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0권 - 6화
현실 이상의 자유도와 방대한 세계관을 자랑하는 Satisfy에서 즐길 거리는 무한대에 가깝다.
대륙 곳곳을 누비며 각 지역 고유의 음식들만 찾아 탐해도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저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른 법이다.
누군가는 Satisfy를 기존의 게임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즐기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랭커들이 있다.
랭킹을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더 높은 랭킹을 차지하기 위해서 집착하는 그들은 Satisfy에 접속해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냥터에서 보냈다.
남들이 평범하게 즐기는 컨텐츠 대부분을 포기하고 사냥에만 열중한 그들은 그 노력 덕분에 랭커가 될 수 있었고, 랭커가 됐기 때문에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이다.
단, 그리드는 조금 다르다.
이름:그리드
레벨:362
직업:파그마의 후예(조건부 대마법사)
칭호:전설이 된 자 외 25개(목록을 확인하려면 상세 보기를 클릭해 주십시오)
생명력:88,815 마나:14,268
근력:3,160(+360)
체력:1,987(+580)
민첩:2,690(+330)
지력:1,838(+540)
손재주:3,547(+880)
끈기:1,472(+330)
평정:1,078(+330)
불굴:1,333(+440)
위엄:1,986(+330)
통찰력:1,826(+330)
용기:1,022(+330)
정치력:21(+330)
악마력:15,498
행운:241
신위:4
잔여 능력치 포인트:267
그리드가 사냥에 할애하는 시간은 보통의 랭커들과 비교해서 무척 적었다.
대장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하는 한편, 인과율에 휩쓸려 각종 사건 사고를 겪어 온 그는 상식적인 관점에서 레벨이 높으면 안 됐다.
하지만 보라.
꾸준히 레벨이 올라온 그리드는 여전히 한 자릿수 랭킹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각종 네임드 NPC들과 엮이며 세계관의 중심에 섰고, 그 과정에서 강력한 보스를 레이드하거나 각종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한 덕분이다.
남들이 백날 사냥해야 얻을 수 있는 경험치를 그는 단 한 번의 레이드로 획득하는 방식으로 레벨을 올려 왔고, 이는 NPC와의 관계가 만들어 준 행운이었다.
하지만 남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십만대군 학살검.”
쾅! 쿠콰콰콰콰콰콰콰콰쾅!!
허공에 그려지는 수십 줄기의 검광에 이은 폭발.
뷰티앙과 아리사의 외침에 호응해 달려왔던 페난의 병사들이 일제히 잿빛으로 산화한다.
그 숫자, 족히 200이었다.
“저 지긋지긋한 새끼……!”
상왕 키르의 돈과 자신의 노력을 토대로 육성한 병사들이 압도적인 화력 앞에 허무하게 사라지는 모습을 목도한 뷰티앙이 치를 떨었다.
그는 국왕이라는 직책에 있으면서도 상위 랭킹을 유지하고 있는 그리드의 ‘폐인력’을 간과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저놈이 여기까지 쫓아올 것을 미리 예상했어야 했다! 밥 먹고 게임만 하는 놈답게 부지런한 걸 알았어야 돼!’
사실 뷰티앙만 해도 Satisfy를 플레이하는 시간이 하루 평균 12시간에 육박했다. 그리고 키르의 명령을 수행할 때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사냥터에서 지냈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자릿수 랭킹은 꿈에도 못 꿔 본 것이 현실이다. 그의 랭킹 최고 기록은 100위권이었다.
그가 봤을 때 그리드는 식사도 거르고 게임만 하는 폐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도 10년만 젊었어도……!’
40대에 접어든 후로 약해진 체력이 원망스럽다.
아직 20대 후반에 불과한 그리드의 젊음을 시기하며, 뷰티앙은 소리쳤다.
“전군! 바리케이드를 세워라!”
뷰티앙은 단 한 번의 스킬에 소멸하는 200의 병력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았다. 도리어 희망을 엿보고 있었다.
시가지에서 싸울 때 방어하는 측의 메리트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각종 시설물의 도움이 바로 그것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리케이드였다.
쿵! 쿵쿵!
