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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704화 (699/1,794)

템빨 40권 - 10화

‘역시, 모조리 다 죽일 걸 그랬나?’

베라딘, 드루, 타게오, 다일, 에이스토, 킹드래곤 등등.

라인하르트를 침략해서 대장장이들과 병사들을 학살했던 임모탈 명단이다.

조금 전, 그리드에게 목을 내밀었던 네크로맨서 중에는 당연히 그들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그들 모두를 죽이지 못했다.

이미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지난 일을 후회하는 눈치가 강했던 그들의 목숨을 빼앗기가 영 꺼림칙했던 것이다.

키르의 경우와는 달랐다.

키르는 존재 자체가 위협이었고 빼앗을 수 있는 게 많은 반면, 이미 아그너스에게 버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임모탈은 나약한 존재들이었고 빼앗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대표 격인 드루만큼은 묵과할 수 없어서 베었다지만.....

“....쯧, 역시 다 죽였어야.”

먼저 떠난 칸에게 미안하다.

쓸데없는 동정심으로 잠시나마 나약해졌던 스스로가 원망스럽다.

꽈드득, 자신을 책망하며 이를 가는 그리드의 눈빛에 다시금 강한 살의가 깃들었다.

이 살의, 오로지 한 명에게 향한다.

‘베라딘....!’

지하수로를 향하는 그리드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게 만들다니, 서로에게 손해라는 거 모릅니까? 생각이 없어요? 이래서 저급한 자들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베라딘은 불렛을 마치 벌레처럼 내려 보았다. 혐오가 느껴졌다.

상처투성이 불렛의 눈빛이 떨린다.

“제국에게 이민족 학살 퀘스트를 받고 고뇌하던 베라딘, 동료들을 아끼던 베라딘, 아그너스에게 충성하던 베라딘의 모습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거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거짓 연극에 불과했다.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고 손쉽게 접근해서 관찰할 자격을 얻고자, 대부분 유형의 사람들이 호감을 느낄만한 이상적인 인간을 연기했을 뿐이다.

“.....”

작게 한숨 쉬는 불렛.

울컥하는 마음을 감춰보려 하지만 쉽지가 않다.

그의 눈가가 경련하는 것을 목격한 베라딘이 콧방귀 뀌었다.

“당신, 그러고 보니 언젠가 제게 말했었지요? 마치 오랜 친구 같다고. 당신이 그렇게 느끼게끔 제가 유도했던 겁니다. 임모탈 초기에 인재를 끌어 모으기 위해서는 당신의 명성이 필요했었으니까.”

“.....”

“뭐, 당신에게도 지난 일이겠죠. 당신이 여전히 저를 친구로 생각했다면 제 발목을 붙잡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황비 마리의 궁전에서 혼자만 살아보겠답시고 제 이름을 팔아먹는 짓도 하지 않았겠죠. 언제부텁니까? 언제부터 저를 의심했던 거죠?”

“....네가 아그너스 님의 저의를 알아보지도 않고 멋대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렇군요. 제가 부주의했군요.”

힐끗, 베라딘이 반파 된 독귀에게 눈짓하자 독의 숨결을 토해낸 독귀가 단도를 높이 치켜들었다.

불렛의 데스나이트와 사투를 벌인 직후인지라 몸 곳곳에 상처가 있었지만 움직임에는 큰 무리가 없어보였다.

불렛은 랭킹 2위와 1위의 격차를 뼈아프게 체감해야만 했다.

‘직업군 내의 랭킹 격차도 이렇게 심한데....’

모든 플레이어를 통틀어서 가장 강한 지존 그리드를 상대로 몇 번이나 도전해왔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미쳐도 단단히 미친 짓이다.

‘아그너스 님께서 여전히 우리의 곁을 지켜주셨다면 또 모를까....’

아그너스와 처음 만났던 그날을 회상해본다.

어찌나 강하고 멋졌던가.

홀로 언데드 대군을 이끌며 ‘이것이 진정한 네크로맨서다.’라고 외치는 듯했던 그의 모습, 지금 떠올려도 전율이 인다.

그에게 반해서 임모탈에 가입했고, 자신의 말이 곧 아그너스의 뜻이라고 외쳤던 베라딘을 신뢰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아그너스에게 있어서 임모탈은, 우리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그너스의 대변인을 자처했던 베라딘은 우리를 쓰다 버릴 패쯤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큭.....!!”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불렛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자신은 선망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었고, 같은 뜻으로 모인 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이 멋진 세상을 즐기고 싶었다.

그 바람이 이리도 큰 잘못이었나?

