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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699화 (694/1,794)

템빨 40권 - 5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설이 된 자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체력이 최소치가 되어 5초 동안 모든 공격에 저항합니다.]

“으… 우으윽……!”

무너진 성의 잔해 속.

바위 더미를 간신히 빠져나와 몸을 일으키는 유라의 머릿속이 어지럽다.

어째서 이곳에 그리드가 있는 걸까?

왜 나를 공격한 거지?

더군다나 단 ‘일격’에 나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상상조차 못해 봤던 상황들이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혼란 탓에 이성적인 판단이 어렵다. 의지가 흩어진다.

지금 자신이 뭘 하고 있는 건지, 어떤 상황에 놓인 건지, 뭘 해야 하는 건지 유라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꾸욱……!

이를 악문 유라가 평정심을 되찾았다.

현재 시점에서 그리드가 지옥을 방문할 이유는 없다.

만약 상대가 진짜 그리드였다면 나를 공격했을 리도 없다.

그래.

‘그리드가 아니야.’

혼란이 수습된다.

유라는 성의 잔해를 헤치고 나아갔다. 그리고 자신을 단 일격에 죽음으로 내몬 정체불명의 괴한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리드…….”

괴한의 이름을 확인한 유라의 두 눈이 부릅떠진다.

그리드와 꼭 닮은 생김새의 산발 사내, 머리 위에 ‘그리드’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기에.

단, 그리드와 명백한 차이점이 있다면 그의 이름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네임드 NPC의 상징이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일까요?”

어째서 그리드와 꼭 닮은 네임드 NPC가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도 하필이면 이곳 지옥에?

다시금 커지는 혼란 속에서, 유라는 몇 가지 가설을 세웠다.

‘야탄교의 주술?’

교단을 배신한 나를 저격해서 내린 시련?

아니면.

‘단순히 지존의 모습을 복제할 수 있는 악마가 존재한다거나…….’

어찌 됐든 적이다.

물약을 마시는 유라의 총구가 그리드의 머리를 겨냥하는 순간이었다.

“질문.”

그리드, 아니 그리드의 모습을 빌리고 있는 악마(?)가 입을 열었다.

음성 또한 그리드와 꼭 닮아 있었다.

“너는 인간? 그리드와 똑같은 생물인가?”

“……!”

악마의 질문은 유라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리드를 알고 있다고?’

악마의 질문은 계속되고 있었다.

“경악. 이곳에서 인간을 본 것은 처음이다.”

“…….”

“의문. 그리드도 이곳에 올 수 있는 걸까?”

그리드에 대해서 알고 있을뿐더러 집착한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읽은 유라가 반문했다.

“당신은 그리드라는 사람을 찾고 있는 건가요?”

“답변. 그렇다.”

“그와 무슨 사이인데요?”

“답변.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근데 어째서 그를 찾는 거예요?”

“답변. 죽여야 하니까.”

“…왜죠?”

“답변. 나는 그리드를 죽이기 위해서 태어났으니까?”

“당신은… 누군데요?”

“미묘. 그리드?”

“…….”

유라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녀는 그리드와 생김새와 목소리, 그리고 이름마저 똑같은 눈앞의 사내로부터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단지 강하기 때문에 두렵다, 같은 개념이 아니라 보다 원초적인 공포였다.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의문. 우리의 대화에 의미가 있나?”

“…….”

유라가 뒷걸음쳤다.

자아가 불완전한 정체불명의 괴물, 기대했던 보물이 아니라 폭탄이었으니 상대해 봤자 좋을 게 없었던 것이다.

이내 그대로 등을 돌려 도망치는 그녀를.

“파그마의 검무, 화(花).”

촤르르르르르륵!!

만개한 꽃을 연상시키는 수십 개의 칼날이 덮쳤다.

“……!!”

유라의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또 한 번 단 일격에 치명상을 입은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운 좋게 10단위 생명력이 남았다. 이를 악문 그녀, 목숨을 부지하고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터를 이탈한다.