뷰티앙의 명령을 받든 병사들이 통나무로 제작한 바리케이드를 시가지 곳곳에 설치한 후 그 뒤에 대열을 갖췄다.
공격자 입장에서는 우선 바리케이드를 부숴야지만 병사들을 공격할 수 있는 형국이 되었다.
뷰티앙이 회심의 미소를 그린다.
“템빨왕!! 제 발로 무덤에 찾아온 것을 환영한다!! 오늘날의 어리석음을 영원토록 후회해라!!”
그리드의 막강한 공격력이라면 바리케이드조차도 일격에 부술 수 있다는 사실, 뷰티앙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격을 소모하는 것이 컸다.
그리드가 하나의 바리케이드를 공격하는 동안 이쪽의 궁병대와 마법사단은 그리드를 수십 번이나 더 공격할 수 있었다.
완벽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을 때 숫자의 우위가 갖는 힘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상식적으로는 말이다.
“매직 미사일.”
퍼펑-!
퍼퍼퍼퍼퍼퍼퍼퍼펑!!
“뭣……!!”
4개의 갓 핸드가 초당 1회씩 발사하는 백색 섬광이 시가지 곳곳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속절없이 무너뜨리는 것에 이어서.
“찌릿찌릿이다냥!!”
파직! 파지지지지지지직!!
웬 고양이 한 마리가 아군 병사들 사이로 날아들더니 광범위 전격 마법(?)을 전개하자 병사들이 눈을 까뒤집으면서 쓰러졌다.
“서둘러!!”
전위가 순식간에 무너지자 조급해진 뷰티앙이 재차 명령하자 궁병대가 황급히 활을 쏘아 봤지만.
“회.”
그리드의 모습을 복제한 랜디가 튀어나오더니 화살을 모조리 반사해 버렸다.
푹!
푸푸푸푸푸푸푹!!
“커윽……!”
“윽……!”
화살에 가슴을 관통당하고 쓰러지는 궁병들!
“이게 무슨!”
뒤늦게 마법의 캐스팅을 끝낸 뷰티앙이 마법사단과 함께 마법을 발사해 봤지만 늦었다.
“애초에 이딴 얕은 수에 당할 거 같으면 내가 혼자서 쳐들어왔을까?”
<종횡무진>을 토대로 모든 마법을 회피한 그리드가 어느새 뷰티앙의 곁에 도달해 있는 것이었다!
푸욱!!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쿨럭……!”
열망의 무아검에 베이고 피를 토하는 뷰티앙의 생명력 게이지가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스턴에 빠지고 아무것도 못하게 된 그의 목덜미로 떨어지는 것은 그리드의 공격이 아니었다.
캬캭! 캭!!
소름 돋게 웃는 스켈레톤들의 공격이었다.
푹! 푹푹!!
[509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48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연신 단도에 찔리는 뷰티앙.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오는 병사들을 베어 넘기는 그리드를 노려보며 포효한다.
“이놈! 내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직접 마무리 짓지 않고……!!”
이딴 피라미들에게 마무리를 맡긴단 말인가? 라는 내용의 분노에 찬 외침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공격력이 워낙 허접한 탓에 뷰티앙의 방어력을 꿰뚫지 못했던 스켈레톤들의 단도 찌르기 중 일격이 끔찍한 크리티컬을 터뜨린 까닭이었다.
[늑골이 부러졌습니다!]
[치명적인 피해입니다!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이동속도가 감소합니다! 생명력 회복 효과가 80퍼센트 감소합니다!]
[골절 약을 복용합니다.]
[골절 약의 효과가 듣지 않습니다.]
[최상급 골절 약이 필요합니다.]
“뭐……!!”
뷰티앙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지금, 자신을 무시한 채 병사들을 학살 중인 그리드.
녀석이 거느린 황금 손들과 고양이, 그리고 도플갱어와 스켈레톤들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평범한 게 없지 않은가?
남들은 단 하나만 얻어도 지존이 될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최강의 아이템과 펫들을 그리드는 혼자서 독식 중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문제인 점은.
“크윽……!”
아리사를 비롯한 두 자리, 세 자릿수 하이랭커들을 혼자서 압도하는 그리드 개인의 무력이었다.
