 불가능한데다가 쾌속은 기본이어서 크라우젤의 타고난 혜안과 초감각이 몇 번이나 파훼 당했다.
반면 크라우젤의 변칙성은 통하지 않았다. ‘소리’를 토대로 공격의 방향을 읽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하스터의 움직임은 과거의 그가 어째서 게임계의 왕이라고 불렸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지금은?’
크라우젤은 확인하고 싶었다.
300레벨을 달성하고 스탯이 3차 각성을 맞이한 지금, 200레벨 당시와는 비교도 안 될만큼 강해진 자신은 과거의 하스터를 상대로 과연 어디까지 싸울 수 있을까?
“.....”
눈 감고 있는 크라우젤의 머릿속에 산골 깊은 곳 오두막이 펼쳐진다. 하스터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크라우젤은 싸웠고, 또 한 번 패배했다.
“.....구시대의 지존이라.”
유래 없을 잔재에 맞서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의 지존이라는 타이틀부터 쟁취하는 게 우선 아닐까?
하지만 이미 그리드에게 빼앗긴 그 타이틀을 과연 다시 빼앗아올 수 있을까?
다시금 눈을 감은 크라우젤이 이번에는 머릿속에 그리드를 그려보았다.
한참 후에야 다시 눈을 뜬 그의 눈동자에는 한참동안 잊고 있던 투쟁심이 깃들어 있었다.
‘패배에 익숙해질 수는 없지.’
하스터, 그리드.
그리고 예상컨대 아그너스까지.
현재의 나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실력자가 무려 3명이나 있다.
마음에 새기는 크라우젤, 좌절하기는커녕 도리어 의욕이 끓어 넘친다.
***
“저항하는 자들은 모조리 포박해!! 위협하지 마! 죽이지 마라!! 상대는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없는 민간인임을 명심해라!!”
오아시스 소대가 산기슭 아래의 작은 마을에 진입했다. 말이 마을이지 화전민촌이나 다름이 없었다.
오아시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필이면 추운 계절인 탓에 마을주민 모두가 굶주린 상태 같았다. 실제로 마을 창고에는 식량이 거의 없었다. 소량의 말린 고기와 끓여먹을 짐승 가죽이 전부였다.
‘미안하다.’
템빨왕 그리드의 도움으로 제국의 침공을 막아낸 발할라는 이후 지금까지 1년 동안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해왔다.
앞으로 계속 될 제국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그 탓에 발할라 또한 상당히 궁핍해졌다. 자체적인 내정 시스템으로는 경제 발전 아니, 경제 유지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당신들의 나라를 정복할 수밖에 없어.’
발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울티나 왕국은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만약 울티나 왕국이 제국의 침략에 동조할 경우 발할라는 고립된 채 힘든 싸움을 해야만 했다.
발할라가 일으킨 이번 정복 전쟁의 목적은 울티나 왕국을 완전히 집어삼킴으로써 후방의 위협을 없애는 동시에 울티나의 경제를 그대로 흡수하는 것에 있었다.
그 과정에서 굳이 약탈이 필요할까?
심지어 이처럼 작은 마을을?
어차피 나라를 통째로 집어삼킬 계획이면서, 굳이 백성들의 반감을 사야할까?
최초의 오아시스는 의문을 품었으나, 아레스가 지닌 <약탈> 스킬의 위력을 보고는 의심을 거두었다.
[오아시스 소대가 <렌 마을>의 식량을 약탈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군왕(君王)의 도량> 효과가 발동합니다!]
[군왕 아레스가 약탈당한 마을의 주민들에게 살 길을 제시합니다! 약탈당한 마을의 주민들이 빼앗긴 식량보다 더 많은 식량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약탈당한 마을의 주민들이 군왕 아레스에게 깊은 존경심을 품습니다!]
[마을을 약탈한 오아시스 소대의 사기가 크게 오릅니다! 사기가 유지되는 동안 모든 능력치가 5퍼센트 상승합니다. 스태미나 소모 속도가 50퍼센트 하락합니다. 효과 <용기>를 얻습니다. 어떤 강적을 만나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우와아아아아!!”
오아시스를 비롯한 병사들 모두가 전율하며 환호했다.
현재 유니크 등급에 머물고 있는 아레스의 성장형 히든 클래스 <군왕>이 발휘하는 힘은 모든 종류의 클래스를 통틀어서 가장 특별했고 독보적이었다.
