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706화 (701/1,794)

템빨 40권 - 12화

언더 워치, 레인보우 세븐, 언리미티드 배틀그라운드.

무려 7년 10개월 동안 전 세계 게이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FPS 게임 목록이다.

특히 언리미티드 배틀그라운드(이하 언배)는 출시되고 3년 동안 FPS 게임 순위 1위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

언배는 e스포츠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대중은 언배를 플레이하는 게이머들의 화려하면서도 정밀한 컨트롤 솜씨에 열광했다.

그중에서도 대중에게 가장 큰 존경과 사랑을 받은 게이머가 바로 하스터다.

그는 전설이었다.

언더 워치, 레인보우 세븐, 언리미티드 배틀그라운드 3개 게임 전부에서 최고의 선수로 꼽혔다.

극강의 컨트롤 솜씨는 기본이오, 한 자리에 몇 분이고 숨죽인 채 적을 기다리는 인내력과 체력, ‘소리’를 듣고 대국을 읽는 사운드 플레이 능력이 독보적인 선수였다.

미국 언론들은 그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드디어 임X환, 페이X급의 전설적인 프로게미어가 탄생했다며 열광했다. 타국 언론들 또한 부정하지 못하고 인정했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던 하스터의 왕좌는 허무하게 끝이 났다.

Satisfy의 출시 때문이다.

가상현실게임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더 이상 기존의 게임에 열광하지 않았다. 시선 자체를 돌리지 않았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Satisfy에 집중했고, 기존의 e스포츠는 커다란 침체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스터는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은퇴는 기존 게임계의 완전한 몰락을 선고하는 셈이나 다름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했다. e스포츠협회는 하스터에게 남아 기존의 게임계를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하스터는 은퇴를 번복하지 않았다.

그 또한 Satisfy에서 새로운 미래를 엿보았기에.

***

“정말로 오래 기다렸습니다.”

적기사단, 배신자, 그리고 아스모펠.

흩어진 낱말들을 잇는 하스터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인고의 시간이 얼마나 길었던가?

현실 시간으로 무려 2년이다.

감회에 젖은 하스터가 Satisfy를 처음 접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인지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약한 육신.

스탯을 올려서 육신을 단련해봤자 극복하기 어려운 아이템 시스템.

직업이라는 틀에 묶여있는 캐릭터의 자체적인 한계.

FPS와는 전혀 다른, 타고난 피지컬보다는 외적인 요소가 너무 많이 개입하는 Satisfy에서 하스터는 고심 끝에 판단했다.

자신의 타고난 피지컬을 철저히 단련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히든 클래스>가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단지 강한 직업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저등급 클래스라도 좋았다.

하스터가 원하는 것은 다양한 전투방식을 구사하며 온갖 역할군을 수행할 수 있는 클래스였다.

자신의 인지를 곧이곧대로 이행할 수 있는, 그런.

“기다렸다?”

옛 친구의 제자를 자처하는 이가 자신을 환영하자 아스모펠은 경계했다. 불길함을 느꼈다.

자신에게 배신당하고 지옥 같은 삶을 살아왔을 친구의 제자다.

그가 자신을 기다렸을 이유야 뻔했다.

“스승의 복수를 위함인가?”

과거의 나였다면 달갑게 복수를 받아들였으리라.

제발, 부디 죽여 달라고 부탁했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못한다.

섬기는 왕이 있고, 왕께서 명령을 내리셨다.

왕명을 완수하기 전까지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이다.

쓴 표정으로 질문하는 아스모펠에게 하스터가 반문했다.

“스승님의 이명은 붉은 현자 아니었는지?”

“....?”

“현명하신 저의 스승님께서 당신의 배신에 얽힌 흑막을 눈치 채지 못하셨을 리 없잖습니까?”

“.....!”

움찔.

깜짝 놀라는 아스모펠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가 이내 파르르 떨린다.

“윈프레드는 모든 진실을 알고 있던 것인가.... 그런가....”

기쁨과 회한의 눈물이 아스모펠의 눈가에 맺히는 그때.

끼릭-!

“....!!”

갑자기 작은 각궁을 꺼낸 하스터가 아스모펠에게 화살을 쏘았다.

