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703화 (698/1,794)

템빨 40권 - 9화

강한만큼 호전적이다. 본인의 힘에 도취되어 현명하지 못하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더 큰 것을 잃는 유형의 인물이다.

결단력이라는 미명 하에 표출하는 잔혹한 폭력성은 혐오감을 유발시킬 정도다. 사람들의 반감을 사기 딱 좋다.

여기까지가 그리드에 대한 키르의 평가였다.

당장은 강한 무력으로 군림할 수 있겠지만, 예상보다 더 빠른 시일 내에 고립되고 무너지리라.

키르는 그리드 천하를 그리 오래 보지 않았다.

하지만 웬걸?

바니바니를 목격한 키르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그리드를 달리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영리하기까지....!’

아니, 그리드가 영리한 게 아니다.

템빨국을 세운 일등공식 라우엘의 영향력이 분명하다.

배후에 라우엘이라는 천재를 거느린 그리드에게 빈틈은 없었다.

그리드가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고 작정했다는 사실을 눈치 챈 키르는 깊은 좌절감을 맛봐야했다. 희망을 찾을 길이 없었다.

절망하던 그가 이내 악에 받쳐서 질문했다.

“너와 나의 차이점이 뭐지?”

“?”

“나는 최소한 엘프들을 학살하지는 않았다. 네놈이 방해하기 전까지는 단 한 마리의 엘프도 죽이지 않았어. 반면 너는? 지금 단 십여 분 만에 수백 명의 병사들을 학살했지. 그래놓고 뭐? NPC를 존중해? 네가 엘프들을 포로로 만들었던 나보다 나은 점이 뭐지? 너 같은 살인마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나를 증오하고 엘프들을 구출했던 거냐?”

“아, 그런 뻔한 이야기라면 됐어.”

“....?”

지금으로부터 수 년 전.

교황청에서 타임어택 퀘스트 <증거인멸>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교황 후보 파스칼과 교황청의 원로들을 레이드한 그리드는 창녀들의 죽음을 방관했었다.

죄 없는 창녀들을 방패로 삼고 협박하는 원로들을 무시하고 그들을 해치웠고, 그 탓에 창녀들은 원로들에게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

아니, 그것보다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대장장이 칸을 처음 만났던 그날, 그리드는 자신과 칸을 위협했던 동네 건달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해했다.

“나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는 거야. 나는 NPC라고 해서 전부 다 존중한다고, 소중하다고 말하지 않아.”

NPC라는 존재에 대해서 고뇌하는 일, 끝나도 진즉 끝난 그리드였다.

또 한 명의 병사를 거침없이 베어 넘긴 그가 시가지 곳곳에 숨어있는 민간인들을 손으로 가리켜보였다.

“봐. 저런 사람들은 안 죽이잖아.”

“놈....!!”

협박은커녕 단순한 비난조차도 불가능하다고?

지독한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그리드는 일말의 화풀이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키르는 더욱 더 분해졌다. 눈에 핏대를 세운 그가 절규하듯이 외쳤다.

“네가...! 네가 신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어찌 그리 제멋대로일 수가 있는 거지!!”

그리드가 두 눈을 껌뻑인다.

“뭐라는 거야? 설마 너는 네가 신인 줄 알았어?”

“....?”

“너도 멋대로 행동해왔잖아? 약한 사람의 것을 망설임 없이 빼앗아왔잖아? 그게 다 너 스스로를 신이라고 생각해서 벌인 짓이냐고.”

“궤, 궤변을....!”

“그래, 궤변이야. 단순한 내로남불을 확대해석하지 마라.”

“내로 뭐?”

한국식 조어를 쉽게 알아들을 리 만무하다.

눈살을 찌푸리는 키르의 목덜미에 그리드가 검을 겨눴다.

“지금이라도 공격을 멈춰.”

“???”

또 무슨 갑자기 헛소리를?

키르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여태까지 일방적인 학살을 벌여온 놈이 누구보고 공격을 멈추라고 지껄인단 말인가?

“왜 내가 할 대사를 네가....!”

“아니, 나는 정당방위 중이라니까? 공격 멈추라고. 그럼 나도 공격 멈출게.”

‘이 개자식이!’

끝까지 카메라를 의식하고 있다.

자신을 피해자인 것처럼 꾸미는 그리드는 정말이지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치를 떠는 키르에게 그리드가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어서 항복하라고. 그럼 이 도시만큼은 빼앗지 않고 남겨줄 테니까.”

“......”

도시만큼은.

말인 즉, 도시 외의 모든 것은 빼앗겠다 이거다.

키르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그리드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여기까지 찾아왔을지 뻔히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내 상권을 모조리 빼앗아갈 생각이지?”