홀로 남은 사내는 그녀를 뒤쫓지 않았다. 녹슬고 이 빠진 검을 칼집에 회수하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곤란. 새집을 찾아야…….”

나는 누군가?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다.

단지 그리드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

“똥오줌 못 가리는 양아치 새끼가 지존을 자처했던 거라니! 우습군, 우스워! 다른 랭커들은 대체 얼마나 무능하기에 그깟 저능아에게 밀리는 거지?”

가우스 왕국 동부 끝에는 3만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작은 소도시가 존재했다.

페난.

상왕 키르가 2천만 골드라는 거액을 주고 구매한 도시다. 현금으로 백억이 넘는 금액을 지불한 셈이지만 키르는 단 한 번도 아깝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계획대로 도시를 발전시켜 나갈 경우 게임 시간으로 7년 후면 투자 비용을 뽑고, 흑자로 전환시킬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리드 때문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흑자 전환의 발판이 될 첫 번째 대규모 사업이 그리드의 훼방으로 실패했기 때문이다. 도시 값보다 몇 배나 큰돈을 하루아침에 날려 버렸다.

키르는 그리드가 품은 ‘악’보다 ‘무지’가 원망스러웠다.

“멍청한 새끼! 나와 한배를 타는 편이 자신에게도 큰 이익이 될 거라는 사실을 왜 모르는 거지? 왜 굳이 나를 적대해서 피차 피곤해지게 만든 거냐……!!”

언제나 그렇다.

지능이 낮은 것들은 늘 혐오감을 유발한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암 덩어리다.

그리드의 짜증 나는 면상을 떠올리며 분개하는 키르에게 때마침 희소식이 날아왔다.

“타루 변경백이 병력을 지원해 주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좋아. 당연히 그래야지.”

본래 페난은 타루 백작이 거느리고 있는 수많은 도시 중 하나였다. 키르가 그에게 페난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뒤로 먹인 돈도 상당했다.

“내가 지한테 준 돈이 얼만데? 양심이 있다면 내 요청을 거절해선 안 되지.”

그리드 탓에 다수의 병력과 3명의 기사를 잃은 키르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엄선된 병력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이번에 떠안게 된 손실액을 복구하려면 빠르게 사업을 확장할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력이 필요했다.

그리드와 척을 지자마자 임모탈에게 연락을 넣은 것 또한 무력을 확보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이런 식으로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딸칵, 집무실 문이 열리면서 백발의 청년이 등장했다. 키르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는 그의 이름, 베라딘이다.

환한 미소를 그린 키르가 베라딘이 내민 손을 두 손으로 덥석 쥐었다.

“초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도리어 저희 쪽에서 해야지요.”

임모탈은 템빨국의 척살령 탓에 갈 곳을 잃은 형국이었다.

어디를 가도 플레이어들에게 쫓기는 신세로 전락해서 안전한 보금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상왕 키르로부터 연락이 도착한 것이다. 자신의 도시에 머물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담은 연락이었다.

키르와 마주 보고 앉은 베라딘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드한테 당하셨습니까?”

“…무슨?”

키르는 아직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무슨 연유에서 임모탈을 불러들였는지에 대해서 일체 설명하지 않은 상태였다.

한데 다짜고짜 그리드의 이름이 튀어나올 줄이야?

당황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자 노력하는 키르에게 베라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상왕께서는 늘 최선의 이익을 추구하기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당신께서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이미 그리드에게 단단히 찍힌 우리를 불러들였을 리 없겠죠.”

그래, 키르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리드의 눈 밖에 나는 짓을 자처할 리가 없다.

베라딘은 추측하고 있었다.

키르가 이미 그리드에게 단단히 찍힌 상태라는 사실을 말이다.

쯧, 혀를 찬 키르가 깊은 한숨을 토했다.