스켈레톤들의 단도에 연신 찔리며 침침해지는 시야 속에서, 고전하는 아리사의 모습을 엿본 뷰티앙은 확신했다.
‘…플레이어의 범주를 초월한 정도가 아니다.’
그리드는 ‘개인’의 범주를 초월했다. 그 자체가 군단이었고, 함락할 수 없는 거성이었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다.
“제길! 전군… 전군 퇴……! 컥!!”
현재 남은 전력으로는 그리드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뷰티앙이 명령을 내리던 도중에 사망하고 잿빛으로 산화했다.
그를 죽인 것은 템빨골들이 아니라 임모탈의 네크로맨서였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씨익!
희열에 찬 미소를 그린 네크로맨서들이 곳곳에 즐비한 시체들을 일으켜 세웠다.
오늘날의 그들은 황비 마리의 궁전에 있을 때와 달랐다.
바로 백요와 흑요 자매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이네, 빌어먹을 새끼.”
“오늘이야말로 복수할 기회야.”
한때 <블러드 카니발>을 대표했던 태양급 강자들!
이미 오래전에 블러드 카니발을 버리고 임모탈에 가입했던 그녀들이 그동안 세상에 모습을 감췄던 이유를 증명한다.
쿠르르르르르릉!!
강렬한 기파!
지방을 연소하는 백요와 망상을 소환하는 흑요 두 자매가 내뿜는 기운이 매섭다.
그리드와 페이커, 그리고 심지어는 그리드의 아들 로드에게까지 고배를 마시고 복수심을 불태웠던 그녀들은 지금까지 몇 달 동안을 사냥터에서 레벨만 올려 왔다.
과거와는 비할 바 없이 강해진 그녀들이 자부하기로 그리드쯤이야 우습게 박살 낼 수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임모탈과 키르 상단이 도와주는 상황이라면 그리드 격퇴 난이도는 누워서 코 풀기 수준으로 쉬울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죽어어어어어!!”
드디어 복수를 이룰 때가 왔다!
템빨골들의 두개골을 일격에 날려 버린 후, 그리드에게 몸을 날리는 백요와 흑요의 망상들.
병사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그리드의 곁으로 순식간에 도달한다.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흑화.”
백요와 흑요 자매를 뒤늦게 발견한 그리드가 지체 없이 스킬을 연계시켰다.
“암흑의 룬 개방, 대악마 아스타로트의 힘.”
“……!!”
“전격 마기의 폭풍.”
콰직!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하늘은 진즉부터 흐렸다.
이 날씨가 그리드가 ‘오늘’을 선택한 이유다.
즉시 발동한 대악마의 힘이 그리드의 반경 200미터에 초당 4회~11회의 벼락을 떨어뜨렸고, 그 벼락에 적중당하는 백요 자매와 병사들은 1만의 고정된 데미지를 입음과 동시에 마비, 기절, 화상 등의 상태 이상을 겪었다.
“이익! 못 본 새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템빨을!!”
운 좋게 마비와 기절을 피한 백요가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뎠다.
플레이어가 필드를 소환한다고?
이 힘이 스킬일 가능성은 전무하다.
그건 이미 플레이어가 아니라 보스다.
백요는 판단했다.
그리드가 작금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 소모성 히든 아이템을 소모한 것이라고.
“템빨 새끼……!!”
콰앙!!
강풍에 짓눌려 무거워진 몸을 간신히 움직여 낙뢰를 회피한 백요가 그리드에게 발차기를 날렸다.
혼신의 힘을 담은 일격이었다.
하지만 필드 속에서 이동속도가 상승한 흑화 그리드에게 슬로우+명중률 하락 디버프를 당한 그녀가 공격을 적중시킨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슬쩍.
지난날의 분노와 원한이 축적된 백요의 일격을 허무하리만치 손쉽게 회피한 그리드가 백요를 베어 넘겼다.
태양급 강자답게 단단한 그녀를 잿빛으로 산화할 때까지 계속, 계속해서 공격했다.
“언니이이이!!”
낙뢰에 맞을 때마다 마비, 기절에 걸린 흑요의 망상들이 무력하게 절망한다.
두 개의 태양, 새로운 하늘 아래 평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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