“그래.”

“상식 이상의 폭거다. 네가 내게 저지른 짓이 언젠가 세상에 밝혀졌다가는 너를 비난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테고 템빨국은 고립될 수도 있어.”

“감수해야지.”

템빨단이 나라를 세우기도 전부터 이미 온갖 공작이 시작되고 있었다.

단지 강하다는 이유로, 그렇기에 우리들의 밥그릇이 빼앗길 수도 있다는 이유로 수많은 플레이어들과 세력들이 템빨단을 이간질했다. 템빨단을 와해시키겠답시고 연합해서 침략해온 적도 있을 정도이다.

어차피 겪게 될 위협이라면, 잠자코 앉아서 숨통이 조여지기를 기다리느니 더욱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너를 그대로 방치해봤자 위험이 되는 건 마찬가지잖아. 기왕이면 방치하기보다 빼앗아서 우리의 세를 불리고 너를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게 좋지. 템빨국의 입장이다. 이해하지?”

“......”

키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감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자신 또한 남의 것을 빼앗아왔다. 언젠가는 다시 빼앗길 거라고 각오도 했다.

키르에게 남은 관건은 상권을 지키느냐, 지키지 못하느냐가 아니다.

고심 끝에, 키르는 상인의 기지를 발휘했다.

“알겠다. 요구에 순순히 따르도록 하지.”

“호오?”

“단....”

“단?”

“앞으로 내가 얻게 될 새로운 상권들만큼은 빼앗지 않겠다고 약속해줬으면 한다.”

어차피 빼앗길 수밖에 없다면 순순히 주겠다. 대신 미래만큼은 약속해 달라 이거다.

잠시 생각해 본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에는 계약서도 쓰자.”

사실, 그리드는 키르가 이렇게 순순히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지 몰랐다.

‘계약’이라는 형태로 묶여있는 상권을 빼앗기 위해서 앞으로 큰 시간과 자금을 소모할 것을 예상했다.

한데 순순히 내어주겠다는 것이다.

키르의 앞날을 보장해주는 편이 그리드 입장에서도 좋았다.

‘모든 걸 다 잃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봤자 템빨국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지 못할 테고.’

검을 거둔 그리드가 한쪽에 멀뚱멀뚱 서있는 네크로맨서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낯짝을 확인하는 그리드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강한 증오와 살기가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표정이었다.

“뭘 넋 놓고들 있어? 이제는 저항조차 포기한 거야?”

칼을 뽑으며 이죽거리는 그리드에게.

“....죽여라!”

유명한 랭커 드루를 필두로 네크로맨서 전원이 목을 내밀었다.

그리드가 짐짓 당황했다.

그래도 나름 강한 네크로맨서들이 후퇴도, 저항도 포기한 채 순순히 목을 내밀자 의아했다.

‘또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건가?’

놈들에게 다가가는 순간 땅속에 파묻혀진 수백 구의 시체가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한다거나, 하는 함정이 설치 된 건가?

경계하는 그리드에게 드루가 설명했다.

“우리가 라인하르트를 침공했던 이유는 순전히 베라딘의 명령 때문이었다. 그리고 베라딘은 우리를 버렸어. 임모탈을 나갔다.”

“.....”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뜻이 아니야. 더군다나 나는 라인하르트를 침략한 장본인 중 하나다. 이제 와서 네게 복수를 끝내달라는 염치없는 부탁 따위 하지 않아. 하지만 오늘만큼은 네가 우리의 부탁을 들어줬으면 좋겠다.”

“부탁?”

“베라딘을 쫓아가서 죽여줘. 우리의 힘으로는 놈을 막을 수 없었다.”

“.....놈은 어디지?”

“성 뒤뜰에 가보면 지하수로로 향하는 입구가 있을 거야. 그곳으로 도망쳤다.”

“좋아.”

대답한 그리드가 드루의 목을 베었다.

이야기가 좋게 풀리던 이때 드루가 사망하자 네크로맨서들 모두가 당황했다.

그리드가 뒷걸음치는 그들을 찌릿, 노려보았다.

“라인하르트를 침략한 장본인이라며? 앞으로도 계속 죽어야지.”

“.....”

그리드는 눈치 채고 있었다.

임모탈이 아그너스에게 버림 받았다는 사실을.

그게 아니면 이들이 전의를 상실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았다.

‘끝내 코빼기 한 번 보이지 않더니만은....’

쯧, 혀를 찬 그리드가 <신속한 몸놀림>을 전개, 지하수로를 향해서 내달렸다.

***

[사망하였습니다.]

그리드를 발견하고 흑화를 사용하자마자 기습을 당했던 타로트.