“뭐… 굳이 숨기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당신의 추측이 맞아요. 나는 그리드 그 빌어먹을 놈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되었고, 갚아 줘야 할 빚이 생겼습니다.”

베라딘의 눈이 빛난다.

“흥미롭군요. 자세히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일의 발단은…….”

임모탈의 협력이 필요한 키르의 입장에서는 임모탈을 완전한 우군으로 만들 의무가 있었다.

하여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했다. 단, 약점이 잡히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입은 피해 규모를 한껏 축소시켰고, 저력을 남기기 위해서 야탄교와의 관계를 숨겼다.

장황한 설명이 끝난 후.

“그래요. 고생이 많으셨군요. 당신 또한 그리드라는 악당에게 선의의 피해를 입으셨네요. 좋습니다. 저희 임모탈은 앞으로 이곳에 머물면서 당신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피해자끼리 서로를 도와야지, 아니면 누가 우리를 돕겠습니까?”

베라딘은 키르가 흡족할 만한 답변을 주었다.

“이곳을 우리의 거점으로 삼아서 힘을 비축하도록 하지요. 당신께서 지시하는 사항들을 우리 임모탈이 최선을 다해서 수행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저 또한 임모탈에게 아이템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한데… 아그너스 님은?”

사실, 도시에 돌아온 키르가 가장 먼저 임모탈을 떠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아그너스 때문이었다.

누가 봐도 아그너스의 전설 승급을 알렸던 월드 메시지의 내용이 키르에게 희망을 주었다. 아그너스가 자신을 도와주면 그리드에게 복수하기가 훨씬 더 수월할 거라는 기대감을 품었다.

한데 아그너스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 것이다.

불안해하는 그에게 베라딘은 별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아그너스 님의 성정은 유명하지 않던가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유롭게 대륙을 활보하며 즐거움을 만끽하시는 중입니다.”

“척살령은 어쩌고요?”

“그분께 척살령이 무슨 소용일까요? 그리드가 직접 나서도 어쩌지 못할 분을 그 누가 감히 해하려고 들겠습니까?”

“하하! 그렇겠죠.”

“뭐, 걱정 마십시오. 저희끼리 잡다한 일을 처리하고 있으면 아그너스 님께서도 도착하실 겁니다.”

거짓이다.

독단으로 진행한 라인하르트 침략 사건으로 인해서 베라딘은 아그너스의 신뢰를 잃은 상태였다. 아그너스의 태도는 예전과 많이 달랐다. 베라딘에게 어떠한 임무도 맡기지 않았고, 임모탈을 완전히 방관했다.

하지만 베라딘은 그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아그너스가 없는 임모탈은 대우받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뻔히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믿기도 했다.

아그너스가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나를 찾을 거라는 믿음 말이다.

“자,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우선은 자금을 모을 겁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분야의 상권을 확보해서 돈을 모은 뒤, 인재와 병기를 갖출 거예요.”

“그리드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고작 그 정도로는 안 됩니다. 그리드의 모든 것을 빼앗아야죠.”

“하하! 그것참 멋진 마음가짐이로군요. 좋습니다. 우리 함께 힘을 합쳐서 그리드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줍시다.”

“납작하게 만드는 정도로 되겠습니까? 부숴 버려야죠. 하하하!”

같은 뜻을 품게 된 두 사내의 음침한 웃음소리가 화려한 장식물들이 즐비해 있는 집무실에 울려 퍼진다.

두 사람은 진심으로 그리드에게 복수할 계획이었다. 또한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템빨국이 강성해지면 강성해질수록 템빨국을 시기하고 견제하는 세력 또한 많아졌으니, 그들과 힘을 합쳐서 템빨국을 짓밟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리드와 라우엘이 염려했던 부분이다.

이미 적이 된 상대에게는 여지를 줘선 안 된다.

“키, 키르 님……!”

“베라딘!! 어서 나와 봐!!”

“……?”