반응한 아스모펠이 회피했고, 각궁을 회수하고 장검을 뽑아 쥔 하스터는 그대로 접근해서 연격을 날렸다.

까앙-!!

“이 무슨 짓인가!”

윈프레드는 진실을 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복수 또한 언급하지 않았다.

한데 다짜고짜 공격하다니?

혼란에 휩싸인 아스모펠의 눈동자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는 반면 하스터의 눈동자는 깊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복수하려는 게 아닙니다. 단지 확인을 하고 싶을 뿐.”

“확인? 무엇을?”

“때가 되었는가.”

“때....?”

“왕명(王名)을 부활시킬 때.”

하스터.

한때 전 세계 모든 게이머들을 열광시켰던 패왕의 이름, Satisfy라는 최고의 무대에 올려놓아도 부족함이 없는가?

하스터는 확인이 필요했다.

확신도 없이 무대에 올랐다가 과거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싶지 않았다.

기존의 강자들, 특히 크라우젤과 그리드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한 도전이 아니다.

그저 하스터 자신만의 싸움일 뿐.

<적기사단의 적통>

난이도:전직 퀘스트

등급:SS

당신은 전대 적기사단의 첫 번째 기사, 붉은 현자 윈프레드의 모든 기술과 지식을 전수 받았습니다.

하지만 윈프레드의 제자임을 자처할만한 자격이 충분한지는 의문입니다.

전대 적기사와 결투하여 승리하고 자격을 증명하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전대 적기사단과 결투하여 승리.

*전대 적기사단의 위치는 윈프레드가 죽기 전 남겨둔 힌트를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유니크 클래스 <붉은 현자>의 모든 스킬 개방.

“왕의 이름....?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화르륵!

허리에 꽂혀온 검을 막아내고 반격하는 아스모펠의 검 끝에 화염이 맺혔다.

하지만 하스터는 당황하지 않았다. 윈프레드에게 배운 마법 <빙결의 춤>의 묘리를 이용해서 얼음의 장막을 만들어내더니 열기를 막아냈다.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얼음 장막 사이사이로 희뿌연 증기가 피어오른다 싶다니.

푸욱-!

증기를 꿰뚫고 솟구쳐 올라온 창끝이 아스모펠의 복부를 찔렀다.

아슬아슬하게 회피한 아스모펠과 공격 적중에 실패한 하스터 두 사람 모두 경악했다.

‘마법과 창칼을 동시에 쓴다고? 이자는 윈프레드의 재림 그 자체인가....!’

‘크라우젤조차 반응하지 못했던 콤보를 피해?’

츠칵!

내지른 창을 회수하려는 하스터의 뺨을 아스모펠의 검이 스쳐지나간다. 창을 회수하기를 포기, 그냥 버리고 회전하면서 입는 피해량을 최소화시킨 하스터가 반격하려다가 멈췄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귓가로 파공성이 들려온 까닭이다.

시야의 사각을 파고드는 아스모펠의 현란한 검술이 어금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서걱!

“....!!”

하스터가 황급히 뒤로 물러나자 허공을 베어버린 아스모펠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건 윈프레드의 기술이 아닌 거 같은데?”

“저 자신이 쌓아올린 기술이라고 해두죠.”

“.....”

아스모펠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멋진 수염자국을 자랑하는 눈앞의 사내가 워낙에 실력이 빼어나서 승산이 없기 때문에?

아니다. 실력은 인정하지만 승산이 없다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아스모펠이 신경 쓰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이 소란 속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니....’

하스터가 등지고 서있는 작은 오두막 안에서부터 도무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감춰진 것인가 싶었으나, 이제는 없는 것인가 싶다.

울컥, 솟구치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른 아스모펠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윈프레드는 외출 중인가?”

“아니요.”

“하면.....”

“스승님은 이미 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제국에게 친구와 가족을 모두 잃고 본인은 쫓기는 신세가 되셨으니.... 지난 수 년 동안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치셨죠.”

“그런.....”

모두 나 때문이다.

내가 모두를 배신한 탓에!!

대해보다 깊은 죄책감에 잠식당한 아스모펠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새로운 불안감에 휩싸였다.