마음속으로 절규하는 그의 귓가로 베라딘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온다.

“더 독해졌어야죠. 마음에 어둠을 품었어야죠. 그랬다면 지금쯤 차디찬 바닥에 누워있는 것은 당신이 아닌 내가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

“잘 가세요, 순수한 열정을 품었던 재미없는 사람.”

푸욱!!

독귀의 단도가 불렛의 가슴을 찌른다.

불렛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일격이었다.

“아....”

큰 데미지를 입고 중독 된 불렛의 시야가 흐려졌다. 그의 마음속에 어둠이 싹터 올랐다.

헛된 꿈을 좇았던 지난날의 자신에 대한 분노다.

나의 동경에 응하지 않은 아그너스는.... 원망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남을 돌아볼 의무 따위 없었으니까.

“역시 재미없네요.”

활활 타올랐다가 다시금 사그라지는 불렛의 눈빛을 읽은 베라딘이 칫, 혀를 차며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불렛은 차디찬 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죽음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4,300의 중독 데미지를 입습니다.]

[물약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해독제가 듣지 않습니다.]

[4,300의 중독 데미지를....]

시야가 붉게 점멸한다.

생명력 게이지가 바닥으로 도달한다.

의욕이 사라진다.

빈 껍데기로 전락해버린 불렛의 귓가로.

“잘 봤다.”

낯설지 않은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그너스의 음성처럼 강한 힘이, 꺾이지 않을 듯한 의지가 깃든 음성이었다.

단, 아그너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온화하다.

“그리....드....”

“혹시라도 강시에 대해서 관심 있으면 연락해. 갈 곳 없는 인재는 언제나 환영이다.”

저벅.

그리드는 죽어가는 불렛을 그냥 지나쳐갔다. 불렛이 제법 마음에 든다고 해서 굳이 살려주지는 않았다. 아직 그는 임모탈이었으니까. 그저 기회를 줄 뿐이다.

쏴아아아아아....

솟구쳤다가 흩어지는 잿빛 기둥을 배경 삼은 그리드, 그대로 지하수로로 향하는 입구에 진입한다.

***

“허억.... 허억....!!”

지하수로에 입장한 베라딘이 헐레벌떡 내달리고 있었다.

불렛을 조롱하며 보였던 오만과 여유는 온데 간데 사라졌다.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불렛에게 마무리 일격을 가하는 광경을 그리드가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모습을!

‘소름 돋는 놈!’

구경이나 하고 앉았다니?

나 따위는 언제든지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인가?

“그 같잖은 여유를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사실 베라딘은 아주 오래 전부터 페난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암굴왕>

왕의 칭호를 지닌 먼 옛날 과거의 강자가 페난 지하수로에 잠들어있는 것으로 추정됐기 때문이다.

상왕 키르에게 호출받았을 때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게 바로 운명인가 싶었다.

그렇다.

베라딘이 지하수로를 퇴각 루트로 삼은 이유는 단순히 은밀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뿐만 아니라 암굴왕의 시신을 얻으려는 계획도 숨어있었다.

그리드에게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독귀를 굳이 이번 전투에서도 사용했던 이유 또한 여기에 있었다. 독귀는 이제 버리는 패다. 망가져도 좋다.

베라딘은 이미 반파 된 독귀를 버림으로써 지배력을 확보한 뒤 암굴왕의 시신을 데스나이트로 만들 작정이었다.

‘이쯤일 텐데?’

곧 그리드에게 추격당할 거다.

놈이 도착하기 전에 서둘러야 된다.

초조해진 베라딘이 썩은 내가 진동하는 지하수로 곳곳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몸이 오물에 흠뻑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잠수까지 해가면서 ‘관’을 찾았다.

결과.

“이거다!!”

베라딘은 낡고 녹슨 철관을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암굴왕.

수백 년 전, 가우스 왕국의 지하에 비밀의 도시를 건설하고 힘을 쌓아 가우스 왕국을 정복하기 직전까지 갔다는 희대의 악당.

무한한 체력과 대지를 격동시키는 괴력을 겸비했다는 그가 현세에 부활한다.

끼익-

관을 열어 백골이 있는 것을 확인한 베라딘이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소리쳤다.

“데스나이트 독귀의 지배권을 포기!”

치이이익-

네크로맨서 전용 인벤토리 <시신함>이 열린다.

그곳에서 독귀의 백골을 꺼내 버린 베라딘이 암굴왕의 백골을 시신함의 빈 공간에 채워 넣었다.