기분 좋게 웃고 있던 베라딘과 키르가 동시에 입을 다물고 표정을 굳혔다. 허겁지겁 달려온 동료와 부하들에게 상황을 설명받는 그들의 안색이 이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뭐라고……?”

***

“그때는 방심해서 그래.”

“맞아.”

뷰티앙과 아리사.

상왕 키르가 거느리고 있는 하이랭커 중에서 수위를 다투는 그 두 명의 실력자들이 숲에서의 전투를 복기하고 있었다.

“내가 마법으로 놈에게 타격을 입히려고 했던 게 과욕이었어. 발만 묶었으면 충분했을 텐데.”

파그마의 검무인지 나발인지 하는, 그 촐싹대는 움직임을 봉쇄했다면 그리드의 전력은 몇 배나 약화됐을 것이다.

기껏 국가대항전 영상을 토대로 그리드의 약점을 분석해 놓고도 실전에서는 욕심을 부리다가 활용하지 못했다.

쯧, 아쉬움에 혀를 차는 뷰티앙에게 아리사가 솔직하게 고백했다.

“우리 돌격대도 실수한 게 많아. 흑화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저력을 남겨 놨었고, 하필이면 그때 허를 찔렸어. 그냥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으면 일이 쉽게 풀렸을 텐데…….”

후, 재차 한숨 쉬는 두 사람 사이에 잠자코 앉아 있던 ‘타로트’가 킥킥 웃었다.

“그러게 나도 데려갔었어야지. 나만 있었으면 너희들이 아무리 삽질을 했어도 손쉽게 그리드를 사냥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안 그래?”

타로트는 그리드와 마찬가지로 흑화 보유자다. 대악마와 관련된 퀘스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강대한 힘을 얻은 그는 완전한 반마족으로 진화한 상태였다.

뷰티앙과 아리사조차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그 실력자의 입장에서는 이번에 그리드와 만나지 못한 게 지독히도 아쉬웠다.

“쩝! 놈을 사냥하고 보너스 두둑이 챙길 수 있는 기회였는데.”

“어쩔 수 없었잖아? 너는 별도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애초에 키르 잘못이지. 내가 임무를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갈 것이지, 왜 그새를 못 참고 설치다가 그딴 수모를 겪……. 응?”

키르의 어리석음을 탓하던 타로트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두 눈을 몇 번이나 비벼 보더니 손가락으로 저 멀리 성문을 가리켜 보였다.

“저거 그리드 아니야?”

“뭐?”

뷰티앙과 아리사가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타로트가 이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었으니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마치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둔 것처럼 혀를 뻗은 타로트가 입술을 핥았다.

“아, 인간의 시력은 많이 나쁘지? 인간이었던 시절이 벌써 몇 개월 전이라 깜빡했네.”

쿠르르르르르!

“뭐 하는……!”

장난치고는 과하다.

갑자기 마기를 분출한 타로트가 흑화 상태에 돌입하자 뷰티앙과 아리사가 당황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지금 타로트는 장난질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타앗-!

붉은 마검을 꺼내 쥔 타로트가 울타리를 박차고 도약하는 그때.

푸욱-!!

백광의 검이 날아와 그의 미간을 꿰뚫었다.

“…어?”

단 일격을 허용한 대가로 절반에 가까운 생명력을 잃은 타로트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털썩!

추진력을 잃고 맥없이 추락하는 그의 곁을.

저벅.

한 사내가 그냥 지나쳐 갔다.

뒤늦게.

핏-!

피피피피피피피피피피핏!!

수십 개의 검광이 아로새겨지며 타로트를 잿빛으로 산화시킨다.

뷰티앙과 아리사는 다급히 소리치고 있었다.

“비, 비상령을 내려라!!”

“당장 전군을 소집해!!”

“십만대군 학살검.”

“……!!”

도시에 출몰한 한 마리의 맹수가 돈에 길러진 가축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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