오아시스에게는 깊은 믿음이 있었다.
아레스 아래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다보면 무패왕의 후예로 전직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었다.
‘그래서 나 또한 아레스 님과 그리드 님 같은 주인공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날이....’
1년 아니, 5년.
아니다, 10년 후라도 좋다.
영광의 그날이 올 때까지 굳건히 견뎌낼 자신감이 오아시스에게는 있었다. 모든 면에서 평범한 오아시스가 그나마 자랑할 구석이 바로 끈기와 집념이었으니까.
“너희들은 누구지?”
다짐하며, 병사들을 통솔하여 마을의 식량을 운반하고 있던 오아시스가 갑자기 나타난 두 사내를 발견하고 경계한다.
장난으로 만든 듯한, 허술한 군모를 깊이 눌러쓰고 있는 두 명의 사내, 얼굴과 이름 모두 가려진 상태였다.
처음에는 동네 청년들인가 싶었으나 한 명의 차림새가 범상치 않다.
허름한 망토 사이로 언뜻언뜻 엿보이는 갑주의 상태가 썩 고급지고 빼어난 까닭이었다.
수수께끼의 사내들이 대답했다.
“일개 병사다.”
“....? 나, 나도.”
“.....”
어디를 봐서 병사라는 거지?
한 명은 기사급의 무장 상태이고 다른 한 명은 산골 사냥꾼이나 입을 법한 허름한 가죽갑옷을 걸치고 있는 상태인데?
눈살을 찌푸린 오아시스가 병사들에게 눈짓하자 창칼을 뽑아 쥔 병사들이 두 사내를 에워쌌다.
“지나가던 방랑 기사와 마을 청년이 의기투합해서 정의감을 불태우는 것이라면 아서라. 발할라의 강병들은 어중이떠중이가 상대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다. 지금이라도 검을 거두면 못 본채하고 떠나주마.”
이제 오아시스는 발할라의 얼굴 중 하나였다.
발할라의 강군이 남들에게 업신여겨지지 않게끔 위엄을 갖춰야할 필요가 있었다.
서슬퍼런 눈빛으로 경고하는 오아시스에게 사내 중 한 명이 소리쳤다. 가죽갑옷을 걸친 사내였다.
“강군을 자처하면서 작은 마을을 수탈한다고? 너희 발할라가 완전히 양아치 집단이었구나!”
“양아치....? 그 말을 물러라.”
“반응 보니까 뜨끔한가보지?”
“놈....!”
꽈드득!
오아시스가 이를 가는 것이 신호였다.
위대하신 국왕 아레스가 건국한 우리 발할라를 양아치 집단으로 몰아가다니?
이미 분노가 승천한 병사들이 일제히 청년들을 공격했다.
사기 진작 효과로 강화 된 병사들의 공격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아레스 밑에서 훈련 받아온 병사들의 진형은 바위처럼 견고해서 빈틈을 찾기 어려웠고, 한 점을 찌르는 창술은 날카로웠다.
“호오.”
아스모펠이 감탄했다.
그는 설마 ‘진짜’ 일개 병사들이 이 정도 수준까지 단련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템빨로 무장한 템빨국의 강병들을 직접 육성한 장본인 아스모펠이 봤을 때는 발할라의 병사들이 아무리 강해봤자 템빨국 병사들 아래였다.
덥썩!
동시에, 각기 다른 궤도로부터 쇄도해오는 다섯 자루의 창을 회피하며 그중 한 자루의 창대를 손으로 붙잡아버리는 아스모펠.
그가 손에 쥔 창대를 그대로 힘껏 휘두르자, 병사 한 명이 창대와 함께 날아가 아군의 진형을 무너뜨린다.
한편 병사들의 공격을 모조리 얼음 장막으로 막아낸 하스터는 균열이 발생한 얼음 장막에 마력을 불어넣어서 그것을 총탄처럼 쏘아내고 있었다.
푹!
푸푸푸푸푸푹!
“크아아아악!!”
얼음 총탄에 갑옷이 꿰뚫린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눈 깜짝할 사이에 병사들의 진형이 붕괴되자 오아시스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만한 실력자들이 어디서?’
병사들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저들의 실력이 부각된 것일까?
일개 병사를 자처하는 수수께끼 사내들의 실력은 거의 그리드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본래의 오아시스였다면 본능적으로 도망치고도 남았을 정도로 상대방들이 강력했다.