자신과 피아로보다 견고한 정신력을 자랑했던 윈프레드조차 이 지독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떠난 것이다. 과연 다른 동료들은 무사할까?

어쩌면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게 아닐지.....

“크흑....!”

아스모펠이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이를 악 물고 오열하는 그를 마주하고 선 하스터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난처하군.’

지난 몇 년을 스승과 한집에 살았기 때문일까?

하스터는 NPC와 인간의 차이를 느끼기 어려웠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오열하는 아스모펠에게 감정이 이입되고 말았다.

‘얼마나 괴로울까.’

상대가 잘못 됐다.

전대 적기사단의 부단장이었던 아스모펠.

실력을 테스트하기에 딱 좋은 상대라고 생각하며 기뻐했건만, 그의 입장을 고려해봤을 때 그리 좋은 상대도 아니다.

‘조금 기다려줄까.’

윈프레드를 추모하며 사죄하는 아스모펠을 눈앞에 둔 채, 씁쓸한 표정의 하스터가 무기를 거두는 그때였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앙!!

“....!!”

산이 흔들렸다.

저 멀리, 왕도로부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전쟁?”

아니, 무슨 다짜고짜. 그것도 하필이면 왜 이런 중요한 타이밍에?

눈살을 찌푸리는 하스터의 귓가로 북적거림이 들려온다.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마을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였다.

“식....! 을....! 내....!”

“안....!”

“저항....! 모조....! 죽....!”

“꺄아아아아아!!”

대화 내용은 명확히 들려오지 않으나, 끔찍한 비명 소리만큼은 확실하게 전달된다.

하스터의 뇌리에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스쳐지나갔다.

겨울이 찾아오면 자주 신세졌던 나무꾼.

여윈 스승님을 걱정하며 두터운 가죽옷을 챙겨주던 옷가게 아줌마.

눈이 마주칠 때마다 꾸벅꾸벅 인사하던 꼬맹이들.

수줍음을 많이 타던 여관 주인의 딸.

모두 그래픽덩어리로 치부되는 NPC일 뿐이다.

하지만....

“제길!”

하스터는 방관할 수 없었다.

그가 마을 사람들에게 느꼈던 따스함은 진짜였기 때문이다.

“저건....!”

결국, 아스모펠을 내버려둔 채 그대로 산기슭을 따라 내려가던 하스터가 제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마을을 약탈하고 있는 군대의 깃발에 거대한 성이 그려져 있었다.

플레이어가 세운 두 번째 나라, 발할라를 상징하는 국기였다.

‘하필이면!’

하스터는 더 이상 산을 내려갈 수 없었다.

스승을 만나기까지 2년, 그리고 스승을 만난 후에 또 2년.

그가 총 4년 동안 쥐 죽은 듯이 지내온 이유는 확고했다.

몰락한 게임계의 구 왕자가 새로운 게임에서 화려하게 부활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이는 단순한 명예욕이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자신을 사랑해주고 아껴주었던, 그리고 어쩌면 아직도 자신을 기다려주고 있을 수많은 팬들을 위한 깜짝 선물이기도 했다.

한데 이제 와서 NPC 몇 명 구하겠답시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지난 4년을 부정하는 꼴이다.

“하필이면 발할라....”

나섰다가는 플레이어들의 눈에 띄게 될 테고 그들 중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볼 수도 있다.

망설이는 그의 곁으로 아스모펠이 다가오더니 낡아빠진 군모를 건네주었다.

작대기 하나가 그려진 군모였다.

정작 아스모펠 본인은 작대기 두 개가 그려진 군모를 눌러쓰고 있었다.

“....아!”

생뚱맞게 군모를 건네다니?

이해하지 못하고 두 눈을 깜빡이던 하스터가 뒤늦게 깨닫는다.

군모를 깊이 눌러 쓴 아스모펠의 얼굴과 이름이 가려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배려인 것이다.

“신세집니다.”

고개 숙인 하스터 또한 깊이 군모를 눌러 썼다.

그리고 그동안 애써 외면해왔던 속세에 등장한 그는....

“너희들은 누구냐?”

“일개 병사다.”

“....나, 나도.”

한 명의 병사가 되었다.

발할라의 병사들을 인솔하여 마을을 약탈하고 식량을 확보하고 있던 오아시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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