백광의 검에 찔려서 추락하고, 이어 스쳐지나가는 그리드의 연격에 베여 사망했던 그가 부활한 지점은 부활 포인트와 거리가 먼 장소였다.

쿠르르르르르르....!

구토와 현기증을 유발하는 독기와 한기를 동반하는 마기, 동시에 뜨거운 용암이 들끓는 지옥의 한복판.

타로트는 바로 그곳에서 눈을 떴다.

“....썩을.”

타로트는 당황하지 않았다.

보스 레이드 도중에 흑화 상태로 죽어본 경험이 있는 그에게 있어서 지옥은 생소한 장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락한 장소도 아니다.

종족이 반마족으로 분류되는 그의 입장에서도 지옥은 두려운 미지의 장소였다.

[길드 말 보내기에 실패하였습니다. 지옥은 인간계와 단절 된 차원입니다.]

[귓속말 보내기에 실패하였습니다. 지옥은 인간계와 단절 된 차원입니다.]

[사망 페널티로 <흑화> 해제에 실패하였습니다.]

“칫.”

반마족 타로트의 흑화 지속 시간은 무려 15분이다. <다크버스의 귀걸이>라는 아이템을 매개체로 흑화를 사용하는 그리드와 비교해서 그의 흑화는 더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는가?

‘눈치 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당해버렸는데!’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신을 베어버렸던 그리드의 옆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설마 지존과 자신 사이에 이만한 실력 차이가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바로 나였군.’

현실을 직시하는 타로트였다. 그는 좌절하기는커녕 도리어 의욕을 불살랐다.

‘아직 약하다는 말은 즉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리드, 다음에 만날 때는 다를 거다.’

타로트는 잡초 같은 사내였다.

아무리 짓밟혀도 굴복하지 않고 다시 벌떡 일어났다. 그 과정을 수백 번 아니, 셀 수 없이 많이 반복하였기 때문에 지금의 타로트가 있을 수 있었다.

“제한 시간 동안 마물이나 사냥해볼까.”

천금 같은 시간을 허투루 낭비할 수는 없는 법!

흑화의 지속 시간이 끝나야지만 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타로트는 남은 시간을 사냥에 투자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이 주변에 마물이라고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이곳을 방금 막 누군가가 휩쓸고 지나간 것 같다고 표현해야할까....

왠지 섬뜩해진다.

무기를 꺼내 쥐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 그의 시야에 저 멀리, 한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봉두난발의 사내였다. 옷차림도 영 허름한 것이 거지같았다.

하지만 타로트는 그에게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어디서 본 듯한 뒷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죽으면서 봤던 그리드의 뒷모습 같다고 할까....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미쳤나?

타로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그때.

“질문. 인간?”

“....?!!”

앞서 걷던 사내가 고개를 돌리며 질문해왔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타로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 그리드....?!”

설마 나를 확인 사살하겠답시고 지옥까지 쫓아온 건가?

경악하는 타로트에게 이 빠진 검이 날아들었다.

검에는 타로트가 반응할 수 없는 속도와 감당할 수 없는 위력이 실려있었다.

“쿨럭....!”

[사망하였습니다.]

[24시간 내에 2번 사망하여 강제 로그아웃 당합니다.]

눈 깜짝할 새에 몇 차례나 찔리고 사망에 이른 타로트가 결심했다.

두 번 다시는 그리드에게 까불지 않겠다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돈 다발이 들어와도 결코 그리드는 적대하지 않겠다고!

이날.

<제목:그리드 만난 후기>

작성자:흐콰한다

내용:그리드한테 까불면 지옥 끝까지 따라와서 죽임;;; 비유가 아니라 진짜입니다 여러분....;;

한 유명한 Satisfy 커뮤니티에 등록 된 게시글이 화제가 되었다.

밑에 달리는 댓글들이 가관이었다.

-그걸 누가 모르냐? 임모탈 척살령 내렸던 거 생각해봐라. 그리드 성격에 지옥은 당연하고 천당까지 쫓아가도 이상하지 않지.

-그러게 갓리드한테 까불기는 왜 까불어서 지옥을 맛보시고 그래요....

-님 혹시 페난 주민임? 거기 혹시 미친놈들 소굴 아닌가요?

-페난 거기 진짜 이상하더라. 그리드가 관광 갔더니 갑자기 공격함;;

-작성자 댓글:아니,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지옥까지 쫓아왔다니까? 그리고 뭘 페난이 미친놈 소굴이야. 그 새끼가 먼저 쳐들어왔는데.

-네, 다음 미친놈.

-작성자 댓글:(신고를 받고 블라인드 처리 된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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