하지만 지금의 오아시스는 발할라의 장수였다. 병사들을 버리고 퇴각할 수 없었다. 또한 이로운 효과 <용기> 때문에 겁도 상실한 상태였다.
“이놈들!!”
말고삐를 비틀며, 참마검을 뽑아 쥔 오아시스가 그대로 하스터에게 돌진했다.
명마에 귀속 된 ‘돌진’ 스킬 덕분에 오아시스의 속도는 무척 빨랐고 기세가 맹렬했다.
하지만 하스터에게 위협을 줄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푹!
끼히히히힝!!
각궁을 꺼낸 하스터가 접근해오는 말의 앞다리에 화살을 적중시켰다.
“뭣....!”
오아시스의 시야가 빙글 돈다.
낙마하며 허공을 부유하는 그에게 어느새 다가온 하스터의 검이 꽂혀오고 있었다.
무패왕의 낡은 칼집이 조소한다.
-이제는 아무에게나 목숨을 위협받는구나. 그대에게는 시대의 강자들을 상대할 자격이 없다. 그대와 짐의 관계도 오늘로써 끝이겠군.
순간.
“그건....!”
이를 악 문 오아시스가 허공에서 허리를 비틀었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에 회피동작을 취해야한다고 판단하고, 수행한다?
평소의 오아시스의 집중력과 피지컬로는 결코 선보이지 못했을 컨트롤 솜씨였다.
“싫다!”
포효하며, 하스터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회피한 오아시스가 그대로 추락, 우당탕탕탕! 지면에 뒹굴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더 이상 지고 싶지 않아!!”
주인공이 되고 싶다.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 또한 큰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다.
간절한 바람을 품고 검을 고쳐 쥐는 오아시스의 얼굴에 깃든 결사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상대가 나빴다.
아니, 타고난 재능이 나빴다. 그로 인해서 쌓아올린 실력의 수준이 너무 부족했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법이다.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는 없었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쿨럭...?!”
“오아시스님!!”
갑자기 알림창이 떠오른다 싶더니 병사들의 절규가 들려온다.
고통은 뒤늦게 찾아왔다.
“....?”
떨리는 시선을 내려 본 오아시스는 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 복부를 꿰뚫고 나온 이 창은 뭐지?
내가 언제, 누구에게 당한 거지?
바들바들.
간신히, 천천히 고개를 돌려본 오아시스가 가죽 갑옷을 입고 있는 군모 사내와 시선을 마주친다.
하스터였다.
푹!
오아시스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후방을 점령하고 창을 찔러 넣었던 하스터.
그가 창을 회수하지 않고 그대로 새로운 검을 뽑아 재차 오아시스를 찌르자, 오아시스의 몸이 서서히 잿빛으로 산화하기 시작했다.
[사망하였습니다.]
[패배로 간주됩니다.]
[무패왕의 후예가 될 자격을 상실합니다.]
[무패왕의 음성이 아련히 들려옵니다.]
-근성은 마음에 들었다.
[히든 전직 퀘스트 <무패왕의 후예>가 기술 습득 퀘스트 <십만대적검>으로 변경됩니다.]
-패배자에게는 패배자 나름의 길이 있을 터. 조금 더 지켜봐 볼까?
레전드리 전직 퀘스트를 획득하기 위한 조건은 무척 까다롭다. 의도적으로 노린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플레이어가 기껏 힘들게 쟁취한 기회를 단 한 번의 실패로 영영 사라지게 만들 정도로 S.A그룹은 악랄하지 않다.
새로운 기회. 아니, 보다 현실적인 기회를 얻게 된 오아시스가 그대로 잿빛으로 산화하는 그때 하스터는 아스모펠을 마주보고 있었다.
“은혜를 입었으니 갚아야겠군요. 당신은 전대 적기사들을 찾아다니는 거겠죠? 제가 돕겠습니다.”
콰앙! 쾅!!
저 멀리 왕도로부터 연신 폭음이 들려온다.
발할라의 정복 전쟁이 본격적인 단계에 돌입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시각, 템빨국.
“강시 제작법을 배우고 싶어서 찾아왔다.”
“배워서 어쩌고 싶은데?”
“내게 새로운 기회를 준 은인과 나란히 함께할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싶다. 나는.... 나는 친구를 원해. 서로를 이용만 하려는 관계에는 이제 지쳤다.”
“잘 찾아왔어.”
그리드는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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