“나 베라딘, 암굴왕을 지배하겠다! 암굴왕이여! 죽음의 기사가 되어 나의 충실한 종이 될지어다!!”

[레전드리 등급의 시신입니다.]

[지배력 스탯의 부족으로 인하여 암굴왕을 데스나이트로 만드는데 실패하였습니다.]

[칭호 <망자를 홀리는 이>의 효과로 지배력 스탯의 한계를 극복합니다.]

[암굴왕을 데스나이트로 만드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칭호 <왕을 아래에...>를 획득하였습니다.]

<데스나이트>

이름:암굴왕

레벨:361

*주인의 레벨이 너무 낮습니다. 암굴왕의 레벨과 모든 능력치가 약화 된 상태입니다.

근력:4,100▼ 체력:4100▼

민첩성:540▼ 지력:190▼

-보유 스킬 목록-

<약탈(A-)>, <붕괴시키는 검(A+)>, <나락으로 인도한다(S)>.....

....

...

“핫...! 크하하하하!!”

기대 이상이다.

독귀를 비롯해서 여태까지 거느렸던 그 어떤 데스나이트보다 강력하다. 높은 능력치는 물론이고 A급 이상의 스킬들이라니.... 이쯤 되면 아그너스의 데스나이트들과 비벼볼만 할 수도?

암굴왕의 확보에 성공한 베라딘이 광소를 터뜨렸다.

그리드에 대한 두려움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그에게는 여유가 충만했다.

뒤늦게 자신을 쫓아온 그리드를 마주보고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당신을 볼 때마다 허구적 독특성 이론을 상기하게 됩니다. 당신은 염치라는 게 없습니까? 자신 또한 남들에게 무수한 피해를 입혀왔고,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피해자를 낳고 있으면서, 왜? 본인은 단 한 번 피해 입은 것에 대해서 그토록 집착하고 과민하게 반응하는 겁니까?”

“....?”

백날 떠들어봤자 청자가 이해하지 못하면 무의미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리드에게 베라딘은 쉽게 풀어서 말해주었다.

“임모탈을 향한 당신의 증오와 복수극 말입니다. 필요 이상이라고요. 임모탈이 라인하르트를 한 번 침략한 게 그렇게까지 죽을 죄입니까? 당신 또한 수많은 침략을 자행해 왔지 않나요? 심지어 당신은 멀쩡히 존재하던 왕국을 멸망시키고 빼앗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놓고도 정작 자신은 멀쩡히 잘 살고 있으면서, 타인의 침략은 용납하지 않겠다? 용서하지 않겠다? 방어기제가 강해도 너무 강합니다. 당신, 찌질했던 과거의 기억에 지배당해서 그래요. 두 번 다시는 찌질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심리가 너무 강한 나머지 자신의 영역이 침범당하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죠. 정말이지 당신은 정점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제가 당신을 징벌하겠습니다. 당신을 위에서 끌어내리겠습니다. 피해의식에 찌들어있는 병신 따위가 설쳐대는 꼴, 언제까지고 지켜보고 있다가는 역겨워 토악질이 나올 것 같으니까.”

딱!

할 말을 끝낸 베라딘이 손가락을 퉁기자 데스나이트 암굴왕이 움직였다.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전신에 보랏빛의 오러를 두르더니 포효했다.

그리드는 아이템 합체를 전개하고 있었다.

쿠르르르르르르르릉!!

하나가 된 열망의 무아검과 벨리알의 지팡이가 기성을 토한다.

쏘아지는 마력에 암굴왕의 어깨가 날아갔고, 암굴왕이 휘두르는 검은 그리드의 실드를 부셨다. 하지만 그리드의 실드는 계속해서 생성되는 반면 암굴왕의 파괴는 수복되지 않는다.

“뭐.... 뭣이!!”

저 무한한 실드는 뭐란 말인가?

상식에 위반되는 능력을 대체 몇 개나 지니고 있는 거지?

허무하게 무너지는 암굴왕을 보고 경악하는 베라딘에게 그리드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걸로 내가 너를 몇 번째 죽이는 거였지? 까먹었으니까 처음으로 하자.”

“자, 잠깐....!”

푸욱-!!

“커억!!”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치명적인 피해를....!!]

....

...

[사망하였습니다.]

[★히든 퀘스트★ <환국의 백성(1)>의 조건 달성에 실패하였습니다. <환국의 백성(1)> 퀘스트가 소멸합니다.]

[환국은 더 이상 당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것입니다. 방문조차 허가하지 않습니다.]

[24시간 내에 2번 사망하여 강제 로그아웃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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